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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풍경 2009 도시를 기억하다] <10> 영도(선창)

_______! 2009. 4. 6. 03:17
부산일보

[부산풍경 2009 도시를 기억하다] <10> 영도(선창)

기사입력 2009-03-14 09:12 기사원문보기

고단한 군상 부둥켜안은 넉넉한 섬

 



1917년 스탠다드석유회사의 유조선이 절영도 대풍포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기름을 내리고 출항하는 날 새벽, 두 청년이 몰래 배 안으로 들어왔다. 미국으로 밀항하려던 두 청년의 시도는 출항 직전 선내 검색에서 발각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밀항미수사건은 신문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됐는데, 두 청년 중 한 명이 현명건. 영도다리를 건너자 마자 보이는 노래비의 주인공인 가수 현인의 아버지다. 뒤에 현명건은 이 회사의 사무원으로 취직이 됐고, 현인도 영도와는 뗄레야 뗄수 없는 인연이 겹쳐졌다. 현명건에게 그러했듯, 영도는 가지 못한 바다 건너 세상에 대한 환상이 있는 곳이다.

"맑은 비린내가 아니라 기름내 나는 비린내예요. 열심히 손에 기름을 묻혀가며 기름밥 먹는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지요"


매립을 통해 성장해 온 땅

현인 노래비를 뒤로 하고 영도로 들어갔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영도에서 두 번째로 매립된 곳이에요." 김재승 해양대 겸임교수와 함께 부산은행 영도지점까지 걸었다. 은행 모퉁이에 영선동패총(조개무지)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비석이 보인다. 대교동 4거리 이곳까지 바다였던 거다. "교량만 놓으면 공사비가 많이 들어가니까 영도다리 쪽으로 달아내면서 매립을 했던 거죠."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사쓰마(가고시마의 옛 지명) 수군들이 군선을 숨기기 위해 해안을 준설해 포구로 만들었던 사쓰마보리도 일제강점기에 매립을 했던 곳이다. 현명건이 바다를 건너려 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고, 화해와 교류의 상징인 절영도왜관이 있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현인의 아버지가 일했던 스탠다드석유회사의 석유저장소가 남항동 대동대교맨션으로 변한 것처럼 김환기 이중섭이 한때 도기에 그림을 그리면서 생계를 이었던 조선경질도자기회사(대한도기)도 봉래동 미광마린타워란 아파트로 변했다.

땅의 매립뿐 아니라 영도는 '인구의 매립'을 통해 성장한 섬이다. 단발령 이후 말꼬리로 만들던 갓의 수요가 줄면서 제주도 사람들도 생존을 위해 바다를 건너 영도로 왔던 거다.

기름내 쇳내 비린내 뒤엉킨 건강한 터전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영도다리 아래 선창가에선 기름내가 확 풍겼다. 개발의 훈풍으로 말쑥해진 해운대해수욕장의 향긋한 분냄새도, 파닥거리는 자갈치시장의 비린내와도 또 다르다. "맑은 비린내가 아니라 기름내 나는 비린내예요. 기름때에 절은 작업복을 입고 열심히 손에 기름을 묻혀가며 기름밥 먹는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지요." 영도에서 성장한 김수우 시인의 말이다.

소설가 조갑상은 이곳에서 철 냄새를 먼저 맡았다. '대평동과 남항동 해변은 철 냄새가 난다. 전기, 냉동, 엔진, 스크류, 페인트 상가들이 골목을 잇고 있다. 여기저기 공장에서 용접불꽃이 파랗게 일며 길바닥은 쇠똥이 씻기지 않아 불그레 하다'(조갑상 '이야기를 걷다' 중에서)

영도다리 아래로 큰 배가 지나가자 선창에 묶여있던 배들이 서로 몸을 비벼댄다. "고무타이어 부딪히는 소리가 소들이 서로 몸을 부비는 소리를 닮았어요." 고무타이어를 부딪는 배 이름이 '태평양'이다. "안전한 항구에 정박해 있지만 끊임없이 항해의 꿈을 꾸는 거죠." 김수우 시인의 말처럼 선창에는 땅도 아니고 바다도 아닌 어쩡쩡한 매립지란 특성만큼이나 땅에서 쉬지도 못하고 바다를 항해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배들도 많았다.

'선상포장마차'란 간판을 내건 바지선 한 척. 바지선 바닥은 시멘트로 깔았고, 천막 위론 땔감으로 불을 때는 난로 연통이 T자형으로 쭉 올라와 있는 게 오래된 집의 풍경을 보는 것 같다. '꼼장어'를 구워주는 여사장은 "우리 아저씨가 바지선을 6척 갖고 있다가 IMF를 겪으면서 1척밖에 안 남았어요. 원목 싣고 다니던 바지선을 고쳐서 포장마차로 만들었어요."

선창에 정박해 있는 배들 중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당장이라도 바다가 아니라 하늘을 날 것 같은 배 한 척을 발견했다. 페인트 칠을 하려고 색을 다 벗겨냈지만, 수리비가 없어 몇 년 째 묶여 있는 배다.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오는 산신령이 살아요. 바지선에서 낚시로 잡은 물고기를 팔아서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한데요." 그러고보니 영도엔 산신령이 살 법한 마을 이름이 많다. 신선동, 영선동, 봉래동, 청학동….

기독교 천주교 천리교 들어선 공존의 공간

부산대교 아래쪽으로 해서 봉래동으로 들어서자 낡고 오래된 적산가옥들이 도열하고 있다. 한때 사창가였던 곳이다.

한 식당 옆에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다는 작은 돌부처 하나가 보인다. "일본에서 오신 분이래요. 집도 없이 '지장보살 할매'(돌부처) 혼자 비를 맞고 있어서 비라도 피하시라고 3년 전에 유리관 안에 모셔둔 거예요. 사람들이 효험이 있다고 코를 문질러대서 코가 없어졌어요." 반공내(68) 할머니의 말이다.

철학자 이지훈이 옆에서 일러준다. "지장보살은 남성인데 해안가로만 오면 여성으로 변해요. 이렇게 길모퉁이나 마을입구에 지장보살을 세우는 건 일본식 풍습이에요. 우리네 장승의 역할과 비슷하지요."

일본에서 온 돌부처도 감싸안는 할머니의 손길처럼 영도는 포용력이 큰 섬이란 생각이 들었다. "영도는 엄청나게 종교적인 섬이에요. 부산서 처음 교회가 생긴 곳도 영도였고, 영도의 첫 주민도 박해를 피해온 천주교 신자였고, 일본 천리교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최고의 여성신인 마조사당도 영도 홈플러스 앞에 있더라고요."

삶의 터전이자 죽음의 장소, 갯가 사람들은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바다를 겪으며 온갖 것들을 품에 안았던 거다.

언뜻 든 생각이 이랬다. 어정쩡한 매립지의 특성은 어찌보면 두 배의 가능성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바다를 항해하지도 땅에서 휴식을 취하지도 못하는 바지선이지만 선상포장마차로 재생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부산을 압축해 보여주는 '꽃그림자 섬'

"신숙주가 해동제국기에서 절영도의 영자를 그림자 영(影)이 아니라 꽃부리 영(英)으로 썼어요. 꽃과 그늘이 함께 공존하는 거지요. '꽃그림자'에요." 이지훈의 말처럼 '꽃그림자' 섬은 부산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였다. 낡고 투박한 풍경이지만 그걸 새로운 미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도 보았다. -끝-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