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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목 작업은 열 손가락이 거미발처럼 움직여 아름다운 율동미가 넘쳐난다. 끈목장(多繪匠₩다회장) 임금희씨가 혼을 담아 완성한 작품을 벽에 걸며 환하게 웃고 있다. |
다회·매듭, 요샌 여자들이 많이 하지만 60년대 이전엔 남자의 영역.
끈목 짜는 일은 명주실과의 전쟁, 며칠 밤 새울 때도 있지만 세 제자의 도움이 큰 위안.
'조선시대 광다회의 복원적 연구'로 국내 유일무이의 석사 장인
구의동 전철역 바로 옆 건물 4층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산업디자인학원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생전 처음 본 다회틀에서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임금희 다회장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의 공방이자 일반인들에게 규방공예, 전통 매듭, 침선 등의 기술을 가르치고 있는 곳.
그가 직접 고안하여 제작한 다회틀 기구는 그의 스승이신 고 김주현 선생께서 고려타기(高麗打幾)라 이름 붙였다. 일본서적 '조뉴(組紐)의 연구'에 기록된 문헌에서 어렵게 찾아내 복원해 사용하고 있기에 임금희도 선생이 사용하던 다회틀에 좀 더 편리성을 가미해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다회틀 기구에 대하여 기록해 놓은 것은 1962년 8월 21일 당시 문화재 위원이었던 고 예용해 선생이 전북 남원 노암리에서 다회일을 하는 박용학씨를 만나 인터뷰한 것이 최초인 듯싶다.
〈그들의 유일한 생활의 밑천이라고 할 끈판 이래야 높이 40여㎝ 정도의 판자로 된 것이다. 먼저 송판을 네모나게 맞추어 그 위에 원추형(圓錐形)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 옷(衣)을 입힌다. 옷이라야 누더기 조각을 둘러 끈을 절어도 손이 아프지 않게 한 것, 기둥 위에 송판으로 된 어른 손바닥만 한 '접시'를 얹고 그 가에 대를 곱게 깎아 '전티'를 두른다. 고운 실이 접시 가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접시 중심에 가는 대나무로 된 '바늘대'를 세워 끈을 절어 입혀 내려가는 구실을 하게 한다. 따라서 바늘대가 굵으면 끈도 굵고, 가늘면 끈도 가늘어진다. 끈판 한쪽 키에다는 즉시 가는 댓가지로 된 '갈걸이'를 세워 바늘대에서 전 끈목이 길어지면 걸 수 있도록 마련하였다. 끈목을 절기는 열 손가락을 다 쓴다. 실을 '토짝'이라는 배가 오목한 돌짝에 백지(白紙)를 입힌 후에 감아서 이를 이리저리 섞어 바꾸어가며 절어 내려간다.〉
예용해 선생이 으스러져 가는 초막(草幕)에서 끈목을 만들고 있는 박용학(朴用學)씨를 만나 막걸릿잔을 비우며 나누었던 내용 중엔 이런 대목도 있다.
〈공부를 못해서 눈이 어둡고 멍청하여 재주가 없으니 딴 도리(道理)가 없었던 까닭이었지만 배운 도적질과 같아 평생을 이 일만 하다가 늙어버렸다. 끈목에 있어서 선생이란 있을 수 없고 굳이 있다면 먼저 배운 사람이 선생이다. 끈목을 배우는 데 있어 1년간 열심히 하면 겨우 흉내는 낼 수 있다.〉
옛 다회장들의 처지가 이러한 데 비해, 임금희는 1983년 안동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안동은 유교사상이 짙게 깃들어져 있는 전통의 고장이기에 학창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전통문화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서울생활을 하면서도 늘 책과 가까이하며 고궁과 박물관을 찾았다. 우연한 기회에 끈목(다회)으로 여러 공예품을 만들어 내는 일즙 김주현(金注顯·명장) 선생의 예술세계와 접하면서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기로 마음 다잡아 먹고 끈목의 기능에서부터 유래와 역사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끈목(다회)기술을 배우다 보니 매듭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천연염색, 매듭, 술 만들기를 능수능란하게 익히게 되어 현재는 매듭장도 겸하고 있다.
끈목의 종류에는 도포끈·염낭끈·매듭끈·십육사끈·주머니끈(담양끈)·이십사사끈(二十四絲)·허리끈·오봉연끈·명정끈·가마끈·목도리끈·선초끈·당줄 등 주로 오색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끈목은 광다회와 동다회(童多繪)로 나뉜다.
어느 정도의 기초기술을 배운 후 끈목을 절기 위해서는 ①명주실을 외바람으로 자새에다 감고 ②여덟 또는 열 오락지로 올을 합해(올맨다) ③다시 폭이 넓은 자새에다 옮겨 감고(종긴다) ④냇물에 하루를 씻어 바랜다 ⑤ 갖가지 색(色)으로 물을 들인다 ⑥말린다 ⑦다시 작은 자새에다 풀 감아서 해사한다 ⑧끈의 길이로 날아서 ⑨끈의 굵기, 즉 물품에 따라 각각 수를 세어 가른다 ⑩대 끝에 추를 달고 꼰다 ⑪ 헝클어지지 않게 손에 감아서 ⑫ 끈판에 대고 전다 ⑬ 전 끈을 열 가락씩 죽을 잡는다.
이상 열세 가지 순서대로 행하게 되는데 어찌 보면 비교적 간단한 것 같은데도 "끈 판에 대고 포목을 절 때 머리카락과 같은 실오리가 헝클어져 풀리지 않으면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하고 싶을 때가 수십 번"이라고 한다.
임금희가 끈목을 짜는 모습을 보면 마치 명주실과의 전쟁이며 능조(綾組), 평조(平組), 당조(唐組)기법 등을 재현할 때는 당조 틀 위아래로 넘나드는 추와 타봉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재빠르게 오가게 되는데 어느 때는 추가 200여개 매달릴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몇날 며칠 꼬박 밤을 새우게 될 때도 있지만 옆에서 거들어주는 박병희·유명현·공영희 등 세 제자가 있어 한결 위안이 되기도 한다. 이들은 대학원 문화재학과에 적을 두고 기술을 배우겠다며 억척스럽게 도제방식을 전수받고 있는 중이다.
종목의 절기는 열 손가락을 다 사용한다. 실을 '토짝'이라는 실패와 같은 추(錐)에 감아서 이를 이리저리 섞어 바꾸며 절어 내려가는 것이 비법이라고 귀띔을 한다. 다회 짜는 모습을 글로 쓰다 보면 복잡 난해하게 헝클어진 공정처럼 생각되나 막상 저는 방법을 보면 열 손가락이 거미발처럼 움직여 아름다운 율동미가 넘쳐나 보는 이들도 애잔한 마음이 절로 든다.
옛 선비들의 도포끈이나 손에 쥐고 다니는 합죽선 끝에 매달려 있던 선초끈이 그리 쉬운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순간이기며, 다회장들의 숨 가쁜 노력이 잉태되는 진솔함의 극치라고나 할까.
해방 이후 각종 노리개 문화가 발달하여 매듭문화는 손쉽게 전승되고 중요무형문화재, 시·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매듭의 가장 핵심적 역할을 하는 다회장은 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못내 아쉽기만 하다. 조선시대 경국대전 공전공장조(工典工匠條)에 분명 다회장이 경공장에 기록되어 있다. 임금희는 서울시로부터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사업에 일곱 번이나 채택되는 행운(?)을 잡기도 했는데, 유송옥·박성실 등 섬유분야 원로교수들의 끈목에 대한 아쉬움에 대한 배려이며 결단이기도 하다.
사실 대한제국은 물론 6·25 전후까지만 해도 다회, 매듭은 주로 남자들의 몫이었다. 여성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힘들고 난해한 분야였다. 그러다 1960년대 이후부터 서서히 여성들이 입문하기 시작, 근래는 거의 여성들의 몫이 됐다.
임씨는 다회분야에 입문한 후 2008년 성균관대학교 디자인대학원에서 '조선시대 광다회의 복원적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국내 유일무이한 최초의 석사 장인이기도 하다. 일본 정창원을 찾아가 유물을 보면서 광다회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 한국·일본·대만·삼국 교류전을 비롯하여 프랑스 파리국제박람회장에 출품도 하는 등 국내외에서의 활동도 다양하다. 그 공로로 지난해 유엔에 등록되어 있는 세계불교법왕청으로부터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칠용·(사)근대황실공예문화협회장]
[사진=사진작가 김기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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