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제2권
계사년(癸巳年; 33)
신라 유리왕 10년, 고구려 대무신왕 10년, 백제 다루왕 6년
한(漢)나라 건무 9년
봄 정월 백제왕이 원자(元子) 기루(己婁)를 세워 태자(太子)로 삼고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2월 백제에서 나라의 남쪽 고을에 영(令)을 내려 비로소 도전(稻田)을 만들게 하였다.
갑오년(甲午年; 34)
신라유리왕 11년, 고구려 대무신왕 17년, 백제 다루왕 7년
한(漢)나라 건무 10년
봄 2월 백제의 우보(右輔) 해루(解婁)가 졸(卒)하였으니 나이 90세였다. 동부(東部)의 흘우(屹于)를 그 후임으로 삼았다.
○여름 4월 백제의 동쪽에 붉은 기운(赤氣)이 있었다.
○6월 신라에서 큰 물(大水)이 들었다.
○가을 9월 말갈(靺鞨) 군사가 백제의 마수성(馬首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城)을 불태웠다.
○겨울 10월 말갈(靺鞨) 군사가 백제의 병산책(甁山柵)을 공격하였다.
○신라의 서울에서 땅이 갈라지고 샘물이 솟아 올랐다.
병신년(丙申年; 36)
신라 유리왕 13년, 고구려 대무신왕 19년, 백제 다루왕 9년
한(漢)나라 건무 12년
가을 8월 낙랑(樂浪)의 군사가 신라의 북쪽 변방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함락시켰다.
정유년(丁酉年; 37)
신라 유리왕 14년, 고구려 대무신왕 20년, 백제 다루왕 10년
한(漢)나라 건무 13년
겨울 10월 백제에서 우보(右輔) 흘우(屹于)를 좌보(左輔)로 삼고, 북부(北部)의 진회(眞會)를 우보(右輔)로 삼았다.
○11월 백제에서 지진(地震)이 있었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고구려에서 낙랑(樂浪)을 습격하여 멸하였다. 낙랑 사람 5천 명이 대방(帶方) 사람들과 더불어 신라에 투항(投降)하니 신라에서는 이들을 육부(六部)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무술년(戊戌年; 38)
신라 유리왕 15년, 고구려 대무신왕 21년, 백제 다루왕 11년
한(漢)나라 건무 14년
백제에서 흉년이 들었으므로 백성들이 사사로이 술을 빚는 것을 금지하였다.
○겨울 10월 백제왕이 동?서 양부(東西兩部)를 순무(巡撫)하고 가난하여 제 힘으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곡식 2석(石)씩을 주었다.
경자년(庚子年; 40)
신라 유리왕 17년, 고구려 대무신왕 23년, 백제 다루왕 13년
한(漢)나라 건무 16년
가을 9월 화려(華麗)?불내(不耐) 두 고을에서 군사를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거수(渠帥)가 군병을 이끌고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가로막아 이를 깨뜨리니 신라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더불어 우호를 맺었다.
신축년(辛丑年; 41)
신라 유리왕 18년, 고구려 대무신왕 24년, 백제 다루왕 14년
한(漢)나라 건무 17년
봄 3월 고구려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가을 7월 고구려에서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 고구려에서 매화(梅花)가 피었다.
임인년(壬寅年; 42)
신라 유리왕 19년, 고구려 대무신왕 25년, 백제 다루왕 15년
한(漢)나라 건무 18년
봄 3월 기망(旣望 음력16일)에 가락국(駕洛國) 시조(始祖) 김수로(金首露)가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 가락국에는 9간(干)이 있어서 아도(我刀) ? 여도(汝刀) ? 피도(彼刀) ? 오도(五刀) ? 유수(留水) ? 유천(留天) ? 신천(神天) ? 오천(五天) ? 신귀(神鬼)라고 하였다. 각기 그 무리를 거느리고 추장(酋長)이 되었는데, 호수(戶數)는 1백 호(戶)이고, 인구(人口)는 7만 5천 명이었다. 산야(山野)에서 모여 살며 밭을 갈고 우물을 파서 먹고 마셨는데 임금과 신하의 위호(位號)도 없었다. 하루는 9간(干)이 계사(稽事)1)를 행하는데 마침 구지봉(龜旨峰)을 바라보니 이상한 서기(瑞氣)가 있었다. 또 공중에서 수백의 사람들이 부르는 듯한 소리로 9간(干)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이 땅에 와서 나라를 세우게 하였으니 너희들은 구지(龜旨)의 곡조를 노래하여 맞이하도록 하라.?
하였다. 9간(干)이 그 말대로 하자 조금 후에 하늘에서 금합(金盒)이 내려왔는데 열어보니 여섯개의 금란(金卵)이 있었다. 얼마 후에 알이 모두 개화(開化)하여 남자가 되었는데 기위(奇偉)하고 장대(長大)하여 용모가 옛 성인(聖人)과 같았으므로 무리가 모두 놀라고 기이하게 여겨 제일 먼저 난 자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금란(金卵)에서 나왔으므로 성(姓)을 김씨(金氏)라 하였고, 제일 먼저 나타났으므로 이름은 수로(首露)라고 하였으며, 국호(國號)를 대가락(大駕洛)이라 하였는데, 또 가야(伽耶)라고도 일컬었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다섯 가야(伽耶)의 왕이 되었는데, 아라가야(阿羅伽耶) ? 고령가야(古寧伽耶) ? 대가야(大伽耶) ? 성산가야(星山伽耶) ? 소가야(小伽耶)라고 하였다. 가락국(伽洛國)은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개칭(改稱)하였다.
○가을 8월 맥국(貊國)의 거수(渠水)가 사냥하여 얻은 짐승을 신라에 바쳤다.
○신라에서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신라를 침범하였다.
갑진년(甲辰年; 44)
신라 유리왕 21년, 고구려 대무신왕 27년, 민중왕(閔中王) 원년, 백제 다루왕 17년
한(漢)나라 건무 20년
봄 2월 가락국왕(駕洛國王)이 도성(都城)을 건축(建築)하고 궁실(宮室)을 조영(造營)하였다.
○가을 9월 한(漢)나라에서 군사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낙랑(樂浪)을 쳐서 그 땅을 취하여 군현(郡縣)을 삼으니 살수(薩水) 이북은 한나라에 속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왕 무휼(無恤)이 훙(薨)하니 대수촌(大獸村)의 들판에 장사지내고 대무신왕(大武神王) - 혹은 대해미류왕(大解味留王)이라고도 한다. 이라 호(號)하였다. 태자(太子) 해우(解憂)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왕의 아우 해읍주(解邑朱)를 추대(推戴)하여 왕으로 삼았으며,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을사년(乙巳年; 45)
신라 유리왕 22년, 고구려 민중왕 2년, 백제 다루왕 18년
한(漢)나라 건무 21년
봄 3월 고구려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宴會)를 베풀었다.
○여름 5월 고구려 동쪽 지방에서 큰 물(大水)이 들어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倉庫)를 열어 구제하였다.
병오년(丙午年; 46)
신라 유리왕 23년, 고구려 민중왕 3년, 백제 다루왕 19년
한(漢)나라 건무 22년
가을 7월 고구려왕이 동쪽으로 사냥을 가서 흰 노루(白獐)를 잡았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남의 후계자(後繼者)가 된 자는 그의 아들이 된 것인데, 이제 민중왕(閔中王)은 무휼(無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니 마땅히 무휼을 아버지로써 섬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국상(國喪)을 당한 지 몇달도 안 되어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연회(宴會)를 열었으며, 기년(朞年)의 연상(練祥)도 지나기 전에 또 사냥을 하였으니, 그 예절에 어긋난 것이 절로 드러났다.?
하였다.
○겨울 11월 고구려의 남쪽에 혜성(?星)이 나타나 20일 만에 사라졌다.
○12월 고구려 서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정미년(丁未年; 47)
신라 유리왕 24년, 고구려 민중왕 4년, 백제 다루왕 20년
한(漢)나라 건무 23년
여름 4월 고구려왕이 민중원(閔中原)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7월 또 민중원에서 사냥하다가 석굴(石窟)이 있는 것을 보고 좌우(左右)에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반드시 이곳에 장사지내고 달리 능묘(陵墓)를 만들지 말라.?
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 잠지락부(蠶支落部)의 대가(大家) 대승(戴升) 등 1만여 가(家)가 낙랑(樂浪)으로 가서 한(漢)나라에 투항하였다.
무신년(戊申年; 48)
신라 유리왕 25년, 고구려 민중왕 5년, 모본왕(慕本王) 원년, 백제 다루왕 21년
한(漢)나라 건무 24년
봄 고구려왕 해읍주(解邑朱)가 훙(薨)하니 왕후(王后)와 여러 신하들이 왕의 유명(遺命)에 따라 석굴(石窟)에 장사지내고 민중왕(閔中王)이라 호(號)하였다. 태자(太子) 해우(解憂)가 왕위에 올랐는데 포학하고 어질지 못한데다가 국사(國事)마저 돌보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3월 백제의 좌보(左輔) 흘우(屹于)가 졸(卒)하였다.
○가을 7월 가락국주(駕洛國主)가 허씨(許氏)를 맞아들여 왕비(王妃)로 삼았다. 당초에 9간(干)이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청하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이 땅에 내려온 것은 하늘이 명(命)하신 것이다. 응당 나의 배필이 될 왕후(王后)도 주실 것이니, 경(卿) 등은 염려하지 말라.?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公主)가 뱃길로 당도하니 이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가을 8월 고구려에서 큰 물(大水)이 들고 20여 군데 산사태가 났다.
○겨울 10월 고구려왕이 아들 익(翊)을 세워 태자(太子)로 삼았다.
기유년(己酉年; 49)
신라 유리왕 26년, 고구려 모본왕 2년, 백제 다루왕 22년
한(漢)나라 건무 25년
봄 고구려에서 장수(將帥)를 보내어 한(漢)나라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습격(襲擊)하였는데 요동 태수(遼東太守) 채동(蔡))이 은혜와 신의(信義)로써 대하니 다시 한(漢)나라와 화친하였다.
○3월 고구려에서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 고구려에서 서리가 내리고 우박이 쏟아졌다.
○가을 8월 고구려에서 기근(饑饉)이 들자 사자(使者)를 내보내서 진휼(賑恤)하였다.
신해년(辛亥年; 51)
신라 유리왕 28년, 고구려 모본왕 4년, 백제 다루왕 24년
한(漢)나라 건무 27년
고구려왕의 포학함이 날로 더하여 항상 사람을 깔고 앉았고 누울 때에는 사람을 베개로 삼아서 조금만 움직여도 문득 살해하였으며 간(諫)하는 신하가 있으면 활로 쏘아 죽였다.
이첨(李詹)이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는 일체(一體)로 서로 협조함으로써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 마땅히 예절로써 상대(相待)하고 은의(恩義)로써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왕 해우(解憂)는 흉악하고 무도(無道)하여 항상 앉거나 누울 때에 사람을 깔고 있어 움직이면 문득 죽였으니 죄악이 하늘에 가득하였으며 간(諫)해도 그치지 않았다. 감히 바른말을 하는 자는 위태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며 그 몸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루는 자인데 해우는 한갓 자기에게 거스리는 것만 미워할 뿐이고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히 어려운 데에서 나온 것은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간(諫)하는 자를 해치기를 마치 풀을 베고 짐승을 죽이듯이 하였으니 그 포악함이 어떻게 이보다 심할 수가 있겠는가? 예로부터 지극히 무도(無道)한 임금이 아니라면 간신(諫臣)을 경솔히 죽이지 않았다. 진 영공(陳靈公)이 예야(洩冶)2)를 죽인 것과 진 후주(陳後主)가 부재(傅縡)3)를 죽인 것과 당(唐)나라 희공(僖公)이 상준(常濬)4)을 죽인 것은 모두가 세 나라의 멸망할 즈음에 있었는데 《춘추(春秋》와 《강목(綱目》에는 이 일을 직필(直筆)하여 그 멸망한 연유를 밝혔다. 해우도 또한 오래지 않아 내수(內竪 - 환관)인 두로(杜魯)에게 시해되었으며, 또 그 세자(世子)도 불초(不肖)하여 폐위(廢位)되고 다시 서지 못하였다. 그런즉 장차 천하(天下)와 국가(國家)를 잃게 된 자는 마땅히 이로써 징험(徵驗)을 삼을 것이다.?
하였다.
계축년(癸丑年; 53)
신라 유리왕 30년, 고구려 모본왕 6, 태조왕(太祖王) 원년, 백제 다루왕 26년
한(漢)나라 건무 29년
겨울 11월 고구려 두로(杜魯)가 그 임금 해우(解憂)를 시해(弑害)하였다. 두로는 모본인(慕本人)으로서 왕의 좌우에서 시종(侍從)하고 있었던 바, 화(禍)가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통곡하니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통곡하는가? 옛사람의 말에 나를 어루만져주면 임금이고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고 하였다. 이제 왕은 포악한 짓을 행하여 함부로 사람을 죽였으므로 백성의 원수가 되었으니 그대는 어서 도모하라.?
하였다. 이에 두로가 칼을 품고 왕에게 가까이 가니 왕이 이끌어 자리에 앉히므로 드디어 왕을 시해하였다. 모본원(慕本原)에 장사(葬事)지내고 모본왕(慕本王)이라고 호(號)하였다. 태자(太子) 익(翊)은 불초하여 사직(社稷)의 주(主)가 되기에 부족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유리왕(琉璃王)의 손자 궁(宮) - 일명(一名) 어수(於漱)라고도 한다.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궁은 나면서 능히 볼 수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매우 영리하였는데 나이 겨우 7세였으므로 태후(太后)가 수렴 청정(垂簾聽政)하였다. 태후는 부여인(扶餘人)이었다.
갑인년(甲寅年; 54)
신라 유리왕 31년, 고구려 태조왕 2년, 백제 다루왕 27년
한(漢)나라 건무 30년
봄 2월 신라에서 혜성이 자미원(紫微垣)에 나타났다.
을묘년(乙卯年; 55)
신라 유리왕 32년, 고구려 태조왕 3년, 백제 다루왕 28년
한(漢)나라 건무 31년
봄 2월 고구려에서 요서(遼西)에 열 군데 성(城)을 쌓아 한(漢)나라에 대비(對備)하였다.
○백제에서 봄부터 여름에 이르도록 가물으니 죄수의 죄상을 너그럽게 다시 심사(審査)하고 사죄(死罪)를 사면(赦免)해 주었다.
○가을 8월 고구려 남쪽 지방에 황충(蝗蟲)이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말갈(靺鞨)이 백제의 북쪽 변방을 침범하였다.
병진년(丙辰年; 56)
신라 유리왕 33년, 고구려 태조왕 4년, 백제 다루왕 29년
한(漢)나라 중원(中元) 원년
봄 2월 백제왕이 동부(東部)에 명하여 우곡성(牛谷城)을 쌓아 말갈(靺鞨)에 대비(對備)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신라의 금성(金城) 우물에서 용(龍)이 나타나더니 곧 폭우(暴雨)가 쏟아졌다.
○5월 신라에서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가을 7월 고구려에서 동옥저(東沃沮)를 쳐서 그 땅을 취하여 읍(邑)을 삼았다. 이에 지경(地境)을 개척하여 동쪽으로는 창해(滄海 - 동해)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정사년(丁巳年; 57)
신라 유리왕 34년, 탈해왕(脫解王) 원년, 고구려 태조왕 5년, 백제 다루왕 30년
한(漢)나라 중원(中元) 2년
○가을 9월 신라왕이 병이 나자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탈해(脫解)는 국척(國戚)의 몸으로서 지위(地位)가 보신(輔臣)의 자리에 처하여 여러 차례 공명(功名)을 세웠다. 나의 두 아들은 재주가 탈해에게 훨씬 미치지 못한다. 또 선군(先君)의 명이 있었으니 내가 죽은 후에는 탈해로 하여금 즉위(卽位)하게 하여 유훈(遺訓)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겨울 10월 신라왕 유리(儒理)가 훙(薨)하였다. 남해왕(南海王)의 사위 석탈해(昔脫解)가 즉위(卽位)하였는데 나이 62세였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 사람이니,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쪽 1천리 되는 곳에 있었다. 당초에 그 국왕(國王)이 여국(女國)의 왕녀(王女)를 데려다 아내를 삼았는데 임신(妊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에 그 아내가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寶物)과 함께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처음에는 금관국(金官國) 해변에 당도하였는데 그곳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취하지 않았다. 다시 진한(辰韓)의 아진포구(阿珍浦口)에 이르렀는데, 한 노파가 그 궤를 줄로 잡아당겨 열어보니 어린 아이가 있었으므로 드디어 데려다 길렀다. 혹(或)은 말하기를, 이는 혁거세(赫居世) 39년의 일이라고도 하였다. 장성하자 신장(身長)이 9척이나 되고 풍채가 청수(淸秀)하였으며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당시 사람들이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였는데, 궤가 처음 이르렀을 때 까치가 날아와 울면서 따라다녔으므로 ‘작(鵲)? 자(字)의 한쪽을 생략하여 ?석(昔)?으로 성씨(姓氏)를 삼고, 또 궤를 풀고 나왔으므로 ?탈해(脫解)?라고 이름하였다. 탈해가 처음에 고기잡이로 업(業)을 삼아 그 노파를 봉양했는데 조금도 게으른 빛이 없었다. 노파가 말하기를,
?너는 범상(凡常)한 사람이 아니며 골상(骨相)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學問)에 힘써 공명(功名)을 세우라.?
하니, 탈해가 학문에 오로지 힘쓰고 겸하여 지리(地理)에도 통달하였다. 하루는 양산(楊山) 아래에 있는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 그 터가 길지(吉地)임을 알고는 꾀를 써서 그 집을 빼앗아 살았다. 그 뒤 남해왕(南解王)이 그가 현명(賢明)하다는 말을 듣고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 남해왕(南解王) 때 어떤 배가 가락국(駕洛國)에 당도하므로 수로왕(首露王)이 붙잡아 두려 했으나 그 배는 그대로 떠서 계림(계林)의 아진포(阿珍浦)에 닿았다. 마침 아진의(阿珍義)라는 노파가 있어서 바다 가운데에 까치가 모여드는 것을 바라보고 그 배를 끌어당겨 찾아본즉 배 가운데 큰 궤가 있었다. 궤를 열어보니 한 아이가 있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인데, 부왕(父王)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王女)를 맞이하여 왕비(王妃)로 삼았으나 오래도록 아들이 없자 간절한 기도(祈禱)를 올린 지 7년 만에 큰 알 하나를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로운 일이 아니라고 하여 큰 궤를 만들어 나를 그 속에 담고 바다에 띄워 이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곧 토함산(吐含山)에 올라가 성(城) 안의 살만한 곳을 살펴보는데 한 봉우리의 형세가 반달(半月)과 같음을 보고는 내려와 찾아보니 곧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이에 거짓 꾀를 지어내여 남몰래 그 터에 숫돌과 숯을 묻고 이는 옛날 우리 선조(先祖) 때부터 전해오던 집이라 하여 소송(訴訟)하기를, ?우리는 세업(世業)이 야장(冶匠)인데 잠깐 이웃 고을에 나간 사이에 남이 이 집을 빼앗아 살았습니다. 청컨대 땅을 파서 징험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므로 마침내 그 집을 얻게 되었다. 남해왕(南解王)이 그가 지혜있는 사람임을 알고 장공주(長公主) 아니부인(阿尼夫人)으로서 처를 삼도록 하고, 옛날[昔]부터 우리 집이라는 뜻에 의하여 석씨(昔氏)로써 성을 삼게 했다고 하였다. 또 《수이전(殊異傳》에 의하면, 용성국(龍城國)의 왕비(王妃)가 큰 알을 낳으니 괴이하게 여겨 그 알을 조그만 궤에 담고 노비(奴婢) 및 칠보 문첩(七寶文貼)과 함께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는데 그 배가 와서 아진포(阿珍浦)에 닿았다. 이에 촌장(村長) 아진(阿珍) 등이 궤를 열고 알을 꺼냈는데 홀연히 까치가 와서 알을 쪼으니 알이 열리고 아이가 나와서 탈해(脫解)라고 자칭(自稱)하였다. 이에 마을 노파에게 의탁하여 어미로 삼고 경사(經史)를 배웠는데 겸하여 지리(地理)도 통달하였으며 용모가 영특하였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 서울의 지세를 살펴보니 신월성(新月城) 터에 살만한 곳이 있었는데 호공(瓠公)이란 자가 거주하고 있었다. 호공은 허리에 박[瓠]을 차고 바다를 건너와 살았는데 어떠한 사람인지 내력을 알지 못하였다. 탈해가 그 집을 빼앗고자 하여 밤에 남몰래 그 집 정원(庭園)에 들어가서 쇠붙이를 연단(鍊鍛)하는 기구(器具)를 묻어 둔 후에 조정(朝廷)에 고하기를, ?우리는 야장(冶匠)으로서 세업(世業)을 삼고 있는데 잠깐 이웃 고을에 나간 사이에 호공이 우리 집을 빼앗아 살고 있으니, 청컨대 땅을 파서 징험(徵驗)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땅을 파보니 과연 쇠붙이를 연단하는 기구가 나왔다. 남해왕이 탈해가 본래 계림(계林) 사람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 비범함을 기특히 여겨 그 집을 내려 주었고 드디어 장공주(長公主)를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용성국은 왜국(倭國)의 동북쪽 2천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하우씨(夏禹氏) 이래로 국가(國家)를 영유(領有)한 자는 반드시 그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였으니 이는 다만 후세에 쟁란(爭亂)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때문 만이 아니라, 종사(宗祀)를 소중히 여긴 때문이다. 만약 이성(異姓)에게 전위한다면 이것을 혁명(革命)이라 이르는 것이니 조종(祖宗)의 사당(祠堂)에서 혈식(血食)할 수 없는 것이다. 남해왕이 탈해에게 왕위를 전하고자 하였으나 탈해가 사양(辭讓)하여 유리(儒理)가 먼저 왕위에 올랐는데 그 난명(亂命 - 임종을 맞아 정신이 혼미할 때 한 유언)에 따라 마침내 탈해에게 전위(傳位)하였으니, 그 경중(輕重)을 알지 못함이 매우 심하다. 만약 이성(異姓)에게 전위한 다음 조종의 사당이 오히려 보존되어 있다 하더라도 신명(神明)은 그 자손(子孫)이 아닌 자의 제물을 흠향(歆饗)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혈식(血食)이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 만약 요?순(堯舜)의 선양(禪讓)으로써 말한다면 요?순의 선양은 천하(天下)의 공도(公道)를 위한 것이며, 천하를 위하여 인재(人材)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남해왕이 아들이나 사위에게 전위하려 한 것은 나라를 사사로운 물건으로 삼아 아들과 사위의 경중(輕重)을 구분(區分)하지 않고 전위하려 한 것이니 어찌 이를 빙자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이첨(李詹)은 말하기를,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이후에 제왕(帝王)이 계승(繼承)하는 차서(次序)는 모두 한 성씨(姓氏)가 서로 전하는 것으로써 법칙을 삼았다. 그러므로 한 고조(漢高祖)가 처음 천하(天下)를 차지하고 약속(約束)하기를, ?유씨(劉氏) 아닌 자가 왕이 되거든 천하가 모두 공격하라.?라고 하였다. 신(新) 왕망(王莽)의 말년(末年)에 광무제(光武帝)가 중흥(中興)하였다가 동한(東漢)이 또 쇠약함에 미쳐 비록 천하가 분열되었으나 유비(劉備)가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예로서 오히려 삼국(三國 촉 - (蜀)?위(魏)?오 (吳))의 정통(正統)이 되었다. 그런데 신라의 전계(傳系)는 그렇지 아니하여 남해왕 박씨(朴氏)가 장차 운명(殞命)할 때 그 아들 유리와 사위 석탈해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아들이나 사위를 물론하고 나이 많고 어진 자로써 왕위에 오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탈해왕이 유리왕의 뒤를 계승하였고, 7세(世) 만에 조분왕(助賁王)이 내해왕(柰解王)의 유명(遺命)으로써 왕위에 올랐으며, 2세(世) 만에 미추왕(味鄒王) 김씨(金氏)가 조분왕의 사위로써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리하여 무릇 세번 성씨(姓氏)가 바뀌었는데 그 전수(傳受)할 즈음에 먼저 선왕(先王)의 훈계를 외워 천명(天命)을 받는 표본(標本)을 삼았고 조금도 의심하거나 꺼려하는 마음이 없어 1천 년의 유구(攸久)한 왕업(王業)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한 지방의 나라를 전하는 가법(家法)에 그칠 뿐이요, 천하(天下)와 더불어 널리 의논할 것은 되지 못한다.?
하였다.
○신라에서 유리왕(儒理王)을 사원(蛇園)에 장사지냈다.
무오년(戊午年; 58)
신라 탈해왕 2년, 고구려 태조왕 6년, 백제 다루왕 31년
한(漢)나라 명제(明帝) 영평(永平) 원년
봄 정월 신라에서 호공(瓠公)을 대보(大輔)로 삼았다.
○2월 신라왕이 직접 시조묘(始祖廟)에 제사하였다.
기미년(己未年; 59)
신라 탈해왕 3년, 고구려 태조왕 7년, 백제 다루왕 32년
한(漢)나라 영평 2년
고구려왕이 고안연(孤岸淵)에 가서 물고기 노는 것을 구경하였다.
○5월 신라에서 왜국과 더불어 교빙(交聘)하였다.
○6월 신라에서 혜성이 천선성(天船星) 자리에 나타났다.
○가을 7월 고구려 서울에 큰 물(大水)이 들어서 백성들의 가옥이 떠내려가거나 무너졌다.
신유년(辛酉年; 61)
신라 탈해왕 5년, 고구려 태조왕 9년, 백제 다루왕 34년
한(漢)나라 영평 4년
마한(馬韓)의 장수(將帥)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巖城)을 들어 신라에 투항(投降)하였다.
임술년(壬戌年; 62)
신라 탈해왕 6년, 고구려 태조왕 10년, 백제 다루왕 35년
한(漢)나라 영평 5년
가을 8월 고구려왕이 동쪽 지방에서 사냥하여 흰 사슴(白鹿)을 잡았다.
○고구려에서 황충(蝗蟲)이 번져 곡식을 해쳤다.
계해년(癸亥年; 63)
신라 탈해왕 7년, 고구려 태조왕 11년, 백제 다루왕 36년
한(漢)나라 영평 6년
가을 10월 백제왕이 신라의 낭자곡성(娘子谷城)을 침범하고, 이어서 사신을 보내어 회맹(會盟)하기를 청하였으나, 신라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갑자년(甲子年; 64)
신라 탈해왕 8년, 고구려 태조왕 12년, 백제 다루왕 37년
한(漢)나라 영평 7년
가을 8월 백제왕이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서쪽 변방에 있는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겨울 10월 또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였는데 신라에서 기병(騎兵) 2천 명을 보내어 이를 맞아 쳐서 패주시켰다.
○12월 신라에서 지진(地震)이 있었고, 눈이 오지 않았다.
을축년(乙丑年; 65)
신라 탈해왕 9년, 고구려 태조왕 13년, 백제 다루왕 38년
한(漢)나라 영평 8년
봄 3월 신라왕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수목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날이 밝아오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색(金色)의 조그만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고하므로 왕이 사람을 시켜 그 궤를 가져다 열어보니 그 속에 조그만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용모가 영특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좌우에게 이르기를,
?이는 하늘에서 나에게 아들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거두어 길렀는데, 점차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智略)이 많았다.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하였으며, 알지는 방언(鄕言)에 어린아이(小兒)의 칭호이다. 또 금궤(金櫃)에서 나왔으므로 성(姓)을 김씨(金氏)라고 하였으며, 닭의 이적(異蹟)이 있었으므로 시림(始林)을 고쳐 계림(?林)이라 하였고 인하여 국호(國號)로 삼았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천도(天道)가 유행(流行)하고 만물이 화생(化生)하여 북돋아 기르고 뒤집어 엎을 뿐이다. 어찌 금궤(金櫃)에 아이를 담아 수목 사이로 내려보내고 닭이 울어 사람에게 알리는 일이 있었겠는가? 이는 간사한 사람이 있어 왕이 신이(神異)하게 태어나 나라를 얻은 것을 보았으므로 또한 그 아들에게도 짐짓 신이(神異)한 기적을 만들어 왕의 후사(後嗣)가 되게 하여 거짓을 행하고 나라를 도둑질하기를 마치 황헐(黃歇)5)과 여불위(呂不韋)6)처럼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왕은 금독(金櫃)과 흰 닭[白?]의 신이(神異)한 데에 미혹되어 이를 길러 아들로 삼았다. 또 국호(國號)를 변경하여 마침내 엉뚱한 이성(異姓)의 후예(後裔)로 하여금 나라를 얻게 하였다. 남해왕이 이미 먼저 잘못을 저질렀고 탈해왕이 또 뒤에 잘못을 저질렀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였다.
병인년(丙寅年; 66)
신라 탈해왕 10년, 고구려 태조왕 14년, 백제 다루왕 39년
한(漢)나라 영평 9년
백제에서 신라의 와산성(蛙山城)을 쳐서 빼앗고 2백 인을 남겨두어 지키게 하였다.
정묘년(丁卯年; 67)
신라 탈해왕 11년, 고구려 태조왕 15년, 백제 다루왕 40년
한(漢)나라 영평 10년
봄 정월 신라에서 종척(宗戚)인 박씨(朴氏)로써 주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는데, 주주(州主)?군주(郡主)라고 불렀다.
○2월 신라에서 순정(順貞)을 이벌찬(伊伐飡)으로 삼아 정사(政事)를 맡겼다.
무진년(戊辰年; 68)
신라 탈해왕 12년, 고구려 태조왕 16년, 백제 다루왕 41년
한(漢)나라 영평 11년
가을 8월 갈사왕(曷思王)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투항하였는데 도두를 우태(于台)로 삼았다.
○겨울 10월 고구려에서 천둥하였다.
경오년(庚午年; 70)
신라 탈해왕 14년, 고구려 태조왕 18년, 백제 다루왕 43년
한(漢)나라 영평 13년
백제에서 군사를 보내어 신라를 침범하였다.
임신년(壬申年; 72)
신라 탈해왕 16년, 고구려 태조왕 20년, 백제 다루왕 45년
한(漢)나라 영평 15년
봄 2월 고구려에서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어 조나(藻那)를 쳐서 그 왕을 사로잡았다.
○여름 4월 고구려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계유년(癸酉年; 74)
신라 탈해왕 17년, 고구려 태조왕 21년, 백제 다루왕 46년
한(漢)나라 영평 16년
여름 5월 그믐 무오(戊午)에 백제에서 일식(日蝕)이 있었다.
○왜인(倭人)이 신라 목출도(木出島)를 침범하였다. 왕이 각간(角干) 우오(羽烏)를 보내어 방어하게 하였는데 이기지 못하고 전사(戰死)하였다.
갑술년(甲戌年; 74)
신라 탈해왕 18년, 고구려 태조왕 22년, 백제 다루왕 47년
한(漢)나라 영평 17년
가을 8월 백제에서 신라를 침범하니 신라에서 군사를 보내어 막았다.
○겨울 10월 고구려왕이 환나부(桓那部) 패자(沛者) 설유(薛儒)를 보내어 주나(朱那)를 쳐서 그 왕자(王子)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古鄒加)로 삼았다.
을해년(乙亥年; 75)
신라 탈해왕 19년, 고구려 태조왕 23년, 백제 다루왕 48년
한(漢)나라 영평 18년
신라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니 창고를 열어 구제해 주었다.
○겨울 10월 백제에서 신라 와산성(蛙山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병자년(丙子年; 76)
신라 탈해왕 20년, 고구려 태조왕 24년, 백제 다루왕 49년
한(漢)나라 장제(章帝) 건초(建初) 원년
가을 9월 신라에서 군사를 보내어 백제의 와산성(蛙山城)을 다시 쳐서 빼앗고 백제의 수비병(守備兵) 2백여 인을 섬멸하였다.
정축년(丁丑年; 77)
신라 탈해왕 21년, 고구려 태조왕 25년, 백제 다루왕 50년, 기루왕(己婁王) 원년
한(漢)나라 건초 2년
가을 8월 신라 아찬(阿飡) 길문(吉門)이 황산진(黃山津) 어귀에서 가야(加耶)의 군사와 싸워 1천여 명의 목을 베어 수급(首級)을 얻으니, 길문을 파진찬(波珍飡)으로 삼았다.
○가을 9월 백제왕 다루(多婁)가 훙(薨)하고 태자(太子) 기루(己婁)가 왕위에 올랐다. 기루는 지식(志識)이 크고 원대하여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겨울 10월 부여(扶餘)에서 뿔이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고구려에 바치니, 왕이 상서로운 물건이라 하여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이첨(李詹)이 말하기를,
?시절이 화평하여 해마다 풍년을 맞이하는 것은 으뜸의 상서(祥瑞)이니, 진실로 그렇지 않다면 비록 하늘에서 감로(甘露)를 내리고 땅에서 예천(醴泉)이 나온다 하더라도 족히 상서로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더구나 물건이 정상(正常)에 반(反)하는 것임에랴! 무릇 사슴과 토끼는 벌판에서 치달리고 굴속에 엎드려 있어 음류(陰類)에 속한 것인데 이제 사슴은 뿔이 셋이고 토끼는 꼬리가 기니 음도(陰道)가 극단(極端)에 달하여 정상(正常)의 도리에 어긋난 것이다. 이는 요망한 것이지 상서가 아닌 바, 태조왕이 왕위에 있은 지 오래되어 마침내 두 아들이 참화(慘禍)를 입었으니 이것이 어찌 그 조짐이 아니었던가? 그 후에 붉은 노루[紫獐]와 붉은 표범[赤豹]을 잡은 것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무슨 도움이 있었던가? 태조왕이 이로써 두려워하고 수성(修省)함으로써 재앙을 늦추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로 여겨 온 나라의 죄수를 놓아주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하였다.
○11월 고구려 서울에 눈이 내렸는데 석 자(尺) 깊이였다.
기묘년(己卯年; 79)
신라 탈해왕 23년, 고구려 태조왕 27년, 백제 기루왕 3년
한(漢)나라 건초 4년
봄 2월 신라에서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또 북쪽에 나타나더니 20일 만에 사라졌다.
○신라에서 간시산(干時山)?거칠산(居漆山) 두 나라를 쳐서 멸하였다. 처음에 두 나라가 이웃에 접경(接境)하여 자못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이에 신라에서 거도(居道)에게 명하여 변방(邊方)의 장관(將官)을 삼으니 거도가 두 나라를 병탄(幷呑)할 뜻을 갖고 항상 장토야(張吐野)에 군마(群馬)를 모아놓고 날마다 군사들로 하여금 희롱(戱弄) 삼아 말을 달리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마기(馬技)라고 일컬었는데 두 나라 사람들이 이를 익숙히 보고 항상 있는 일이라 하여 방비하지 않으므로 이에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두 나라를 멸하였다.
경진년(庚辰年; 80)
신라 탈해왕 24년, 파사왕(婆娑王) 원년, 고구려 태조왕 28년, 백제 기루왕 4년
한(漢)나라 건초 5년
여름 4월 신라 서울에 큰 바람(大風)이 불어 금성(金城) 동문(東門)이 무너졌다.
○가을 8월 신라왕 탈해(脫解)가 훙(薨)하니 양정구(壤井丘)에 장사지냈다. 유리왕(儒理王)의 둘째 아들 파사(婆娑)가 왕위에 올랐다. 왕이 훙하자 여러 신하들은 유리왕의 태자 일성(逸聖)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어떤 이의 말에 일성이 비록 적사(嫡嗣)이기는 하지만 위엄과 총명함이 파사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므로 드디어 파사를 세우게 되었다. 파사는 절약하고 검소하며 백성을 사랑하니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여 복종하였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혁거세 39년에 해변의 노모(老母)가 궤[?]를 열고 알을 가져다 탈해(脫解)를 얻어 길렀으며, 유리왕 34년에 이르러 탈해가 즉위하였으니, 그때 나이 62세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연표(年表)를 상고해 보건대, 혁거세 39년은 임인년(壬寅年)으로써 유리왕 34년 정사년(丁巳年)과의 거리가 76년이 되니 그때의 나이가 62세라고 한 것은 그릇된 것이다. 탈해가 왕위에 있은 지 24년째인 경진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 향년(享年)은 말하지 않았지만 혁거세 39년 임인년부터 계산해 본다면 그가 세상을 떠날 때에 99세가 되는 것이다. 탈해가 즉위할 때의 나이 62세로서 추산(推算)해 본다면 85세가 된다. 중수(中壽)로써 본다면 즉위할 때 나이 62세라는 말이 옳을 듯한데, 그렇다면 궤를 열었다고 한 때는 혁거세 53년 병진(丙辰)에 해당한다. ?궤를 열었다?라는 말이 이미 허탄(虛誕)한데다가 그 연수 또한 서로 엇갈리니 모두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옛날 신인(神人)들은 그 태어난 것이 보통 사람과 다르며 그 향년(享年)도 또한 ?1백세가 넘었으므로 우선 옛 사기(史記)대로 썼으니 이에 대해서는 깊이 변론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신사년(辛巳年; 81)
신라 파사왕 2년, 고구려 태조왕 29년, 백제 기루왕 5년
한(漢)나라 건초 6년
봄 2월 신라왕이 직접 시조묘(始祖廟)에 제사하였다.
○3월 신라왕이 주군(州郡)을 순무(巡撫)하고 창고를 열어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였으며 죄수의 죄상을 다시 너그럽게 심사(審査)하게 하였다.
임오년(壬午年; 82)
신라 파사왕 3년, 고구려 태조왕 30년, 백제 기루왕 6년
한(漢)나라 건초 7년
봄 정월 신라왕이 영(令)을 내리기를,
?지금 창고가 비었고 군기(軍器)가 허술하니 만약 홍수나 가뭄의 재앙과 변방에 경보(警報)가 있다면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마땅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농상(農桑)을 권면하고 군기를 수선(修繕)케 하여 변란(變亂)에 대비하도록 하라.?
하였다.
갑신년(甲申年; 84)
신라 파사왕 5년, 고구려 태조왕 32년, 백제 기루왕 8년
한(漢)나라 원화(元和) 원년
봄 2월 신라에서 명선(明宣)을 이찬(伊飡)으로 삼고, 윤량(允良)을 파진찬(波珍飡)으로 삼았다.
○여름 5월 신라의 고타 군주(古?郡主)가 푸른 소(靑牛)를 바치고, 남신현(南新縣)에서는 가지가 잇달아 붙은 보리 이삭을 바쳤는데, 그 해에 신라에서는 큰 풍년이 들어 나그네들이 양식을 싸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을유년(乙酉年; 85)
신라 파사왕 6년, 고구려 태조왕 33년, 백제 기루왕 9년
한(漢)나라 원화 2년
봄 정월 백제에서 군사를 보내어 신라를 침범하였다.
○2월 신라에서 길원(吉元)을 아찬(阿飡)으로 삼았다.
○여름 4월 신라에서 객성(客星)이 자미원(紫微垣)에 들어갔다.
○을사(乙巳)에 백제에서 객성이 자미원에 들어갔다.
정해년(丁亥年; 87)
신라 파사왕 8년, 고구려 태조왕 35년, 백제 기루왕 11년
한(漢)나라 장화(章和) 원년
가을 7월 신라왕이 영(令)을 내리기를,
?우리 나라는 서쪽으로 백제와 이웃하였고 남쪽으로 가야(加耶)와 연접하였는데, 내가 덕망으로 그들을 따르게 하지 못하고 위엄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지 못하니 마땅히 성루(城壘)를 보수(補修)함으로써 변란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 달에 가소(加召)와 마두(馬頭) 두 성(城)을 쌓았다.
○8월 그믐 을미(乙未)에 백제에서 일식(日蝕)이 있었다.
기축년(기축년; 89)
신라 파사왕 10년, 고구려 태조왕 37년, 백제 기루왕 13년
한(漢)나라 화제(和帝) 영원(永元) 원년
여름 6월 백제에서 지진(地震)이 일어나 민가(民家)가 허물어지고 사람이 많이 죽었다.
경인년(庚寅年; 90)
신라 파사왕 11년, 고구려 태조왕 38년, 백제 기루왕 14년
한(漢)나라 영원 2년
봄 3월 백제에서 큰 가뭄이 들어 보리가 흉작이었다.
○여름 6월 백제에서 큰 바람(大風)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가을 7월 신라에서 10인을 나누어 보내서 주주(州主) ? 군주(郡主)를 염찰(廉察)하여 직사(職事)를 게을리하고 전야(田野)를 황무(荒蕪)케 한 자는 폄출(貶黜)시켰다.
임진년(壬辰年; 92)
신라 파사왕 13년, 고구려 태조왕 40년, 백제 기루왕 16년
한(漢)나라 영원 4년
여름 6월 초하루 무술(戊戌)에 백제에서 일식(日蝕)이 있었다.
계사년(癸巳年; 93)
신라 파사왕 14년, 고구려 태조왕 41년, 백제 기루왕 17년
한(漢)나라 영원 5년
봄 정월 신라에서 윤량(允良)을 이찬(伊飡)으로 삼고, 계기(啓其)를 파진찬(波珍飡)으로 삼았다.
○2월 신라왕이 고소부리군(古所夫里郡)에 순행(巡幸)하여 나이 많은 이를 위문하고 곡식을 내려주었다.
○가을 8월 백제의 횡악(橫岳)에서 큰 돌 다섯 개가 떨어져내렸다.
○겨울 10월 신라의 서울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갑오년(甲午年; 94)
신라 파사왕 15년, 고구려 태조왕 42년, 백제 기루왕 18년
한(漢)나라 영원 6년
봄 2월 가야(加耶)의 군사가 신라 마두성(馬頭城)을 포위하니 신라에서 아찬(阿飡) 길원(吉元)을 보내어 기병(騎兵) 1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요격(邀擊)하여 패주시켰다.
○가을 8월 신라가 알천(閼川)에서 열병(閱兵)하였다.
병신년(丙申年; 96)
신라 파사왕 17년, 고구려 태조왕 44년, 백제 기루왕 20년
한(漢)나라 영원 8년
가을 7월 신라에서 폭풍(暴風)이 불어 금성(金城)의 큰 나무가 뽑혔다.
○9월 가야(加耶)의 군사가 신라의 남쪽 변방을 엄습해 들어오니 신라에서 가성주(加城主) 장세(長世)를 보내어 막게 하였는데 싸움에 패(敗)하고 전사(戰死)하였다. 왕이 노하여 직접 날랜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워서 적군을 깨뜨렸는데 노획(虜獲)한 것이 매우 많았다.
정유년(丁酉年; 97)
신라 파사왕 18년, 고구려 태조왕 45년, 백제 기루왕 21년
한(漢)나라 영원 9년
봄 정월 신라에서 군사를 일으켜 가야(加耶)를 치려 하였으나 가야국주(加耶國主)가 사신을 보내어 사죄(謝罪)하였으므로 곧 그쳤다.
○여름 4월 백제에서 한강(漢江)에 두 용(龍)이 나타났다.
무술년(戊戌年; 98)
신라 파사왕 19년, 고구려 태조왕 46년, 백제 기루왕 22년
한(漢)나라 영원 10년
봄 3월 고구려왕이 동쪽으로 순행(巡幸)하여 책성(柵城) 서쪽의 계산(?山)에 이르러 흰 사슴(白鹿)을 잡고 책성에 당도해서는 여러 신하들과 연음(宴飮)하였다. 성(城)을 지키는 이졸(吏卒)들에게 차등(差等)을 두어 상을 내렸다. 드디어 돌에 공(功)을 새겼다.
○여름 4월 신라의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겨울 10월 고구려왕이 책성(柵城)에서 돌아왔다.
기해년(己亥年; 99)
신라 파사왕 20년, 고구려 태조왕 47년, 백제 기루왕 23년
한(漢)나라 영원 11년
가을 8월 백제에서 서리가 내려 콩(菽)을 해쳤다.
○겨울 10월 백제에서 우박이 내렸다.
경자년(庚子年; 100)
신라 파사왕 21년, 고구려 태조왕 48년, 백제 기루왕 24년
한(漢)나라 영원 12년
가을 7월 신라에서 우박이 내려 작은 새들이 죽었다.
○겨울 10월 신라의 서울에 지진(地震)이 일어나 민가(民家)가 허물어지고 사람이 죽었다.
신축년(辛丑年; 101)
신라 파사왕 22년, 고구려 태조왕 49년, 백제 기루왕 25년
한(漢)나라 영원 13년
봄 2월 신라에서 금성(金城)의 동남쪽에 성(城)을 쌓고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불렀는데, 성의 둘레가 1천 23보(步)였다.
○가을 7월 왕이 새로 지은 성(城)으로 옮겨 거(居)하였다.
임인년(壬寅年; 102)
신라 파사왕 23년, 고구려 태조왕 50년, 백제 기루왕 26년
한(漢)나라 영원 14년
가을 8월 음집벌국(音汁伐國)이 실직곡국(悉直谷國)과 지경을 다투어 신라왕에게 나아가 판결해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이를 어렵게 여겨 금관국(金官國)의 수로왕(首露王)은 연로(年老)하고 지식(智識)이 많다고 하고는 불러서 물어보니 수로왕이 즉석(卽席)에서 판결하여 다투던 땅을 음집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육부(六部)에 명하여 수로왕을 향연(饗宴)하게 하였는데 오부(五部)에서는 모두 이찬(伊飡)으로써 접빈(接賓)을 주관하게 하였으나 오직 한지부(漢祗部)만은 지위가 낮은 자로써 주관하게 하였다. 수로왕이 노하여 그 종(奴) 탐하리(耽下里)로 하여금 한지부주(漢祗部主) 보제(保齊)를 잡아 죽이도록 하였으나 그 종이 명령에 따르지 않고 도망쳐서 음집벌주(音汁伐主) 타추(陀鄒)의 집에 의지하였다. 수로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가 보내지 않으니 수로왕이 노하여 군사를 이끌고 음집벌국을 치자 타주가 그 무리와 더불어 항복하였다.
○실직(悉直)?압독(押督) 두 나라가 신라에 항복하였다.
○가을 8월 고구려에서 사신(使信)을 보내어 책성(柵城)을 안무(安撫)하였다.
○겨울 10월 신라에서 복숭아 꽃과 오얏 꽃이 활짝 피었다.
계묘년(癸卯年; 103)
신라 파사왕 24년, 고구려 태조왕 51년, 백제 기루왕 27년
한(漢)나라 영원 15년
백제왕이 한산(漢山)에서 사냥하여 신록(神鹿)을 잡았다.
갑진년(甲辰年; 104)
신라 파사왕 25년, 고구려 태조왕 52년, 백제 기루왕 28년
한(漢)나라 영원 16년
봄 정월 신라에서 별이 비오듯 떨어졌으나 땅에는 닿지 않았다.
○가을 7월 실직(悉直)이 배반(背叛)하니 신라에서 군사를 보내어 평정하고 남은 무리들은 남쪽 변방으로 옮겼다.
을사년(乙巳年; 105)
신라 파사왕 26년, 고구려 태조왕 53년, 백제 기루왕 29년
한(漢)나라 원흥(元興) 원년
봄 정월 백제에서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부여(扶餘)에서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범(虎)을 바쳤는데, 길이가 1길(丈) 2자(尺)이고 꼬리가 없었다.
○고구려왕이 장수(將帥)를 보내어 한(漢)나라 요동(遼東)에 들어가 여섯 현(縣)을 노략하였는데 태수(太守) 경기(耿夔)가 군사를 이끌고 막으니 고구려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2월 신라의 서울에 눈이 석 자(尺)가 내렸다.
○가을 9월 한(漢)나라 경기(耿夔)가 맥인(貊人)을 쳐서 깨뜨렸다.
병오년(丙午年; 106)
신라 파사왕 27년, 고구려 태조왕 54년, 백제 기루왕 30년
한(漢)나라 상제(상帝) 연평(延平) 원년
봄 정월 신라왕이 압독(押督)에 행행(行幸)하여 가난한 자를 구제해주고 3월에 돌아왔다.
○가을 8월 신라왕이 마두성주(馬頭城主)에게 명하여 가야(加耶)를 치게 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07)
신라 파사왕 28년, 고구려 태조왕 55년, 백제 기루왕 31년
한(漢)나라 안제(安帝) 영초(永初) 원년
겨울 백제에서 얼음이 얼지 않았다.
무신년(戊申年; 108)
신라 파사왕 29년, 고구려 태조왕 56년, 백제 기루왕 32년
한(漢)나라 영초 2년
여름 5월 신라에서 홍수(洪水)가 나서 백성이 굶주리니 10도(道)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창고를 열고 진휼(賑恤)하였다.
○신라에서 군사를 보내어 비지국(比只國) ? 다벌국(多伐國) ? 초팔국(草八國)을 쳐서 병합하였다.
○고구려에서 가뭄이 심하여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왕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진휼하였다.
○백제에서 가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가을 7월 말갈(靺鞨)의 군사가 백제의 우곡(牛谷)에 들어와 백성을 사로잡아 갔다.
○9월 고구려왕이 질산(質山)의 남쪽에서 사냥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 동해곡수(東海谷守)가 붉은 표범(朱豹)을 바쳤는데, 꼬리 길이가 아홉 자(尺)였다.
기유년(己酉年; 109)
신라 파사왕 30년, 고구려 태조왕 57년, 백제 기루왕 33년
한(漢)나라 영초 3년
봄 정월 고구려에서 한(漢)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황제(皇帝)의 원복(元服 - 관례(冠禮))에 대하여 하례(賀禮)하였다.
○가을 7월 신라에서 황충(蝗蟲)이 번져 곡식을 해쳤으므로 왕이 명산 대천(名山大川)에 두루 제향(祭享)을 올려 비니 황충이 사라졌다.
○신라에서 풍년이 들었다.
신해년(辛亥年; 111)
신라 파사왕 32년, 고구려 태조왕 59년, 백제 기루왕 35년
한(漢)나라 영초 5년
봄 고구려에서 한(漢)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현도(玄?)에 속(屬)하기를 구하였다.
○3월 백제에서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 신라에서 성문(城門)이 무너졌다.
○신라에서 5월부터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겨울 10월 백제에서 지진(地震)이 있었다.
임자년(壬子年; 112)
신라 파사왕 33년, 지마왕(祗摩王) 원년, 고구려 태조왕 60년, 백제 기루왕 36년
한(漢)나라 영초 6년
겨울 10월 신라왕 파사(婆沙)가 훙(薨)하니 사릉(蛇陵)의 원내(園內)에 장사지냈다. 태자(太子) 지마(祗摩) - 혹은 지미(祗味)라고도 한다.)가 즉위(卽位)하였으며, 왕비(王妃) 김씨(金氏)는 갈문왕(葛文王) 마제(摩帝)의 딸이다. 처음에 파사왕(婆娑王)이 유찬택(楡飡澤)에서 사냥할 때 태자(太子)도 따랐는데 한기부(韓?部)를 지날 때 이찬(伊飡) 허루(許婁)가 연회(宴會)를 베풀었다. 술이 거나하자 허루의 아내가 어린 딸로 하여금 나와 뵙게 하였고 마제의 아내도 또한 그 딸을 나오게 하였는데, 태자가 마제의 딸을 보고 좋아하니 허루가 기뻐하지 않았다. 이에 왕이 허루에게 말하기를,
?공(公)이 여기에 성찬(盛饌)과 미주(美酒)를 베풀어 즐겁게 잔치하였으니 마땅히 주다(酒多)의 직위(職位)에 올려 이찬(伊飡)의 위에 있게 하리라.?
하였다. 주다는 후에 각간(角干)이라고 일컬었다.
계축년(癸丑年; 113)
신라 지마왕 2년, 고구려 태조왕 61년, 백제 기루왕 37년
한(漢)나라 영초 7년
봄 2월 신라왕이 직접 시조묘(始祖廟)에 제사하였다.
○신라에서 창영(昌永)을 이찬(伊飡)으로 삼아 정사(政事)에 참여하게 하였다. 옥권(玉權)을 파진찬(波珍飡)으로, 신권(申權)을 일길찬(一吉飡)으로, 순선(順宣)을 급찬(級飡)으로 삼았다.
○3월 백제에서 신라에 사신을 보내 빙문(聘問)하였다.
갑인년(甲寅年; 114)
신라 지마왕 3년, 고구려 태조왕 62년, 백제 기루왕 38년
한(漢)나라 원초(元初) 원년
봄 3월 신라에서 우박이 내려 보리 싹을 상하게 했다.
○고구려에서 일식(日蝕)이 있었다.
○여름 4월 신라에서 홍수(洪水)가 나니 죄수의 죄상을 다시 너그럽게 심사하여 사죄(死罪)를 제외하고는 모두 놓아주었다.
○가을 8월 고구려왕이 남해(南海)를 순무(巡撫)하고 10월에 돌아왔다.
을묘년(乙卯年; 115)
신라 지마왕 4년, 고구려 태조왕 63년, 백제 기루왕 39년
한(漢)나라 원초 2년
봄 2월 가야국(加耶國)에서 신라의 남쪽 변방을 침구하였다.
○가을 7월 신라왕이 가야국을 칠 때, 군사를 이끌고 황산하(黃山河)를 건너자, 가야국의 복병(伏兵)이 일어나 몇 겹으로 에워싸니, 왕이 분격(奮擊)하여 포위망을 뚫고 물러나왔다.
병진년(丙辰年; 116)
신라 지마왕 5년, 고구려 태조왕 64년, 백제 기루왕 40년
한(漢)나라 원초 3년
봄 3월 고구려에서 일식(日蝕)이 있었다.
○여름 6월 백제에서 10여 일 동안 크게 비가 내려 한강(漢江)이 넘치고 민가(民家)가 떠내려가거나 무너졌다.
○가을 7월 백제에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허물어진 전답(田畓)을 보수(補修)하게 하였다.
○8월 신라왕이 먼저 장수(將帥)를 보내어 가야(加耶)를 침공(侵攻)하도록 하고 직접 정병(精兵) 1만 명을 거느리고 그 뒤를 이으니, 가야에서는 성(城)에 의지하여 굳게 지켰다. 마침 오래도록 비가 내리므로 곧 돌아왔다.
○겨울 12월 고구려에서 눈이 다섯 자(尺) 깊이나 내렸다.
무오년(戊午年; 118)
신라 지마왕 7년, 고구려 태조왕 66년, 백제 기루왕 42년
한(漢)나라 원초 5년
봄 2월 고구려에서 지진(地震)이 있었다.
○여름 6월 고구려왕이 예맥(穢貊)과 함께 한(漢)나라 현도(玄?)를 엄습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가을 7월 고구려에서 황충(蝗蟲)이 번지고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 고구려에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현량(賢良)하고 효순(孝順)한 이를 천거하게 하였으며, 환?과?고?독(鰥寡孤獨)7)과 늙어서 자력으로 생활할 수 없는 자를 존문(存問)하여 의복과 식물(食物)을 주게 하였다.
경신년(庚申年; 120)
신라 지마왕 9년, 고구려 태조왕 68년, 백제 기루왕 44년
한(漢)나라 영녕(永寧) 원년
봄 2월 신라의 월성(月城) 서쪽에 큰 별이 떨어졌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3월 신라 서울에 큰 역질(疫疾)이 돌았다.
신유년(辛酉年; 121)
신라 지마왕 10년, 고구려 태조왕 69년, 백제 기루왕 45년
한(漢)나라 건광(建光) 원년
봄 정월 신라에서 익종(翌宗)을 이찬(伊飡)으로, 흔연(昕連)을 파진찬(波珍飡)으로, 임권(林權)을 아찬(阿飡)으로 삼았다.
○2월 신라에서 대증산성(大甑山城)을 쌓았다.
○한(漢)나라 유주 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 태수(玄?太守) 요광(姚光), 요동 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범하여 예맥(穢貊)의 거수(渠帥)를 쳐서 죽이고 병기(兵器)와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이에 고구려왕이 아우 수성(遂成)을 보내어 군사 2천여 인을 이끌고 풍환과 요광 등을 막아 치게 하였는데, 수성이 사자를 보내어 거짓 항복하니, 풍환 등이 이를 믿었다. 이에 수성이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적(敵)의 대군(大軍)을 막고 몰래 군사 3천 인을 보내어 현도(玄?) ? 요동(遼東) 두 군(郡)을 공격하여 그 성곽(城郭)을 불사르고 2천여 인을 죽이거나 노획하였다.
○여름 4월 왜(倭)가 신라의 동쪽 변방을 침구하였다.
○고구려왕이 선비(鮮卑)의 군사 8천 인과 함께 요동(遼東)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하니, 요동 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였다. 공조연(功曹椽) 용서(龍端)와 병마연(兵馬椽) 공손포(公孫))가 몸으로 채풍을 감싸주다가 함께 전사(戰死)하였고 그 밖에 죽은 자가 1백여 인이었다.
○겨울 10월 고구려왕이 부여(扶餘)에 행행하여 태후묘(太后廟)8)에 제사하고, 가난한 백성을 존문(存問)하여 차등 있게 물품을 내려주었다.
○숙신(肅愼)에서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자주빛 여우 갖옷(紫狐?) 및 흰 매(白鷹)?흰 말(白馬)을 바치니, 왕이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여 보냈다.
○11월 고구려왕이 부여(扶餘)에서 돌아와 그 아우 수성(遂成)으로 하여금 군국(軍國)의 일을 통섭(統攝)하게 하였다.
○12월 고구려왕이 마한(馬韓)과 예맥(穢貊)의 군사 1만여 기(騎)를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玄?城)을 포위하였는데 부여왕(扶餘王)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군사 2만을 거느리고 한(漢)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막아 싸웠으므로 고구려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임술년(壬戌年; 122)
신라 지마왕 11년, 고구려 태조왕 70년, 백제 기루왕 46년
한(漢)나라 연광(延光) 원년
여름 4월 신라에서 큰 바람(大風)이 동쪽에서 불어와 나무가 꺾이고 기왓장이 날리더니 저녁이 되서야 그쳤다. 도성(都城) 사람들의 뜬소문에 왜병(倭兵)이 크게 쳐들어온다 하여 다투어 산골짜기로 도망하니 왕이 이찬(伊飡) 익종(翌宗)에게 명하여 타일러 그치게 하였다.
○가을 7월 신라에서 황충(蝗蟲)이 번져 곡식을 해치니, 흉년이 들고 도둑이 많았다.
○고구려왕이 마한(馬韓)?예맥(穢貊)과 함께 요동(遼東)을 공격하였는데 부여왕(扶餘王)이 군사를 보내어 구원하였다. 마한(馬韓)은 백제 온조왕(溫祖王)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이제 고구려왕과 더불어 군사를 동원(動員)하였으니 어찌 멸망되었다가 다시 부흥(復興)했다는 말이 아닌가?
계해년(癸亥年; 123)
신라 지마왕 12년, 고구려 태조왕 71년, 백제 기루왕 47년
한(漢)나라 연광 2년
봄 3월 신라에서 왜국(倭國)과 강화(講和)하였다.
○여름 4월 신라에서 서리가 내렸다.
○5월 신라에서 금성(金城) 동쪽의 민가(民家)가 함몰(陷沒)되어 연못이 되고 거기서 부용(芙蓉)이 자라났다.
○겨울 10월 고구려에서 패자(沛者) 목도루(穆度婁)를 좌보(左輔)로 삼고 고복장(高福章)을 우보(右輔)로 삼아 수성(遂成)과 함께 정사(政事)에 참여하게 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24)
신라 지마왕 13년, 고구려 태조왕 72년, 백제 기루왕 48년
한(漢)나라 연광 3년
가을 9월 그믐 경신(庚申)에 신라와 고구려에서 일식(日蝕)이 있었다.
○겨울 10월 고구려에서 한(漢)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11월 고구려에서 지진(地震)이 있었다.
을축년(乙丑年; 125)
신라 지마왕 14년, 고구려 태조왕 73년, 백제 기루왕 49년
한(漢)나라 연광 4년
봄 정월 말갈(靺鞨)이 신라의 북쪽 변경(邊境)에 크게 쳐들어와서 관리(官吏)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하였다.
○가을 7월 말갈(靺鞨)이 또 신라의 대령책(大領柵)을 습격하고 이하(泥河)를 지나오니 왕이 백제에 글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백제에서 다섯 장군(將軍)을 보내어 구원하니 말갈이 물러갔다.
정묘년(丁卯年; 127)
신라 지마왕 16년, 고구려 태조왕 75년, 백제 기루왕 51년
한(漢)나라 순제(順帝) 영건(永建) 2년
가을 7월 초하룻날 갑술(甲戌)에 신라에서 일식(日蝕)이 있었다.
무진년(戊辰年; 128)
신라 지마왕 17년, 고구려 태조왕 76년, 백제 기루왕 52년, 개루왕(盖婁王) 원년
한(漢)나라 영건 3년
가을 8월 신라에서 장성(長星)이 하늘끝까지 뻗쳤다.
○겨울 10월 신라의 동쪽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11월 신라에서 천둥하였다.
○백제왕 기루(己婁)가 훙(薨)하고, 왕자 개루(盖婁)가 즉위하였다.
기사년(己巳年; 129)
신라 지마왕 18년, 고구려 태조왕 77년, 백제 개루왕 2년
한(漢)나라 영건 4년
신라의 이찬(伊飡) 창영(昌永)이 졸(卒)하니, 파진찬(波珍飡) 옥권(玉權)을 이찬(伊飡)으로 삼아 정사(政事)에 참여하게 하였다.
신미년(辛未年; 131)
신라 지마왕 20년, 고구려 태조왕 79년, 백제 개루왕 4년
한(漢)나라 영건 6년
여름 4월 백제왕이 한산(漢山)에서 사냥하였다.
○5월 신라에서 큰 비가 내려 민가(民家)가 떠내려가거나 무너졌다.
임신년(壬申年; 132)
신라 지마왕 21년, 고구려 태조왕 80년, 백제 개루왕 5년
한(漢)나라 양가(陽嘉) 원년
봄 2월 신라에서 궁성(宮城) 남문(南門)이 불탔다.
○백제에서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다.
○가을 7월 고구려 왕제(王弟) 수성(遂成)이 왜산(倭山)에서 사냥하며 좌우(左右)와 더불어 연회(宴會)하였는데, 관나부(貫那部) 우태(于台) 미유(彌儒)와 환나부(桓那部) 우태 어지류(?支留)와 비류나부(沸流那部) 조의(?衣) 양신(陽神) 등이 은밀히 수성(遂成)에게 말하기를,
?당초 모본왕(慕本王)이 죽었을 때 태자(太子)가 불초(不肖)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왕자 재사(再思)를 세우려고 하였는데 재사가 나이가 많으므로 아들에게 양보한 것은 형(兄)이 연로(年老)한 후 아우에게 양위(讓位)하도록 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제 왕이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위할 생각이 없으니, 그대는 도모(圖謀)하십시오.?
하였다. 이에 수성이 말하기를,
?왕위의 승습(承襲)은 반드시 적통(嫡統)으로 하는 것이 천하(天下)의 상도(常道)이다. 왕은 지금 연로(年老)하였지만 적자(嫡子)가 있는데 어찌 감히 넘겨다 보겠는가??
하였다. 미유가 말하기를,
?현명(賢明)한 아우가 형의 뒤를 계승하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던 일이니 그대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이에 좌보(左輔) 패자(沛者) 목도루(穆度婁)는 수성에게 이심(異心)이 있음을 알고 병을 칭탁(稱托)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갑술년(甲戌年; 134)
신라 지마왕 23년, 일성왕(逸聖王) 원년, 고구려 태조왕 82년, 백제 개루왕 7년
한(漢)나라 양가(陽嘉) 3년
신라에서 봄부터 여름까지 가물었다.
○가을 8월 신라왕 지마(祗摩)가 훙(薨)하였다. 아들이 없어서 유리왕(儒理王)의 장자(長子) 일성(逸聖)이 즉위(卽位)하였다. 9월에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을해년(乙亥年; 135)
신라 일성왕 2년, 고구려 태조왕 83년, 백제 개루왕 8년
한(漢)나라 양가 4년
봄 정월 신라왕이 직접 시조묘(始祖廟)에 제사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36)
신라 일성왕 3년, 고구려 태조왕 84년, 백제 개루왕 9년
한(漢)나라 영화(永和) 원년
봄 정월 신라에서 웅선(雄宣)을 이찬(伊飡)으로 삼아 안팎의 병마(兵馬)에 관한 일을 겸하여 관장(管掌)하게 하였다. 근종(近宗)을 일길찬(一吉飡)으로 삼았다.
정축년(丁丑年; 137)
신라 일성왕 4년, 고구려 태조왕 85년, 백제 개루왕 10년
한(漢)나라 영화 2년
봄 2월 말갈(靺鞨)이 신라에 침입하여 장령(長嶺)에 있는 다섯 목책(木柵)을 불살랐다.
○가을 8월 경자(庚子)에 백제에서 형혹성(熒惑星, 화성(火星))이 남두성(南斗星)을 범(犯)하였다.
무인년(戊寅年; 138)
신라 일성왕 5년, 고구려 태조왕 86년, 백제 개루왕 11년
한(漢)나라 영화 3년
봄 2월 신라에서 금성(金城)에 정사당(政事堂)을 설치하였다.
○3월 고구려의 왕제(王弟) 수성(遂成)이 질양(質陽)에서 사냥하여 7일 동안 돌아오지 않고 유희(遊戱)함에 절도가 없었다.
○가을 7월 <고구려의 왕제 수성이> 또 기구(箕丘)에서 사냥하여 5일 만에 돌아오니, 그 아우 백고(伯固)가 간(諫)하기를,
?화복(禍福)은 출입하는 문(門)이 따로 없고 오직 사람이 불러들일 따름입니다. 이제 그대는 왕의 친아우로서 백관(百官)의 으뜸이 되어 지위와 공훈이 성만(盛滿)하니 마땅히 충의(忠義)로써 마음에 간직하고 예양(禮讓)으로써 사욕(私欲)을 억제하여 위로는 왕의 선정(善政)을 보필(輔弼)하고 아래로는 민심(民心)을 얻은 연후에야 부귀(富貴)를 보존할 수 있고 화란(禍亂)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놀이에 빠져 돌아올 것도 잊었으니 저으기 그대를 위하여 위태롭게 여깁니다.?
하니, 수성이 말하기를,
?사람의 정리에 누군들 부귀(富貴)와 환락(歡樂)을 원하지 않겠는가만 그것을 얻는 자가 대개 드문 것이다. 이제 내가 즐겨할 만한 형세에 있으면서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하고 수성이 따르지 않았다.
○신라가 알천(閼川)의 서쪽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査閱)하였다.
○겨울 10월 신라왕이 북쪽으로 순행(巡行)하여 직접 태백산(太白山)에 제사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39)
신라 일성왕 6년, 고구려 태조왕 87년, 백제 개루왕 12년
한(漢)나라 영화 4년
가을 7월 신라에서 서리가 내려 콩(菽)을 해쳤다.
○8월 말갈(靺鞨)이 신라 장령(長嶺)을 습격하여 백성을 노략하였다.
○겨울 10월 말갈이 신라에 내침하였는데 큰 눈이 내려 곧 물러갔다.
경진년(庚辰年; 140)
신라 일성왕 7년, 고구려 태조왕 88년, 백제 개루왕 13년
한(漢)나라 영화 5년
봄 2월 신라에서 장령(長嶺)에 목책(木柵)을 세워 말갈(靺鞨)을 방비하였다.
신사년(辛巳年; 141)
신라 일성왕 8년, 고구려 태조왕 89년, 백제 개루왕 14년
한(漢)나라 영화 6년
가을 9월 그믐 신해(辛亥)에 신라에서 일식(日蝕)이 있었다.
임오년(壬午年; 142)
신라 일성왕 9년, 고구려 태조왕 90년, 백제 개루왕 15년
한(漢)나라 한안(漢安) 원년
가을 7월 신라왕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말갈(靺鞨)을 치는 문제에 대하여 의논하였는데, 이찬(伊飡) 웅선(雄宣)이 불가하다고 하여 그쳤다.
○9월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고구려왕이 꿈에 한 표범(豹)이 이빨로 범(虎)의 꼬리를 물어 끊는 것을 보고 깨어 그 길흉(吉凶)을 점치니 어떤 이가 말하기를,
?범은 백수(百獸)의 장(長)이고, 표범은 범의 동류(同類)이기는 하지만 작은 것이니, 생각컨대 왕의 친족 가운데 아마도 대왕의 뒤를 끊으려고 도모하는 자가 있는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기뻐하지 않고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점자(占者)의 말이 이러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악(惡)한 일을 행하면 길(吉)이 변하여 흉(凶)이 되고 착한 일을 행하면 재앙이 도리어 복(福)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나라를 내 집과 같이 걱정하시고 백성을 내 아들과 같이 사랑하시니 비록 조그만 변괴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염려하실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43)
신라 일성왕 10년, 고구려 태조왕 91년, 백제 개루왕 16년
한(漢)나라 한안(漢安) 2년
봄 2월 신라에서 궁실(宮室)을 보수(輔修)하였다.
○여름 6월 을축(乙丑)에 신라에서 형혹성(熒惑星)이 진성(鎭星) 자리를 범하였다.
○겨울 11월 신라에서 천둥하였다.
갑신년(甲申年; 144)
신라 일성왕 11년, 고구려 태조왕 92년, 백제 개루왕 17년
한(漢)나라 건강(建康) 원년
봄 2월 신라왕이 주군(州郡)에 영(令)을 내리기를,
?농사(農事)는 정치(政治)의 근본이고 곡식은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이니 제방(堤防)을 수축(修築)하고 전야(田野)를 널리 개척(開拓)하라.?
하였다. 또 영을 내려 민간(民間)에서 금은(金銀) 주옥(珠玉)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을유년(乙酉年; 145)
신라 일성왕 12년, 고구려 태조왕 93년, 백제 개루왕 18년
한(漢)나라 영가(永嘉) 원년
신라에서 봄부터 여름까지 가물었는데 남쪽이 더욱 심하여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곡식을 옮겨 구제하였다.
병술년(丙戌年; 146)
신라 일성왕 13년, 고구려 태조왕 94년, 차대왕(次大王) 원년, 백제 개루왕 19년
한(漢)나라 질제(質帝) 본초(本初) 원년
가을 7월 고구려 왕제(王弟) 수성(遂成)이 왜산(倭山)에서 사냥할 때 좌우에게 말하기를,
?왕이 늙었는데도 죽지 않고 내 나이도 또한 쇠경(衰境)에 들어 기다릴 수 없으니 바라건대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도모하라.?
하니, 모두 명령대로 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 사람이 홀로 말하기를,
?왕자(王子 - 수성(遂成)을 말함)가 불손한 말을 하였는데도 좌우에서 곧게 간(諫)하지 않고 모두 명령을 좇겠다고 하였으니 이는 간사하고 아첨하는 것입니다. 내가 직언(直言)을 하고자 하는데 그래도 좋습니까??
하니, 수성이 말하기를,
?그대가 직언을 한다면 나에게 약석(藥石)이 된다.?
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지금 임금이 현명하여 안팎에 이심(異心)이 없습니다. 그대가 비록 공로(功勞)가 있더라도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을 이끌고 임금을 폐(廢)하려 한다면 이는 홑실(單縷)로 만균(萬鈞)의 무게를 잡아당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오히려 그 옳지 않음을 알 것입니다. 만약 왕자께서 속에 품은 뜻을 고치고 생각을 바꾼다면 임금께서 왕자의 효순(孝順)함을 알고 반드시 양위(讓位)할 생각을 품으실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화가 곧 미칠 것입니다.?
하니, 수성이 기뻐하지 않았다. 좌우에서 말하기를,
?임금이 연로(年老)한 탓에 국조(國祚)의 위태로움을 염려하여 왕자가 장원(長遠)한 계획을 도모하였는데 이 사람이 망령되이 화복(禍福)에 대하여 말하니 만약 죽이지 않는다면 일이 누설되어 후회를 초래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수성이 그대로 따랐다.
○8월 고구려왕이 장수(將帥)를 보내어 한(漢)나라 요동(遼東)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엄습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 태수(樂浪太守)의 처자(妻子)를 사로잡았다.
○겨울 10월 신라의 압독(押督)이 반란(叛亂)을 일으키니 군사를 보내어 쳐서 평정(平定)하고 그 남은 무리는 남쪽 지방으로 옮겼다.
○고구려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이 왕에게 말하기를,
?수성(遂成)이 장차 배반할 것이니 청컨대 먼저 죽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고, 수성은 나라에 공로가 있으니 내가 장차 선위(禪位)하려 한다. 그대는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고복장이 말하기를,
?수성의 위인(爲人)이 잔인하고 어질지 못하니 오늘 대왕의 선위(禪位)를 받는다면 다음날에는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어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풀어 무고(無辜)한 자손에게 후환을 남겨 줄 수가 있겠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2월 고구려왕이 수성(遂成)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미 늙어 만가지 정무(政務)에 게으르니 하늘의 역수(曆數)가 너에게 있다. 더구나 너는 안으로 국정(國政)에 참여하였고 밖으로는 군무(軍務)를 총찰(摠察)하여 오랫동안 사직(社稷)에 공로가 있었다. 신민(臣民)의 기대(企待)에 부응(副應)하니 나의 부탁(付托)한 바가 인재를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이에 선위(禪位)하고 별궁(別宮)에 물러가 태조 대왕(太祖大王)이라 일컬었다. 수성이 즉위하였으니, 나이 76세였다.
정해년(丁亥年; 147)
신라 일성왕 14년, 고구려 차대왕 2년, 백제 개루왕 20년
한(漢)나라 환제(桓帝) 건화(建和) 원년
봄 2월 고구려에서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미유(彌儒)를 좌보(左輔)로 삼았다.
○3월 고구려에서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을 죽였다. 고복장이 죽음에 임하여 탄식하기를,
?아! 원통하다. 내가 당시(當時)에 선조(先祖 - 태조왕)의 근신(近臣)이 되어 난적(亂賊)을 눈으로 보고 어찌 말하지 않겠는가? 전왕(前王)이 나의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이 지경에 이른 것이 한이 된다. 이제 그대는 겨우 왕위에 올랐은즉 정교(政敎)를 새롭게 하여 백성들에게 보 임이 마땅하거늘 불의(不義)하게도 한 충신(忠臣)을 죽이니 내가 이 무도(無道)한 세상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빨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곧 형(刑)을 받으니 원근(遠近) 사람들 가운데 이를 듣고 분하고 애석해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을 7월 신라왕이 신료(臣僚)에게 명하여 지혜와 용맹이 있어서 장수(將帥)가 될 만한 자를 각기 천거하게 하였다.
○고구려 좌보(左輔) 목도루(穆度婁)가 병을 칭탁(稱托)하고 물러가니, 왕이 환나부(桓那部) 우태(于台) 어지류()支留)를 좌보(左輔)로 삼아 주부(主簿)로 승진시키고, 비류나부(沸流那部) 양신(陽神)을 중외 대부(中畏大夫)로 삼아 우태(于台)로 승진시켰으니, 모두 왕의 옛 친구들이었다.
○11월 고구려에서 지진(地震)이 있었다.
무자년(戊子年; 148)
신라 일성왕 15년, 고구려 차대왕 3년, 백제 개루왕 21년
한(漢)나라 건화 2년
여름 4월 고구려왕 수성(遂成)이 태조왕(太祖王)의 원자(元子) 막근(莫勤)을 죽이니 차자(次子) 막덕(莫德)이 화가 자신에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옛날 송(宋)나라 선공(宣公)이 그 아들 여이(與夷)를 세우지 않고 그 아우 목공(公)을 세웠는데, 조그만 것을 참지 못하고 큰 일을 그르쳐 여러 대(代)에 걸쳐 난(亂)을 초래하였으므로, 《춘추(春秋》에 ?정도(正道)를 지킴이 귀(貴)하다.[大居正]?고 평(評)하였다. 이제 태조왕(太祖王)이 왕위(王位)를 가볍게 여기고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선위(禪位)하여 한 충신과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화를 미치게 하였으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가을 7월 고구려왕이 평유원(平儒原)에서 사냥할 때 흰 여우(白狐)가 따라오면서 울었는데 왕이 활로 쏘았으나 맞히지 못하였다. 이에 사무(師巫)에게 길흉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여우는 원래 요망한 짐승이요, 상서로운 짐승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 빛깔마저 희니 더욱 괴이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지성으로 타이르지 아니하고 요괴(妖怪)를 보여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반성(反省)하여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것이니, 임금이 만약 덕(德)을 닦는다면 화가 변하여 복(福)이 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흉(凶)하면 흉하다 하고, 길(吉)하면 길하다고 할 것이지 네가 이미 요망하다 하고 또 복(福)이 된다고 하니 어찌 이토록 기만(欺瞞)하느냐??
하고, 드디어 죽여버렸다.
○신라에서 박아도(朴阿道)를 봉(封)하여 갈문왕(葛文王)으로 삼았는데, 신라에서는 추봉(追封)한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 일컬었다.
기축년(己丑年; 149)
신라 일성왕 16년, 고구려 차대왕 4년, 백제 개루왕 22년
한(漢)나라 건화 3년
봄 정월 신라에서 득훈(得訓)을 사찬(沙))으로, 선충(宣忠)을 내마(奈麻)로 삼았다.
○여름 4월 그믐 정묘(丁卯)에 고구려에서 일식(日蝕)이 있었다.
○5월 고구려에서 오성(五星)9)이 모이니 일자(日者 - 천문(天文)을 맡은 자)가 왕에게 거짓으로 말하기를,
?이는 임금의 덕(德)이요 나라의 복(福)입니다.?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가을 8월 신라에서 혜성[?星]이 천시원(天市垣)의 자리에 나타났다.
○겨울 11월 신라에서 천둥하였고 서울에 역질(疫疾)이 크게 유행하였다.
○12월 고구려에서 물이 얼지 않았다.
경인년(庚寅年; 150)
신라 일성왕 17년, 고구려 차대왕 5년, 백제 개루왕 23년
한(漢)나라 화평(和平) 원년
신라에서 여름 4월부터 비가 오지 않다가 가을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다.
신묘년(辛卯年; 151)
신라 일성왕 18년, 고구려 차대왕 6년, 백제 개루왕 24년
한(漢)나라 원가(元嘉) 원년
봄 2월 신라에서 이찬(伊飡) 웅선(雄宣)이 졸(卒)하니 대선(大宣)을 이찬으로 삼아 안팎의 병마(兵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봄 3월 신라에서 우박이 내렸다.
계사년(癸巳年; 153)
신라 일성왕 20년, 고구려 차대왕 8년, 백제 개루왕 26년
한(漢)나라 영흥(永興) 원년
여름 6월 고구려에서 서리가 내렸다.
○겨울 10월 신라 궁문(宮門)에 불이 났다. 혜성(彗星)이 동쪽에 나타나더니 또 동북쪽에도 나타났다.
○12월 고구려에서 천둥하고 지진(地震)이 있었으며, 객성(客星)이 달을 범(犯)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54)
신라 일성왕 21년, 아달라왕(阿達羅王) 원년, 고구려 차대왕 9년, 백제 개루왕 27년
한(漢)나라 영흥 2년
봄 2월 신라왕 일성(逸聖)이 훙(薨)하고 장자(長子) 아달라(阿達羅)(혹은 아액(阿?)이라고도 한다.)이 즉위(卽位)하였다. 신장(身長)이 7척(尺)이고 콧날이 우뚝하며 골상(骨相)이 기이(奇異)하였다.
○3월 신라에서 계원(繼元)을 이찬(伊飡)으로 삼아 군국 정사(軍國政事)를 맡겼다.
을미년(乙未年; 155)
신라 아달라왕 2년, 고구려 차대왕 10년, 백제 개루왕 28년
한(漢)나라 영수(永壽) 원년
봄 정월 신라왕이 직접 시조묘(始祖廟)에 제사하고,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흥선(興宣)을 일길찬(一吉飡)으로 삼았다.
○정월 그믐 병신(丙申)에 백제에서 일식(日蝕)이 있었다.
○겨울 10월 신라에서 아찬(阿飡) 길선(吉宣)이 반란을 꾀하였다가 일이 탄로되자 백제로 도망하였다. 신라왕이 글을 보내어 돌려보내기를 청하였으나 백제에서 따르지 않았다. 신라왕이 노하여 군사를 보냈으나 백제의 여러 성(城)이 굳게 지키고 나와 싸우지 않았으므로 신라의 군사가 양식이 다하여 되돌아왔다.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춘추(春秋) 때에 거(거)나라의 태자(太子) 복(僕)이 <그 부왕(父王)을 시해(弑害)한 후 보옥(寶玉)을 가지고> 노(魯)나라로 도망쳐 오니, 계문자(季文子)가 말하기를, ?그 임금에게 예의(禮儀)를 갖추는 자를 보면 효자(孝子)가 보모를 공양(供養)하듯 그 임금을 섬기며, 임금에게 무례(無禮)한 자를 보면 그 임금을 죽이기를 마치 매(鷹)가 참새를 쫓듯이 한다. 거나라 태자 복이 행한 일을 보건대 선(善)은 생각지 않고 흉덕(凶德)을 행하고 있으니 이러므로 그를 쫓아버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제 길선도 또한 간사한 도둑인데 백제왕이 받아들여 숨겨두었으니, 이는 이른바 적(賊)을 숨겨주는 자를 장(藏)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웃 나라와의 화친(和親)을 잃고 백성들로 하여금 전쟁으로 인한 병역(兵役)에 시달리게 하였으니 너무 어둡다고 하겠다.?
하였다.
병신년(丙申年; 156)
신라 아달라왕 3년, 고구려 차대왕 11년, 백제 개루왕 29년
한(漢)나라 영수 2년
여름 4월 신라에서 서리가 내렸다.
○신라에서 계립령(계立嶺)의 길을 열었다.
정유년(丁酉年; 157)
신라 아달라왕 4년, 고구려 차대왕 12년, 백제 개루왕 30년
한(漢)나라 영수 3년
봄 2월 신라에서 감물(甘勿)?마산(馬山)의 두 현(縣)을 설치하였다.
○3월 신라왕이 장령진(長嶺鎭)에 가서 수졸(戍卒)을 위로하고 각기 정포(征袍)를 내려주었다.
○신라에서 영일현(迎日縣)을 설치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동해(東海) 물가에서 남편 연오(延烏)가 아내 세오(細烏)와 미역(藻)을 채취하다가 홀연히 표류(漂流)하여 일본국(日本國)의 조그만 섬에 이르러 왕이 되었고, 그 아내 세오도 남편을 찾아 다니다가 또 표류하여 그 나라에 이르러 왕비(王妃)가 되었다. 이때에 신라(新羅)에서는 해와 달에 광채가 없었는데 일자(日者)가 아뢰기를, ?연오와 세오는 해와 달의 정기(精氣)인데 이제 일본으로 갔으므로 이런 변괴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이 돌아오기를 구(求)하니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온 것도 하늘의 명이다.? 라고 하고는 곧이어 세오가 짠 생초(?)를 사신에게 주어 보내면서 ?이로써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이곳을 제천소(祭天所)라 이름하고 영일현(迎日縣)을 삼았다고 하였다.
무술년(戊戌年; 158)
신라 아달라왕 5년, 고구려 차대왕 13년, 백제 개루왕 31년
한(漢)나라 연희(延熹) 원년
봄 2월 고구려에서 혜성(?星)이 북두성(北斗星)의 자리에 나타났다.
○3월 신라에서 죽령(竹嶺)의 길을 열었다.
○왜인(倭人)이 신라에 내빙(來聘)하였다.
○여름 5월 그믐 갑술(甲戌)에 고구려에서 일식(日蝕)이 있었다.
경자년(庚子年; 160)
신라 아달라왕 7년, 고구려 차대왕 15년, 백제 개루왕 33년
한(漢)나라 연희 3년
여름 4월 신라에 폭우(暴雨)가 쏟아져 알천(閼川)이 넘치고, 인가(人家)가 표류(漂流)하였으며, 금성(金城)의 북문(北門)이 무너졌다.
신축년(辛丑年; 161)
신라 아달라왕 8년, 고구려 차대왕 16년, 백제 개루왕 34년
한(漢)나라 연희 4년
가을 7월 신라에서 황충(蝗蟲)이 번져 곡식을 해쳤고, 바다 물고기가 많이 육지로 나와서 죽었다.
임인년(壬寅年; 162)
신라 아달라왕 9년, 고구려 차대왕 17년, 백제 개루왕 35년
한(漢)나라 연희 5년
신라왕이 사도성(沙道城)에 가서 수졸(戍卒)을 위로하였다.
갑진년(甲辰年; 164)
신라 아달라왕 11년, 고구려 차대왕 19년, 백제 개루왕 37년
한(漢)나라 연희 7년
봄 2월 신라 서울에 용(龍)이 나타났다.
을사년(乙巳年; 165)
신라 아달라왕 12년, 고구려 차대왕 20년, 신대왕(新大王) 원년, 백제 개루왕 38년
한(漢)나라 연희 8년
봄 정월 그믐에 고구려에서 일식(日蝕)이 있었다.
○3월 고구려의 전왕(前王) 궁(宮)이 별궁(別宮)에서 훙(薨)하였는데, 나이는 1백 19세였다.
○겨울 10월 고구려 연나부(椽那部) 조의(?衣) 명림답부(明臨答夫)가, 백성들이 학대받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 왕 수성(遂成)을 시해(弑害)하였다. 처음에, 수성이 무도(無道)하였으므로 막내 동생인 백고(伯固)는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산곡(山谷)에 숨어있었는데, 수성이 피살되기에 이르러 좌보(左輔) 어지류(?支留)가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의논한 다음 사람을 보내어 백고를 맞이하였다. 백고가 당도하자 어지류가 국새(國璽)를 바치며 말하기를,
?선군(先君 - 차대왕(次大王)을 말함)에게 비록 아들은 있으나 임무(任務)를 감당할 수 없으니 천심(天心)과 인심(人心)이 모두 지극히 어진분에게 돌아왔습니다. 청컨대 왕위에 오르소서.?
하니, 백고가 세 번 사양한 후에 즉위하였다. 나이는 77세였으며, 수성은 차대왕(次大王)이라고 칭호하였다.
병오년(丙午年; 166)
신라 아달라왕 13년, 고구려 신대왕 2년, 백제 개루왕 39년, 초고왕(肖古王) 원년
한(漢)나라 연희 9년
봄 정월 초하룻날 신해(辛亥)에 신라에서 일식(日蝕)이 있었다.
○고구려왕이 영(令)을 내리기를,
?내가 외람되게도 왕의 지친(至親)으로 태어났으나 본래 임금의 덕망에는 가당치도 않았다. 앞서 형제 간에 정권을 위임한 것은 자손을 위한 큰 계책에 자못 어그러진 것이었다. 나는 해를 입을 것을 걱정하여 멀리가서 숨어있었는데 차대왕의 흉부(凶訃)를 들음에 미쳐 다만 지극히 애통할 뿐이었다. 백성들이 나를 즐겨 추대하고 여러 공경(公卿)들이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할 줄이야 어찌 뜻하였겠는가? 변변치 못한 몸으로 그릇 숭고(崇高)한 자리에 있게 되니 깊은 물에 임(臨)한 듯 해서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다. 마땅히 은혜를 펴서 먼 곳에 미치게 하고 여러 대중(大衆)과 함께 스스로 새롭게 하려고 하니, 나라 안의 죄수를 대사(大赦)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온나라 사람들이 이 영(令)을 듣고 환호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초 명림답부의 난(難) 때 차대왕의 태자(太子) 추안(鄒安)이 도망하였다가 사령(赦令)을 듣고 곧 왕문(王門)에 나아가 고하기를,
?앞서 나라에 화란(禍亂)이 있을 때에 신(臣)이 죽지 못하고 산골짜기로 도망하였습니다. 지금 새로운 정사(政事)를 펴신다는 소식을 듣고 감히 죄로써 고합니다. 만약 대왕께서 법에 의거하여 죄를 정하고 신(臣)을 죽여 저자(市)에 버리더라도 명령에 복종할 것이며, 만약 죽이지 아니하고 먼 곳으로 놓아주신다면 실로 재생(再生)의 은혜가 되겠습니다.?
하니, 왕이 곧 구산뢰(狗山瀨)와 누두곡(婁豆谷) 두 곳을 내려주고 인하여 그를 봉(封)하여 양국군(讓國君)으로 삼았다.
○고구려에서 명림답부를 국상(國相)으로 삼고 패자(沛者)로 승진시켜 안팎의 병마(兵馬)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으며, 겸하여 양맥부락(梁貊部落)을 영솔하게 하였다. 그리고 좌보(左輔)와 우보(右輔)를 고쳐 국상(國相)으로 삼았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분의(分義)는 하늘 땅과 같으니 시역(弑逆)의 적(賊)은 피차(彼此)를 물론하고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의 법에, ?나라 임금으로서 시역자(弑逆者)에게 옹립(擁立)되고 나서도 그 적(賊)을 토벌(討伐)하지 못하면 이도 또한 시역(弑逆)에 참여한 것이 아닌가? 하였으므로 수악(首惡)의 이름을 모면하지 못한다. 지금 명림답부가 수성을 시해하고 백고를 세웠는데, 백고는 당초 산야(山野)에 숨어있어 이 시역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갓 자기를 왕에 옹립한 것을 은덕으로 여기고 임금을 시해한 자를 당연히 토벌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총애하고 신임하여 상국(相國)으로 삼았다. 이는 온나라의 군신(君臣)이 모두 시역(弑逆)의 당(黨)이 되어 삼강(三綱)과 인기(人紀)가 멸하여 없어진 것이다. 만약 백고가 능히 대의(大義)를 펴서 사사로운 공로를 상(賞)주지 않고 시역의 죄를 밝혀서 주벌(朱罰)하였더라면 삼강과 인기가 다시 바로 세워져서 난적(亂賊)이 두려워할 것이니, 비록 한(漢)나라 고제(高帝)가 정공(丁公)을 죽이고, 숙손착(叔孫))이 수우(竪牛)를 쫓아버린 것도 이보다 훌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백고가 이렇게 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하였다.
○백제왕 개루(盖婁)가 훙(薨)하고 그 아들 초고(肖古)가 즉위하였다.
○백제 사람 도미(都彌)는 비록 편호(編戶) 소민(小民)이었으나 자못 의리(義理)를 알았고, 그 아내는 아름답고 절개가 있었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도미를 불러 말하기를,
?무릇 부인(婦人)의 덕(德)은 정결(貞潔)을 우선으로 하지만 만약 은밀한 곳에서 공교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사람의 정리(情理)는 예측할 수 없으나 신(臣)의 아내는 죽더라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시험해 보고자 도미를 일을 핑계로 머무르게 하고, 근신(近臣)으로 하여금 왕으로 꾸미게 한 다음 밤에 그 집을 찾아가서 그 아내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너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들었는데 도미와 더불어 너를 걸고 내기를 하여 내가 이겼다.?
하면서 겁간(劫姦)하려고 하자 그 아내가 말하기를,
?어찌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소서. 첩은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겠습니다.?
하고는 한 계집종을 꾸며서 잠자리를 같이 하게 하였다. 뒤에 왕이 속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애매한 죄를 씌워 두 눈을 뽑아버리고 조그만 배에 실어 강물에 띄웠다. 그리고 다시 그 아내를 데려다가 사통(私通)하려고 하니 그 아내가 말하기를,
?이제 남편이 떠나가고 첩이 스스로 보존할 수가 없는데 감히 왕의 요청을 사절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지금 월경(月事) 중이니 청컨대 다른 날을 기다리소서.?
하니, 왕이 이를 믿고 허락하였다. 이에 도미의 아내가 도망하여 강 어귀에 이르렀으나 건너갈 배가 없었으므로 하늘에 호소하여 통곡하였는데 홀연히 지나가는 배를 만나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니 그 남편이 이미 먼저 가 있었다. 드디어 함께 고구려로 달아났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산산(蒜山) 아래에 거주하게 하니 그곳에서 여생을 바쳤다.
정미년(丁未年; 167)
신라 아달라왕 14년, 고구려 신대왕 3년, 백제 초고왕 2년
한(漢)나라 영강(永康) 원년
가을 7월 백제에서 몰래 군사를 보내어 신라 서쪽 변방의 두 성(城)을 쳐서 깨뜨리고 남녀(男女) 1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8월에 신라왕이 일길찬(一吉飡) 흥선(興宣)에게 명하여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게 하였으며, 또 기병(騎兵) 8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로부터 쳐들어오니 백제에서 크게 두려워하여 사로잡아 간 남녀를 되돌려보내고 화친하기를 간청하였다.
○9월 고구려왕이 졸본(卒本)에 가서 시조묘(始祖廟)에 제사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왕이 졸본으로부터 돌아왔다.
무신년(戊申年; 168)
신라 아달라왕 15년, 고구려 신대왕 4년, 백제 초고왕 3년
한(漢)나라 영제(靈帝) 건녕(建寧) 원년
여름 4월 신라 이찬(伊飡) 계원(繼元)이 졸(卒)하니, 흥선(興宣)을 이찬으로 삼았다.
○한(漢)나라 현도군 태수(玄?郡太守) 경임(耿臨)이 고구려에 침범하여 수백 인을 죽이니, 왕이 항복하고 현도(玄?)에 속(屬)하기를 청하였다.
기유년(己酉年; 169)
신라 아달라왕 16년, 고구려 신대왕 5년, 백제 초고왕 4년
한(漢)나라 건녕 2년
고구려왕이 대가(大加)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 태수(玄?太守)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富山)의 적(賊)을 토벌하게 하였다.
경술년(庚戌年; 170)
신라 아달라왕 17년, 고구려 신대왕 6년, 백제 초고왕 5년
한(漢)나라 건녕 3년
봄 2월 신라에서 시조묘(始祖廟)를 중수(重修)하였다.
○3월 그믐 병인(丙寅)에 백제에서 일식(日蝕)이 있었다.
○가을 7월 신라 서울에서 지진(地震)이 있었고,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겨울 10월 백제에서 신라의 변방을 침범하였다.
신해년(辛亥年; 171)
신라 아달라왕 18년, 고구려 신대왕 7년, 백제 초고왕 6년
한(漢)나라 건녕 4년
봄 신라에 기근(饑饉)이 들었다.
임자년(壬子年; 172)
신라 아달라왕 19년, 고구려 신대왕 8년, 백제 초고왕 7년
한(漢)나라 희평(熹平) 원년
봄 정월 신라에서 구도(仇道)를 파진찬(波珍飡)으로 삼고, 구수혜(仇須兮)를 일길찬(一吉飡)으로 삼았다.
○2월 신라에서 시조묘(始祖廟)에 제사하였다.
○신라 서울에 역질(疫疾)이 크게 유행하였다.
○겨울 10월 한(漢)나라 현도군 태수(玄?郡太守) 경임(耿臨)이 대군(大軍)으로써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하니, 고구려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나가 싸우는 것과 막아 지키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좋을지에 대해 물으니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군사가 많은 무리를 믿고 우리를 업신여기니 만약 우리가 나아가 싸우지 않는다면 저들이 우리를 겁쟁이로 여기고 반드시 자주 쳐들어올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는 산(山)이 험준하고 길이 좁으니, 이는 이른바 한 사람이 관문(關門)을 지키면 1만 사람도 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漢)나라 군사가 비록 많더라도 우리에게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군사를 내어 방어하소서.?
하니, 명림답부(明臨答夫)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한(漢)나라는 크고 백성이 많은데 이제 강병(强兵)으로써 멀리 와서 싸움을 돋우니 그 예봉(銳鋒)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또 군사가 많으면 싸우고 군사가 적으면 지키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병가(兵家)의 상례(常例)입니다. 지금 한(漢)나라 군사는 천리(千里)에 양식을 운반(運搬)하니 그 형세가 반드시 오래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도랑(溝)을 깊이 파고 성루(城壘)를 높이며 들판의 곡식을 깨끗이 비워놓고 기다린다면 열흘이나 한 달을 넘지 못하고 군량이 떨어져 돌아갈 것이니 그때 우리가 강한 병졸로써 추격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 말을 옳게 여겨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한(漢)나라 군사가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또 양식이 떨어져 사졸(士卒)이 굶주리니 마침내 군병을 이끌고 철수하였다. 이에 명림답부가 기병 1천을 거느리고 그 뒤를 쫓아 좌원(坐原)에서 결전하니, 한(漢)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한 필(匹)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좌원과 질산(質山)을 명림답부에게 내려주어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계축년(癸丑年; 173)
신라 아달라왕 20년, 고구려 신대왕 9년, 백제 초고왕 8년
한(漢)나라 희평 2년
왜국(倭國)의 여왕(女王)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어 신라에 빙문(聘問)하였다.
갑인년(甲寅年; 174)
신라 아달라왕 21년, 고구려 신대왕 10년, 백제 초고왕 9년
한(漢)나라 희평 3년
봄 정월 신라에서 흙비(土雨)가 내리고, 2월에는 가뭄이 들어 우물과 샘이 말랐다.
병진년(丙辰年; 176)
신라 아달라왕 23년, 고구려 신대왕 12년, 백제 초고왕 11년
한(漢)나라 희평 5년
봄 정월 고구려에서 여러 신하들이 태자(太子)를 세우도록 청하였는데, 3월에 왕이 장자(長子) 발기(拔奇)는 불초(不肖)하다고 하여 차자(次子) 남무(男武)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무오년(戊午年; 178)
신라 아달라왕 25년, 고구려 신대왕 14년, 백제 초고왕 13년
한(漢)나라 광화(光和) 원년
겨울 10월 그름 병자(丙子)에 고구려에서 일식(日蝕)이 있었다.
기미년(己未年; 179)
신라 아달라왕 26년, 고구려 신대왕 15년, 고국천왕(故國川王) 원년, 백제 초고왕 14년
한(漢)나라 광화 2년
가을 9월 고구려 국상(國相)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졸(卒)하니 나이 1백 13세였다. 왕이 상가(喪家)에 친림(親臨)하여 애통하였고 7일 동안 조회(朝會)를 파(罷)하였으며, 질산(質山)에 예장(禮葬)하고 수묘인(守墓人) 20가(家)를 두었다.
○겨울 12월 고구려왕 백고(伯固)가 훙(薨)하니 고국곡(故國谷)에 장사지내고 신대왕(新大王)이라고 칭호하였다. 태자(太子) 남무(男武)가 즉위(卽位)하였는데 신장(身長)이 9척(尺)이고 용모가 웅위(雄偉)하였으며 힘은 능히 큰 솥을 들어 올렸고 일에 임하여 청단(聽斷)하는 것은 관용(寬容)과 위맹(威猛)이 중도(中道)를 얻었다. 장자(長子) 발기(拔奇)는 맏이로써 즉위하지 못함을 원망하여 소노가(消奴加)와 더불어 각기 하호(下戶) 3만 구(口)를 거느리고 공손강(公孫康)에게 나아가 투항(投降)하였는데 뒤에 도로 비류수(沸流水) 상류(上流)에 와서 거주하였다.
경신년(庚申年; 180)
신라 아달라왕 27년, 고구려 고국천왕 2년, 백제 초고왕 15년
한(漢)나라 광화 3년
봄 2월 고구려왕이 비(妃) 우씨(于氏)를 세워 왕후(王后)를 삼으니, 왕후는 제나부(提那部) 우소(于素)의 딸이었다.
○가을 9월 고구려왕이 졸본(卒本)에 가서 시조묘(始祖廟)에 제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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