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문화와
』
문정조(文貞助)
## 차 례
Ⅰ. 서 론
Ⅱ. 화랑도 기원에 관한 고찰
Ⅲ. 화랑유학승들에 의한 신라무예
Ⅳ. 화랑도와 무예정신
Ⅴ. 화랑도의 무예정신은 태권도문화
Ⅵ. 결 론
## 참고문헌
Ⅰ. 서 론
고대사회에서 청소년 단체를 이끄는 대표여성을 원화(原花)라 했다.
4세기 연맹왕국에서 6세기의 중앙집권국으로 들어선 신라는 당시까지 촌락공동체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청소년 조직을 중앙정부에 흡수하게 되는데, 그 청소년 조직이 원화제도이다.1)
당시 조정은 많은 새로운 인재를 필료로하게 되자, 국가가 젊은이들을 떼지어 놀게해 노는 과정에서 지도능력을 보고 선택하여 등용시키곤 했다. 이런 과정에서 뽑인 대표적인 여성단장이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었는데, 서로 시기하고 질투가 심해 삼천여 부하를 통솔하는데 문제가 생겼고, 하루는 심한 다툼으로 준정이가 남모를 강물에 던져 죽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여성지도자를 내세운 원화제도를 해산시킨다.
6세기 전반부터 신라의 진흥왕은 활발한 영토확장으로, 강인하고 충성스러운 청소년 단체를 만들어 유사시 전쟁터에 투입시킬 계획을 세운다. 이 단체가 돋 “화랑도(花郞道)”이다.2)
화랑도는 법률상으로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었다. 종전의 촌락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청소년 조직에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접목시켜 일종의 반관반민 단체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화랑집단은 각기 화랑 1명과 승려 1명,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다수 낭도(수백명)로 구성했다.
화랑은 집단의 중심인물인데, 진골귀족 가운데에서 선출된 경우가 많았고, 용모가 단정하고 믿음이 깊으며 사교성이 풍부한 조건이어야 했다.
선택된 승려는 학문적 교양이 풍부해 지적.정신적으로 화랑을 자문해 주는 입장에 있게 했다.
낭도들의 신분이나 자격규정은 경주에 사는 6부민(六部民)출신 자녀들에게 유리하게 했고, 일반 평민들도 있었다.
화랑 구성원들은 혈연주의를 초월한 자신의 의사에 의한 결사체로 보는 입장이었고, 일정한 기간을 정해 놓고 애국심을 기르기위해 단체생활을 하게 했다. 경주의 남산, 금강산, 지리산 등 전국 명산 대천을 순례하며 국토에 대한 애착심을 고취시켰다. 그 중에서도 “노고단”이 사록에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 화랑도 정신의 출발점은 지리산 ‘노고단’ 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3)
지리산이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왜 다섯나라의 격전 경계선이고, 한 겨레 조상의 얼이 담긴 백두대간의 뿌리로 간주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들이 연마한 도란, 6세기 “원광법사”가 제정한 「세속오계(충,효,신,용,인)」이었는데, 특히 소중하게 여긴 사회 윤리덕목은 충과 신이었다.
당시 귀족 계급이나 민중들은 이상 국가 건설을 염원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열망을 실현시켜줄 단체로 기대하고 있었다. 국가가 위급하면 군에 배속되어 작전에 동원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국가에 충성하는 단체로 이미지화 되어 있었기에 일반인들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삼국통일 이후부터 화랑도의 성격이 차츰 변질되어가 기강이 해이되고, 군사적 과업이 달성되자 화랑도 존재의 의미도 약화되는 등 전반적으로 백성에 오히려 부담이 되는 단체로 추락해 가게된다.
양주동(梁柱東)의 「조선고가(古歌)」에는 “화랑이 한때 타락해 ‘화냥’의 칭호를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화랑의 선발기준도 여전히 “얼굴이 고운 남자”였다.4)
화랑이 진정 무사도였다면 왜 우람한 남자를 뽑지않았을까? 라는 신복룡의 「한국사 새로보기」의 지적과 함께, 그것은 모계사회의 풍습때문이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진성여왕편에는 진성여왕과 얼굴고운 화랑과의 에로티시슴에 관한 기록도 있을 정도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무도태권도의 정신세계와 이음을 하고 있는 입장에선, 고구려의 당나라에 대한 끈질긴 항쟁정신에서 청년의 기백을 찾고, 망국의 비분강개함을 느끼며 청년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화랑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단재 “신채호”5)의 역사관과, 객관성을 고려해 다소 상반되어 많은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는 「화랑세기」에 의미를 두고 본 논문을 시작하려 한다.
Ⅱ. 화랑도 기원에 관한 고찰
화랑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소도제단(蘇塗祭壇)의 무사들이 화랑도화 하였다는 설(申采浩), 조선 고유의 신앙단인 부루교단에서 연유하였다는 설(崔南善), 원시 미성년 집회에서 연유하였다는 설(李基白)” 등이 있다.6)
그러나 좀더 근접해 보면, 화랑은 원화(源花), 국선(國仙), 선랑(仙郞), 화주(花主), 풍월주(風月主)라고도 하며, 역사상에 확실하게 나타나게 된 것은 신라 진흥왕시대이다. 그리고 고구려에도 이와 유사한 조의선인(皂衣仙人)이라 하는 것이 있었고, 백제에도 보여진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미 삼국시대에 존재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처음에는 어렵고 복잡한 현실에 직면한 젊은이들이 국가 민족의 수호를 이념으로 하여 궐기하게된 순수한 민간 애국운동으로 시작되었고, 진흥왕 초년에 와서는 생각이 건전하고 용모가 단정한 젊은 남아를 뽑아서 풍월주로 추대했다. 선사(善士)를 모집하여 문도(門徒)로 한것이라든지, 또는 진흥왕 27년 고령가야(高靈伽倻)의 격전에서 용맹을 날린 사다함(斯多含)이 화랑으로 추대되어 천여명의 문도를 가졌다는 것 등은 모두 자발적으로 생겨진 민간애국운동의 발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흥왕 말년에 이르러서는 국가목적에 의하여 권위와 신의를 갖추고자 관에서 미소녀로서 원화(源花)를 선발하였고, 그 뒤에는 미남을 모집하여 화랑이라 하였으나, 순수한 민간청년의 애국운동이었던 화랑제도가 이로부터 관에 의하여 운영되게 된 것이다.
그 이념은 유(儒), 불(佛), 선(仙), 삼교(三敎)의 정신을 받고 오계(五戒)와 삼덕(三德)을 신조로하여 애국애족을 표방하였다. 오계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친구에게 믿음을 주고, 싸움터에서는 후퇴할 줄 모르고, 살생을 가려서 해야한다는 것이다. 삼덕은 겸손과 검소, 그리고 순후(醇厚)를 뜻하는 것이다.
화랑도의 조직과 훈련은 , 화랑이 순수한 민간의 애국운동으로 육성되어온 시기에는 그 조직은 간단한 것으로서 지도자격인 화랑이 있었고 그 밑에는 문도인 낭도가 모여 있었으며 화랑은 일대(一代)에 일인(一人)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진흥왕 37년 봄에 국가방위상 필요한 중견 청년의 양성과 상무.희생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관에서 운영하게 된 후로는 총 지도자인 국선(원화,화주,풍월주)이 있고, 그 밑에 화랑이 있으며, 화랑예하에 수개의 문호(文戶)가 있어 각각의 문도인 낭도가 속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국선은 한 대에 한 사람으로 추대 되는 것이 원칙이나, 때로는 한 대에 여러 사람으로 되는 때도 있었다. 선랑은 보통 3-4인으로부터 7-8인나 되었는데, 문도는 수백 수천에 헤아렸다.
화랑의 자격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인격과 덕망, 그리고 용의를 엄격히 보게 되었던 것이다.
화랑의 훈련방법에는 도의 연마나, 음악 조화와 호연의 기상을 기르는 세가지 법이 있었다. 도의 연마는 민족적 전통과 신앙을 존중하고 오계와 삼덕을 함양하는 것이다. 음악 조화는 음악으로써 심정을 고무(남을 격려해 힘나게)하게 하고 부드럽게 하는 것이며, 호연의 기상은 산수간에 몸을 두어 기개와 담력을 기르고 수양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쾌활하고 명랑하며, 씩씩하고 용감한 기상을 육성함으로써 신라의 기둥과 주최가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로 신라에서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고, 현사(賢士), 충신, 용장에는 화랑출신이 많았었다. 실제 진흥왕 말년이후 국토통일의 업을 거쳐 신라의 말기에 이르는 사이에 역대의 지도급 인물들은 대개 화랑에서 나왔던 것이다.
화랑은 이러한 이념과 조직과 훈련으로 인하여 특수한 기풍과 기질이 형성되었으니, 국가와 동지를 위하여 의에 죽는 것을 즐겁게 알게 되고, 대의를 존중하여 의에 어그러지는 일을 죽음으로써 항거하게 되었고, 병석에서 약그릇을 안고 죽는 것을 꺼렸다.
따라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함을 찬양하게 되었고, 오직 앞으로 나아갈뿐, 뒤로 물러남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적군에 패하면 자결할지언정 포로로 됨을 수치로 알게 되었다. 즉 장렬한 기백과 씩씩한 기풍이 함양되었던 것이다.7)
예로, 진흥왕 때 화랑에 추대되어 천여 문도를 거느린 15세의 사다함(斯多含)은 왕의 명을 받고 가야국과의 싸움터에 정병을 거느리고 들어가 큰 공을 세운다. 왕이 사다함에게 공훈을 표창하여 토지와 백성을 내렸으나 이를 고사했으며, 생사를 같이하기로 약속한 무관랑(武官郞)이 병들어 죽게되자 따라서 죽었다고 한다.
지금의 잣대로써는 인정하거나 긍정적인 평가를 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최소한 당시의 살아남기 위한 구국관에서는 평가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는 충성과 겸허, 무욕과 신의를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또 하나의 예로 16세의 관창(官昌)8)의 경우가 있다. 소년 화랑은 황산벌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계백장군에게 생포되어 어린 나이의 용전에 감동되어 살려주었으나, 또 다시 공격해 오자 계백은 목을 잘라 말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내자 이것을 본 신라군은 오히려 사기가 충전되어 황산벌전투를 이길수 이었다는 것이다.
진덕여왕 때의 비녕자(丕寧子)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그는 김유신 장군의 부하로써 백제와 싸워 궁지에 빠졌을 때 장군의 명을 받고 결사대가 되어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그의 아들 거진(擧眞)과 종 합절(合節)도 아버지와 상전의 뒤를 따라 전쟁터에 몸을 던지므로써 신라군을 위기에서 구하고 대승을 한 경우이다.
김유신의 아들 원술(元述)도 화랑정신의 정화이다. 삼국통일과정에서 당나라와 싸웠을 때, 원술도 종군하게 되었는데, 패잔병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아버지 유신은 왕에게 원술의 목을 베도록 청하고, 그 후로 아들 원술을 대하지 않았다. 패전의 죄인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은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원술은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다시 당과의 싸움에 출전하여 크게 승리하게 된다. 그러나 끝내 조정에서 내리는 승자에 대한 훈상을 사양하고 세상을 마쳤다한다.
이 모두는 사사로움을 버리고 대의를 위하여 소아(少我)를 희생함으로써 충(忠)과 신(信)을 실천한 것이다.
화랑도의 변천과정을 보면, 진흥왕(540-576)에서 문무왕(661-681)시대까지는 흥하였다가는 그 후부터 점차로 침체 쇠퇴 되어 실라말까지 계속된다. 신라의 통일이후 정리기인 무열왕, 문무왕시대 까지는 국내외로 국사다난하여 국민정신의 진작과 긴장이 요청되던 때였으므로 화랑사조가 왕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통일이 정착된 이후로는 국가 안팍으로 무사하고 태평이 계속됨에 따라 국민이 게을러지고, 사치에 흘리는 등 퇴폐사상이 일반화되어 국민정신이 해이해져 갔다. 이에 따라 화랑정신도 침체되고 약화되어 갔다. 그러나 신라의 화랑사상은 한민족 고유의 전통과 신념의 발로인 만큼 신라의 소망과 더불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고, 그후 고려.조선시대에도 내면엔 기본적인 화랑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봉착하면 다시 회복되었다가 환경의 자극이 해이되면 다시 쇠퇴되어온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 멸망후 고려조가 창건될 때에는 다시 화랑사상이 왕성하여져서 건국에 이바지한바 있고, 그후 국내가 정돈되고 태평이 계속됨에 따라 다시 쇠퇴됨을 볼 수 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시대가 된 후에도 창건시절이든지, 국난이 있을 때에는 다시 부활되었다가 쇠퇴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요컨대 화랑도는 한민족 고유의 민족정신의 표현이요, 호국애족 기백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비록 화랑이라고 하는 명칭이 붙여 있지는 않지만, 한민족의 피속에는 용맹하고 대의에 앞서고 정의감에 찬 화랑정신이 깃들어 있어, 한민족과 함께 영원하리라는 생각이다. 그 기상의 흐름이 모여 태동된 형태를 민속무예 태권도로 보고자 한 것이다.
Ⅲ. 화랑유학승들에 의한 신라무예
당나라는 675년 유인궤를 사령관으로하여 20여 만의 군사를 이끌고 매초성(양주)을 공격해 왔다. 그 소식을 태백산에서 숨어 지내던 김유신 아들 원술이가 듣고 다시 당군에 맏선 전쟁터로 나간다. 원술은 화랑도의 계율대로 목숨을 걸고 싸워 이긴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곳곳에서 벌어지던 당과의 싸움에서 계속 승리를 하게 된다. 그로인해 성덕왕34년(735) 2월에는 대동강 이남의 영토를 신라의 땅으로 정식 인정 받게 된다.
문무왕은 통일에 공이 많은 귀족에게 식읍(食邑)으로 나누어 주고 전쟁에서 잡힌 포로들을 종으로 나누어주곤 했다.
이로인해 귀족들은 넓은 땅에서 거두어들이는 곡식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집을 지키는 병사와 농사짓는 노비도 수 천명에 이르는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다.
이처럼 전쟁할 필요도 없고 농사지을 필요도 없는 귀족들이 할 일은 그저 먹고 마시는 질타한 놀이 뿐이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경주 안압지,9) 임해전, 포석정10) 등의 연못과 정자, 그리고 누각은 모두 당시 귀족들의 놀이터였던 것이다.
반면에 농민들은 보통촌이라는 행정구역에(村), 그리고 천민들은 향(鄕), 부곡(部曲)이라는 행정구역에 살게 했는데, 대부분 죄인이거나 포로로 잡혀온 고구려, 백제인들이었다. 물론 그들은 하루 종일 농사짓거나, 소.말을 먹이고 힘든 수공업에 종사해야 했다.
그 무렵 산속의 사찰에도 재물이 흘러들어가게 되고 승려들도 많이 늘어났다. 그리고 이름난 승려들도 많았다.
통일전 신라의 불교는 호국의 종교였다. 통일과정에서 화랑도는 원광법사11)가 내려준 “세속오계”에 힘입은바 크다. 사찰에도 풍부한 재력을 갖추게 되자 승려들은 물론이고 촉망 받아오던 화랑들이 선진문화를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중국대륙도 당나라로 통일되어 “참선불교”가 자리 잡아가고 있을 때였다.
520년에 온 제28대 “달마대사”는 인도의 수행불교를 중국화시켜서 참선불교를 정착시키는 작업을 할 때였다. 참선은 “몸과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삼매(三昧), 선수행에 들게한다(參入), 참가시켜준다.”를 의미한다고 한다.
참선의 핵심은 바로 “마음”에 관한 수행법으로, 이 전통은 약 180년 동안 지속되어 참선불교의 황금시대를 만들었다. 어느날 산속으로 열세살의 사마승이 찾아와 해탈법을 가르쳐달라고 매달렸다. 후에 사미승이 제4조 도신대사(580-650)가 되었다. 그는 중국의 환공산과 쌍봉산에서 60년간 장좌불와(長坐不臥)로 공부한 스님이다. 그 무렵 불교탄압이 있었는데, 도신대사의 교리가 전국으로 퍼져나가 젊은 수행승들이 모여 들었다.
천명의 고수들이 소림무예를 연마하여 참선수행을 하는 대 수행승단이 되었다. 천 명의 교수사였던 ‘신수스님’은 제6조가 될줄 알았는데, 여덟달 동안 꾸준히 방아만 찟던 노행(盧行)에게로 법통이 전해 졌다. 깨달음의 깊이와 경지는 경을 많이 아는 것과 다르다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참선은 남종, 북종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그중 교수사 신수대사는 숭산 “소림사”12)로 들어가 참선불교를 확장시켜 나갔다. 천 명의 수행 승단의 활동과 권력층의 지지는 전국사찰 80%이상이 참선 도량이 되게 했다.
보리 달마대사가 창안한 참선불교와 소림무예는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는 하나다. 선(禪)은 무예의 내면세계이고 무예는 선의 형상화다. 따라서 선과 무예는 둘이 아니므로 쌍전수행(雙全修行)해야 한다는 것이다.13)
신라의 화랑유학생들은 이러한 선과 무예를 배우러간 것이다. 불교가 국교로 공인된후 부터는 호국불교가되어 빠른 속도로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성골과 진골계통의 왕족들은 다투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당시 당나라에서는 선수행과 소림권법이 중국 전 사찰에서 성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유학승들에 의해 그간 전통적으로 수련해오던 신라적 맨손무예와 소림권법이 조화되어 새로이 융합된 신라맨손무예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중국 소림권법은 창안될 당시 고구려에서 활성화되었던 맨손무예(수박+덕견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본다.
중국 소림권법이 체계화된 것은 5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 그 무렵 고구려는 장수왕시대이다. 그는 수도를 압록강 중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고구려의 기마군단은 동아시아에서 최강의 군사로 알려져 어느 나라고간에 감히 고구려를 거슬리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의 예로, 백제의 아신왕이 광개토왕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했던 한을 풀기위해 그의 후손인 개로왕이 북위(北魏;소림사가 있는 하남성이북)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를 같이 공격하자고 제안하자 고구려의 당시 위력에 겁이 나 오히려 국서의 내용을 고구려에 알려 바쳤다. 그로 인해 고구려의 장수왕은 백제의 개로왕을 사로 잡아 무참히 살해 시켰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위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친선관계를 유지해 인적교류를 확대하고 가능한 고구려의 강군을 만드는 훈련법을 배우고 싶어했다.14)
Ⅳ. 화랑도와 무예정신
1. 통일신라시대 무예
통일을 이룬 신라는 풍월주 중심으로 똘똘뭉친 화랑들은 300-5000명으로 조직되었다.
교육을 통해서 인생관, 국가관이 확립된 화랑들은 가야국을 먼저 신라로 병합시켰고, 백제와 싸워서 승리하였으며, 이어 고구려와 싸워서 항복을 받아냈다.
삼국중 가장 열악한 환경이었던 신라는 청소년들의 혈기를 북돋아서 패기가 넘치게하여 호국의 역군으로 키웠던 것이다. 그 결과로 통일의 대업을 성취한 것이다. 통일후 당나라 군사를 한반도에서 쫒아내는데에도 적용하였다.
특히 진흥왕은 자연발생의 풍월도 ‘화랑도’를 국가경영으로 받아드렸다. 화랑도의 지도자인 풍월주는 무열왕, 김유신 장군처럼 왕이 되기도 하고 왕의 참모가 되기도 함으로써 화랑도의 전성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또한 동남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서 풍요를 즐기면서 각종 문화를 창조한 나라가 되어간다. 금관, 금허리띠, 금사리함, 금가락지, 금목거리 등 연금문화는 화랑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황금문화의 발전은 중국에 유학시켜 선진문화를 일찍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유능한 원광, 의상, 명랑, 월명, 관혜 등의 큰 스님들이 배워와 신라정신을 창조해 낸 것이다.
당시 중국의 대륙도 인도의 보리 달마대사(520-529)에 의해서 중국적 수행불교인 참선불교가 파죽지세로 퍼져나가던 때이다. 생, 노, 병, 사의 고통과 번뇌망상을 털어내는 수행불교, 그 수행불교의 핵심은 소림권, 소림무예로 유행하던 시대였다.15)
그러한 수행불교를 배우고 익힌 것이 화랑도들의 교육으로 자연스럽게 접목 조화된 것이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시사리를 모시고 화서 명당의 명산에 사리탑을 세우고 기적의 사리신앙을 정착시킨 것이다. 영축산의 통도사, 태백산의 정암사, 사자산의 법흥사, 오산의 상원사, 설악산의 봉정암 등에 오대 사리궁을 창건하고 사리신앙을 극대화한 것이다.
그 사리를 모신 곳이 곧 화랑도들의 교육장이었고, 그 화랑들을 키운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기도처가 되어왔다.
또한 순수하게 민초들로부터 출발한 화랑운동이 국가경영으로 발전하였고, 그 화랑들은 수행불교와 소림무예, 소림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우리것으로 만든 것이다.
2. 고려시대 무예(918-1392)
화랑들이 당나라 유학에서 배워온 선무예와 선수행법을 한국화하기 위해 지방호족 80여 명을 동원해 지리산의 심상사를 비롯한 구산선문(달마선법을 이어받아 종풍을 일으킨 9곳의 산문)을 세웠다.
통일신라의 창조문화를 이어 받은 문화가 고려문화이다. 선수행불교와 도선국사의 풍수사상을 이어 받아 창조한 것이다. 고려 태조왕건은 태어날 때부터 도선국사의 예언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재위기간(25년)중 개경을 중심으로 500여 곳에 절을 세웠다. 그리고 개성에 7층탑, 평양에 9층탑을 비롯해 3500여 가지의 불사를 일으켜 불교국가의 기초를 다졌다. 또한 36왕중 여덟 왕(문종,숙종,예종,인종,명종 등)의 아들이 출가하여 출중한 승려가 되어 호국불교 국가를 만들어 갔다.
고려국은 개국이래 북쪽의 글안병, 여진족, 그리고 몽고병의 침입을 빈번하게 받았다. 무려 다섯 차례나 몽고는 침입하였고 30여 년간이나 머물기도 했다. 그래서 국왕은 국민정신을 하나로 묵고 외적을 막으면서 어떻게 나라를 구할 건가에 고민해 왔다.
불교국가로서 할 일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경판으로 만들어 책을 찍어 보편화하는 작업이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팔만대장경(81258장)을 완성하게 되는데, 600권 460여 만자의 대 반야경을 맨 앞에 새겨서 “부처전의 지혜로 모든 악을 막아주고 씻어주시옵소서”라는 서원의 뜻을 표했다.
국왕과 대신은 물론 전체 주민이 참여하는 국민적 대불사였다. 곧 무아통일정신(無我統一精神)의 결정체이다. 나를 버리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 화랑정신의 발현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세계최초 최대의 대장경목판 보유 문화국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16)
3. 조선시대 무예
조선조를 세운 이성계는 고려말 공양왕의 무신이었다. 착실한 불자로서 승장 신조(神照)스님이 항상 곁에서 보필하였고, 위화도에서 회군시에도 도움을 받았다. 왕이 된 후에는 무학대사의 자문을 받아 수도를 개경에서 지금의 서울로 옮겼다.
개국공신인 정도전, 조준 등의 척불 주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불사를 많이 일으킨 경우이다. 해인사와 연복사의 사리탑을 중수하였고, 조계종의 흥천사를 세웠으며 강화도 선원사에 있었던 고려 대장경 경판을 서울의 지천사(현 프라자호텔)로 옮겼다. 재임 7년 동안에 보우스님과 나옹스님(1320-1376)의 자문을 받으며 고려시대의 호국불교 전통을 이었다.
제7대 세종대왕(1455-1468)은 유상들의 배불을 설득하면서 불교재건에 노력한 왕이다. 해인사, 사원사, 월정사, 화암사, 도갑사, 신륵사, 쌍봉사, 표훈사, 청학사 등을 중수하였다. 또한 재위중 승려들의 권익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였고 사원을 신축하였으며 낡은 절을 중수하였다.
그리고 부처님 경전을 한글화 하였으며 화랑도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몸소 실천한 대왕이었다.17)
불교의 핍박이 심해졌던 무렵 “임진왜란(1592-1598)”이 일어났다. 배불과 척불정책에 시달리던 산속의 스님들은 “나라부터 구하자”는 호국의 신념과 화랑정신을 일깨워 의병 승군(의승군) 활동을 개시하였다.
서산대사(73세)는 법흥사에서 1500여 명의 승병을, 사명대사는 관동지방에서 800여 명의 승병을, 처영스님은 지리산과 호남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을 동원하고 훈련시켜 격전지에 직접 투입시켰다. 승병이 투입된 대부분의 전투에서는 유리한 결과를 얻었다.
영규대사와 의병장 조헌은 금산성에서 1500여 명의 승군과 죽음으로 지휘하여 수 만명의 왜군을 섬멸하였고, 승장 처영스님, 의얼스님, 부휴스님, 선수스님 등의 의승군 활동이 나라를 구해냈다.
특히 행주산성 싸움에서 대첩(대승)이 되도록 결정적 역할을 한 경우인데, 명장 권율장군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행주산성의 북면과 서북면 구릉지는 완만한 곳으로 적 왜군의 작전에 유리한 곳이었다. 그들도 유리한 지형을 이미 알고 주 공격루트로 삼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한 때 일부의 성책이 무너지자, 의지가 굳고 조직력이 강했던 처영의 승병들이 결정적 순간을 막아냈던 일은 민족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하고 값진 경우였다. 그들이 바로 묵묵히 우리의 전통 맨손무예(수박)를 익혀오고, 화랑도정신으로 무장되었던 옛 태권도인들이었다고 보는 것이다.18)
Ⅴ. 화랑도무예는 태권도무예
인간은 자기 보존의 본능과 종족보존의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신체활동을 하게 된다. 특히 원시사회에 있어서는 외적방어라는 본능의 생활요구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도수공권(徒手空拳)의 투쟁형태가 투기 또는 자위무술로 발달하여 그 시대의 유일한 체육적 활동으로 행하여 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자신의 몸을 튼튼히 하려는 생존의식은 계속되었고, 체력과 기술을 발휘하고자 하는 본능이, 앞서 개발된 투기나 자위무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농경시대에는 천신, 태양, 산악 등을 숭상하는 원시신앙, 민간신앙이 유일의 생활이니만큼, 오월 하종, 시월 추수가 끝나면 군중이 모여 신에게 제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부족에 따라 부여에서는 동맹(東盟), 마한에서는 시월제, 신라에서는 가위(架위)라 불렀으나 신에게 감사하는 목적에는 같았다. 제례 전후로 투기나 유희가 있곤했던 수박희, 농악, 씨름 등 민속놀이에서 그 자취를 엿볼 수 있다.19)
이러한 제천대회에서 즐기던 투기, 유희, 오락 등이 점차 경쟁의식을 갖게되어 경기로 발전되었으리라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은 다신교를 신봉했던 그리스인들이 여러 신의 영을 위로하기 위하여 신전에서 제전경기를 행한 ‘올림피아’ 경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부락의 단위가 확대됨에 따라 국방능력과 전투기능의 향상을 목표로 강한 정신력과 체력배양을 위한 무예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그와 같은 제천행사가 계속됨에 따라 신체건강을 위한 양생술(養生術)이 발전되었고, 동작이나 힘이 우세한 동물의 공.방 자세들을 수용해 반복된 경험을 통해 체계화시킴으로써 오늘날의 태권도 전신이라할 수 있는 맨손무술(수박,택견)이 싹트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내적으로 세력확장을 위한 영토분쟁과 민족통일을 위한 각축전을 벌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외적에 대한 민족적 의식의 각성을 촉진시키기위해 무술을 중심으로한 체육활동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의 시조가 모두 무인이며 삼국사기 열전의 대부분의 인사가(87/60) 무인이었듯이 나라의 주인이 무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시대적 환경이 무예체육의 실행을 촉진하여 마침내 고구려의 조의선인(早衣仙人), 백제의 무절(武節), 신라의 화랑도 같은 동서고금에 빛나는 무인 청연단의 확립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는 화랑의 후예들이다.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무절, 신라의 화랑의 기원은 모두 단군조선시대의 천지화랑(天指花郞)이기 때문이다.
화랑도는 신라에만 있었던 제도는 아니다. 이름은 달리해도 고구려 백제에도 있었다. 신라 화랑도의 리더가 ‘화랑’ 이었듯이 조의들의 지도자를 고구려에서는 조의선인이라 했다.
조의선인은 고구려의 상징인 검은색 도복을 입고, 신선도를 수련하며, 몸과 마음을 닦았던 고구려의 젊은 인재양성 제도였다. 또 신라의 화랑들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듯이, 고구려의 조의선인 출신의 많은 인재들이 고구려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의외이겠지만, 을지문덕 장군과 양만춘장군, 연개소문도 조의선인 출신이다.
수나라 양제가 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해 왔을 때, 을지문덕 장군은 살수에서 이들을 대파한다. 이 때의 병사들이 검은 옷을 입고 신선도로 단련되었던 조의선인 출신이다.
그런데도 고구려의 조의선인제도나 백제의 무절이 신라의 화랑도 보다 후대에 알려지지않은 것은 패자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의 천지화랑제도가 고구려에 와서는 ‘조의선인’제도로, 백제에서는 무절로 발전했으며, 신라에서는 화랑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신라의 화랑제도가 시작되기 2500여 년전에 이미 화랑들이 있었음을 말하는데, 당시에는 국자랑(國子郞)이라 했고, 출행할 때에는 머리에 무궁화(天指花)를 꽃았기 때문에 천지화랑이라고 했다.20)
당시의 단군 할아버지들도 사해(四海)를 순행했다고 한다. 이 때 화랑들도 운해주(중국중원), 성생주(인도), 월식주(중동)를 두루 순례했다고 한다. 이 지역들을 연결해보면 고대 우리민족의 강역이 된다. 훗날 신라시대 화랑들이 명산대첩을 찾아다니며 수련하던 수행방식은 이렇듯 천지화랑들의 순행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다.21)
초기 고구려 국가체제를 갖추기시작한 2세기경 태조대왕과 차대왕의 2대에 걸쳐 ‘선배’라는 강력한 무사단을 형성해 국가의 강성과 중앙집권체제의 강화에 활용되었다.
고구려 당시에는 각종 지위가 출신에 의한 세습제였으나 오직 ‘선배’만은 출신의 미천이 없이 학문과 기술로 개인의 지위를 정하는 까닭에 모든 젊은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무를 중시한 고구려에서 무예의 근간인 수박이 으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고구려 고분 삼실총, 무용총, 각저총 등의 벽화에 나타난 무사들의 맨손무예 장면들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신라의 무예라면 화랑도의 수련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국선화랑은 진흥대왕이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옮겨온 것이며 신수두단전의 경기에서 뽑아 학문에 힘쓰게 했고, 수박(手搏), 격검(擊劒), 기마(騎馬), 덕견이, 깨금질, 씨름 등 각종 경기를하며 원근 산수에 탐험하여 시가와 음악을 익히며 공동으로 한곳에서 숙식하며 평시에는 환난구제, 성곽이나 도로공사에 참여했고, 난시에는 전장에 나가 공익을 위해 일신을 희생하는 것이 선배와 같다” 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검토해 보았을 때, 그간 있어왔던 맨손무술(수박,택견등)이 화랑도라는 제도속에서 성숙되어 왔고, 실질적인 수련과정에선 무기를 갖추고하는 검도,활쏘기,승마 등의 훈련이전에 맨손무술 ‘수박’이 기초수련으로 설정되어, 반드시 이수해야하는 기초수련무예였음을 알 수 있다.
Ⅵ. 결 론
화랑도는 골품사회의 산물이었다. 신라에서 근친혼이 행해젔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왔다. 세계역사상 하나의 독특한 신분제인 골품제사회 신라에서는 지배세력들이 왕을 축으로 하여 그 골품이 정해졌다.
신라의 화랑도가 새롭게 발견되고 주목 받게된 것은 20세기 들어서 였다. 그중 단재 신채호를 주목할 수 있다. 그가 1925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조선역사상 1천년래」가 그것이다.
그는 조선의 역사가 원래 낭가(郎家)의 독립사상과 유가(儒家)의 사대주의가 분립해 왔었는데, 묘청22)이 낭가의 이상을 실현하려다 패망하고 사대주의파 천하가 되었다고 했다. 그 결과 1894년과 1895년에 진흥왕과 같은 경세가가 나타나지 않고 외세를 따라 옮겨가는 사회가 되었다고 했다.23)
그는 19세기말 제국주의 열강의 한국침탈을 보며 민족의 성쇠가 낭가사상이 사라진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한국의 자주독립을 생각하며 화랑정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가 화랑도의 실체를 밝힌 것은 아니었다.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후,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화랑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물론 1945년 이후에는 한국의 연구자들에 의해 화랑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 모두 화랑도가 가지는 무사정신과 전사단으로서의 성격에만 주목해 왔던 공통점이 있다.
일본인 연구자중 ‘이케우치히로시(池內광)’는 1929년 「삼국사기」(47, 열전7)에 그 시대의 충신, 의사라 칭찬할 만한 인물을 들어 무사정신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신라의 무사정신이 하대에 가면 거의 없어젔다는 주장이다.24)
‘이키히데(三品彰英)’도 같은 입장이었는데, 세속오계의 화랑도정신을 신라의 멸망과 더불어 해체되었다고 주장했다.25)
그들의 주장은 정치적 목적이 숨어 있었다. 식민통치시대에 무사정신 나아가 독립정신을 잃어버린 한국인으로 결과를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신라를 고구려와 다른 남방문화권으로 강요하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이미 한국의 역사를 남북으로 분단시킨 것이다. 또한 ‘미지나 아키히데’는 문화연구를 통해 식민지 통치 정책을 뒷받침한 것이다.
해방후 손진태(孫晉泰)는 “민족통일운동에 중대역임은 신라의 화랑제도이다.”라며 상무적.순국적 화랑정신을 이야기 했다. 이후 화랑도는 한국인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하나의 장치가 되었다.
「한국사신론」도 화랑도를 다루고 있는데, “이 시대에 왕경의 중앙군을 보충하는 것은 신라의 화랑도 같은 청년단체였던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적 기능이었다. 그들은 평상시에 무술을 연마하다가 위급한 때에 국가를 위한 전투에 참가했던 것이다.
화랑도가 사다함, 김유신, 관창 등 화랑출신들의 많은 무용담이 예가 되고 있다.26)그런데 북한에서는 화랑도를 전혀 다르게 보고 있다. 그들은 신라의 통치배들이 국왕중심의 중앙 집전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귀족 출신 청소년들 속에서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하나의 국가적인 제도로서 화랑제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즉 신라의 화랑제도는 신라 지배세력의 계급적 지배와 통치제도를 강화하는 수단이었다는 것이다.27)
화랑도에 대한 남한과 북한의 주장은 이렇듯 서로 다르다. 이러한 견해차이는 목적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남한에서는 다음세대를 이끌어갈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장치로서 화랑도를 강조하고 있고, 북한에서는 유물사관에서 말하는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고구려를 평정한 신라의 화랑도를 지배세력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장치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가들 자체가 현실의 벽을 벗어나기 어려운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제국주의 일본의 연구자들은 순국무사(나라위해 몸바친 무사정신)로 군사적 기능만 화랑도 읽기를 하고 있어, 다른면의 여러 기능을 은폐.말살하게 되었다. 그러하다보니 현세의 화랑도는 각 집단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화랑도일뿐, 실제 신라의 화랑도 그 자체가 아닌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본 논문에서는 「화랑」을 통해 화랑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신채호의 역사관과 다소 상반된데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는「화랑세기(花郞世紀)」28)에 지향점을 두어 왔다.
화랑도는 고려시대에 와서도 「삼국사기」나 「삼국사절요」, 그리고 「동국통감」등에도 등장한다.
삼국시기에는 진흥왕 37년(576) 봄에 미모의 남자를 뽑아 화랑으로 삼고 받들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에는 원화를 두었으나 시기와 질투로 폐하고 대신 화랑을 두었다고 한다.
한편 「삼국사기」와 「동국통감」에는 진흥왕 원년(540) 태후가 섭정을 했는데, 그때 용모와 태도가 단정한 동남을 뽑아 풍월주(風月主)라 부르고, 선사(善士)를 구해 효도와 우애, 그리고 충성의 신의를 장려했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화랑도에 관한 기록들이 간략하고 화랑 또는 풍월주 우두머리에 관한 명칭 또한 서로 다르기도 한 것으로 보아, 이전 역사서에서 화랑도에 관한 관심이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근대이후의 역사가인 ‘신채호’의 주장이 돋보인다. 그는 화랑을 본래 상고시대 삼한의 별읍이던 소도(蘇塗)제단의 무사였다고 보며, 김부식이 화랑의 역사를 증오해 「삼국사기」에 원화와 화랑의 구별을 혼동하거나, 화랑이 고구려 관직이던 조의.선인을 모방한 것 등 사실을 말살했다고 주장했다.29)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서도 학자에 따라 견해를 달리하고 있어 김부식이 화랑을 싫어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도 한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나 「삼국사절요,동국통감」의 저자 서거정(徐居正)은 글을 쓰기전에 「화랑세기」를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도 「화랑세기」에 나오는 신라인들의 근친혼 등 유교적 윤리에 어긋나는 이야기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화랑세기에는 “신라는 근친혼을 통하여 지배세력들이 그들의 사회.정치적 자위를 지켜나갔다.”는 혼인.남녀관계의 이야기에 이어 “부계 계승을 원칙으로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왕위계승이나 종족의 성원권은 부계 계승을 통해 이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기준일 뿐, 기킬 수 없는 상황은 존재했다. 또한 왕자 집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에 대한 이해는 화랑도의 정체를 밝히는 전제가 된다. 그리고 반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화랑도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칠숙의 난, 비담의 난, 흠돌의 난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반란의 진압에 화랑도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흠돌은 27세 풍월주를 지냈던 사람이다. 그의 반란에 풍월주를 포함 화랑출신이 가담한바 있다. 우리 태권도인들의 인식에는 화랑도의 반란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사건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지지않았고 거론을 피해왔던 화랑도의 반란을 알게 되었으므로, 오히려 화랑도의 실체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화랑세기」에는 신선(神仙)의 도와의 관계성도 논이하고 있다. 도교가 신선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도교는 신선사상을 근본으로 음양, 오행, 참위 등을 더하고,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화랑세기」보리공조30)에는 “나는 불(승려)이 되고 , 너는 선(화랑)이 되면 우리나라를 평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화랑도는 선도(仙道)와 동시에 불교를 받아 들였고 그것이 신라 특유의 불.선(佛仙)으로 되었던 것이다.
화랑도는 신라사회와 별개로 존재한 조직이 아니다. 때문에 풍월주와 관련된 사람들은 왕, 왕의 일족에서부터 서민 낭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31)
오늘의 맨손무술 태권도의 성격도 선택적.제한적 범위란 있을 수 없이 우리 모두가 접하고 가꾸어야 할 민속무예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태권도 성격의 내공을 화랑도의 무도정신에서 찾으려 했던 경향이 있어왔다. 화랑도적 태권도와의 관계성에 관한 논의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화랑도 정신에 비추어 볼 때, 반란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규범을 벗어나 불의 앞에선 저항도 할 수 있다.
둘째, 맨손무예 태권도의 전수과정이 양인(농,공,상)들 만에 의한 것이 아니고, 선도가 화랑도로 편재되고, 동시에 불교를 받아들였던 사료를 통해, 심산유곡 승려들의 노력이 합쳐저 내려온 대중의 문화현상이다.
셋째, 신라는 근친혼을 통해 지배세력들이 그들의 사회, 정치적 지위를 지켜나간 사회였다. 사통(私通) 관계나, 아내 상납, 남의 아내 빼앗기, 왕 등에게 여자를 제공하는 색공(色供)을 한 사회이기도 했다. 이는 화랑이 신조로 삼았던 세속오계와 삼덕에 상반된 사회적 무질서가 보인다.
넷째, 법흥왕의 아들 비대공은 그의 어머니가 골품이 없어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화랑제도에는 적용되지 않아비대공의 아들 비보랑은 9세 풍월주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화랑이 신조로 삼았던 도덕, 유.불.선의 정신을 받들고, 세속오계와 삼덕을 실천하려 했던 그들의 장렬한 기백과 씩씩한 기풍, 그리고 유사봉공 정신을 태권도 내공의 정신으로 한다면 현실적 무리는 없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본다.
Ⅶ.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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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랑세기』이종욱, 신라인의 이야기, 1999.
3. 『조선역사상1천년래.』조선사 연구초, 1992.
4. 『조선민족사 개론』손진태,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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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화랑세기』보리공조, 140쪽, 1999.
8. 『삼국사기』4, 신라본기, 진평왕조.
9. 『삼국사기』5, 신라본기5, 선덕왕 16년조.
10『화랑세기로본 신라인 이야기』이종욱, 2000.
11.『조선고가연구』양주동,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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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花郞世紀』新羅文化祭학술논문집, 김대문, 서경문화사, 1989.
21.『세계백과사전』1-20권, 교육출판사, 1986.
22.『新羅人 武士的精神』池內 ,史學雜誌,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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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한국사신론』한글판, 72쪽, 1999.
25.『조선전사』4, 213-214쪽, 김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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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고대태권도발자취를 찾아서』문정조,태권도신문 학술난 1-19회분,1999.
28.『화랑유학승들이.』박동기, 무예신문,특별기획12.
29.『지리산이야기』화랑도정신,다음, cafe53.daum.net
30.『삼국통일후 화랑도』풍월주,박동기,무예신문, 특별기획12.
31.『고려시대 화랑도정신』박동기, 무예신문 특별기획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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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행주나루마을 복원에관한연구』문정조, 행주얼지,2004.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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