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과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지인이 어린 시절에 읽었던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가슴 설레이면서 읽었는데 제목을 잘 모르겠다고 하는데, 들어보니 내용이 딱 도미시마 다케오의 <여인추억>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알려주니 매우 기뻐하며 옥션을 뒤지고 있더라는...
그래서 짧게나마 이 분에 대한 이야기를...
1993년에 나온 문고본 표지들입니다. 분위기로 봐서 왼쪽부터 요시코 아줌마, 다에코, 아키, 묘우미(아케미)인 것 같은데. 7권에 저건 누군지 잘 모르겠군요. 치에 아니면 키쿠인 거 같긴 한데.
사실 저와 비슷한 연배인 남성들 중에 소시적에 <여인추억> 시리즈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텐데요. <여인추억>은 1990년대 초반에 국내에서는 상당한 베스트셀러 소설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이 소설이 출간되었을 당시에는 작가 이름이 '도미시다 다케오'라는 이름으로 나왔었죠. 본래 작가의 이름은 富島健夫(도미시마 다케오)인데 말이죠. 이것은 나중에 <꽃잎>의 번역판에 잠깐 언급되는데 90년대 초반에 나왔던 <여인추억>은 사실은 정식 계약을 하지 않은 해적판이었고, 이 때문에 작가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저자명을 살짝 바꿨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원작인 <여인추억(女人追憶)>은 일곱권에 이르는 초장편 소설입니다. 1981년에 처음 출간된 것이 1990년에 최종권인 7권이 나오면서 완결된 작품인데요. 국내에는 이것이 총 5권으로 편집 재가공되었습니다. 당시의 원작을 읽었던 분의 말에 따르면, 거의 축약의 수준이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적판 <여인추억>은 인터넷이 없어서 손쉽게 야동을 손에 넣을 수 없던 시절에 불끈불끈 하는 남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이것을 계기로 도미시마 다케오의 대표작이 대부분 국내에 번역 출판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정수 님의 말씀에 따르면 1994년경에 나왔던 <여인의 추억>은 <여인추억>과는 관계 없는 <꽃잎>의 축약판으로 역시 해적판이고, 나중에 <여인추억> 6~7권이 역시 해적판으로 다른 제목으로 나온 적이 있다고...)
<여인추억>은 제목처럼 주인공인 마사오(싱고真吾의 오역)가 살아가면서 붕가붕가를 했던 수많은 여성들에 대한 추억을 대하드라마 형식으로 나열한 소설인데요. 당시에도 상당히 많은 야설들이 있었음에도 <여인추억>이 독보적인 인기를 누린 이유는 다른 뽕빨 야설들과 달리 <여인추억>은 체계가 잡힌 스토리텔링과 뛰어난 문학성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게...장르가 야설이어서 그랬지 작품성은 상당히 높았고, 이야기도 매우 흥미로웠죠. 상업성과 작품성, 거기에 붕가붕가를 함께 갖춘 훌륭한 작품이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추억>은 사실 요즘 나오는 청년지 만화보다도 붕가붕가의 강도가 약할 정도인데요.(솔직히 <체리 신드롬>같은 게 더 강도가 쎈 것 같음.-_-) 요즘 나오는 이쪽 계열 소설들은 대부분이 묘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을 설정해놓고, 거기서 여성을 어떻게 하느냐는 그 상황의 묘사에 너무 치중을 하는데요. 사실 그게 훨씬 자극적이고 잘 팔리기 때문에 그런 경향을 띄는 것이겠죠. 그런데 도미시마 다케오나 동시대에 활약한 '단 오니로쿠(団鬼六, <꽃과 뱀>의 작가)'의 소설들은 묘사보다는 전체적인 이야기의 구도와 인물들의 심리묘사에 더 치중하고 있습니다.
<여인추억>의 주인공 마사오의 경우는 그 수많은 여성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각 여성의 타입에 따라서 달라지는 조금은 비겁한 생각들이 보는 이에게 정신적인 쾌감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다 여성들도 타입별로 다 있었고요. 소위 요즘 말하는 츤데레 캐릭터도 완비니까...
작가인 도미시마 다케오는 상당히 복잡한 사정을 가진 작가입니다.
이 작가의 가장 특이한 이력은 해방전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점일 겁니다. 1931년에 조선에서 태어나서 일본이 패전한 1945년에 일본으로 돌아갔으니, 14년 동안 조선에서 살았고 학교도 조선에서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특이한 이력 때문에 문단에서 은근히 배척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와세다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했는데, 대학에 다닐 때부터 소설 쓰는데 흥미가 있어서 당시의 유명 소설가인 니와 후미오의 제자로 들어갔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53년에 <喪家の狗(상가의 개)>라는 소설을 써서 아쿠타카와상 후보에 오르는데, 결국 수상은 하지 못합니다.
일본 근대사를 잘 아시는 분들이라면 눈치를 채셨겠지만, 일제시대 연간에 조선에 넘어와서 살다가 패전때까지 돌아가지 못했던 일본인들은 상당히 비참했습니다. 일본에 친척이 있었다면 모를까, 일본을 떠나서 조선이나 만주 같은 곳에서 태어났다면 둘 중 하나죠. 부모가 관료이거나 일본에서 영 못 살 것 같으니까 이주정책에 따라서 딴 나라로 간 것. 그리고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인들은 귀국할 때 1인당 1,000엔(당시 돈으로는 상당히 큰 돈이긴 했습니다. 지금 가치라면 20만엔 정도)까지만 일본으로 가져갈 수 있었죠. 이런 사정이 있는지라, 아무래도 귀국인이었던 도미시마 다케오의 가족은 그다지 풍족하지 못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아쿠타카와상이 좌절되자 이 사람이 손대기 시작한 건 하이틴 소설이었습니다. 1950~60년대에는 하이틴잡지에 연재되는 소설들이 인기가 높았는데요. 당시만해도 하이틴 소설을 쓴다는 건 작가에게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져서 제대로 된 소설가는 이쪽 장르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미시마 다케오는 그런 금기를 깨고 하이틴 소설을 써서 상당한 인기를 얻습니다.(아마도 돈 때문에 썼을 게 뻔하지만요.)
하이틴 소설로 돈을 조금 벌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1950년대에 상당히 인기가 좋았던 추리 미스테리나 서스펜스 장편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이 썼던 작품 중에 <검은 강>과 <용의자들>은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고 하는군요.
도미시마 다케오가 야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소설가로서 활동한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1970년대에 와서였습니다. 이 사람이 야설을 쓰게 된 계기도 좀 재미있는데요. 당시에 하이틴 소설이나 서스펜스 소설만으로 돈이 잘 안되니까 영화대본에 손을 대기 시작하는데요. 하이틴 소설을 쓰던 사람에게 영화대본을 맡기는 영화사는 거의 없었고, 그래서 당시 핑크무비(약간 강도가 약한 에로영화) 전문 제작사였던 '니카츠' 영화들의 대본을 써주게 되었다고 합니다.(슈오 마사유키, 가네코 슈스케 등의 감독들도 니카츠 출신이죠.) 결국 이것도 돈 때문에 하게 되었던 일인데, 이미 기존문학계에서는 배척 받고 있으니까 신천지인 야설 전문으로 나가보자고 결심을 했던 듯 합니다.
그래서 1970년대부터는 무서운 속도로 야설들을 발표합니다. 우리에게 유명한 <여인추억>이 도미시마 다케오의 야설 집필이 최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쓰여졌던 역작인 셈입니다.
뭐든지 하나를 오래파면 거장으로 인정하는 일본이라는 나라다보니, 1990년대에 이르면 도미시마 다케오는 원로 문학인으로서 상당히 대접을 받았던 듯 합니다.
1998년에 66세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요. 죽고 나서 편집작업이 마무리되어 소설 단행본 세 권이 더 나왔을 정도로 작품 활동에 매진했습니다.
<여인추억>은 붕가붕가가 많이 나오기는 해도 순애물에 가까웠고, 좀 문학작품이라는 느낌이 강했는데요. 이 분의 야설들은 초-중-후기 작품들이 조금 성격이 다릅니다.
초기작들은 좀 상업성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주로 붕가붕가를 하는데 집중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리고 조금 서스펜스 적인 성향도 있고요.
중기작들이 걸작이 많은데요. <여인추억>에서 느낄 수 있듯이 스토리 중심이고, 주인공이 사회의 제도에 반항하는 다크히어로와 같은 이미지가 강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작품의 성격은 순애에 가까운 것이 많고요. 사회적으로 보면 별볼일 없지만 붕가붕가와 여자를 꼬셔서 해방(?) 시켜주는 재능은 슈퍼맨인 놈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좀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경향도 많이 보이고요.(그렇다고 해도 <꽃잎>은 완전히 <육욕완구택배배달인>...같은 구도인데, 나름 시대를 앞서갔다고 봐야 할지도...)
후기작들은 작가 자신이 노쇄해져서 그런 것인지 좀 변태적인 성욕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더군요. 주로 스와핑이나 칸다리즘적인 설정이 많고, 소설로서의 재미보다는 에로시즘을 예술적으로 승화하는데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여인추억>이 붕가붕가만 하는 소설이기는 한데, 그렇게 평가절하를 받을만한 작품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간만에 다시 들춰보니까 문장도 좋고, 소설적인 완성도도 아주 수준 높아요. 야설이라고 문학이 아니라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치탈레 부인의 사랑>도 고전명작인데.
PS. 이 분의 작품을 모은 <도미시마 다케오 전집>(총 22권)이 있다고 하는군요.
PS2. 저는 불량소녀 아키를 가장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옷장씬이 아직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정도라.(그것 못지않게 1권의 목욕씬하고, 3권이었던가에 공원에서 붕가붕가도 만만찮게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요.)
PS3. 언젠가는 완전판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래봐야죠. 결말이 어떻게 되는 건지 좀 궁금합니다. 설마 <돈쥬앙>처럼 온가족에게 자기 씨를 뿌려서 대가족을 만드는 건 아닐 것 같은데...
PS4. 그러고보니 단 오니로쿠의 <꽃과 뱀> 시리즈의 하나가 국내에는 <오욕의 꽃>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근데 역시...<야근병동>이다 <애자매>다 이런 걸 섭렵한 뒤에 다시 보니 너무 강도가 약해서...-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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