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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잊혀진 러시아의 생물학무기 프로그램

_______! 2013. 1. 27. 23:18

 

잊혀진 러시아의 생물학무기 프로그램

2010-11-18 19:29:42 [ 신성택(미국 몬트레이 국제학대학교 교수) ]

1970년대에 시작하여 1980년대까지 미국의 정보관련 기관들은 줄곧 당시 소련의 생물학무기 연구, 개발, 생산 프로그램 진행에 대하여 집중적인 감시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9년에 스베르들로프스크(Sverdlovsk, 현재의 Yekaterinburg)에서 탄저병이 유행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때 발생한 폐(肺)탄저에 의해 여러 명이 동시에 목숨을 잃었고, 당시 소련 정부는 이에 대한 모든 내용을 감추는 바람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서방 언론들이 세상에 알렸다.

1980년2월13일, 독일 잡지 빌트지(Bild Zeitung)는 스베르들로프스크에서 탄저병이 창궐하는 사고가 한 군사시설에서 유출된 생물학작용제가 바람을 타고 교외로 날아가면서 발생했다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이로 인하여 바람의 방향과 같은 기상조건이 생물학무기 사용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주요 서방 언론들은 이 사건을 집중 보도하였다.

이로부터 수주일 후에 미국 정부는 당시 소련 정부에게 이 사건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면서 혹시 생물학무기의 저장관리가 잘못되어 발생한 것인지를 직접적으로 문의하였다. 소련 정부는 즉각적으로 이 내용은 중상모략적인 선전이라며 비난하였지만 탄저병균이 일부 전파되었다는 사실만은 인정하였다. 소련의 발표에 따르면 이 사건은 식중독을 일으킨 탄저균이 기류를 타고 전파된 것은 사실이나, 오염된 고기를 주민들이 섭취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둘러댔다.

오랜 세월이 흐른 이후, 최근에 나온 자료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탄저균 흡입에 의하여 발생한 것으로 보는 소견, 즉 폐(肺)로 연결되는 가슴 임파선에 발생한 출혈성 괴사나 흉곽 내의 출혈 등이 나타나는 것으로 판명됐다. 이것은 탄저균에 오염된 고기를 먹었을 때 발생하는 소화기 탄저병과는 전혀 다른 소견이다.

미국 정부는 소련 정부의 설명이 여러 가지 면에서 의문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스베르들로프스크는 생물학작용제 생산 및 저장 시설이 있는 도시로 미국이 지속적으로 분석해오던 곳 중의 하나다. 1979년4월3일 사건 직후 당시 소련의 국방장관이던 유스티노프(D. F. Ustinov)가 이 도시를 직접 방문하여 사건을 무마시켰다. 하지만 당시 소련과 같은 수준의 나라에서 탄저균에 오염된 음식이 주민들을 사망에까지 이르게 했다는 사건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미국은 위성사진의 판독으로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 지역에 생물학무기 관련 시설이 존재하였고, 특별한 경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밝혀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소련은 러시아로 간판을 바꿨다. 1992년2월,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1979년의 사건이 비밀 생물무기 시설과 관련된 탄저병이었음을 인정하였다. 그는 또한 구소련이 1972년의 생물무기금지협약(BWC)을 위반하여 불법적인 생물학무기 프로그램을 진행한 사실도 인정하였다. 그리고 나서 생물학무기금지협약 내용을 준수하여 저장보관하고 있는 생물학작용제들을 무조건 파기할 것이며, 방어적인 내용에만 국한하여 연구를 진행할 것임을 밝혔다. 그는 또한 “과거의 생물학무기 프로그램은 국제협정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음도 인정하였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1992년8월 옐친의 발표가 있은 직후 퇴역한 러시아 장군이자 소련 화학무기 연구 책임자를 지낸 은퇴한 쿤트세비치(Anatoly Kuntsevich)를 인터뷰하고 구소련 생물무기 프로그램의 내용에 대한 신뢰성 높은 기사를 게재하였다. 쿤트세비치는 이 기사에서 당시 소련 군대는 불법적으로 생물무기 사용을 위한 폭탄과 로켓 탄두를 개발했다고 진술하였다. 이 탄두들은 탄저병, 야토병, Q열 등 여러 가지 생물학작용제의 운반을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생물학무기 개발 노력이 적어도 1990년까지는 지속되었지만 이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는 6년 동안에 프로그램이 크게 축소되었다고 밝혔다.

1992년4월, 옐친은 1972년의 생물무기금지협약을 위반하는 모든 활동은 위법이라는 법령을 공표하기에 이른다. 옐친의 법령공포로 러시아 영토 내에서 모든 공격적인 생물학무기 프로그램은 금지되었고, 아랄해의 한 섬 부근에 있는 광범위한 생물학무기 실험지역도 폐쇄된다. 그리고 관련된 모든 연구 프로그램도 정부에 의하여 철저하게 통제됐다.

그러나 같은 달, 러시아는 생물무기금지협약에 따른 생물학무기 통제에 대한 법령을 비준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이 법령은 1991년9월에 생물무기금지협약을 위한 세 번째 위원회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러시아도 회의 참가국이었으며, 국제적인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끝내 비준은 하지 않은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1992년7월 말에야 관련 보고서 초안을 제출하였지만 그 보고서에는 핵심적인 세부사항이 누락되어 있었다. 이렇게 비준이 지연된 것을 두고 미국은 러시아가 과거 보유하고 있었던 생물학무기 프로그램을 더 강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은 소련의 공격용 생물학무기 개발을 수십년 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구소련에서 감염력이 아주 강력한 병원체들과 독소들을 연구개발하기 위해 수많은 과학자들이 국가연구소 등에서 일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들은 대기물리학, 공기로 전파되는 병원체 연구, 병원체의 병원성을 조절하는 연구를 통하여 당장 생물학무기 개발에 이용할 수 있는 기술과 지식을 확보하고 있었다.

현재는 완전히 수면 아래로 들어갔지만, 러시아의 관련 연구기관에서는 수많은 자료를 생물학무기 방어용 프로그램 뿐 아니라 공격용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하여 국가차원에서 자금지원과 후원을 해서 최근까지도 진행한 것으로 서방세계의 정보기관들은 분석하고 있다.

구소련의 생물학무기 프로그램과 관련된 내용의 많은 부분은 1989년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 파세크니크(Vladimir Pasechnik)가 공개한 것이다. 파세크니크는 그가 진행한 연구의 일부가 의료용으로도 전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1939년 스탈린그라드에서 태어난 파세크니크는 소련에서 가장 뛰어난 젊은 과학자중 한 명이었다. 1974년에 당시 소련 국방부 소속의 한 장군이 파세크니크에게 생명과학 실험실을 갖추게 해 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 제안에는 연구장비를 무한대로 구입하고, 소련의 뛰어난 과학자들을 연구원으로 선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파세크니크는 이 제의가 국방부로부터 제기되었다는 사실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냐 하면 민수용 의료목적으로 응용되는 연구 프로젝트를 포함하여 구소련에서 진행되는 대부분의 연구는 군의 후원을 받아서 진행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그는 훌륭한 연구실에다 400여명의 뛰어난 과학자들을 채용하여 생명과학 기술을 이용한 연구를 진행하였고, 최신의 연구진행을 위하여 무한대의 연구비를 사용하였다. 이 연구실은 1981년부터 운영되었으며, 그로부터 2년간 파세크니크는 진실을 깨닫게 된다. 이곳은 최첨단 연구와는 거리가 먼 치명적인 새로운 전쟁무기를 연구하는 방대한 연구실과 공장 복합체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파세크니크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된 신문 기사는 “공식적으로 우리는 백신과 농작물 보호에 이용될 수 있는 물질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거대한 생물학무기 프로그램을 위한 생산방법과 장비를 연구하고 있었다”라고 전한다.

그는 바이로프레파라트(Biopreparat)라고 알려진 민간 연구기관의 네트워크를 폭로하였다 이 조직은 1973년 소비에트 중앙위원회와 각료회의에서 군사프로그램을 은폐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바이오프레파라트는 25,000명이 넘는 인원, 18개 이상의 연구동, 6개의 생산라인, 시베리아에 거대한 저장창고를 가진 엄청난 조직이었다. 1980년대 초에 이미 연간 2억 루불 이상의 자금을 투입하였다.

연구목표 중 하나는 기존의 약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유전적으로 변형된 병원체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연구소에서는 이미 밝혀진 것보다 강력한 새로운 병을 유발할 수 있는 균주를 개발하고, 이를 에어로졸 형태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연구를 진행하였다. 1983년에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60마일 떨어진 오볼렌스크(Obolensk)에 있는 바이오프레파라트 연구소 연구진들은 처음으로 야토병의 원인 균주보다 강력한 변형체를 개발하였다. 고위층에서는 이 연구결과에 만족해하며 대량생산체제를 갖추도록 했고, 1985년에는 그 연구소에 폐(肺)페스트 원인균보다 더 강력한 병원체를 생산하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파세크니크의 역할은 개발과정이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생산 과정을 개량하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소련 당국이 1987년까지 바이오프레파라트 내에 매주 200kg의 신종 야토병 병원체를 생산하도록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바이오프레파라트 네트워크는 언제라도 명령만 떨어지면 대량생산체제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서, 연구개발이 완료된 작용제들에는 ‘X-1’, ‘X-2’… 식으로 임시작명을 사용했다. 당시 소련 국방부는 이 같은 생물학무기를 “특별히 지정된 무기”라고 하여 그들의 대량살상무기 사용계획에 포함시켜 놓았다. 이것은 최후수단으로서 항만, 철도 등에 포진하고 있는 적군을 공격하는 경우 재래식 비핵무기를 보완하기 위한 또 다른 핵무기로 사용될 것이었다.

파세크니크는 바이오프레파라트 조직의 한 연구소의 책임자였으므로 프로그램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각 연구소의 수장들로 이루어진 과학기술위원회의 멤버였다. 매스컴에 보도된 파세크니크의 주장에 따르면 바이오프레파라트 관리들은 이와 같은 병원체를 무기화된 형태로 만들어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넘기는 내용을 토론했다고도 한다.

파세크니크의 주장은 역시 바이오프레파라트 프로그램 출신이며, 1992년 후반에 미국 CIA가 데리고 나온 망명자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이 망명자는 옐친이 더 이상 무기용 연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전적으로 변형된 새로운 병원체를 개발하려는 연구가 자신이 망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진술하였다.

1993년 가을에 출현한 세 번째 망명자는 영국 정보국에 위의 두 사람이 진술한 것과 똑같은 사실을 확인해 주기도 했다. 이런 망명자들로부터 나온 증거를 보면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과 영국의 메이저 총리,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약속,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러시아의 옐친대통령의 약속도 러시아와 구소련이 진행한 생물학무기 프로그램을 완화시키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미영 연합대표단이 러시아의 초대로 1990년 러시아 여러 지역을 방문하였다. 이 대표단은 동물에게 뿌릴 수 있도록 고안된 거대한 에어로졸 용기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생물학무기 운용실험에 이용되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그들은 또 다른 곳에서 거대한 발효용 용기가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도 보았다. 이런 모든 증거들은 파세크니크가 이야기한 것을 증명해주기에 충분했다.

1992년 미국과 영국의 관심에 대하여 당시 러시아는 생물무기금지협약을 공식적으로 준수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삼자간 합의(Trilateral agreement)라 알려진 이 때의 합의는 결과적으로 1992년8월31일부로 러시아에서 생물학무기 관련 연구가 종결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끝난다.

내용은 (1) 러시아가 구소련의 공격적인 생물학무기 프로그램을 그만두었으며, (2) 러시아가 의심되는 시설을 조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생물학무기 관련시설이 민간용으로 전환되었으며, 방어목적 이외의 생물학무기 프로그램이 끝났고, (3) 세 나라에서 생물학무기 관련 지역을 공통으로 조사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1991년 미국과 영국의 대표단은 St. Petersburg Institute of Especially Pure
Biopreparations를 방문하였고, 그곳은 파세크니크가 생물학무기 관련 연구를 하는 곳이라고 지적한 곳이었다. 삼자간 합의가 끝난 후 첫 번째 방문은 1993년 가을에 일어난다.

이들 대표단은 시베리아의 노보시베르스크(Nobosibirsk)에 가까운 베르드스크(Berdsk)와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포크로프(Pokrov)를 방문하였다. 1994년 1월에도 미국과 영국 대표단은 두 곳을 더 방문하였으며, 러시아 대표단도 영국의 한 곳과 미국의 세 곳을 그 해 후반에 방문하였다. 러시아의 화학 및 생물학무기 비무장화를 위한 대통령위원회(Presidential Committee on Problems of Chemical and Biological Disarmament)의 위원장인 쿤트세비치는 이 방문을 끝으로 서방세계는 생물학무기에 대한 관심을 접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국 관리들은 모호한 점이 아직 남아있고, 두 가지 측면에서 과거의 생물학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고찰을 해야 한다고 했다.

구소련의 생물학무기 프로그램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가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여전한 가운데 당시 옐친대통령은 1994년4월 쿤트세비치를 해고하였다. 쿤트세비치는 구소련에서 화학무기 개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고, 미국 정부에서 생물학무기 해결에 장애가 되는 인물로 간주된 사람이며, 옐친대통령이 생물학무기 프로그램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러시아의 생물학무기 프로그램 시설을 은닉시키는데 가장 역할이 컸던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러시아 당국은 그가 자신의 의무를 크게 위반한 것이 해고사유라고 했다. 1994년4월7일의 이타르 타스 통신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의 생물무기 프로그램을 비난하는 서방 신문사와 쿤트세비치의 해고에는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보도했다.

어떤 생물학무기도 존재한 적이 없었고, 생물학무기와 관련된 어떤 활동도 사라졌으며, 결코 다시 시작되지 않을 것이라는 러시아의 주장에 대하여 서방세계의 의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더욱이 서방세계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1972년 생물무기금지협약 수준을 넘어선 구소련의 연구활동을 지금의 러시아 정부가 완전히 금지시킬 만큼의 정치적 지도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러시아의 생물학무기 위협은 아직도 공공연한 비밀로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가운데,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는 현재도 방어용(?) 생물학무기 프로그램은 국가적 통제하에 철저히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대한민국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러시아의 생물학무기쯤은 그래도 먼 나라 이야기다. 국제적인 무기평가기관들에 의하면 한결같이 북한은 생물학무기를 개발, 생산, 보유한 국가로 분류한다. 그럼에도 “베이징 북핵 6자회담”이라는 문구가 등장한 이래로 어느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는다. 모른척하는 하는 것이 진정한 상책인가?
출처 : 훈훈한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얼굴
글쓴이 : 老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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