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 과연 환호할 만한 영화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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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 어떻게 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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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5 / 강유정(영화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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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고 탈 많았던 영화 <보랏>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박스오피스에서 거둔 성공과 원근각지에서 일으킨 스캔들로 바람 잘 날 없었던 사고뭉치 영화. 영화평론가 강유정이 <보랏>을 비판적인 시선에서 분석한다. 아마도 이 영화는 극명한 찬반논란을 불어일으킬 텐데, 이어질 또 다른 시각의 글 역시 미리 기대해본다. (편집자 주)
한 작품을 관람 혹은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니 질문을 바꿔보자. 영화를 보는 데 정치적 태도라든가 철학적 준비 같은 것이 필요할까?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영화가 어떤 영화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키에슬롭스키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볼 때는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반성, 성찰, 철학, 정치와 같은 용어들을 끄집어내 미리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코미디영화는 어떨까? 대개 코미디영화는 정치적이며 편파적인 코드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비정치적이며 비철학적인 관객의 태도를 요구한다. 코미디영화의 제1계명이 '웃어라'이며 그것도 '맘껏 웃으려면 머리를 비워라'라면 이 계명의 속뜻은 '당신의 편견과 선입관에 최대한 많은 공간을 양보해라'로 받아들여진다. 화장실 유머, 성적 소수자를 차별의 대상으로 짓밟는 농담, 노인에 대한 학대에 가까운 경멸, 여성의 성적 도구화와 같은 무시무시한 일들이 코미디영화에서는 별일 아닌 우스갯거리 정도로 차용되곤 한다. 물론, 관객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철학적 태도를 완전히 무장해제 했을 때, 단 그때 가능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웃기기만 한다면 그것의 질적 내용이나 품위는 관계가 없는가? 웃기기 위해 여선생의 젖가슴을 거의 다 드러내고, 웃기기 위해서라면 부모를 모욕해도 되는가? 저질 코미디와 고급스러운 상황극 혹은 언어유희가 어떻게 같은 수준으로 향유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 말이다. 이런 질문은 예상 가능한 두 가지 답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코미디는 웃기면 된다와 코미디라도 웃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라는 대답 말이다. 여기 이 오래 묵은 질문을 또 한 번 격렬한 논쟁으로 끌고 온 작품이 있다.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이하 <보랏>)라는 해괴망측하게 긴 제목을 가진 <보랏>이 그 주인공이다. <보랏>은 최근에 본 가장 웃기는 영화지만 가장 수상한 작품임에도 틀림이 없다. 이 문제적 작품이 일으킨 논쟁 속으로 들어가 보자.
▶카자흐스탄 킹카의 막대한 영향력
<보랏>의 원제는 'Cultural Learnings of America for Make Benefit Glorious Nation of Kazakhstan'. 즉, '영광스러운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배우기'이다. <보랏>의 현재적 의미는 작품 자체보다도 그를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통해 입체적으로 조형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문제가 파멜라 앤더슨이 개인 경호를 철저히 하게 되었다는 수준의 가벼운 농담에서 미국과 카자흐스탄의 외교 분쟁에 이르는 넓은 스펙트럼 안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이다. 84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상영시간을 가진 이 작품의 영향력은 멕시코만 앞바다에서 날갯짓한 나비의 몸짓이 불러일으킨 태풍효과에 비견되는 게 과장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제작비 1,800만 달러 규모의 저예산 코미디영화가 불러일으킨 영향은 그것이 양산한 현실적 문제들을 일별해보는 것만으로도 선명히 지각된다.
일단 이 작품은 미국 개봉 주말 3일 동안 2,635만 달러라는 경이적인 수입을 올렸고, 영화의 성공은 비즈니스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대중뿐 아니라 나름의 감식안을 지닌 비평가들의 심금을 울린 것인데, <보랏>은 LA비평가협회상과 시카고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미국영화협회가 선정한 2006년 10대 영화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하는 데까지 이른다. 게다가 주인공을 맡은 샤샤 바론의 주 활동지인 영국에서는 개봉 첫 주 만에 1,1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상당한 상업적 성공을 거뒀고, 2006년 5월에는 칸국제영화제에서 상영돼 기대 이상의 반향을 얻어내기도 했다. 저명한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06년의 10대 인물에 보랏을 연기한 주연배우가 선정된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다. 문제는 이 같은 성공이 단순한 해프닝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현실적 분쟁과 불쾌감을 양산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보랏의 고향으로 묘사되고 있는 루마니아 마을 주민들은 자신의 주거지를 강간과 근친상간이 횡행하는 지옥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해 소송을 제기 중이고, 무지하고 무질서한 야만 국가로 묘사된 카자흐스탄에 대해 대통령까지 반론을 제기했다. 한 코미디언의 좌충우돌 미국 체험기가 미국과 카자흐스탄이라는 실제 국가 사이에 미묘한 외교적 갈등을 불러일으킨 셈이다.
논쟁의 격렬함을 뒤로 하고 작품 내부를 들여다볼 때, 우선 이 작품은 무지하지만 순수한 시골 촌뜨기가 다른 문명 혹은 문화권 속에서 겪는 컬처 쇼크 코미디로 규정될 수 있다. 이를테면, 시간적 간격을 훌쩍 뛰어넘어 중세에서 현대로 건너온 기사의 좌충우돌 코미디인 <비지터>가 추구했던 웃음과 매우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는 셈이다. 카자흐스탄 킹카 보랏의 고향에서는 여동생이나 장모와 섹스를 나누는 게 이상할 바 없다. 유대인들을 괴물로 분장시켜 박멸하기도 하고, 엄마가 아들의 페니스 크기를 자랑삼아 사진으로 찍어두는 나라이다. 물론, 관객의 웃음을 폭발하게끔 만드는 코드는 이 이상한 격차에 놓여 있다. 어느샌가 서구 문명의 기준에서 '세련됨'과 '문화'가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 이 카자흐스탄 킹카의 행위는 모두 기이하고 괴상하며 우스꽝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떤 점에서 문화적 차이를 근간에 둔 코미디는 코미디영화사에 늘 존재해왔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넓게 말하자면 콜라병을 들고 주인을 찾아주겠다 나선 부시맨도, 아들의 결혼을 위해 중국에서 미국으로 온 중국인 부모의 가슴 아픈 여행기였던 이안 감독의 <결혼피로연>도 문화적 차이 속 갈등과 편견 하에 영화적 주제의식의 핵심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화 차이라는 보편적 소재로 제작된 영화 <보랏>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중요한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문화적 차이를 바라보는 시선, 이 글의 맨 처음 부분에 언급했던 바로 그 기준, 바로 정치적 올바름과 타자에 대한 객관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랏>은 정치적 올바름이 아닌 정치적 편견, 타자에 대한 객관적 태도가 아닌 주관적이며 편협한 사유 속에 웃음의 코드를 매설하고 있다. 이는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히 살펴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무개념아의 좌충우돌

영화는 카자흐스탄의 한 마을에 살고 있는 보랏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고향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콧수염에 곱슬머리를 지닌 이 남자는 마을에서 유명한 강간범과 따라쟁이인 이웃, 불법 낙태 시술자인 이웃을 소개한다. 아이들은 살인기구인 총을 만지며 놀고 있고, 마을축제는 유대인들을 괴물로 묘사해 박멸하는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들어간 보랏은 아내로 연상될 법한 관능적인 금발머리 여성과 긴 프렌치 키스를 나누곤 여동생이라고 말한다. 마을에서 네 번째로 잘나가는 창녀라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보랏의 거침없는 가족 및 마을소개는 이 영화가 지향하고 있는 웃음의 문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즉, 여동생과 동침하고 아내를 동물처럼 여기는 보랏의 태도를 우스꽝스러운 농담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괴팍하고 불쾌한 도발로 볼 것이냐에 따라 영화에 대한 이입의 정도가 가늠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괴팍하고 이상한 남자 보랏이 자국 문화의 발전을 위해 '미국'이라는 다양한 문화 백화점에 가겠다고 선언하는 데서부터 심각해진다. '미국으로 간 문화 촌놈'이라는 도식 속에서 관객의 웃음을 유도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예상했다시피, 미국으로 간 보랏의 행동은 '행태'라 불러 마땅할 만큼 대책이 없다. 쇼윈도에 걸린 속옷을 보고 백주대로에서 자위행위를 하는가 하면, 호텔에 들어가 변기 물로 얼굴을 적신다. 카자흐스탄 식으로 인사를 하다 뭇매를 맞을 뻔한 보랏의 좌충우돌은 얼핏 보면 미국 문화의 편협함을 드러내는 듯하지만 실상 강조되는 것은 웃음의 소재로 강등된 제3 국가인의 면모다. 카자흐스탄이라는, 미국으로부터 먼 나라에서 온 이 인물 보랏이 불러일으키는 웃음은 대개 아니 모두 보랏의 야만성과 미개성에 기인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논쟁의 핵심이 있는 셈이다. 코미디는 코미디일 뿐이라는 대명제 하에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좌충우돌 해프닝에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한 할리우드 리포터의 말마따나, "<보랏>은 품위 없고, 그로테스크하지만 어떤 영화보다 웃기고 재미있다". 즉, <보랏>은 사람들이 웃음이 아닌 폭소를 터뜨리는 매우 예민한 공통분모를 찾아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반감도 같은 지점에서 비롯된다. 왜 하필 카자흐스탄이라는 제3세계인이 무지한 야만인으로 등장하며 왜 그는 그토록 마초적이고 수구적이며 편향적인가?
보랏은 페미니스트들을 만나 여성의 뇌가 쥐만큼 작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허머와 같은 차로 집시를 공격하면 차가 다치진 않느냐 묻기도 한다. 텍사스 로데오에 가서는 이라크를 불살라버려야 한다며 마초들의 환호성을 얻고, 미국식 정찬 저녁식사에서는 자신의 변을 봉투에 싸들고 나와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웃음의 코드인 보랏의 순진무구는 미개성, 혹은 인공성에 덜 오염되었다는 뜻의 야만성과 분명 다를 수밖에 없다. 영화가 이 미개성과 야만성을 카자흐스탄의 특성으로 전제하고 그것을 악의적으로 남용하고 있다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니 고쳐 말하자. 악의적이라기보다는 무반성적이고 무개념적이라고 말이다.
▶미국 문화 발가벗기기

어떤 면모에서, 보랏이 하는 행위들은 무지함을 가장한 한 인물을 통해 신랄하게 벗겨지는 미국 문화의 극단적 이분법과 허위에 초점을 두고 있는 듯 보인다. 적극적으로 해석해본다면, 이라크 몰살에 환호하는 미국인들의 면면에서 우스꽝스러워지는 것은 순진한 보랏이 아니라 미국인들의 폭력성이다. 이는 한편 점잖은 척 복잡한 매너를 강요하는 미국 남부의 상류계층을 향한 분뇨 테러로 이어지기도 한다. 아내의 젖으로 만든 치즈를 먹는 전직 국회의원의 괴로운 얼굴이라던가, 흑인 말투를 쓰는 이방인을 쫓아내는 고급 호텔의 이미지 역시도 미국 내부의 문제를 드러내는 단초 역할을 한다.
아마도 미국 평단이 높이 평가한 부분은 바로 이 점, 타자의 시선에서 객관화된 미국 문화의 남루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멜라 앤더슨이 출연한 <베이 워치>가 미국의 꿈으로 이상화된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이상화된 문명국가 미국의 이미지가 파멜라 앤더슨의 섹스 비디오로 무너지듯이 <보랏>은 미국 내부의 문화 곳곳을 파 헤집고 공격한다. 이를테면 근본주의 기독교도들의 집회장에서 벌어지는 오순절 행사에서 이상하고 괴이한 사람은 보랏이 아니라 집회 참가자들이다. 그들은 보랏이 지금껏 벌여왔던 기행은 기행 축에도 못들만큼 괴이한 접신 상태와 맹신을 보여준다. 방언을 하며 집회장소를 뛰어다니는 맹신도들, 안수기도를 통해 당신은 이제 치유되었다고 말하는 목사의 모습은 보랏이 맨몸으로 호텔을 뛰어다니던 기행을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미국 문화에 대한 자기반성 부분이 아니라 보랏의 무지막지한 행위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니까, 똥을 비닐봉지에 싸서 나온 보랏을 보고 얼굴이 붉어진 미국 상류층을 보고 고소한 냉소를 짓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랏이 식사시간에 똥을 들고 나왔기에 웃는 셈이다. 상황 때문에 웃느냐, 보랏의 행동 때문에 웃느냐의 이 사소한 차이는 실상 이 영화를 접하는 정치적 태도와 사유에 깊이 연관돼 있다. 그것은 이 영화를 제작한 래리 찰스와 주연 배우 샤샤 바론 코엔의 의도가 어디에 있느냐와도 관련된다.
그들의 의도는 몇몇 문제적 장면을 통해 유추될 수 있을 것이다. 보랏은 숙소를 찾던 중 친절한 노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지금까지 경험할 수 없었던 환대를 받게 되지만 그들이 유태인임을 알게 되자 보랏과 그의 동행자 아자맛은 대경실색하고 만다. 그들 부부가 준 음식엔 독이 들어 있을 것이며, 밤이 되니 바퀴벌레로 둔갑했다는 설정은 웃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지만 그 웃음은 석연치 않은 편견에 기대고 있음에 분명하다. 이는 두 사람이 파멜라 앤더슨을 두고 벌이는 싸움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게이 레슬링을 연상시키는 행위 속에서 그들은 눈뜨고 보기 민망한 나체로 격투를 나눈다. 비대한 아자맛의 몸과 검은색 바(bar)로 가려진 보랏의 웅장한 남근에서 비롯되는 웃음들, 고무손을 들고 종횡무진 하는 보랏을 통해 유발되는 웃음은 성적 소수자인 게이들에 대한 편견의 코드를 깊숙이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에서 온 문외한, 미국 문화와 예절을 전혀 모르는 타자라는 점에서 그들의 무례와 공격성이 무조건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영화적 전제의 불쾌감이 바로 그 부분에 있는 셈이다.
<보랏>은 영리하게도 이율배반적인 모순의 공격성을 내장하고 있다. 마치 두 얼굴을 지닌 광대처럼 미국인들을 놀리고 싶을 때는 순진한 외래인의 면모를 보여주고 소수민족이나 나약한 국가 혹은 소수자를 놀리고 싶을 때는 보수적 미국인의 가면으로 얼른 얼굴을 돌린다. 영화가 거둔 성공의 입지는 바로 이 빠른 변장술의 타이밍과 기민한 리듬의 스텝 변조에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자신이 조롱의 대상이 되는지도 모른 채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화면을 즐기도록 유도된다. 급진적 문명 비판이자 지독한 문명 차별주의라는 이분법에 발을 담그고 있는 이 작품은 그래서 소수자의 형편에 스스로가 놓여 있다고 판단되는 관객에게는 불편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소수자라 할 수 있을 동성애자, 여성, 아동, 유태인들은 무방비 상태 속에서 웃음으로 윤색된 폭력에 견딜 수밖에 없다. 애초부터 그들은 관찰 대상이자 리포트 대상일 뿐 발언권을 가진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의 이러한 태도는 보랏이 리포트해서 말을 녹취하는 대상, 그러니까 그나마도 말을 경청하는 대상이 주로 미국 상류계층의 보수적인 다수자라는 점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편견에 근거한 화장실 유머

보랏은 텍사스 마초의 말을 경청해 그를 따라하고, 국회의원과 공식적으로 면담하며, 미국 상류계층 식사를 위한 레슨을 정성스레 준비한다. 또한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백인우월집단에 가까워 보이는 미국의 젊은이들과 여성학대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기까지 한다. 이는 게이들과 모른 채 어울렸다는 설정이나 페미니스트들에게 “우리나라에서는 여자 다섯 이상 모이면 불법”이라고 공격적인 태도로 말하는 것과 구분된다. 즉, 보랏은 보수적 다수의 말을 경청하고 소수의 말은 무시하거나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소수자의 입장을 경청하거나 존중할 때 컬처 쇼크를 주제로 한 작품은 코미디가 아닌 드라마가 될 수밖에 없다. 만일 <보랏>이 <브로크백 마운틴> 속 서부사회로 가는 상황을 설정해본다면 이는 쉽게 예상될 사태로 다가올 것이다. 화장실 유머, 섹스 코미디와 같은 소위 자극적이며 직접적인 소재의 코미디들은 모두 주류문화와 다수자의 편견에 웃음의 코드를 두고 있다. “여성 운전자들은 모두 덮쳐야 한다”거나 “유태인들은 또 9.11 테러 같은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같은 말은 그들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철학적 관객에겐 가벼운 농담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농담의 대상으로 격하하기에 이는 너무도 중요한 정치적이며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자신이 소수자의 입장인지 혹은 다수자에 속하는지에 대한 판단에 따라 이 영화에 대한 판단은 나뉠 것임에 분명하다. 아마도 미국이 이 영화에 대해 그토록 호의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카자흐스탄 촌놈의 공격 따위에 끄떡하지 않을 다수자였기에 가능한 거만한 관대함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카자흐스탄에 대해 이 영화가 무례한 도발이자 무분별한 공격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보랏이라는 허구적 인물에게 카자흐스탄의 정체성을 모두 떠맡겨버린 채 타자로서 관객 앞에 던져진 카자흐스탄은 무지하고 무모할 뿐만 아니라 주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국가다. 동생과 근친상간을 하고 아들의 남근 크기를 자랑으로 삼는 나라, 보랏과 같은 일개 개인이 미국 문화 탐방을 위해 국가의 지원을 받고 그가 가져온 문화 수입품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는 나라, 강간범이 게이의 성적 도구를 손에 끼고, 미국의 왜곡된 기독교 문화를 국교로 흡수해 의지하는 이상한 나라 카자흐스탄. <보랏>에서 카자흐스탄은 웃길 수 있는 상황 전체가 뒤범벅된 이상한 원더랜드에 가깝다. 논란과 논쟁 끝에 국내에 개봉하게 된 <보랏>에 대한 판단이 관객 편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도 이와 연관된다. 영화 <보랏>은 자신의 입지를 어디에 두고, 코미디의 웃음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이냐에 따라 웃음과 불쾌로 나뉠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분명한 것은, 이 영화를 본 그 어떤 관객이라도 한 번 이상 웃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질문을 당신에게 넘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