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감상하는 데는 여러 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만, 그 중 하나는 칼몸(도신刀身)과 손잡이를 고정하는 방식을 보는 것입니다. 일본의 카타나打刀와 조선의 환도環刀는 기본적으로 칼몸에 뚫린 구멍을 통해 고정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만, 실제로 어떻게 고정하느냐에 대해서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카타나의 경우, 메쿠기目釘라고 불리는 작은 대나무 정을 꽂아넣어서 고정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로 만든 손잡이에 이를 꽂아넣기 위한 작은 구멍이 하나 있게 되는데, 이를 목정혈目釘穴이라고 하지요. 칼을 잡았을 때 손으로 만져지지는 않습니다. 일본도를 손질하는 도구 중에는 메쿠기를 빼고 박는 데 쓰는 메쿠기누키라고 해서 작은 망치도 하나 있는데, 이걸 쓰면 어렵지 않게 칼을 해체할 수 있기 때문에, 칼의 손잡이 부속품 등을 자기 마음대로 바꿔서 커스터마이징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메쿠기 교체 동영상(Youtube). 메쿠기누키를 사용하는 방법을 볼 수 있다.
반면, 조선 환도의 경우 유소혈流蘇穴이라는 작은 금속 원통을 박아넣어서 고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매듭 장식을 끼워넣어서 마무리를 하게 되지요.(유소혈의 유소라는 말 자체가 이러한 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칼 손잡이 위에 살짝 튀어나와 있기 때문에 만져보면 유소혈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해체 따위는 생각하지 않은 구조입니다. 커스터마이징 따위는 물 건너갔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조선시대의 별운검 손잡이. 고려대학교 소장.
이러한 차이점이 생기게 된 이유는 이 칼들의 태생에 기인합니다. 일본도의 대표적인 형식인 카타나는 지방 분권적 사회에서 사용하는 양손칼입니다. 내전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사회에서 칼이란 각 지방의 장인이 만들어 판매되는 상품입니다. 무사의 필수품인만큼 사용자의 취향 같은 것을 고려할 필요 또한 있습니다 - 조립만 할 줄 안다면, 마음에 드는 부품들을 사다 온라인 게임 캐릭터 꾸미듯이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양손으로 칼을 쓰는 만큼, 칼날을 고정하는 부품이 손잡이에 튀어나와 있으면 곤란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조선 환도의 경우, 태생 자체가 중앙 집권적 사회에서 탄생한 한손칼이죠. 이런 사회에서는 칼과 같은 병장기란 기본적으로 국가에서 생산해서 보급해주는 군수품입니다. 군수품 주제에 개인의 취향 따위를 고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매뉴얼 대로 만들어서 쓰다가 망가지면 그냥 정비소에 보내는 수 밖에요. 게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대형화되기 전, 환도는 한 손으로 쓰는 칼이었습니다. 그러니 길이도 좀 짧고, 손잡이 위에 유소혈이 튀어나와 있어도 문제가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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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5일부터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칼, 실용과 상징" 이라는 전시회를 열고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과 경인미술관이 수집한 조선 환도를 중심으로 한 전시회인데요, 이만한 수준의 전시는 아마도 몇 년 동안 만날 일이 전혀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일본의 도검 박물관에 전혀 꿀리지 않는 전시더군요.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만, 코너마다 컨셉을 줘서 아주 세심하게 배열해 놓은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환도의 변천사에서 빼먹을 수 없는 요소가 바로 일본도의 영향입니다. 이웃 나라에 워낙에 걸출한 도검이 있는 데다가 오랜 전쟁으로 인해 닮아갈 수밖에 없었던 탓이 큰데, 이번 전시에서도 그러한 점을 잘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특히 전시실 한 귀퉁이에 함께 놓은 네 자루의 칼은 일본도의 영향을 완연히 보여 주는 칼들이더군요. 심지어 그 중 한 자루는 옻칠한 칼집 위에 금가루를 뿌려 장식하는 마키에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기도 했습니다. 흥미를 가져서 잘 살펴보니, 유소혈과 목정혈이 함께 나타나는 칼이 생각보다 많이 있더군요. 한일 양국의 문화적 교류를 보여 주는 흥미로운 자료들이라 생각합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은 월요일과 국경일은 쉽니다만, 지하철 6호선을 타면 쉽게 갈 수 있으니 칼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꼭 한 번 가서 관람하시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2009년 1월 18일 까지니까 며칠 안남았군요. 운이 좋으면 큐레이터 분의 안내를 받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회전초밥을 사 주신다면 제가 대신 가서 안내해드릴 용의도 있습니다. :D
* 주의사항: 전시회 도록(\35,000)이 몇 권 안 남았음. 이 역시 육군박물관의 조선 도검 도록 이래 최고의 수준이라 확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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