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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주이상스(Jouissance)

_______! 2015. 7. 8. 18:04

 

 

 

 

                 주이상스(Jouissance) 

 

 


-Wikipedia

 프랑스 말 주이상스(Jouissance)는 enjoyment라는 뜻이다. 그것은 영어 단어 “enjoyment"에는 빠져있는 성적인 함의(i.e. 오르가즘)를 갖는다. 그러므로 자콥스 라캉의 영어 버전의 저작에는 번역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라캉은 자신의 세미나 “정신분석학의 윤리(The Ethics of Psychoanalysis, 1959-1960)"에서 주이상스(Jouissance)와 기쁨(pleasure)의 반대 개념을 개발했다. 라캉에 따르면 기쁨 원리(pleasure principle)는 기쁨에 제한으로써 작동한다. 그 법칙은 대상이 가능하면 덜 즐겁도록 명한다. 동시에 대상은 끊임없이 그의 즐거움에 부과된 제한들을 어기고, 그 기쁨 원리(pleasure principle)를 넘어서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라캉에 따르면 기쁨 원리를 어긴 결과는 더 많은 즐거움이 아닌 고통이다. 왜냐하면 오직 일정한 양의 기쁨만을 그 대상이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제한을 넘어서면 기쁨은 고통이 된다. 이 ‘고통스러운 원리(painful principle)’이 라캉이 주이상스(Jouissance)라고 부르는 것이다.(Dylan Evans) 그러므로 주이상스(Jouissance)는 고통을 겪는 것이다.(Ethics)


 그의 세미나 “앙코르(Encore, 1972-1973)"에서 라캉은 주이상스(Jouissance)는 본질적으로 남근숭배라고 진술한다. 주이상스(Jouissance)는 성적인 까닭에 남근 숭배이다. 그것은 주이상스(Jouissance)가 그 자체로 그 나머지(The Other)와 관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라캉은 인정한다. 특별히 여성의 주이상스(feminine Jouissance), 보충적인 주이상스(supplementary Jouissance)가 있다고. 그것은 남근을 넘어선, 그 나머지(The Other)의 주이상스(Jouissance)이다. 이 여성의 주이상스(Jouissance)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여성은 그것을 경험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세미나 “정신분석학의 그 나머지 측면(1969-1970)”에서 라캉은 마르크스의 잉여 가치(surplus-value)의 개념에 영감을 받아, 잉여 주이상스(surplus-jouissance, 불어로는 ‘plus-de-jouir')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objet petit a(object little-a, 얻을 수 없는 욕망의 목표)는 주이상스(Jouissance)의 과잉이다. 그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다. 그리고 오직 주이상스(Jouissance)를 위해 지속된다.


 슬로비아인 철학자인 라캉주의 이론가로 알려진, 슬라보예 지젝은 그의 철학에 이 용어를 적용한다. 또한 이 개념은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의 저작에 결합되거나 개별적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Roland Barthes의 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리비도[libido]  VS 주이상스[Jouissance]

 


 주이상스는 상징계(법, 언어, 이성, 제도)를 넘어서는 즐거움이다.

간단히 말해서 무의미한, 고통스러운 즐거움이란 뜻이다.

목표를 향해 힘든 노력을 할 때 힘든 노력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사람들이 엽기적이고 불쾌한 장면을 보려고 할 때 그것은 이성과 제도의 관점에서는 전혀 즐거움이 아닌데도 사람들이 묘하게 끌리게 된다.

그것이 바로 주이상스이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은 소설의 소재로 쓰일 수도 있겠지만 문학을 분석하는 중요한 틀로, 사회를 진단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문화이론으로 넓게 쓰여 왔다.

사실 그는 과학자라기보다 시인이었다. 마음을 읽어내는 과학이란 시가 아닌가.

문학의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물의 심리를 잘 그려서 읽는 이의 상처를 치유해줄 때다. 그러기에 잘 쓰인 작품은 그 자체가 이미 분석이요 치유다. 사랑을 다루지 않는 명작이 없고 그것을 사회와 연결시키지 못하는 명작이 없다. 사랑은 잘하면 보약이고 잘못하면 독약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살게 하는 동력을 ‘리비도’라고 불렀고, 라캉은 ‘주이상스’라고 부른다.

리비도는 공격적이다. 이 공격성이 삶의 동력이기에 사랑은 연인을 공격하는 것이다.

왜 나와 한 몸이 되기 위해서다. 파괴를 하지 않고 통합은 없기에 에로스는 타나토스의 짝이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그리 쉽지 않다. 상처는 주는 양보다 받는 양이 더 크기 때문이다. 내 모든 것을 주고 싶은데 너는 왜 그만큼 안 주느냐고 미워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남을 증오하는 분노다. 유아기에 돌봐준 어머니와 하나가 되고 싶은 소망이 연인으로 옮아간 것이고 에로스요, 무의식이요, 근원적 나르시시즘이다.


 199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의 대표작 <소중한 사람>은 흑인 노예로 살았던 여주인공이 노예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어린 딸을 죽이는 이야기다. 사랑이 지극하면 목숨을 빼앗는다. 그것이 나르시시즘이고 에로스 속에 숨은 타나토스다.

그 딸은 유령이 되어 엄마를 찾아오고 에로스의 탐닉은 마음과 몸을 피폐시킨다. 노예제도는 얼마나 잘못되었던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가.

 리비도는 신경증의 원인일 뿐 아니라 사회적 징후를 비판하는 틀이다. 리비도의 공격성을 이해하고 그것이 얼마나 질긴 욕망인지 이해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윤리적 접근이자 문학이 다루는 주제들이다. 문학은 에로스의 동력이 타나토스인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줄 때 설득력을 얻는다. 어떻게 폭력을 줄이고 사랑을 늘일 것인가. 섹스는 그 낯설음을 파괴하는 폭력임을 세련되게 보여준다. 섹스와 사랑의 차이는 목을 잘리고도 뛰는 닭이 아닐까. 삶을 움직이는 동력은 ‘죽음충동’이다.

 

 연인이나 삶의 목표는 유아기의 판타지를 투사한 허상이고 죽음의 안식만이 욕망을 충족하는 대타자라면 억울하지 않은 삶을 위해 죽음은 늦춰야 한다. 그러기에 강렬한 반복충동은 삶 그 자체다. 이 반복의 충동은 ‘전이’를 동반한다. 앞선 것을 어딘지 다르게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은 늦추어진다.


 라캉은 국내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언어학과 결합, 철학으로 발전시킨 문화이론가로 더 알려졌다. 하지만 라캉은 수많은 환자를 상담하며 말년까지 활동한 정신과의사였다. 프랑스에서 라캉을 연구하고 미국 듀케인 대학 심리학교수로 있는 저자는 미국사회 역시 라캉이 인문학적 담론 수준에서만 논의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환자들의 심리 분석과 치료법을 체계화한  ‘탁월한 정신과의사’로 환원시킨다.


 부제 ‘라캉이론과 임상분석’. 책은 독자들을 정신과를 찾은 환자와 대면하고 있는 임상의(정신분석가,심리치료사 등)라고 가정한다. 저자는 특히 독자들이 라캉을 전혀 모른다는 전제 아래 가장 쉽게, 통속적인 라캉 책을 쓰려고 했다고 말한다.


 라캉의 용어와 개념들이 실제 정신분석에서 어떠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책을 통해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다. 이는 역으로 라캉의 철학을 공부하는 인문학도들이 라캉이론의 뿌리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미가 된다. 심리치료사들은 상담치료의 실패를 종종 ‘환자의 의지 부족’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라캉에게 환자가 치료를 원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환자가 빠져 있는 증상에는 많은 에너지가 축적돼 있으며 그 속에서 ‘대리만족’을 얻고 있다.

 

 환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쾌락을 얻는 유일한 방법을 왜 포기하려고 하겠는가. 쾌락이라는 용어만으로는 부족한데 환자는 고통을 호소하고 불평을 해대면서도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을 고통 속으로 몰고가며 느끼는 쾌락이 바로 주이상스(jouissance)다. 어떤 의미에서 환자가 임상의를 찾는 것은 증상에서 더 이상 행복을 느끼지 못할 때이다. 따라서 심리치료에서 환자를 계속 상담과 분석에 참여하게 만드는 것은 환자의 욕망이 아니라 ‘분석가의 욕망’이다.

따라서,분석가는 환자의 엄살에 동조해서는 안된다. 초기상담은.... 환자가 분석가를 한사람의 인격이 아닌 하나의 기능, 즉 텅 비어 있는 스크린이나 거울로 느끼게 될 때까지 계속돼야 한다. 심리분석에 들어갈 때....환자의 무의식은 언어 속에 있다.

 

 하지만 환자는 분석가와 결코 동일한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가령 환자가 “섹스는 혐오스럽다”고 말할 때 분석가는 구체적으로 어떤 섹스를 의미하는지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야 환자의 기만에 말려드는 분석가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분석대상(즉 환자)에 대한 라캉의 진단법은 단순 명쾌하다.

새로운 증상들을 별도의 장애로 분류해 질환의 수를 늘려가는 미국의 분석가들과 달리 신경증·정신병·도착증 등 3개의 범주로 단순화하고 있다. 신경증의 메커니즘은 억압(抑壓), 도착증은 부인(否認),  정신병은 폐제(廢除:폐지해 없애버림)이다. 신경증은 히스테리강박증, 공포증 등으로 하위분류된다. 라캉의 3분류 진단체계는 환자에 따라 각기 다른 목표를 갖고, 각기 다른 분석 테크닉을 적용해야 함을 명확하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거식증(拒食症)에 걸린 한 여성을 기존 분석가들에 의해 ‘식사장애’라는 이름으로 분류하는데 이는 거식증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라캉의 관점에서 그녀의 증상은 히스테리(신경증의 하나)이며, 엄마에 대한 죄의식에서 초래된 것이다.

 

또 라캉의 이론에서는 소아대상성도착증, 브래지어도착증, 팬티도착증 등도  대개 신경증 또는 정신병으로 판명난다.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자신이 상담한 4건의 실제 상담사례를 소개하며 라캉의 분석 진단기술의 적용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라깡의 이론을 살펴보면 공감할 만한 내용이 참 많다. 그 중에서도 히스테리 환자에 대한 내용을 보면 그의 이론이 왜 많은 사람들한테 관심을 불러일으켰는지 알 수 있다.

히스테리 환자는 타자의 욕망의 회로를 자신이 직접 조절하면서 타자의 욕망과 그 원인을 지배하게 된다. 동시에 그녀는 타자에게 만족을 주는 인물이 되지 않으려 한다. 그녀는 타자의 주이상스 jouissance (쾌락 또는 향락)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의 욕망을 불만족한 상태로 유지한다.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라캉에게 있어서도 히스테리 환자는 파트너가 자신에게서 성적인 만족을 얻는 것을 거부한다.

 

 

 그녀는 그의 욕망의 원인이 되길 원하지만 그의 주이상스의 원인이 되는 것은 거부한다.

예를 들어, 라캉은 정육점 여인이 남편에게 자기 여자친구를 주고 싶어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성적 욕구를 해소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히스테리 환자는 자신을 매혹시키는 불가사의한 여인을 남편에게 제공한다. 그녀는 그것을 즐기지 못하고 남편에게 떠넘긴다."                                                                                      

                                                                                    -브루스 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p.226참조.


 위에서 알 수 있듯이 히스테리 환자는 자신이 쾌락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한다. 성적인 쾌락이란 일종의 오르가즘, 혹은 죽음과 같은 상황을 연출하는데, 그는 그러한 상황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이드)를 보호하는 것이다. 즉, 쾌락의 순간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는 상황을 거부하는 것이다.


 라캉에 의하면 욕망이란 대타자의 욕망으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욕망을 인정받기 위한 욕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으며, 주체를 죽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반복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성은 정치적인가? 에로스는 정치적인가?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마음이 가을하늘처럼 높고 맑고 순수해진다고 믿는다. 눈물이 고이니까. 그러나 그 눈물은 순수하지 않다. 아주 짜다.

프로이트는 지식의 편집증과 파시즘을 성의 본질로 보았다. 그리움의 눈물이란 연인과 하나가 되고 싶은 충동이다. 그러나 연인은 그 자신의 삶을 가지고 있기에 나와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러기에 그리움이 지나치면 파시스트가 된다. 히틀러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갈구했고 미술대학에 들어가려 했던 것은 그가 그리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반해버리는 군중들도 마음이 여렸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혼자 설 수 없었고 누군가에 의지해야 했지만 연인은 자기를 안아주지 않았다. 대신 그들이 택한 것은 집단 속에서 대장을 신처럼 받들고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고통을 즐기는 마조히즘적 쾌락이었다."

                                                                          -권택영, <부친살해와 패러다임의 전환>, 시학과 언어학, 2호,p.44.


 이 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 타자와 하나가 되려는 욕망이야말로 타자에 대한 일종의 폭력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와 점점 가까워질수록 주체는 점점 자신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주체의 자리는 텅 비게 된다. 프로이트가 얘기한 사도마조히즘의 욕망은 인간과 성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욕망이다. 독재자들이 철저한 사디스트 혹은 마조히스트가 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욕망의 근원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욕망의 충족을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욕망이 채워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욕망을 주체 너머에 위치시킴으로써 욕망의 기표가 비워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의 비움이야말로 우리가 삶의 실체에 다가설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라깡에 의하면 '향락(jouissance)'이란 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보존하고 환상 속에서 그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것을 말한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려던 자아가 향락을 유지하기 위해 그 사이로 미끄러지는 현상을 라깡은 욕망의 그래프를 통해 설명했다. 수학공식처럼 복잡하긴 하지만 이 그래프엔 욕망과 환상, 타자의 삼각관계가 도식화되어 나타난다. 즉, 스스로 증상이길 원하는 욕망은 지연 혹은 미끄러짐을 통해 그 욕망이 충족되기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주체를 빈 공간 속에 남겨둔다. 사회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잉여물로 남길 원하는 욕망이야말로 순수한 의미의 '향락' 혹은 '히스테리' '저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이 채워지는 순간 주체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막스 데미얀    편집 후 올림


출처 : 심리의 바다
글쓴이 : 막스 데미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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