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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째 전쟁에 관한 영화에 필이 꽂힌 모양이다. 자꾸 이런 쪽으로 보게 되는 걸 보니.
'바시르와 왈츠를(Waltz with Bashir, ואלס עם באשיר)'은 레바논 전쟁에 참가했던 주인공(감독인 아리 폴먼ארי פולמן)이 잊어버린 자신의 참전 기억을 떠올려가는 내용의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이다. 왜 잊어버렸는가, 혹은 왜 잊으려 하였는가......
◎레바논 전쟁
그냥 봐도 무방하지만 이 작품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바논 전쟁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알아두는 것이 좋다. (레바논 전쟁은 지금까지 몇 차례 있었지만, 여기서 다룬 것은 1982년의 레바논 전쟁이다.) 간략히 설명하자면......언제나 들어보았을 법한 이 명분 저 명분을 동원해 전쟁은 시작되었고, 이스라엘은 파죽지세로 레바논을 점령, 친이스라엘 정권을 세우려 한다. 그 수장으로 레바논 기독교당(黨)인 팔랑헤당의 바시르(Bashir)를 내세우지만, 바시르는 취임 전 암살당한다. 그러자 팔랑헤 민병대는 테러리스트 색출을 명목으로 난민촌에 진입하여 민간인을 학살하고, 이스라엘군은 후방에서 이를 지원하였다.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이스라엘군은 팔랑헤 군인들이 어두울까봐 그랬는지 조명탄을 쏘아주는 등 난민촌 밖에서 적절한(?) 지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아이러니
작품 전체적으로 아이러니한 모습이 가득하다. 그 전쟁 자체가 아이러니였다는 걸까. 보면 제목부터가 '바시르와 왈츠를'이다.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왈츠라. 제목부터 아이러니컬하게 붙여 놓은 셈이다.
(▲세련된 피아노 곡이 흘러나오며 기관총은 정신없이 난사된다. 한 곡의 우아한 왈츠를 추는 듯한 그 모습이란. 정말이지 묘한 느낌이었다. 뒤편 건물에 바시르의 얼굴이 걸려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음악을 정말이지 잘 배치해 놓았다. 감탄스러운 연출력이었다. 다큐멘터리이지만 애니메이션을 통한 자유로운 연출이 가능한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좋은 효과를 얻은 것 같다. 왜 괜찮은 노래를 듣고나면 멜로디가 한동안 머리 속에 박혀버리지 않는가. 여기서 노래도 그런 곡이 있었다.
(▲위 장면은 '나 오늘 시온에 투폭했어'로 시작하는 흥겨운 노래에 맞추어 나오는 장면의 일부이다. 지독히도 흥겨운 노래 가운데 이런 장면이 깜짝깜짝 등장해 사람을 놀래키더니, 노래 내내 등장하여 아예 아이러니가 주는 특유의 묘한 감정에 빠져버리게 한다.)
위 화면에서 나왔던 곡이 머리 속에 박혔다는 건 아니고......레바논을 달리는 탱크에서 이스라엘 군이 부르는 제법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가 있다. 마침 동영상 자체에 영문 번역본이 있기에 한글 번역본과 같이 올린다.
Good Morning, Lebanon 잘 잤니 레바논
Good Morning, Lebanon 잘 잤니 레바논
Too much pain to carry on 견뎌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구나
Good Morning, Lebanon 잘 잤니 레바논
...May your dreams come true ...네 꿈이 이루어지기를
May your nightmares pass 네 악몽이 사라지기를
Your existence is blessing, Lebanon 네 존재는 축복이란다 레바논
...You are torn to pieces ...너는 산산조각나 버리지
You bleed to death in my arms 너는 내 팔에 안겨 피 흘려 죽는 거야
You are the love of my life 넌 내 삶의 사랑스런 존재
Oh, my short, short life 아, 짧디 짧은 내 인생이여!
Take me to pieces, I'm bleeding... ...날 갈갈이 찢어, 난 피 흘리며....(갑작스런 총격)
정말이지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군(軍)이라는 파괴본위의(설사 그게 본질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 상황은 남의 나라를 침공하는 상황이니 이런 표현도 무방할 것이다) 모습이 겹쳐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나무 사이에서 어린 아이가 RPG를 쏘는 장면은 어떤가. 느릿느릿한 화면전개와 아름다운 햇빛, 잔잔한 음악, 모든 것이 어루러진 그 광경은. 이 작품은 정말이지, 아이러니컬했다.
(▲어두운 밤길, 아무도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총을 쏘며 차량은 달린다. "뭘 해야하죠? 뭘 할지 말해주세요" "쏴." "...누굴요?" "......낸들 아나? 그냥 쏴." 이런 아이러니컬한 상황. 마치 감독이 느꼈던 전쟁에 대해 요약한 대사 같았다.)
◎몽환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이지만 동시에 애니메이션. 위에서도 말했지만, 그로 인해 자유로운 연출이 가능하고 이 작품은 그 장점을 마음껏 살려냈다. 실사 느낌의 독특한 작화도 한몫 했을 것이다.
프로이드 심리학에서 말하길 억압된 심리(여기선 억압된 기억)가 발현된다고 하는 곳이 있다. 그건 무의식, 바로 꿈이다.(써놓고 나니 내가 심리학에는 문외한이란 게 떠올랐다. 맞겠지?)
(▲아리 폴만이 꾸었던 꿈. 물에서 나와 거리로 들어서자 수많은 아랍인들이 지나가고 자신은 그 가운데 우두커니 서있다. 이 꿈이 어떤 기억이었는지, 작품의 마지막, 너무나도 서글퍼졌다.)
그러고 보니 잔잔한 물 또한 여러 명의 기억 속에 등장한다. 흡사 고요한 물은 죽음의 이미지를 가진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장면들이다. 폴만의 꿈에서 자신이 걸어나오는 곳도 물이었고, 굿모닝 레바논을 부르던 병사가 피해 들어간 곳도 밤바다(거기서 물에 몸을 맡겨 적막하게 흘러가는 장면이 있다.)였으며, 친구 카미(כרמי)의 꿈 속에서도 폭격 당하는 보트 옆 헤엄치는 여인의 나신(裸身)에 얹혀있던 곳도 바다였다. 왠지 몽환적인 그 분위기. 잊혀진 기억을, 아픈 기억을 드러내는 작품의 배경, 그게 '몽환'같다.
(▲폴만의 꿈, 혹은 기억 속 장면. 고요함靜, 수면表, 어둠暗......몽환夢幻. 사건의 여러 이미지들이 복합된 환상의 장면이었다.)
◎그것이 공포이든 무엇이든
기억을 찾으러 여러 참전자들을 만나가며, 폴만은 그들을 인터뷰한다. 그들은 각기 나름대로 다양한 기억들을 안고 있었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공포이든 죄의식이든 무엇이든 간에, 영화를 보는 이로서는 착잡함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저 두렵고 불안해서 우린 미친듯 쏘기 시작했어" "누구에게?" "낸들 알겠나." ... "그 때 낡은 벤츠가 다가왔어. 다들 그걸 향해 미친듯이 쏘았지...(중략)...그리곤 조용해졌네. 죽음의 끔찍한 고요함. 날이 밝고 우린 우리가 파괴한 것을 보았어. 그 차 속에는......" "뭐가 있었나?" "일가족의 시체.")
죽였다는 일 때문만이 아니다. 그런 불편한 의식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도 남는 모양이다. 작품 속에서는 이러한 면들도 포착하여 표현하고 있었다.
(▲"마치......내가 내 전우를 버린 것 같이 느껴졌어요. 다들 날 전우를 버린 녀석으로 여길 것 같았죠. 나만 살기 위해 전장에서 도망친 녀석처럼...(중략)...난 무기를 들고 모두를 구하는 그런 영웅타입이 아니었어요." 동료들이 모두 죽은 가운데 혼자 살아남았던 어느 참전자의 이야기.)
◎기억, 그리고 진실
작품의 마지막, 폴만이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던 기억은 드디어 하나로 정리되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팔랑헤군의 학살이 자행되던 난민촌, 그는 그곳을 포위하던 이스라엘군의 일원이었다. 조명탄을 쏘아 그들을 지원해주고(어쩌면 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품 속 대사처럼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학살이 이루어지던 가운데 손을 놓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 그는 난민촌 내부의 한 거리에 서있다. 꿈 속에 나오던, 아랍인들이 쏟아져 나오던 그 거리.
(▲거리 가득 쏟아져 나오는 절규하는 여성들. 아들의 죽음에, 남편의 죽음에, 혹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절규. 폴만은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바라본다. 작품에 표현된 그의 호흡만으로도 그 심경을 읽기에 충분하다. 이 일을 끝내고 시간이 흐르며 그는 이 기억을 잊어버리고 만다. 아니면 일부러 잊어버렸을 것이다. 아니, 정말로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었을까?)
엔딩 크레딧 직전 갑작스레 나오는 실사화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정말이지 우울한 기분이 들게 한다. 어쩌면 뉴스 같은 곳에서 끊임없이 보았던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알고 나면 결코 같은 눈으로 바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여성은 알 수 없는 언어로 외쳐댔지만 그 말은 듣는이에게 너무나도 생생하게 와 닿았다. TV에서 너무 많이 보아 면역되어 버린 장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 속에서는 그 이상의 장면이었다.)
이렇게 이 작품은 끝을 맺는다. 딱히 두드러지게 전쟁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적 차원의 반성을 드러낸 작품도, 전쟁을 사회적 차원에서 조명한 작품도 아니었다. 단 하나, 한 사람에게 그 일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는가. 한 개인에게 그것은 어떤 일이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너무나도 훌륭하게 살려냈다. 최근 본 관련 작품 가운데 가장 수작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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