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를 거친 필리핀 앙헬레스는 미 공군기지가 들어서면서 홍등가로 전락했다. 10여 년 전 공군기지는 폐쇄되고 지금은 미군 휴양시설만 남아있다. 앙헬레스는 최근 특별경제구역으로 선포되었지만 기지촌시절 시작된 섹스산업은 여전하다. 어둠이 내리면 미국으로 떠나지 않은 퇴역군인과 특별경제구역을 찾아온 비즈니스맨, 일본과 한국의 관광객이 뒤섞여 ‘소돔과 고모라’가 된다 조주청<만화가, 여행가> 앙헬레스 바의 골든벨을 울리는데는 8만 원밖에 들지 않는다 무희든 웨이트리스든 거리의 꽃이든, 이곳에서 하룻밤의 공정가격은 1천 패소(약 2만4천 원)다 거리의 아가씨들은 포장마차에서 야참을 한다 앙헬레스의 밤은 쭉쭉 뻗은 여체들의 율동으로 시작된다 홍등가에서 멋모르고 낄낄거리는 사생아들 거리의 트랑시클은 짝을 맞춘 커플을 호텔로 데리고 갈 참이다 제대하고 나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연금을 받으며 이곳에 눌러 앉은 어글리 아메리칸은 밤마다 하는 일이 걸 헌팅이다 쿵쿵 쾅쾅쾅귀를 찢는 록 리듬이 바를 들었다 놓는다. 붉은 조명은 좌르르 쏟아지고 무대 위 반라의 댄서들은 흐느적거린다. 나이 지긋한 미국인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들어온다. 웨이트리스가 팔을 잡고 헤픈 웃음을 날린다. 미국인은 산미구엘 맥주를 벌컥벌컥 마신다. 구석진 자리에서는 거구의 미국인이 PC를 두드리며 무언가 정리하는데 열중이다. 그는 이 앙헬레스 바의 주인이다.
스페인 식민지에서 미군 기지촌으로 미국인들이 들락날락 거리고 때때로 내국인, 그리고 일본인, 한국인도 보인다. 들어와 술 몇 잔을 마시고 나갈 때 어김없이 웨이트리스를 끼고 나간다. 뚱보 미국인 주인은 클락 공군기지에서 제대한 퇴역군인이다. 그는 본국에 돌아가는 걸 포기하고 이곳 앙헬레스에 눌러 앉아 바까지 열었다. 나이 지긋한 미국인들은 거의 대부분 이 같은 케이스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마누라 잔소리 들으며 연금으로 빠듯하게 사느니 앙헬레스에서 자유롭게 왕처럼 살겠다는 게 그들의 신조다. 그들의 연금이면 하녀를 둔 번듯한 집에서 낮에는 골프를 치고 밤에는 이 술집 저 술집 돌아다니고 마지막엔 필리핀 아가씨 하나를 골라 집으로 데려가 밤을 새우는데도 돈은 남아도는 것이다. 앙헬레스 바가 자리잡은 이곳 도시 이름도 앙헬레스(Angeles)다. 영어로 엔젤스, 바로 천사라는 뜻이다. 1898년 미국이 필리핀을 접수하기 전까지 400년간 이 나라는 스페인 식민지였기에 곳곳에 스페인 흔적이 남아 있다. 앙헬레스는 바로 스페인어로 천사다. 어둠이 내리면 앙헬레스의 밤은 ‘소돔과 고모라’로 변한다. 클락 공군기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미군들은 불나비처럼 앙헬레스의 홍등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네온사인 번쩍이는 거리엔 아슬아슬한 핫팬츠에 립스틱 짙게 바른 필리핀 아가씨들이 술 취한 미군들 팔소매를 잡아당긴다. 인도차이나부터 중국, 한반도, 러시아까지 한눈에 레이더망으로 잡을 수 있는 전략요충지 필리핀에서 미국은 마닐라 위 앙헬레스에 클락 공군기지를 두고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클락 공군기지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 기지 배후도시 앙헬레스는 세계 최대의 섹스 산업기지가 되어 흥청거렸다. 1991년 6월 15일, 그 날도 앙헬레스는 뜨거운 열기로 달아 있었다. 소돔과 고모라를 불바다로 만든 하느님의 응징인가. “콰르르 쾅” 지진과 천둥으로 하늘과 땅이 갈라지며 앙헬레스 서쪽 지근거리의 피나투보 화산이 대폭발을 한 것이다. 바위와 화산재 기둥이 40km나 하늘로 솟아오르고 2천m가 넘던 피나투보 화산은 꼭대기 300m가 날아가 버렸다. 화산재와 주먹만한 돌멩이들이 미국의 힘 클락 공군기지를 덮어버리고 소돔과 고모라 앙헬레스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무소불위를 자랑하는 미국의 힘도 자연의 날벼락 앞에서는 맥을 못 춰 클락 공군기지는 폐쇄되고 말았다.
특별경제구역 선포 후 다시금 ‘흥청’ 섹스산업도시 앙헬레스는 더 큰 날벼락을 맞았다. 지진으로 갈라진 도로, 그리고 무릎까지 덮은 화산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앙헬레스를 먹여 살리는 주고객, 미군들이 떠나버린 것이다. 설상가상, 알프레도 림 마닐라 시장이 칼날을 세웠다. 새로운 매춘 방지법을 만들어 마닐라와 그 주위의 홍등가를 깨끗이 쓸어버렸다. 술집과 카페, 디스코텍은 문을 닫고, 수많은 아가씨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식당, 공장, 미장원으로 일거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클락 기지는 잡초가 우거지고 앙헬레스는 폐허가 되었을까? 아니다. 클락 기지는 특별경제구역(Clark Special Economic Zone)이 되었고 담 하나를 끼고 있는 앙헬레스는 더더욱 흥청거린다. 림 시장은 벌써 물러났고 술집들은 다시 문을 열고 흩어졌던 아가씨들은 다시 모여들었다. 열 여섯, 열 일곱 살밖에 안 된 필리핀 아가씨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곳으로 몰려든다. 클락 공군기지는 폐쇄되었지만 미군이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다. 미국과 필리핀 정부의 합의 아래 클락 기지의 미군 휴양시설은 그대로 미군들이 사용하게끔 한 것이 앙헬레스가 다시 살아나는 원동력이 되었다. 클락 특별경제구역을 찾아오는 비즈니스맨들도 앙헬레스의 새로운 고객으로 떠올랐다. 앙헬레스의 밤은 피나투보 화산이 터지기 전보다 더욱더 흥청거린다. 1999년 비공식 통계로 50만 명이 넘는 필리핀 섹스노동자들의 지하경제는 이 나라 국민 총생산의 10%에 육박하지만 필리핀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필리핀은 400년 동안 스페인의 통치를 받으며 철저한 가톨릭 국가가 되어 나라 체면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UN의 국제 노동기구는 섹스산업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대책을 세우라고 다그치지만 필리핀 정부에게는 우이독경이다. 필리핀 정부가 굳이 이를 외면하는 것은 나라 체면도 있지만 매춘 자체가 외화 획득의 일환이라는 데 무게가 실린다. 태국과 인도, 미국에 이어 매춘 세계 4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는 필리핀의 가장 큰 문제는 7만 명에 달하는 매춘 어린이들이다. 서구의 어린이 성도착자들은 끊임없이 필리핀으로 들어와 비밀리에 그러나 아주 쉽게 거래를 성사시킨다. 여기엔 많은 돈이 오간다. 그리고는 침묵이 흐를 뿐이다. 어린이 몫으로 돌아가는 돈은 아주 작다. 어린이 성매매를 알선한 사람과 이걸 알고 협박하는 사람들이 거의 모든 돈을 챙긴다. 협박범의 상당수는 바로 경찰이다.
<자동차생활, 2003년 12월호 - 저작권자 (주)자동차생활,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