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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개장사 하던 사람이 해방이 되어 국내의 정치와 사회가 혼란한 틈을 이용해 들어 와서 창설군(創設軍)이되고 장군이 되었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도 있었으며, 일제하에서 일본에서 유학한 친일파와 도항해서 일본으로 건너간 그 시대의 우범자들이 어느날 갑자기 국내로 들어와서 애국자가 되고 선각자가 되어 역사 창출에 관여한 암울한 시대가 있었다. 부패한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쿠데타 정권인 박정희의 독재 18년을 거처서 지금까지 이어온 태권도사는 무풍지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시대에 따라 변모 해온 태권도사 정치와 밀접한 관계에서 출발한 태권도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되어 왔으며 식자(識者) 들의 거창한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철학적 요소와 민족사로 만들어낸 것이 오늘날 태권도사의 모습이다. 먼저 태권도사를 민족사와 비교해서 만들어 낸 것이 고구려 시대 각저총 벽화의 수박희 맞서기 장면과 경주 석굴암에 있는 금강역사의 석조상이다. 1960 대 태권도란 무도명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그 시대에 권위있는 사학자들이 도복을 입고 태권도를 실제로 수련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이 부패한 정권하에서 상납하듯 태권도사를 쓰기 위해서 태권도 고대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예가 1968년 11월 3일자 주간조선에 실린 "남태평양까지 뻗은 고려인삼과 태권도"제목의 이선근 박사의 칼럼이다. 그는 칼럼에서 유감없이 태권도의 고대사를 찬미했다. 그는 그림까지 삽입하여 태권도의 원형을 근세중국의 유술(柔術)이라고 소개했으며 창헌류의 23개 형(型)이 태권도의 기본형이라고 소개했다. 창헌류란 오도관을 창설하고 현 국제연맹총재인 최홍희를 가르키는 말이다. 그 후 1972년 국제연맹의 창설자인 최홍희가 망명하고 정치적으로 최홍희란 이름과 국제연맹은 한국에서 사라지게 된다. 불과 4년전인 1968에 당시 언론에 게재된 이선근 박사의 태권도사 칼럼 내용이 1972년 이후로 최홍희의 망명과 동시에 사라지고 또 한번 변화를 겪어야 했던 것 이다.1972년 이후 30년동안 이어온 태권도사는 삼국시대가 기원이 되어 고구려의 각저총 벽화와 경주의 석굴암, 조선시대 쓰여진 무예도보통지, 태껸,등 우리 민족사를 이용해서 오늘날에 와서는 철학적요소까지 구성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태권도의 중앙도장이라 할 수 있는 국기원과 대한태권도협회, 세계태권도연맹에서 홍보해온 태권도사의 변천과정을 보면 지금의 태권도사가 어느 정도 포장되어 왔는지 유추할 수가 있다. 정권의 눈치를 보면서 최홍희와 태권도의 관계를 단절하고 역사를 만들어온 것을, 최근에 와서 슬그머니 태권도역사에 최홍희란 이름을 기재 한 것이다. 시대에 따라 변화 되어진 태권도의 역사가 오늘날 태권도사 현실이다. 태권도와 가라데 태권도역사의 기원은 중국무술과 일본 가라데로부터 탈피하는 분위기에서 출발해야 된다. 태권도(跆拳道)란 무도명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시작 되었는지는 의견이 아직도 일치되지 않고 있다. 다만 앞서 말한 태권도는 고대의 것과 별개인 가라데에부터 출발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해방 후 일본에서 활동한 초창기 관장들이 국내에 들어와서 공수도,당수도로 시작한 것이 태권도의 기원이 된다. 무덕관을 창관한 황기관장은 중국에서 무술을 배웠다고 하지만 분명하지 않고 그가 국내 청도관에서 당수도를 처음 배웠다는 설도 있다. 태권도와 가라데의 관계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지금도 수련하고 있는 태극(太極)품새의 명칭과 형태를 보면 알수가 있다. 1920년대 가라데의 창시자 후나고시가 저술한 공수도교본를 보면 태극 (太極)형이 그대로 잘 나타내어 있다. 1945 년 해방이 되고 일본에서 유학하거나 활동한 사람들이 국내에 들어와서 당수도와 공수도란 무도명으로 각 도장을 창설하고 각자의 조직을 만들어 냈다. 가장 먼저 1945년 이원국에 의해서 창관한 청도관과 1946년 조선연무관(후에 지도관) 송무관, YMCA권법부(후에 창무관), 무덕관 등이다. 이들이 창관한 당시의 무도명은 모두가 일본서 배워온 당수도(唐手道), 공수도(空手道) 그대로 였다. 최초의 태권도란 무도명 일본서 유학중 쇼도깡에서 가라데를 배운 최홍희에 의해서 군에서 출발한 오도관이 세력이 커지고 군의 장성으로 있었던 최홍희가 그동안 공수도,당수도로 난립해있던 관(館)통합을 위해 군 세력을 이용하여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그는 1955년 명칭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태권도(跆拳道)란 무도명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최홍희는 이승만 대통령이 군 시찰에서 시범 보인 당수도 연무를 보고 "태껸"이구먼 이라고 말한 이대통령의 음운(音韻)에 착상하여 跆 와 拳을 만들어 냈다고 전한다. 태권도란 무도명이 이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은 최홍희에 의해서 작명 되었으며 그가 당시 권력을 이용해서 수차례 관장들을 설득하여 1959년9월3일 대한체육회에서 정식으로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 했으나 4.19혁명으로 공식적으로 출범하지는 못했다. 태권도란 무도명이 만들어 지기는 했으나 당시 관장들의 반발로 쉽게 정착하지 못했으며 공수도 집착한 관장들에 의해서 1961년 대한 태수도협회가 창립되기도 했으며, 태권도란 무도명을 만들어낸 최홍희가 다시 1965년 대한태권도협회로 어렵게 통과시켜 출범시키기도 했다. 대한태권도협회는 1966년 3월 22일 서울에서 창립한 국제태권도연맹이 출발하면서 다시 한번 대한태권도협회와 국제태권도연맹 간에 분쟁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1968 년 9월에 국제연맹과 대한태권도협회 분쟁은 극에 이렀고 결국제1회 아시아 태권도대회가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개최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이런 반목속에서 태권도란 무도명이 정착되었으나 반목의 주인공격인 최홍희가 1972년 한국을 떠나고 1973년 김운용 등장과 함께 세계태권도연맹이 새롭게 출범하였으며 최홍희는 해외에서 북한을 배경으로 해서 1966년 서울에서 본인이 창립한 국제연맹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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