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강 고대국어(1)
1. 고조선
(1) 우리 민족의 역사는 고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우리 민족의 조상은 오늘의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었음
(2)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언어에 대한 기록이 적어 그때의 상황을 정확히 알기 어려우며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서에 의해 추측할 따름
(3) 고조선의 언어 자료는 ‘檀君, 王儉, 朝鮮, 阿斯達’ 등 한자 표기로 전하는 이름뿐이나 이들이 문자로 기록된 시기는 훨씬 후대의 일이라 이 이름들이 얼마나 오랜 전통을 가졌는지는 증명할 도리가 없음
2. 부여계 제어
(1) 3세기경의 중국 측 사료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으로 기원 전후의 한반도의 언어 상태를 추정해 보면 肅愼계, 부여계, 한계의 3대 어군이 있었던 것으로 보임
(2) 부여계 제어에는 부여어, 고구려어, 옥저어, 예어 등이 있음
(3)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고구려의 언어는 부여와 같고 옥저와 예의 언어는 고구려와 같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부여, 고구려, 옥저, 예의 언어는 서로 매우 비슷했던 것으로 추측됨
(4) 이와 유사한 기록은 5세기의 문헌인 <후한서> 동이전 등에서도 발견되며 이것은 이들 언어를 포괄하는 한 어군의 수립을 가능케 함
(5) 고대 肅愼의 언어와의 대립 - 읍루는 숙신계의 후예로 말갈에 그 계통이 이어지는데 이들의 언어와 부여계 제어의 구별은 중국 측 사적에 일관되게 나타남.
(6) 肅愼族은 여진족의 선조라기보다 퉁구스족의 어느 선조였다고 추측되며 그 언어가 퉁구스 어군의 고대 단계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중국 측 사적이 숙신계 언어와 부여계 언어의 차이를 명기하고 있는 사실은 중대한 의미. 부여계 언어가 고대에 이미 퉁구스 제어와는 확연히 구별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사실로 볼 수 있기 때문
(7) 부여계 제어는 뒤에 고구려어에 의해 대표됨
(8) 부여어, 옥저어, 예어 등은 거의 자료를 남기지 않고 고구려어 속에 흡수됨
3. 한계 제어
(1) 삼한, 즉 진한, 마한, 변한은 한반도의 남쪽에 치우쳐 있으면서 다시 여러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음
(2) 이 중 50여국의 이름이 기록되어 전하는데 적지 않은 이름에 ‘卑離’가 나타남. 이 ‘비리’는 백제의 지명에 보이는 ‘夫里’(부리), 신라 지명에 보이는 ‘伐’ 또는 ‘火’(블)와 같은 것으로 사람들이 모여 산 거주지를 뜻하는 말이었던 듯함
(3) 진한, 마한, 변한의 언어에는 차이가 있었던 듯하며 이 韓族社會는 후에 백제, 가야, 신라로 이어짐
4. 고구려어
(1) 고구려어는 적으나마 현전 자료를 가진 유일한 부여계 언어로 고구려어에 대한 연구는 고구려어뿐 아니라 북방 부여계 제어 전체를 밝혀줄 것
(2) 자료
① <삼국사기> 지리지 권37의 지명표기 (권35는 보조 자료)
“買忽 一云 水城”과 같이 하나의 지명에 대하여 음독명과 석독명이 나란히 기록되어 있음
“買忽”은 음독명이고 “水城”은 석독명
이는 고구려어에서 ‘水’의 새김이 ‘매’였고 ‘城’의 새김인 ‘홀’이었음을 의미
② 중국측 사료 : <삼국지> 위지 동이전
③ 일본측 사료 : <일본서기> 권24
(3) 고구려어 명사를 중세국어 및 신라어, 퉁구스어, 일본어 등과 비교해 보면 고구려어가 신라어 및 중세국어와 매우 가까우며 퉁구스어, 일본어와도 가까운 일면이 있음을 보여줌
5. 백제어
(1) 백제는 부여계의 한 갈래가 지금의 서울 부근의 한강 유역에 세운 나라이며 이때에는 고구려어와 같은 부여계의 한 언어를 말했을 것으로 추측됨. 그 뒤 백제는 마한을 통합하여 나라의 기초를 확립하고 5세기에는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그 뒤 다시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함
(2) 지배족은 부여계의 언어를 사용하고 피지배족은 마한계의 언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
(3) 현전하는 백제어 자료는 고구려어 자료보다 더 적음
(4) 자료 : <삼국사기> 지리지 권37의 기록에도 백제 지명은 음독명과 석독명을 함께 보여주는 자료가 드물어 주로 권36의 지명표기를 이용
(5) 백제 지명의 특징 - ‘夫里’ : 신라 지명에 자주 보이는 ‘伐’ 또는 ‘火’(블)와 같은 것으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의미한 것으로 추정됨
(6) 백제어는 어말 모음을 보존하려는 경향 : ‘곰’(熊)에 대응되는 ‘고마’는 백제어의 잔영
(7) 백제어의 어휘는 신라어 및 중세국어와 많이 같았던 것으로 추측되나 신라어나 중세국어에서 발견할 수 없는 특이한 단어들도 있었음 : ‘城’을 의미하는 ‘己’, 임금을 의미하는 ‘*기’ 등
제8강 고대국어(2)
1. 신라어의 자료
(1) 내외의 역사책에 나오는 고유명사 표기
①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실린 인명, 지명, 관명 등이 주가 되고 중국, 일본의 역사책들도 간혹 참고 됨.
② 특히 어떤 한 인명, 지명, 관명 등에 대해 음독 표기와 석독 표기가 아울러 행해진 경우 자료로서 가치 있음
(2) 이두 자료
(3) 향찰 자료 :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 14수
(4) 중국 역사책 <梁書> : ‘新羅傳’에 신라어의 몇 단어 나타남
(5) 고대 일본어에 들어간 차용어
(6) 우리나라의 전통적 한자음(東音)
2. 신라어의 표기법
- 신라어의 표기법에 대한 연구에서 부딪히는 문제점
① 현존 자료로는 그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점
② 음독자와 석독자를 가리기 어려운 점
③ 음독자나 석독자에 대해 그 음이나 석을 정확히 재구하기 어려운 점
(1) 음독 표기
① 신라 시대 음독자들의 용법은 체계적이었으며 고유명사 표기에서 향찰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일관됨
② 신라어의 표기에 사용된 음독자들이 고구려어나 백제어의 표기에 사용된 것들과 대체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고대 일본어의 표기에 사용된 음독자들과도 광범한 일치를 보여줌
③ 음독자들의 예
阿 - ‘아’
伊 - ‘이’
乃 奈 那 - ‘나’
羅 - ‘라’
多 - ‘다’
閼 - ‘알’
干 - ‘간’
翰 - ‘한’
發 - ‘발’
密 - ‘밀’
良 - ‘라’ 및 ‘아/어’
旀 - ‘-며’
遣 - ‘-고’
尸 - ‘ㄹ’
叱 - ‘ㅅ’
只 - ‘기’
(2) 석독 표기
① 석독 표기에 사용된 한자는 그 음으로 읽지 않고 새김(釋, 訓)으로 읽음
② 한자의 새김은 매우 보수적이어서 고대의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예가 많으므로 중세 자료를 검토하여 그 토대 위에서 고대의 새김을 재구하는 방법을 취하는데, 한자의 새김에서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여 개신이 일어나므로 중세의 새김을 토대로 한 재구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
(3) 혼합 표기
① 문장 표기에서는 음독 표기와 석독 표기가 혼합되어 쓰임이 원칙으로 향가의 표기인 향찰은 이런 혼합 표기의 전형적 모습을 보임
② 혼합 표기법의 특징
㉮ 체언이나 용언의 어간을 석독자로 표기하고 조사나 어미는 음독자로 표기
㉯ 체언이나 용언의 어간을 표기할 때 석독자 밑에 그 제2음절이나 끝 자음을 나타내는 음독자를 덧붙임
3. 신라어의 음운
(1) 자음 체계
① 신라어의 자음 체계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유기음 계열과 된소리 계열이 있었을까 하는 것
㉮ 중국 중고음의 전탁자가 한국 한자음에 평음으로 반영된 것으로 보아 아직 이 시기의 국어에 된소리 계열은 없었을 것
㉯ 중국 중고음의 차청자가 일부는 유기음으로 대부분은 평음으로 반영된 것으로 보아 신라어에 유기음이 있었다 해도 매우 미약했을 것
② 유성 마찰음 계열 - 중세국어에 존재했던 유성 마찰음 ‘ㅸ’, ‘ㅿ’ 등이 고대국어의 어떤 음으로 소급하는가 하는 문제
③ 음절말 자음 - 음절말 자음의 내파화가 고대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음
㉮ ‘ㅅ, ㅈ’을 비롯한 모든 자음이 음절말 위치에서도 제대로의 음가를 가지고 있었음
㉯ 고대국어의 유음에 *r, *l이 있었을 가능성이 큼
(2) 모음 체계와 모음조화
① 고대국어의 모음 체계 재구에는 문제가 있음
② 한편으로는 전기 중세국어의 모음 체계를 토대로 하여 그것으로부터 고대국어의 모음 체계에 소급하는 과정을 재구하고, 다른 편으로는 고대의 표기 체계와 한자음을 검토하여 그 합치점을 찾는 것이 가장 온당한 방법이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함
③ 고대국어도 전기 중세국어와 마찬가지로 7모음 체계였던 것으로 생각되나 각 모음의 음가가 다 같았던 것은 아님
④ 현존 고대국어 자료는 모음조화의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지 않는데 이를 바탕으로 고대국어에 모음조화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중세국어와 근대국어에서 이른 시기로 올라갈수록 모음조화가 강했음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고대국어에는 매우 엄격한 모음조화가 존재했다는 추론이 가능해짐
⑤ 후설모음과 전설모음의 양 계열로 된 이른바 구개적 조화였던 것으로 추정
⑥ 고대국어에서도 ‘이’는 중성모음이었을 것으로 추측
(3) 모음 간 ‘ㄷ’과 ‘ㄹ’의 변화
① 모음 사이에 ‘ㄷ’을 가졌던 단어 : 바(海), (一日), 가(脚)
- 후에 ‘ㄷ’이 ‘ㄹ’로 변함
② 모음 사이에 ‘ㄹ’을 가졌던 단어 : 나리(川), 모리(山), 니림(主)
- 후에 ‘ㄹ’이 탈락함
(4) 한자음
① 우리나라의 한자음은 중국이나 일본과 다르며 이 한국 한자음을 동음(東音)이라 부르는데 이는 신라 시대에 전반적으로 확립되어 있었음
② 한국 한자음에서는 중국의 상고음 또는 중고음의 입성 운미 중 ‘-t’를 ‘ㄹ’로 발음함
③ 한국 한자음의 모태가 된 중국음이 어느 시기의 어떤 방언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
4. 신라어의 문법
(1) 격조사
① 주격 : 伊, 是(-이)
② 속격 : 矣, 衣(-의), 叱(-ㅅ)
③ 처격 : 中, 良, 良中
④ 대격 : 乙(-을), 肹(-흘)
⑤ 조격 : 留(-루)
(2) 용언의 활용
① 동명사 어미 : 尸(-ㄹ), 隱(-ㄴ)
② 부동사 어미 : 良(-라), 米(-매), 旀(-며), 如何(-다가), 遣, 古(-고)
③ 정동사 어미 : 如(-다), 羅(-라), 古(-고), 齊(-져)
(3) 경어법 : 향가에서 분명히 확인되는 것은 존경법과 겸양법
① 존경법 : ‘賜’(시)자로 표시
② 겸양법 : ‘白’()자로 표시
③ 공손법 : 향가에서는 확인되지 않음
5. 신라어의 어휘
(1) 수사
① 신라어의 수사는 중세국어와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나 신라어 자료에서 확인되는 수사는 많지 않음
② 1 : 一等隱, 一等 -
2 : 二肹, 二尸 - 두
3 : 서리
4 : 너리
千 : 즈믄
(2) 왕호 및 관명
① 시조로부터 22대 智證麻立干까지 왕에 대하여 ‘次次雄, 尼師今, 麻立干’ 등의 칭호가 사용됨
② 순수한 신라어로 된 관직명이 사용됨
(3) 한자어
① 본래 신라어로 된 임금의 칭호가 사용되다가 6세기 초인 지증마립간 때에 와서 ‘王’이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8세기 중엽 경덕왕 때(757)에 이르러 지명을 중국식으로 고침
② 한자로 된 왕호 및 지명의 개신은 국어 語彙史상 가장 큰 인위적 변혁의 시초로서 오늘날 인명, 지명, 관명 등이 한자어 일색이 된 원류가 됨
③ 국어와 중국어의 접촉은 국어 어휘에 막대한 한자어를 침투시킴. 펌
070808 새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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