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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8월 1일 서울 전투

_______! 2008. 7. 13. 16:36

그림 설명
1887년 8월12일, 대한제국의 성립과 하께 고종황제는 자주적인 입장에서 군제(軍制)를 개편하여 왕권을 강화코자 하였다. 당시 대한제국 시위대 1개 중대 병력은 정위(중대장) 1명, 부참위(소대장) 4명, 정교 1명, 부참교 14명, 병졸 180명 등 총 200명으로 편성되었다.
본 그림은 현재의 서울 세검정 국민학교 자리(총융청)에서 시위대원들이 사격술, 제식훈련, 총검술 등의 군사훈련과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민속씨름을 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1907년 8월 1일 서울 전투

1907년 7월 3일 국내에 <대한매일신보> 편으로 보도된 헤이그 밀사 사건은 국가 전체를 혼
란의 도가니로 몰아갔습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것을 핑계로 친일내각을 이용, 황제의
퇴위를 요구했고, 결국 7월 19일 양위조칙이 내려져 고종황제는 퇴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던 당시 시위 제 2연대 3대대는 궁내부대신 박영효와 공모하여 황제를
직접 보위하며 일본군으로부터의 협박을 완화하고, 실질적인 전쟁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습
니다. 이는 군부대신 이병무에게 탐지되었고, 결국 이들이 움직임을 시작하려던 자정무렵 일
본군 제 51연대 1, 3대대의 동원으로 실패했습니다. 3대대는 경운궁의 각 문을 가로막아 통
행을 막는 한편, 1대대는 시위 2연대 3대대의 본영을 기습포위한 후 병사들의 출동을 사전
저지했던 것이지요.
이후, 당시 2연대 3대대 병사 수명이 탈영하여, 아직까지는 일본군에게 특별한 압력을 받지
않고 외출 및 경계근무를 수행중이던 시위 1연대 3대대 병사 100여명을 선동, 오후경 대대
적인 무장탈영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고종퇴위에 반대하는 시민과 합류, 덕수궁과 경복궁
앞에서 일본 경찰과 산발적인 총격전을 벌이는 한편, 총을 하늘로 치켜들며 군중을 선동하
는 등 격렬한 항일 의지를 보인 후 당일로 모두 본영에 복귀했습니다.
이에 놀란 일본군은 포병 19연대 1개 포대를 동원, 남산 왜성대(현 예장동) 일대에 산포 6문
을 전개하는 한편, 역시 51연대 병력을 동원하여 대한제국 군부청사를 점거하고 용산 육군
병기창을 점령하여 탄약을 인출, 모처에 은닉합니다. 이 과정에서 대한제국군이 그나마 보유
하고 있던 주력장비인 맥심 기관총 6정을 비롯한 중화기 탄약 대부분이 일본군의 손에 넘어
가고, 전시 병사들에게 개인별로 지급되기로 되어 있던 실탄 6백만 발 이상이 모두 일본군
의 관리 하에 들어가게 됨으로서 대한제국군은 실질적으로 전투불능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
니다.
그러나 당시 일제가 집계하기로도 시위 혼성여단 예하 2개 연대의 병력은 총 4900여명으로,
개인적으로 항시 휴대하게 되어 있는 실탄 12~15발 이외에 각 대대의 예비탄약까지 고려한
다면 최대 15만 발 가까운 탄환이 한국군 손에 아직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습니다. 이
들이 조직적인 반항을 시작할 경우, 자칫하면 서울 시내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연대병력
으로는 제대로 맞서기 힘들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에 일본군은 7월 20일부로
일본 한국주차군 평양수비대에서 1개 보병대대를 차출하여 서울의 일본군 병력을 증강시켰
습니다.
시위연대도 상당수의 하사관과 병사들이 병영을 무단 이탈, 무장한 상태로 시위대에 합류하
여 일본 군경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등 치열한 저항을 거듭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사태
는 당시 경무사 김재풍, 군부 군무국장 참장 이희두, 군부 교육국 교무과장 참령 이갑 시위
보병 1연대 3대대장 정위 임재덕이 면직되면서 시위를 방임하던 군경 수뇌진이 교체당한 이
후 진정 국면에 접어들게 됩니다. 쐐기를 박은 것은 다음날이었던 7월 21일의 시종무관 포
병정령 어담 해임이었지요.
이후 일본은 7월 24일 서둘러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여기에 바로 한국군의 해산이
결의되어 있었습니다. 관련한 5개항 비밀각서가 있는데, 이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
다.

1) 육군 1개 대대를 존치하여 황궁수위에 임하고 나머지는 해산할것
2) 군부를 비롯한 육군 관련 관아를 전폐할것
3) 교육을 받은 사관으로서 한국군에 남아야 할 인원을 제외하고 일본군에 부속시켜 교육할

4) 해산한 하사 및 병졸들 중 경찰관 자격이 있는 자는 경찰로 채용하고, 나머지는 실업에
종사시킬 것. 간도 이주 또는 둔전병 전환을 권고.
5) 일본에서는 한국군 사관을 양성하기 위한 상당 설비를 할 것.

이와 더불어 일본군은 보병 12여단을 파견하여 한국군 해산공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
다. 그리고 전국적인 일본군 병력 재배치가 이뤄지고 신형 30년식 소총 6만 정의 추가 공급
이 이루어진 일본군은 일본해군 연합함대 제 2함대의 엄호 하에 7월 31일 본격적인 해산공
작을 시작했습니다.7월 31일 밤, 총리대신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는 주차일본군사령관 하
세가와 대장과 함께 입궐, 군대해산조칙을 순종황제에게 강요하여 반포시켰습니다.
이어 8월 1일 오전 7시, 군부대신은 시위혼성여단장 참장 양성환을 비롯 주요 연대/대대장
및 기병/포병/공병대장을 배속 일본군 군사교관과 함께 일본군 사령관 관저로 소집하여 군
대해산 조칙을 반포하고 오전 10시까지 전 병력을 완전 비무장으로 훈련원 연병장에 집결시
키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오전 10시가 되어도 기병대장 참령 김기선 예하 기병 88여 명을 비롯하여 시위 1연
대 2, 3대대, 2연대 3대대, 공병대, 포병대는 도착했으나 인원이 1천 명을 겨우 넘기는 황당
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특히 시위 1, 2연대의 각 1대대는 아예 소수 인원이나 대대장조차
참석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지요.(2연대 2대대는 근위대대로 변해서 1933년까지 존속됐습
니다.)
결국 12시가 되어서 추가로 도착한 600명 정도의 병력을 포함, 총 1800명 가량의 시위혼성
여단 예하 병력을 데리고 해산식은 치러졌습니다만, 이러는 동안 대한제국군의 처음이자 마
지막 전투인 서울 전투는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10시가 되어도 시위 1연대 1대대장 참령 박승환이 출두하지 않는 것을 수상하게 생각한 군
부대신 이병무는 일본군 고문관과 1연대 하사관 수 명을 함께 박승환 관사로 파견하여 즉시
병력을 인솔하고 나올 것을 독촉했습니다. 그러자 박승환은 그 자리에서 군대해산에 동의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자결했습니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칼로 자기 목을 찔렀다 하고, 대한매일신보나 일본측의 기록에 의하면
휴대하고 있던 독일제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했다고 합니다. 어느 쪽이 정확한지는 모
릅니다.)
그 광경을 본 시위 1연대 하사관 중 특무정교 1명(신원확인 불능)이 그자리에서 울며 자결
하였고, 나머지 하사관들은 격분하며 관사를 나와 "박참령이 자결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1연대 소대장 부위 남상덕이 "대대장과 함께 죽자!"라고 외치며 군사들을 지휘
하여 일본 교관진에게 총격을 가했습니다. 이것이 8월 1일 서울 전투의 서막이었습니다.
한편, 대대장을 따라 훈련원으로 갈 준비를 하던 중 이 치열한 총성을 들은 시위 2연대 참
령 오의선이 군도를 뽑아들며 "앉아서 무장해제를 당할 수는 없다. 1연대가 궐기했으니 우
리도 싸우자!"고 외쳤고, 대대원들 역시 이에 적극 호응하여 "1연대가 궐기했다!"고 외치며
영내로 난입, 마침 무기고를 점검하며 탄약을 반출하던 일본군을 발견, 육탄으로 그들과 난
투극을 벌이며 마침내 총과 탄약을 회수하고 바로 거리로 뛰쳐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들 시위 1, 2연대의 각 1대대 병력은 거리에서 합류, 2연대 참령 오의선, 정위 권중협, 소
대장들인 참위 남상덕. 장세정, 노덕세, 이준영, 이한승, 그리고 무관학교 3학년 생도로서 소
대장 견습차 파견되어 있던 견습참위 이충순 등 3명, 특무정교 다수의 지휘 하에 전투를 개
시했습니다.
이에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일본군은 오전 10시 20분 2연대 1대대 주둔지를 향해 51연대 3
대대 병력과 남대문 위병 등, 그리고 호치키스 기관총 3정을 투입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한편 51연대 1대대와 2대대는 서소문 위병들과 더불어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시위 1연대 1
대대 주둔지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차 공격은 아직 실탄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던 시위 1, 2연대 각 대대의 치열한 반
격에 공격이 돈좌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일본군은 추가로 시위 2연대 병영 가
까이에 있던 남대문 위에서 기관총 2정을 추가 거치, 영내에 집중 총격을 퍼붓는 것과 동시
에 51연대 3대대 중대장이 손수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병영으로 돌입, 육탄 폭파를 가하는
맹공을 펼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 51연대 3대대 중대장 1명이 한국군의 총화에 휩쓸
려 무참히 전사하였고, 육탄돌격에 가담한 특무상사 등 하사관 3명이 중상을 입는 등 피해
가 속출했습니다.
그러나 한국군은 2차례 이상 남대문 방향으로 진출하여 통감부를 습격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에 전진을 매번 포기해야 했고, 일본군의 지속적인 공격에 뒤이어 증강된 2개
연대의 일본군에 맞서면서 보유한 그 적은 탄약마저 거의 소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는 동
안에도 훈련원에서 해산된 병사들 상당수는 울분을 터뜨리며 봉기를 일으킨 시위 1, 2연대
에 연거푸 합류해 왔습니다.
그리고 정오를 조금 넘겨 12시 30분이 되었을 때, 마침내 시위 1, 2연대 1대대는 병영을 포
기하고 서울 시내로 흩어져 시가전을 개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탄약이 없었던 그들은 도무
지 제대로 저항을 시도할 수 없었고, 그날 밤 11시까지 전투는 일단락되었습니다.

8월 1일 전투 당시 간부로서 확인된 전사자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령? 오의선(전 2연대 1대대 중대장, 당시 2연대 1대대장 대리?)
정위 권중협(1연대 1대대 중대장)
참위 장세정, 노덕세, 이준영, 이규병, 이한승, 남상덕(견습?)
특무정교 김순석, 고희정
견습소대장 이충순, 백보용

영관장교 1명, 위관장교 7명, 특무정교(원사) 2명, 견습소대장 2명. 계 12명

이외에 매천야록에는 우리쪽 군사 96명이 죽고 다쳤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일본측의 기록은
가지각색이나 한국군에 약 200명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투결과 포
로로 잡힌 한국군은 500명에 달했습니다. 약 3~400명 정도의 한국군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
끝내 의병에 합류해서 1909년까지도 의병투쟁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군의 사상자는 중대장 대위 1명 포함 10여 명, 부상자 포함 60명 가량의 인
명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중대장은 러일전쟁때 "도깨비 중대장"이라는 별
명을 얻은 용맹한 인물이었다고 하는군요.

후일 전투를 관전한 서울 시민 및 미국인 에비슨(Avison, 알렌과 더불어 연희-세브란스대를
창립한 선교사 겸 의사) 박사는 "한국군이 탄약만 많았다면 이겼을 것이다"라고 술회했으며,
전투중에 이화학당 학생 및 제중원의 의과학생들과 더불어 전지를 드나들며 부상자를 구출,
치료했으며, 이들은 대부분 일본군의 마수를 피해 의병진영에 합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박승환 선생(1869.9.7 - 1907.8.1)
서울 반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지용이 뛰어나 군대에 복무한 지 10여년에 육군 참령으로 승진하였다. 1895.10.8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인들에게 보복하고자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 1907. 7.19 일제가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양위 시킬때도 그는 궁중에서 거사하여 이를 제지코자 하였으나 화가 황제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중단하였다.
일제는 고종을 강제 양위 시킨후 대한제국을 완전히 식민지로 병탄하기 위한 준비조치로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을 추진하였다.
동년 8월 1일 새벽에 일제는 통감관저인 대관정에 대한제국 군대의 각 연대장과 대대장을 모아 놓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다."는 순종의 조칙을 낭독하고 군대해산식을 거행하겠으니, 오전 10시에 부대를 훈련원에 무기를 휴대하지 말고 집합시킬 것을 군부대신 이병무에게 명령하였다.
대한제국 장병들은 1909. 8. 1 오전 10시 폭우가 쏟아지는 속에서 곡절도 모르고 훈련원에 집합하니 무장한 일본군 보병과 기병이 포위한 가운데 일본군과 대한제국 군 수뇌들이 늘어서서 해산을 명해 은사금을 주며 각자 자기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그제서야 집합한 까닭을 알고 통곡을 하며 은사금을 땅에 던지는 등 비분강개 했으나 맨손으로 어쩔 수가 없었다.
대한 제국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있던 참령 박승환은 병을 칭탁하고 대관정의 모임에 나가 않고 중대장을 대리로 내보냈는데 군대해산의 명을 전해 듣고 크게 분개하여 몇 자의 유서를 쓰고 "대한제국 만세"를 외친 다음 차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그의 유서에는 "군인이 능히 나라를 지키니 못하고 신하가 능히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를 보고 있던 장병들이 대대장의 자결을 온 부대에 전하니 부대 장병들이 분기 격발하여 바로 탄약창고를 부수고 탄환을 꺼내와 무장봉기하였다.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며 전투에 들어가게 되고 전투후에 상당수가 의병을 전환하게 되었다.
박승환은 자결하여 대한제국 최후의 군인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군대 봉기에 의한 의병활동의 대대적인 파급의 전기를 만들어 준 위대한 순국을 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뜻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