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유적지 안내문
1)진남관
종 목 국보 제304호
지 정 일 2001.04.17
소 재 지 전남 여수시 군자동 471
시 대 조선시대
여수 진남관은 1598년(선조 31) 전라좌수영 객사로 건립한 건물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중심기지로서의 역사성과 1718년(숙종 44)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중창한 당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규모가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면적 240평으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진남관의 평면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서측 각각 2번째 협칸의 전면 내진주를 이주하여 내진주 앞쪽에 고주(高柱)로 처리하였다. 이 고주는 곧바로 종보를 받치고 있고 대량은 맞보로 고주에 결구하여 그 위에 퇴보를 걸었다.
전후면의 내진주와 외진주 사이에는 간단한 형태의 퇴량을 결구하였고 측면 어칸에는 2개의 충량을 두어 그 머리는 내부 대량위로 빠져나와 용두로 마감되었다.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위에 짜여진 포작은 외부로는 출목 첨차가 있는 2출목의 다포계 수법을 보이고, 내부에서는 출목첨차를 생략하고 살미로만 중첩되게 짜서 익공계 포작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외부출목에 사용된 첨차에는 화려한 연봉 등의 장식을 가미하였고 특히 정면 어칸 기둥과 우주에는 용머리 장식의 익초공을 사용하였다.
각 주칸에는 1구씩의 화려한 화반을 배열하여 건물의 입면공간을 살려주고 있으며, 내·외부 및 각 부재에는 당시의 단청문양도 대부분 잘 남아 있다.
또한 건물 내부공간을 크게 하기 위하여 건물 양측의 기둥인 고주(高柱)를 뒤로 옮기는 수법을 사용하여 공간의 효율성을 살리고, 가구는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여 건물의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다. 건물의 양측면에는 2개의 충량(측면보)을 걸어 매우 안정된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등 18세기초에 건립된 건물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2)충민사
종 목 사적 제381호
지 정 일 1993.06.01
소 재 지 전남 여수시 덕충동 1808외
시 대 조선시대
충무공 이순신, 의민공 이억기, 충현공 안홍국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임진왜란 때 목포, 노량, 당포, 한산도, 부산포, 명량 해전에서 왜적을 무찔러 우리의 바다를 지켰고, 선조 31년(1598) 노량에서 도망가는 왜적을 무찌르던 중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글에도 재주가 있어 『난중일기』와 같은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전쟁터에서 읊은 시조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좋은 작품을 손꼽히고 있다.
의민공 이억기(1561∼1597)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함께 당항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등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이순신 장군이 감옥에 갇히자 이항복·김명원들과 함께 무죄를 주장했으며,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충현공 안홍국(?∼1597)은 임진왜란 때 왕을 모시고 의주까지 따라갔으며 이순신 장군의 밑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 뒤 정유재란 때 안골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이 사당은 선조 34년(1601) 나라를 위한 세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영의정 이항복이 임금께 청하여 통제사 이시언이 세웠다.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지하였다가, 고종 10년(1873)에 다시 세운 뜻 깊은 곳이다.
3)여천선소유적
종 목 사적 제392호
지 정 일 1995.04.20
소 재 지 전남 여수시 시전동 708외
시 대 조선시대
고려시대부터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있던 자리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거북선을 만들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지도상으로 보면 가막만의 가장 북쪽에 조선소가 있으며 조선소의 바다 입구에는 가덕도와 장도가 조선소의 방패 구실을 하고 있다. 또한 먼 바다에서 보면 육지처럼 보이고, 가까이 봐도 바다인지 호수인지 알아보기 어려워 중요한 해군 군사 방어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곳에는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했던 ‘굴강’, 칼과 창을 갈고 닦았던 ‘세검정’, 수군지휘소였던 ‘선소창’, 수군들이 머물렀던 ‘병영막사’, 거북선을 매어 두었던 ‘계선주’, 칼과 창을 만들던 ‘풀뭇간’, 왜군들의 활동을 살피던 ‘망해루’, 말과 수군이 훈련하던 ‘망마기마대’, 창을 던지고 활을 쏘는 연습장인 ‘궁장사’, 일반인의 통행금지를 표시했던 벅수(석인) 등 다양한 관련 유물들이 남아 있으며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 하씨부인을 모셨던 곳인 ‘자당기거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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