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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 차(茶)의 유래(由來) - Ⅰ 茶文化의 起源地

_______! 2011. 7. 29. 20:35

대흥사에서 두류봉 쪽으로 걸어서 40여분 걸리는 산중턱에 일지암(一枝庵)이 있다. 이곳은 초의선사가 39세인 1824년에 지어 40여 년간 기거한 한국 차 문화 중흥의 상징인 곳이다.


우리 차(茶)의 유래(由來)


서언(序言)



  '마시면 쓰나 목에서 단것은 茶이다.(啜苦咽甘茶也.)'1)《다경(茶經)》에서 茶의 맛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어찌 차(茶)의 그 오묘함을 한 마디로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인류가 차(茶)를 일상에서 사용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어떻게 차를 알게 되었고, 이를 유용하게 식음료로 사용하게 되었을까? 원시인류에게는 먹을거리를 찾는 것이 사는 것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찻잎도 원시인류가 야생에서 여느 먹을거리를 처음 찾았을 때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과정을 밟았을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먹을거리로 차나무를 발견하고 그 잎을 먹어봄으로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여러 번의 시식경험을 통해서 해(害)가 없음을 확인하고 처음에는 식용으로 이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피가 났거나 삐었을 때 환부에 찻잎을 발라보니, 피가 빨리 멈추고 부기도 쉽게 가라앉았던 경험을 하게되었을 것이다. 그 후로는 찻잎에 약리작용2)이라는 특별한 효능까지 있음을 알게 되어 주로 약용으로 쓰였을 것이다.
  문명의 발전을 거듭하던 인류는 농경시대(農耕時代=The Agricultural Age)라는 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농경시대의 도래는 인류에게는 복음과 같은 황금기였다. 많은 곡물을 수확하고 저장하기 위해 필수요소인 저장법을 발견하고 발달시켰다. 이에 힘입어 야생에서 채취한 차나무 잎도 다른 곡물의 저장법을 원용(援用)하는 등으로 장기간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을 터득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차(茶)의 유래는 원시시대로부터 시작하여 농경사회를 거치면서 다양한 식생활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발전하였으며 나아가 기호음료로 크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하겠다. 인류의 생활문화가 크게 발전하자, 차 문화도 더불어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차 문화를 통해서 집단의 정체성을 찾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활용하였으며, 차나무의 대량재배가 성공하자, 큰 부(富)를 창출하는 경제의 한 수단으로 자리도 잡았다. 이제는 차(茶) 문화를 통한 차 산업이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예술계 등 각 분야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크다고 하겠다. 더구나 극동지역에서는 차가 주는 상징성이 유별나기 때문에 그 영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크다고 하겠다.
  정확한 차나무의 원산지(原産地)는 미얀마의 이라와디(Irrawaddy River)강 원류지대로 추정하고 있다. 그곳으로부터 중국의 남동부지역과 인도차이나 일부지역으로 전파되었고, 인도의 아삼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일본은 805년에 사이초(最澄)3)가 중국에서 종자를 가지고 들어가 재배에 성공하였고,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차가 전래된 시기는 신라 선덕여왕 때인 7세기경이었지만 약용이나 음료용이라는 제품의 성격으로 들여온 것이고 직접 종자를 가져와 재배하게 된 것은 828년(흥덕왕 3) 견당사로 갔던 대렴(大廉)이 당(唐)나라에서 중국산 소엽종(小葉種)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었다.4) 차나무 재배가 한분야로 자리를 잡자 근래에는 품종 개량을 통하여 아프리카와 남미까지 차의 재배지가 확대되었다. 이제는 전 세계에 걸쳐 고루 재배하는 작물이 되었으며 인류에게는 귀중한 자산 중에 하나가 되었다.
  본고(本稿)에 들어가기 전에 짚고 가야할 일이 있다. 차(茶)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하니 차(茶)로 불리는 진정한 의미를 살피고 가는 것도 뜻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애용되는 '차'의 종류를 찾아보면, 곡류로 만든 율무차, 옥수수차가 있고, 과실류로 만든 유자차, 모과차가 있다. 식물의 잎을 이용하여 만든 차로는 두충차, 감잎차가 있다. 또 꽃이나 뿌리, 껍질 등으로 만든 국화차, 인삼차, 귤피차도 있으며, 약재로 만든 쌍화차 등도 '차'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와 같이 '차'는 기호음료 전체를 칭하기도 하나, 차(茶)자라는 이름을 쓴다면 원래 차나무 잎을 이용하여 만든 '차'를 지칭하여야 엄밀한 의미로 올바르다 하겠다. 율무차나 인삼차 등은 차가 아닌 탕(湯)으로 불러야 옳을 것이다. 차(茶)는 약용으로 쓰기 시작하였으나 계획적인 다량재배가 이루어지면서 음용으로 완전하게 바뀌었다. 이제는 차나무의 어린잎을 따서 만든 차(茶)음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상이상이다. 차는 최고수준의 기호품이며, 세계최대의 음용량을 기록하고 있는 식음료이다. 차(茶)가 점점 기호식품화하면서 차 문화도 따라서 발전되었으며 다도(茶道)로까지 발전하였다. 이 세상에서 '차'라고 불리는 어떠한 음료도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차(茶)야말로 진정한 이름의 '차'이다.
  또 하나는 당연한 말이지만 본고의 목적이다. 본고에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차나무(茶樹)의 원산지를 찾아보기보다는 음다(飮茶)에 관련된 차문화(茶文化)의 기원지와 그 발전과정을 찾아보는 것이다. 인류가 처음으로 야생에서 차나무를 발견한 그 후에,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차문화를 발전시켰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고대 중국과의 사이에는 차문화를 통해서 상호간에 어떠한 관계에 있었고, 어떠한 영향을 서로 주고받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우리의 상고시대부터 오늘까지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의 차문화가 발전하였나를 살펴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요, 그것으로 본고의 의무를 십분의 일이라도 다했다고 하겠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했다. '옛것을 보고 오늘을 배운다.' 옛것을 유추(類推)한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다. 과거를 모르고 오늘을 이루수 없듯이, 미래도 결국은 과거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훌륭한 밑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오늘은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으니 과거를 아는 것은 오늘을 충실하게 만드는 발판이 될 뿐만 아니라 충실한 미래를 준비하는 첩경이다. 과거는 오늘을 있게 한 디딤돌이다. 과거를 오늘의 현실에 접목시킨다면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좋은 방편이 아닐까한다. 비록 차(茶)라는 좁은 범위의 역사를 살펴보는 정도이지만 이 일도 보다 나은 오늘과 미래를 만드는 일에 일조를 할 것으로 믿는다.  


Ⅰ 茶文化의 起源地


  차(茶)가 인간의 생활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크게 미치기 시작하면서 차를 마시는 음다(飮茶)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각 시대별로 그 기원에 관하여 여러 가지 억측과 설이 무성할 정도로 많이 생겼다. 그렇다고 그 설(說)들을 전부 파헤칠 수는 없으니 그중에서 가치가 있는 몇 가지만 추려서 알아보려고 한다. 차를 고대로부터 적극적으로 실생활에 활용한 국가는 중국이고 차의 문화나 산업도 크게 발달하였다. 따라서 음다(飮茶)에 관한 기록도 풍부할 것이고 그에 관련된 유물도 상당할 것이니 남다를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고대 중국의 차 문화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하겠다.
  음다(飮茶)의 기원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가벼운 이야기 거리로 시작하겠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75∼221)의 명의인 편작(扁鵲)이 아버지를 장사지내자 그 무덤에서 처음으로 차나무가 돋아났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는 동화와 같다. 부처님의 주치의이자 명의였던 기파가 20세에 죽은 딸의 무덤에 약을 뿌려 차나무가 돋아났다는 전설도 재미있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삼국지에 나오는 흥미 있는 이야기이다. 제갈공명이 후주(後主)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에 기록된 '5월에는 노수를 건너 그 거친 오랑캐 땅 깊이까지 들어갔습니다.'5)고 표현했던 남정(南征) 중에 생겼던 일화로 한화운남 다사(閑話雲南 茶事)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공명차산(孔明茶山)이라고 불리리우는 내력, 전설에 삼국시대 재갈공명이 남정(南征)길에 오늘의 맹해현 남나산을 지날 때 병사들이 수토불복(水土不服, 기후나 물이 몸에 맞지 않아서 배탈이 남)하여 눈병이 생기자 공명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남나산 상(上, 정수리)에 꽂으니 이 지팡이가 차나무로 바뀌고, 길고 넓은 찻잎이 나왔다. 이를 따서 달인 물로 장병들의 몸을 씻기고 마시게 하니 모두가 완쾌되었다. 이후로 남나산을 공명차산(孔明茶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차나무의 기원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로 한담(閑談)으로는 제격이다. 그러면 대표적인 학설 네 가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첫 번째 설은 육조설(六朝說)로 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왕자인 달마(達磨)대사와 관련이 있다. 중국 음다(飮茶)의 기원이 육조시대(六朝時代 AD 220∼589)라는 주장은 달마대사의 고사와 연관되어 있다. 달마대사는 인도에서 육조시대 말인 AD 520년경에 양(梁)나라로 건너왔다. 소림사(少林寺) 뒤편의 동굴 속에서 벽을 향해 앉은 자세로 9년간의 좌선을 시작하였다.6) 잠을 자지 않는 상태로 행하는 수행은 처음 3년간은 별다른 무리 없이 잘 진전되었다. 3년이 지나자, 그 후부터는 수마(睡魔)가 선(禪)수행을 극렬히 방해하였다. 달마대사는 천근의 무게인냥 내려덮는 자신의 눈꺼풀을 싹둑 잘라 땅바닥에 내던져버렸다. 얼마 후에 눈꺼풀이 떨어진 그 자리에서 나무 한 그루가 자랐는데 이 나무의 잎을 따서 달여 마셨더니 잠을 쫓는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차나무의 기원이라고 하는데, 이 주장은 확실한 사료적 증거가 전혀 없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 위의 설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두 번째는 서주설(西周說)이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앞으로 많은 관심을 갖고 부단한 연구를 하여야할 중요한 설(說)이다. BC 2세기경에 쓰였다고 전해지는 《이아(爾雅)》에 주공단(周公旦)7)이 '차는 쓴 도다'라고 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 있다.8) 동진(東晋 AD 317∼420)의 상거(常璩)는 《화양국지 파지(華陽國志 巴志)》에 서주(西周)시대 초기(BC 11세기경)에 파촉(巴蜀)지방에서 차의 재배가 행해졌다고 기록되고 있다. 이후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BC 770∼221)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9) 한족(漢族)에 의한 본격적인 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세 번째로 신농설(神農說)이다. 당(唐)대의 육우(陸羽 AD 733-804)가 지은 《다경(茶經), 760년경》에 의하면 '차를 마시는 것은 신농씨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노공(周魯公)에게서 들었다.'10)고 말하고 있다. 또 '염제 신농씨가 식경(食經)에 이르기를 차를 오래 복용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힘 있고 뜻을 기쁘게 한다.'11)고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차(茶)는 신농 황제(BC 2517∼2475) 때인 BC 25∼26세기에 기호음료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신농(神農)씨가 차를 알게 된 사연을 재미있게 그린 이야기가 있다. '신농(神農)씨가 차를 발견한 데에는 두 가지 전설이 내려온다. 첫 번째는 그가 몸소 약초를 씹어 효능을 알아보다가 독에 걸렸었다. 그는 독에 중독이 되어가던 중 불어오는 바람에 신선한 향기를 맡고 그 향기가 나는 나뭇잎을 씹었는데 그 맛이 향긋하였고, 그것을 씹어 넘기자 독이 풀렸다고 한다. 두 번째는 그가 약초를 한 아름 캐어 그것들을 성질에 따라 분류하기 위하여 마당에 쇠 가마를 걸어 놓고 끓는 물에 약초를 넣었다. 물이 끓기 시작하여 신농이 뚜껑을 열고 약초를 살필 때에 우연히 하늘에서 나뭇잎 몇 개가 곧 바로 가마 안으로 날아들었으며 뒤이어 상쾌한 향기가 가마에서 퍼져 나왔다고 한다. 그가 그 물을 마시자 쓰고 떫은 속에서도 뒷맛이 향기롭고 달콤했으며 이상한 기운이 돌며 갈증이 가시면서 피곤이 사라지고 머리도 맑아졌다. 그가 그 나뭇잎이 어디서 왔는지 살폈으나 그 주위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하늘이 도우심을 알고 그 나뭇잎을 찾아 뭇 산을 돌아다니며 그 나뭇잎을 찾아 다녔는데, 결국 그가 찾아낸 것이 야생 차나무였다.'12) 이렇게 해서 차를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음다(飮茶)의 기원으로 믿고 싶어 하는 설(說)이다.
  신농씨(神農氏)는 중국 상고(上古)시대의 전설상의 제왕으로 태호(太昊)복희씨(伏羲氏), 황제(黃帝)헌원씨(軒轅氏)와 더불어 삼황(三皇)으로 불리고 있다. 성은 강(姜)씨라고 전해지며 그 어머니가 신용(神龍)에게 점지를 받아 사람의 몸에다 소의 머리를 한 인신우수(人身牛首)의 신농(神農)씨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신농씨는 화덕(火德)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염제(炎帝)13)라고도 하며 백성들에게 농경을 가르쳤고 백초(百草)를 맛보아 약초의 효과를 가려내 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농업, 의약 등의 조신(祖神)으로 알려져 있으며 위의 이야기와 같이 차와 관련된 기록으로 인해 차인(茶人)들에게는 차 문화의 시조(始祖)로 상징적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삼황(三皇)시대는 아직 문자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선사시대(先史時代)였다. 문자의 발명은 그 후로도 천년이 지난 후인 BC 1600년경인 상(商=은殷 BC 1600경∼BC 1046년까지 실재한 중국 최초의 왕조)대에 와서 처음으로 갑골문자(甲骨文字)가 생겼으며 그 이후로 역사시대(歷史時代)가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내용들은 어디까지나 전설(傳說)로서 전거(典據)가 없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위의 이야기들은 인용된 책의 편찬연대뿐만 아니라 책의 내용 중에 차(茶)를 지칭한 문자의 뜻에도 오류(誤謬)나 오역(誤譯)이 있을 수 있음을 주지해야한다.
  네 번째 마지막 설(說)로는 진한설(秦漢說)이 있으며 가장 사실(史實)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설은 차의 역사적인 사실을 더 먼 옛날의 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뒷받침하는 징검다리 역할로서 매우 중요하다. 이 설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것은 전한(前漢)의 선제(宣帝 BC 74∼49, 제 10대)대에 왕포(王褒)라는 선비가 만든 일종의 노예매매계약서라 할 수 있는 《동약(僮約) BC 59년 1월 15일》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 때문이다. 이 계약서는 현존하는 문헌 중에 가장 믿을만한 사실(史實)로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문헌이다. 그 문서의 내용 중에는 양혜(楊惠)라는 과부의 전남편이 거느렸던 편료(便了)라는 남자 종을 왕포가 1만 5000냥에 샀다는 기록이 쓰여 있다. 또 편료가 종으로 할 일도 여럿 적혀 있는데, 그 중에는 '무양(武陽)에 가서 차를 사오는 일과 손님이 오면 차를 달여서 대접하는 일과 차를 다 마신 후에는 다구를 다시 정리해 놓는 일.(무양매도武陽買荼, 팽도진구烹荼盡具, 포이개장餔已蓋藏)<참고 자료 1 ④>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를 미뤄 짐작하건데 차 마시는 풍습이 전한시대(前漢時代 BC 206∼AD 8)에는 전국적으로 널리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차가 이미 기호식품의 일부분이었으며 손님을 접대하는 귀한 선물의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으로 여러 가지 설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설(說)중에는 전설이나 이야기 거리 수준정도에 불과한 설(說)도 있지만 그 중에 네 번째 설(說)은 역사적 사실로서 설득력과 신빙성이 가장 높다고 하겠다. 따라서 전한의 선제(宣帝 BC 74∼49) 시대에 차의 사용이 크게 성행 했다는 사실을 전거(典據)로 하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차가 기호식품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추론하기는 어렵지 않다. 따라서 차의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서는 최고(最古)의 설(說)인 세 번째 설을 살펴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육우는 '차(茶)는 신농씨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또 한의학 최초의 본초서인《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이나 《淮南子 修務篇》에 '신농(神農)씨는 백가지 풀의 맛을 보고 하루에 일흔 두 가지의 독을 먹었지만 차(茶)로 이를 해독(解毒)했다.(神農嘗百草,日遇七十二毒,得茶而解之)'고 기록하여 신농(神農)씨와 차와는 깊이 관련되어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가장 오래된 한의학의 본초서인 《신농본초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차에 대하여 무엇인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 내용 중에 현대에도 훌륭한 약물로 인정받는 차(茶)에 대한 언급이 어느 부분에 기록되어 있지 않겠냐는 추측과 희망을 가져본다. 그러면 앞서서 《신농본초경》이 무슨 책인가를 알아보자. 이 본초서는 신농씨가 백초를 직접 맛보며 한의학 본초의 틀을 세웠다는 책으로 신농씨가 차지하는 상징성이 대단히 높다. 한의학분야에서는 고대로부터 본초 분야의 절대적 위치에 있고, 예부터 한방의서의 원본으로 인식되어져 왔다. 따라서 본초학의 문헌으로 한의학 본초사(本草史)에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책은 신농씨가 직접 저술한 책이 아니다. 고대 중국의 문화적 특징 중의 하나가 뛰어난 저작을 특정 성인에게 가탁(假託)하여 권위를 부여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 책도 다름없이 그에 따랐다. 《신농본초경》은 신농(神農)씨로부터 3000년이나 지난 후한시대(後漢時代 AD 25∼220) 말(末)에 편찬되었다. 그동안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사학상전(師學相傳)하던 것을 장중경(張仲景 AD 150∼219)이 오랜 세월에 걸친 의학적인 경험과 판단으로 집성편찬(集成編纂)한 것이다. 그것을 그 당시의 관습에 따라 한의학의 비조(鼻祖)로 숭앙되고 있는 신농씨(神農氏)의 이름을 빌어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이라 한 것이다.14)
  지금부터는 《신농본초경》에서 차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 차(茶)는 신농씨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럼 기재된 약물 중 현재 우리가 마시는 차는 어떻게 설명되고 있을까? 본문에는 우리가 흔히 차의 한자로 알고 있는 '차(茶)'나 '명(茗)'에 대한 설명은 애석하게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간혹 차의 옛말이라고 하는 고채(苦菜)에 대한 언급이 상품(上品)에 나온다. 그런데 이 '고채'가 '차'와 동일한 식물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다. 우선 고채(苦菜)의 채(菜)라는 글자는 차나무 같은 목본식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초본식물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고, 요즈음 한의학에서 생약으로 쓰는 고채(苦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씀바귀를 말하며 국화과의 다년생의 풀이다. 그렇다고 다른 식물이라고 결론을 내리기도 쉽지 않다.
  '고채는 차가 아니다.'라고 단정할 수가 없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쓰는 차(茶)라는 문자는 예전에는 수없이 다르게 썼다는 기록 때문이다. 곽박(郭璞 AD 276∼324)에 의하면 '촉 지방의 사람들은 천(荈)을 고도(苦荼)라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BC 2세기경에 쓰였다고 전해지는 《이아(爾雅)》「釋木第十四」에 주 노공(周魯公)이 '가는 쓴 도다.(檟, 苦荼.)'라고 말했다는 기록으로 봐서도 오래전부터 차(茶)를 다른 명칭으로 부르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아주소(爾雅住疏)》에도 '촉인들이 가(檟)를 고도(苦荼)라고 불렀다.'고 말하며 촉(蜀)이라는 특정 지역을 언급하고 있다. 이 촉(蜀)이 바로 오늘날 사천성 지역을 의미하는 지명이다. 특히 두 번째 서주설(西周說)에서 말한 파촉(巴蜀)지방은 지금의 귀주성(貴州省)과 사천성(四川省)에 걸친 지역으로 운남(雲南)과 더불어 차의 원산지이며 차재배가 성행하는 지역이다. 《다경》에는 양집극(揚執戟)이 '촉의 서남쪽 사람들은 차를 일러 설(蔎)이라고 부른다.'15)라는 문구가 나오고 있어 촉 지방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차에 대한 명칭이 여러 가지로 불릴 정도로 차에 대한 정보도 많았고, 그들 특유의 차 문화도 일찍부터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화양국지》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상(商)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할 때, 파촉지사(巴蜀之師)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때 파촉에서 주나라 왕실에 바치는 공물에는 차(茶)도 들어있었다.'16)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도 그 지방에서는 특산물로 차의 재배가 크게 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것은 본초서(本草書)에는 시대가 한참 흐른 뒤인 당대(唐代 AD 618∼907)에 와서야 고채(苦菜)와 차(茶)를 구별해서 수록하였다는 점이 이상하지 않은가? 또 하나는 이제는 고채와 차는 다른 것이었구나! 하고 단정할 수 있는가? 이것 또한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신농본초경》저술 당시의 고채(苦菜)가 무엇이었느냐 하는 의문은 분명히 있더라도 - 초본식물로서 고채(苦菜)인 도(荼)이냐? 아니면 목본식물로서 차(茶)를 의미하는 고채(苦菜)인가? - 이후 당(唐)대에 와서야 차(茶)와 고채(苦菜)를 구분한 것으로 미루어 그때까지 한의학에서는 차(茶)를 계속해서 고채로 보아 왔을 것이라는 의견이다.17) '신농(神農)씨가 여러 가지 풀을 맛보다 중독되어 차를 마시고 해독했다.'는 기록이 보여주듯이 당나라 이전까지는 차(茶)와 도(荼)가 - 도(荼)자가 더 많이 쓰였다. - 기호음료보다는 약초의 하나로 폭넓게 활용되고 있었으므로 굳이 고채(苦菜)와 차(茶)를 구분하지 않았다.18) - 지금까지도 중국에서는 차(茶)가 음료인 동시에 약이라는 중층적(重層的) 인식을 가지고 있다. - 차(茶)는 당(唐)의 육우(陸羽 AD 733∼804) 때에 와서야 비로소 약용보다는 기호품으로 더 크게 인식되고 보편화되었으며, 차(茶)자도 '마시는 차'라는 의미로 정착이 되었다.
  중국인의 전통적인 인(飮)에는 차(茶)와 쥐우(酒)의 뜻이 포함되어있다. 당나라에 와서는 차 마시는 풍조가 전국적으로 넓게 퍼졌다. 음다가 일상의 습관으로 완전하게 자리를 잡게 되자, 술을 대신하여 차가 손님을 접대하는 음료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당시의 문인들은 술 대신에 차를 마시며 고아한 정취를 즐겼다는 일화도 많이 남아있다.19) 그리고 한 가지 부언할 것은 차(茶)라는 말의 어원의 변천이다. '도'에서 '다'로 명칭이 완전히 변하는 과정은 차가 약용(藥用)에서 음용(飮用)으로 바뀌는 시기와 맞물린다는 점도 참고하였으면 한다.20)
  차(茶)자는 당(唐) 고종(高宗 3대) 현경(顯慶) 년간(AD 656∼660)에 소공(蘇恭)이 당(唐)《본초(本草)》를 중수(重修)한 이후, 다사(茶事)에 대한 기술은 모두 차(茶)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더 이상은 도(荼)자가 차(茶)자를 대신하는 일은 없었다.《당운(唐韻)》에 '도(荼)는 중당부터 또한 차(茶)자로 했다.(도자중당荼自中唐, 역작차亦作茶.)'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차(茶)자와 도(荼)자를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문종(文宗 AD 827∼840)이 이제까지 차(茶)자를 대신하여 사용해오던 일체의 모든 별명(別名)을 폐용(廢用)하고, 오직 차(茶)자 하나만을 사용하도록 통일하였다. 그 이후로 '마시는 차(茶)'의 의미로 오직 차(茶)자만을 쓰게 되었으며, 오늘에 와서는 마시는 음료를 총칭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차문화의 기원을 찾기 위해 첫 번째 시도로 신농설을 입증할 수 있는 '사실(史實)에 입각한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신농설이 내세우는 '약용과 음용의 시작은 신농씨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의 근거를 찾기 위하여 신농설을 뒷받침하는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을 위시하여 각 시대에 저술한 대표적인 문헌들을 살펴보았다. '본초서'를 중심으로 찻잎을 '약초'로 이용한 기록들을 찾아보았으며, 또한 관련된 각종 문헌에 나타난 세시(歲時)와 차자(茶字)에 관한 문자의 기록들도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고대부터 사용되던 차와 관련된 문자가 오늘의 차(茶)자로 발전내지 변천되어지는 과정을 밝힐 수가 있었다. '차라는 문자는 한 문화의 뿌리가 아니었고, 일관되게 똑같은 과정으로 변모하지도 사용되지도 않았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그것은 '차를 상징하는 문자는 그 발생지가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문화연원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회ㆍ환경적인 배경이 달랐고, 지역마다 독특한 언어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통일성이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차'라는 문자는 용도가 약용이나 음용 중에서 어느 것에 중점을 두었느냐에 따라서도 명칭을 틀리게 사용하였음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도(荼), 가(檟), 설(蔎), 천(荈), 명(茗), 고도(苦荼=皐蘆)' 등으로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별개처럼 다르게 불리었어도 그 의미는 차(茶)를 지칭'함을 알게 되었다. 문자로서는 통일성이 없었다 하더라도 같은 의미로서 사용하였던 동의어(同義語)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신농설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실적(史實的) 근거를 찾지 못하였음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불행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다경》과 《신농본초경》, 《淮南子》이외의 어떠한 문헌도 위의 사실을 결정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별다른 기록-유사한 기록 외에-을 전(傳)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신농씨가 생존했다고 하는 BC 25∼26세기에 음다의 풍속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 증빙할만한 근거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기록이나 주장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함에도 차(茶)에 대한 연원(淵源)으로 가장 오랜 기록인 신농설을 내세우는 이면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한다. 신농씨와 밀접하게 연결 지어 말하는 것은 신농씨가 삼황오제시대를 연 신화적 인물일 뿐만 아니라, 농업과 의약 등의 조신(祖神)으로 불리어지고, 차 문화의 시조(始祖)로 숭앙받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에 관계없이 신농설이 주는 의미는 중화권의 차문화를 굳건하게 세우고 만드는 정신적 지주의 시원(始原)으로서는 그 영향이 넓은 범위에 걸쳐 대단히 크게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는 역사적인 사실관계와는 별개인 또 다른 문제이다.21)
  그렇다면 우리가 찾고자 하는 해답은 어디에 있을까? 언제부터 차를 음용하기 시작하였을까? 정확한 역사적 사실로서 그 시기는 언제였을까? 이제는 역사적 고증을 갖고 있으며, 진한설(秦漢說)을 주장하며 내세우는 근거의 하나인 《동약(僮約)》을 토대를 실마리를 풀어보자. 전한(前漢 BC 206∼AD 24) BC 59년에 왕포(王褒)가 만든 《동약》의 기록을 미뤄보면 차를 이용하는 풍습이 일반인에게까지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폐쇄적인 정치ㆍ사회질서아래에서 이러한 풍습이 일반인에게도 보편화 되었다는 것은 일부 왕족이나 귀족들 사이에서는 오래 전부터 차를 약용이나 음용으로 꾸준하게 사용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차를 처음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차가 흔히 볼 수 있는 값싼 물건이 아니었다. 귀한 물건 중에 하나이고, 당연히 값도 고가였다. 따라서 처음에는 특정한 부류의 계층에게만 통용될 수밖에 없었다.22) 그러다가 차츰 차의 용도가 다양해지고, 많은 수요에 비례해서 생산량도 증가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일반백성에게도 차를 이용하는 풍습이 전하여졌으며, 나중에는 《동약》의 내용처럼 전국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차가 상품(약용이나 기호식품)의 하나로 완전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차는 단일 품목으로서도 상거래가 가능할 정도로 수요도 크게 늘었다. 이만큼이 되기까지는 차를 처음 들여와 이용하기 시작하였던 시기에서 오랜 시간이 경과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동약》의 기록은 BC 59년보다 훨씬 이전부터 차를 이용하고 있었음을 추론케 할뿐만 아니라, 문헌상으로 '가장 오래된 차의 상품화'를 말해주고 있으며, 또한 '최초(最初)의 차의 상거래'를 증명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두 번째의 서주설(西周說)에서 잠깐 언급하였지만 《화양국지(華陽國志) 파지(巴志)》에는 'BC 11세기경에 서주(西周)의 파촉(巴蜀)지방에서 차의 재배가 행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주(西周)의 무왕(武王)이 상(商)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할 때, 파촉지사(巴蜀之師)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때 파촉에서 주나라 왕실에 바치는 공물에는 차(茶)도 들어있었다.'고 말하고 있다.16) 그렇다고 그 시기부터 음다 풍속이 성행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차와 관련하여 이를 뒷받침할 공식적인 기록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이를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름을 인정하여야 한다. 하지만 당시 중화문화권으로 대변되는 중원문화권에 포함되지 않았던 파촉(巴蜀)에서는 오래전부터 음다의 풍속이 활발하였고, 보편화되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지금까지 관련 된 여러 정황이나 문헌에 나타난 근거로 살펴보았을 때 중국의 음다(飮茶) 풍속은 지금으로부터 3,000여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그 지역은 별개의 문화연원을 가지고 있었고, 차나무가 자생할 수 있는 생태환경적인 요소가 충분하였던 서남부(西南部)지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파촉지역에서 차나무에 얽힌 여러 사실을 더듬으면 실마리가 풀릴 것이고, 그것이 주는 의미는 음다의 풍속을 3,000여 년 전으로 끌어 올리는 첩경이 될 것이다.
  황하 일대에서는 하,상,주((夏,商,周) 삼대(三代)라고 불리는 고대 세 왕조가 중원문화권(황하문명)을 형성해나갈 즈음에, 동정호(洞庭湖) 주변과 사천분지(四川盆地)를 중심으로 하는 서남부지역에는 고촉국(古蜀國)이라는 독자적인 남방문화권이 형성되고 있었다. 신석기시대를 이어오면서 중화문화권과 별개의 새로운 문화는 BC 25∼26세기경부터는 독특한 특징을 갖춘 남방문화(사천문명)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23)
  1929년 봄, 사천성 성도에서 22㎞ 가량 떨어진 광한성(廣漢城) 서쪽마을에서 밭일을 하던 농부가 도랑에서 옛날 것으로 보이는 물건을 여러 개 발견하였다. 우연히 발견한 그 유물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각종 옥석기물(玉石器物)이었다. 짙은 옛 촉나라 지역의 특색 있는 옥기여서 학자들에게 큰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광한옥기(廣漢玉器)로 불리는 고촉국의 유물이었다. 그 후 고고학자들이 그 부근을 여러 차례 조사했지만 더 이상 유물을 발견할 수 없었다. 1986년에 이르러 그토록 찾으려하였던 유물은 이번에도 우연하게 발견하였다. 흙을 틀에 넣고 다져서 담의 외곽선을 만드는 식으로 축조된 성벽(版築城壁)으로 이루어진 성터를 찾아냈다. 성(城)의 크기는 남북의 길이가 약 2,000m이고, 총면적은 3.6㎢나 되는 평면상으로 불규칙한 장방형의 형태다. 성벽의 아래쪽 폭은 40m이고, 상부의 폭은 20m, 높이는 8∼9m나 된다. 상(商)나라 초기(初期)의 수도였던 정주(鄭州)의 상성(商城)과 비슷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훗날 '삼성퇴(三星堆)'라고 이름 붙여진 이 유적지는 발굴 지층으로 보아 약 3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심지어는 5천 년 전의 유물도 발굴되었다. 대략 BC 3000∼1000년(5천년∼3천년前)사이의 고촉국(古蜀國)이라 부르는 옛 촉나라 왕국의 유적지로 밝혀졌다. 성벽은 3대 어부왕(魚鳧王)이 촉 지역을 통일한 후인 상(商=殷)나라 초기와 같은 BC 16세기경에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두우왕조까지 도성(都城)으로 사용하였다. 서주(西周)가 상(商)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한 BC 11세기경부터는 고촉국이 성도(成都)의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삼성퇴 유적지는 쇠락(衰落)의 길로 접어들었다.
  고고학자들은 삼성퇴 유적지의 성내 남서부에 있는 높은 언덕에서 제사를 지냈던 흔적이 남아있는 2개의 제사갱(祭祀坑)을 비롯하여 18간(間)의 주거유적(房屋)과 여러 곳의 유적을 추가로 발견하였다. 출토된 유물 중에는 수백 그램에 불과한 조그마한 금기(金器)부터 무게가 1톤이 넘는 청동 주조물도 있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수천 점에 달하는 유물들은 제기(祭器), 금장(金杖), 청동인(靑銅人)과 함께 500여점의 옥기(玉器)와 석기(石器), 80여개의 상아(象牙), 다량의 자패(紫貝)도 포함하고 있었다. 삼성퇴의 유적으로 인하여 사천문명을 대표하는 고촉국의 찬란했던 남방문화의 비밀이 세상 밖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24)
  고촉국은 강족(姜族)이 주가 되어 세운 국가이며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제정일치(祭政一致)의 국가였다. 오랫동안 촉 지방에서 독자적인 남방문화권을 형성하며 중원문화권과 대등한 존재로 존속하였다. 전국시대 이전의 고대 사천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가장 상세히 전해주는 문헌자료로서 양웅(揚雄)의 《촉왕본기(蜀王本紀)》와 《화양국지(華陽國志》가 있다. 《화양국지》에서는 촉국의 시조인 잠총(蠶叢)을 위시하여 백관(柏涫), 어부(魚鳧), 두우(杜宇), 개명(開明) 으로 고촉국의 계보가 이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25) 양 문헌에는 '어부왕이 전산에서 밭을 일구었다.(魚鳧王田於湔山)'고 하여 고촉국의 어부왕 대에 이미 농경을 행하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두우왕(杜宇王=망제望帝, 4대) 때는 백성들에게 농사에 종사하도록 독려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뤄보면 고촉국은 이미 농업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였으며 국가경제와 사회규범도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삼성퇴 유적이 위치하는 일대는 민산산맥(岷山山脈)에서 흘러내리는 민강(岷江)과 타강(陀江)의 퇴적층에 의해서 남쪽의 성도(成都)보다 약간 높은 선상지(扇狀地) 전면의 가장 비옥한 부분에 있었다. 이 지역은 벼농사를 기반으로 한 정주취락(定住聚落)으로는 안정적인 발전이 보장된 천혜의 장소였다. 당시의 고도로 발달된 문화수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 인류의 기술적 진보를 상징하는 옥기(玉器), 청동기(靑銅器), 금기(金器)의 제조는 최고의 첨단기술을 요구하는 주력산업이었다. 다량의 청동기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동ㆍ아연ㆍ주석 등의 자원이 필요하다. 채광(採鑛)을 비롯한 제련(製鍊)기술도 갖추어야 한다. 금속재료학에 정통해야하고, 원료의 확보를 위해서는 지질학과 토목지식도 필수적인 요소 중에 하나다. 아울러 고도의 주조기술은 물론이고, 일관된 제조과정의 확립과 이에 필요한 체계적인 관리도 필수적이다. 당연히 이에 필요한 엄청난 노동력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이 뒤를 받쳐야한다. 이와 같이 청동기의 제조는 대규모의 노동력과 함께 원료자원의 확보를 위하여 넓은 규모의 지역을 장악할 수 있는 큰 세력의 정치권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고촉국(古蜀國)은 BC 11세기경부터 BC 223년 진(秦)의 혜왕(惠王)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의 800년간은 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장강(長江)유역의 많은 나라들을 정복하여 다스렸다. 여러 민족의 서로 다른 문화를 하나로 결집하여 국력을 최대로 키웠다. 경제와 문화가 크게 발달하고 번창하였던 춘추전국시대에는 최대의 영토를 가진 나라였으며, 부력(富力)과 강력(强力)이 인접국을 압도하던 대국이었다.26)
  삼성퇴에서 출토한 유물들 중에는 고촉국의 고유한 특징 속에 다른 문화가 유입되어 혼합된 형태의 유물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는 하(夏)대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고, 당시로서는 접촉이 불가능할 정도로 아주 먼 문화권에서 발굴된 유물들과도 유사한 형태를 가진 것도 있다. 삼성퇴 유물의 2차 발굴보다 20여 년 전인 AD 1959년에 하남성 언사현에서 오랜 유적지가 발견되었으며 정(鼎)이나 분(盆) 등 여러 종류의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유적지는 초기 청동기문화로 후에 하(夏)나라의 유적지로 추정하고 있다.27) 그런데 삼성퇴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물 중에는 하(夏)에서 발굴된 유물들과 비슷한 유형의 유물들도 상당수 들어있음을 발견하였다. 도기로 제작된 그릇(盉), 술잔(觚), 제기(豆)는 물론이고, 항아리(罐)같은 일정한 크기를 요(要)하는 기물(器物)도 작은 크기에 밑바닥도 평평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언사현에서 출토한 하(夏)의 유물과 비교하면 양자의 형태에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문화의 흔적은 청동조각상이나 금장(金杖) 등에 남아있다. 남미의 고대 마야문화나 이집트 문화와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청동가면은 대부분 코가 높이 솟고, 눈이 큼직하다. 금으로 만든 옥장(玉杖)은 고대유럽지역에서 사용하였던 유물과 유형이 같다. 눈부신 황금으로 만든 금장(金杖, 나뭇대를 싸고 있는 황금 박판지)은 무게가 486 그램에 길이가 142㎝나 되고, 그 표면에는 유려하게 선각된 새, 물고기, 인두(人頭) 등을 그려 놓았다. 이런 종류의 유물은 하(夏)의 문화로 추정되는 이리두문화와는 또 다른 유형의 문화임을 말해주고 있다. 제사갱(祭祀坑)에서 발굴한 80여개의 상아(象牙)도 당시로서는 아주 먼 지역과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출토된 유물에 남겨진 다른 문화의 뚜렷한 흔적은 고촉국이 번창하였던 시기에 서아시아, 근동, 유럽과 직간접의 문물교류가 꾸준하게 이뤄지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러 문화의 특징이 혼재된 유물'이 말해주는 것은 보다나은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였음은 물론이고, 고착문화에 슬기롭게 응용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위의 유물들은 당시의 고촉국이 얼마나 대외개방적인 체제아래에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夏)를 비롯하여 모든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특히 고촉국은 해양 루트를 통해서 들어오는 해양문화나 타 대륙의 문화를 결집하여 북방문화와 연결하는 중간지라는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잇점(利點)을 십분 활용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먼 남양의 문물과 황하유역의 문물을 중계하여 큰 경제적 이득을 얻었음은 물론이고, 양 문화의 교류에도 가교역할을 함으로서 다양한 문화를 흡수할 수 있었다. 자신보다 발전된 문물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렸을 것이고, 당연히 비교우위에 있는 자신들의 문물도 전파 하였을 것이다. 삼성퇴 유적은 고촉국의 문화와 국력이 어느 정도 수준의 국가였는지를 단적으로 대변해주고 있는 증좌(證左)라 할 수 있다. 그 당시 중원(황하유역)지역의 패자인 하상주(夏商周) 삼대(三代)와도 비견할 수 있는 잘 발달된 높은 수준의 문화는 어떠한 외세의 위협에도 맞서 싸울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추도록 하였다. 이 힘은 고착문화에 다양성을 융해시켜 만든 어울린 문화가 높은 수준으로 발달함으로서 가능하였으며, 이 어울린 문화의 힘은 고촉국으로 하여금 삼대(三代)와 대등한 위치에서 1,500여 년간을 공존(共存)하며 발전하게 하였던 원동력이었다.28) 이처럼 고촉국은 오랜 시간 촉 지방에서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면서 중원문화권과 대등한 존재로 존속하였다. 그것은 또한 문화의 일방적인 편중은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상호간의 교류를 통해서 상대적으로 보다나은 문화를 주고 받으며 공존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고촉지역은 운남대엽종(중국대엽종=VAr, macrophylla) 차나무의 자생지이다, 고촉인들은 그 찻잎을 이용하여 차를 만드는 비법을 알고 있었다. 또한 차나무와 찻잎을 가지고 여러 가지 용도로 이용할 줄 아는 지식도 가지고 있었다. 삼성퇴에서 출토된 제기용 청동준(靑銅尊)과 도기로 만든 그릇이나 잔들을 보고 있으면 희망적인 큰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 기물들은 차를 마셨을 때 사용하였거나 그렇지 않으면 차 종류를 넣어 두는 저장용기로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성퇴 유물은 차문화의 전파에 관한 단초(端初)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본다면, 비교우위에 있던 고촉국의 차문화가 자연스럽게 삼대(三代)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친다. 삼대(三代)와의 수많은 교역물품 중에 지역 특산물인 차(茶)도 거래품목 중에 하나였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거래를 하면서 차를 이용하는 다양한 방법과 함께 음다의 풍속도 상(商)나라를 비롯한 삼대(三代)에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주(西周)의 무왕(武王)이 상나라와의 전쟁29)을 앞두고 파촉에서 받은 공물 중에 귀한 물건의 하나인 차(茶)가 들어있음은 당연하다 하겠다. 차문화는 고촉국으로 대변되는 남방문화권으로부터 너무나 자연스럽게 중원문화권으로 전파되었다. 드디어 차(茶)문화의 황금기로 향하는 길이 인류의 앞에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이 기념비적인 일은 오늘날 전 세계에 차(茶)문화가 뿌리내리는 계기가 된 역사적인 첫발자국이 그려졌음을 뜻하는 것이었다고 조심스럽게 결론지어본다.

* 힘등 여정이었지만 오랜 진통 끝에 무사히 '본고'를 끝마쳤다. 뒤를 돌아보니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아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 기회에 더 많은 자료를 준비하여 보충하기로 하겠다. 그리고 다음 편은 차와 관련된 상고시대를 돌아보고, 자생차와 전래차에 대해 같이 연구해 보았으면 한다.

 




1) : 《다경(茶經)》下「五之煮」, '其味甘檟也, 不甘而苦荈也. 啜苦咽甘茶也.(그 맛이 단것은 檟라하고, 달지 아니하고 쓴것은 荈이라 한다. 마시면 쓰나 목에서 단것은 茶이다.)'

2) : 차의 약리작용에 대한 참고자료

  석용운, 1993, 《韓國多藝》

  차는 카페인, 탄닌, 비타민 C가 주성분이다. 이들 여러 가지 성분이 합쳐져서 일으키는 복합작용이 인체에 신비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성인병 질환인 고혈압이나 동맥경화를 예방할 뿐만 아니라 제암(制癌) 효과도 있으며 현대병의 근원인 콜레스테롤을 축출하고 알콜을 해독하며 식욕을 증진시키고 소화를 돕고 변비도 치료해 준다고 한다. 이외에도 충치를 예방하며 눈병에도 효과가 있으며 피부병에도 사용하며 잠을 쫓고 기억력을 증진시켜 정신활동을 고무시켜 준다고 하며 피로도 풀어 주고 조혈작용을 도우며 괴혈병 등을 예방해 준다. 또 비만에도 좋으며 이질이나 설사병에도 효과가 있고 피부와 모발을 부드럽게 해주며 당뇨병을 예방하고 현대인의 스트레스 해소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병중에 신이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지만 특효약이라고까지 말할 수 없고 오직 장복을 하면 아래와 같은 효험을 볼 수가 있다는 말이다.

차의 여섯 가지 덕(六德)
  첫  째 - 오래 살게 하고
  둘  째 - 병을 낫게 하고
  셋  째 - 기운을 맑게 하고
  넷  째 - 마음을 편안케 하고
  다섯째 - 신선 같게 하고
  여섯째 - 예의롭게 한다.

(1) 카페인(caffeine)의 효능
  순수한 카페인은 백색의 가벼운 명주실 같은 광택이 있는 6방정형(六方晶形)의 침상(針狀 : 바늘) 결정체이다. 이 카페인의 발견은 1820년 커피 속에서 처음 찾아내었고 그 후 7년 뒤에 차 속에서 카페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후에 연구가 진전되어 코코아, 마테, 구아나라 등 식품에도 들어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이 카페인이 차를 약용으로서 또는 기호음료로서 오랫동안 애음하게 한 주요성분이다. 이 성분의 3대 약리작용은 첫째 각성작용, 둘째 강심작용, 셋째 이뇨작용을 말한다.

  첫째 각성작용이란 카페인이 대뇌피질(大腦皮質)의 감각중추(感覺中樞)를 흥분시켜 일으키는 현상으로 피로회복이 빨라지고 정신적 활력이 생겨나 기분이 상쾌해지고 판단력이 늘고 사고에 대한 집중력이 생기고 조용한 흥분작용과 내구력의 증대, 상황에 대한 인식 및 기억력의 증대와 침착한 행동력이 생겨난다. 커피와 달리 차는 조용한 흥분작용을 일으키는데 그것은 커피 속에 들어 있는 카페인은 유리형(遊籬形) 결정이고 녹차의 카페인은 결합형(結合形) 결정이기 때문에 커피의 카페인은 일시에 흥분상태를 일으키는 반면 녹차의 카페인은 서서히 풀려 천천히 흥분작용을 일으킨다. 또 녹차에는 흥분상태를 억제하는 「테아닌」이라는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흥분작용을 억제시켜 준다. 실제로는 커피보다 녹차에 들어 있는 카페인의 양이 더 많다. 같은 양의 커피에는 1 - 2% 정도라면 녹차에는 2 - 3%의 카페인이 함유되어 있다.
  둘째로 강심작용이란 심장의 운동을 활발하게 하는 작용이니 적당량의 카페인을 섭취하면 심장횡문근(心臟橫紋筋)에 직접 작용하여 관상동맥(冠狀動脈)이 확장되어 혈액순환이 잘 되므로 약해진 심장이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추위나 소심한 생각으로 수축된 심장활동을 강화시켜서 튼튼한 심장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강심작용(强心作用)을 말한다. 심장이 약해지면 잘 놀래거나 가슴(심장부위)에 통증을 호소하거나 매사에 자신감을 잃고 적극적이지 못하면 두려움을 갖는다. 이러한 사람은 심장활동이 약해져서 생기는 현상으로 차를 장복하면 효과를 볼 수가 있다.
  셋째로 이뇨작용(利尿作用)이란 소변(오줌)이 잘 통하도록 하는 작용으로 신장(腎臟)의 혈관을 확장시켜 주어 배설작용을 촉진시켜 준다. 이 작용으로 몸속에 들어 있던 노페물이나 유독성분이 몸 밖으로 배출된다. 이렇게 해서 사지(四肢)의 근육을 강화시켜 주고 피로를 회복시켜 주고 알콜이나 니코틴 등의 독성을 해독시켜 주는 작용을 한다. 토끼에 알콜을 주사하면 취해서 축 늘어지는데 이때 카페인을 주사하면 곧바로 회복되어 살아난다. 또 술에다 차를 타서 말시면 술이 중화되어 취하지 않는다.
  이밖에 두통(頭痛)을 치유해주는 효과와 감기 몸살을 풀어 주고 차멀미, 배멀미 등을 예방해 준다. 미국 보건성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미국의 많은 심장병 환자 대부분이 커피의 애호가로서 커피에 함유된 유리형 카페인의 영향을 받아 심장이 약해져서 생긴 환자라고 한다. 그래서 임신부가 커피를 많이 마시면 태아 발육부진으로 기형아를 낳을 확률이 많다고 했다. 또 어린이가 많이 마시면 심장에 자극을 주어 해로우며 습관성까지 유발 한다고 했다.
  그러나 녹차에는 「데오피린」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 카페인을 중화시키고 「테아닌」의 억제작용으로 심장병을 유발시키는 일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녹차에 들어 있는 결합형 카페인은 차를 마신 지 40분 정도 지나서 조용한 흥분작용을 나타내 약 1시간 정도 지속된다. 그러므로 차를 마시면 약 2시간 정도 차의 작용이 지속되어 정신이 맑아지고 머리가 상쾌하여 잠이 오지 않는다.

(2) 탄닌(tannin acid)의 효능
  탄닌은 단일 물질이 아니고 몇 가지 복합성분으로 산화가 잘되고 흡수성이 강하다. 차를 냈을 때 신 맛과 떫은맛을 내는 것은 탄닌과 그 유도체의 영향 때문이다. 고급차일수록 많고 쉽게 변한다. 탄닌의 효능을 보면 첫째 해독작용(解毒作用), 둘째 살균작용(殺菌作用), 셋째 지혈작용(止血作用), 넷째 소염작용(消炎作用)이 있다.
  첫째로 해독작용이란 탄닌이 식물체(植物體) 속에 들어 있는 독성분인 알카로이드(alkaloid) 성분과 결합하여 불용해성화(不溶解性化)시켜 인체(人體)에 흡수되지 않고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작용을 말한다. 대체로 많은 식물에 들어 있는 독성분은「알카로이드」라는 성분으로 담배에 들어 있는 「니코틴」도 알카로이드의 일종이다. 담배가 해롭다고 하는 것은 니코틴과 타르를 흡수하기 때문이다. 이때 차를 마시면 탄닌이 니코틴과 결합하여 몸에 흡수되지 않고 체외로 배출된다. 이로써 담배의 해를 줄일 수 있다. 또 금속류(金屬類)와도 잘 결합하여 침전시키기 때문에 유해성 중금속의 해독작용도 한다. 찻잔이나 차에 철분이 있으면 쉽게 변한다. 그러므로 탄닌은 인체에 흡수되는 유해금속을 침전시켜 배출시키는 해독작용을 한다.
  둘째로 살균작용이란 탄닌이 균체에 침투하여 단백질과 결합하여 응고시켜 병원균을 죽게 한다. 많은 병원균(病原菌)은 단세포동물(單細胞動物)로서 세포가 하나밖에 없는 진화가 안 된 동물이다. 이 단세포 병원균은 그 원형질(原形質)이 단백질로 되어 있다. 이 단백질을 탄닌이 응고시켜 원래 작용을 못하게 하니 병원균은 죽고 만다. 이렇게 해서 탄닌은 살균작용을 하는 것이다.
  셋째로 지혈작용이란 탄닌의 수렴작용으로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여 지혈이 된다. 부상을 당하여 상처에 피가 날 때에는 가루차(분말차)를 상처에 뿌려 출혈을 막는다. 또 이 수렴작용으로 설사나 이질을 치료할 수가 있다. 탄닌은 장과 위의 점막을 보호하고 그 활동을 촉진시키므로 설사를 멈추게 한다.
  넷째로 소염작용이란 독충에 물려서 빨갛게 열이 나고 부어오를 때 차 우린 물을 바르고 수건에 적셔 습포를 해주면 열도 내리고 부기도 가신다. 이때는 차를 진하게 우려 탄닌 함유량이 많도록 해야만 효과가 있다.

3) : 일본에는 언제쯤 차가 전래 되었을까? 일설에는 사이초(最澄, 일본 천태종의 開祖)가 AD 805년 당(唐)나라 천태산에서 차(茶)씨를 가져와 히에이잔(比叡山)의 사카모토(板本)라는 곳에서 재배에 성공하여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사카모토 다원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다원으로 현재까지도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나 차와 관련된 공시적인 기록은 'AD 815년에 에이추(永忠)선사가 사가(嵯峨, AD 786∼842)천황이 숭복사에 들렀을 때 직접 차를 끓여 천황에게 대접하였으며, 전차(煎茶)의 맛을 본 천왕이 선사에게 긴끼(近畿)지역에 황실전용 다원을 만들도록 하고, 차를 장려하였다.'는 기록이 일본에서 차와 관련하여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후 당풍(唐風)의 끽다취미가 상류 귀족계급사이에 크게 보급 되었으며, 당의 단차(團茶, 둥그런 형태로 긴압성형(緊壓成型)해서 만든 차)가 유행하였다고 전해진다.

4) : 《삼국사기》흥덕왕(AD 826∼836 在位, 第 42代) 3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온 대렴(大廉)이 차(茶)씨를 갖고 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더불어 차는 이미 선덕왕(AD 632∼646 在位, 第 27代)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행하게 되었다는 기록도 같이 나온다.
  -중략-'12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어 조공하였다. 문종(文宗)이 인덕전에 불러 선물을 주고 연회를 베풀었다. 당에서 돌아오는 사신 대렴(大廉)이 차(茶)의 종자를 갖고 오매 왕은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하였다.'-하략-
  《三國史記》 券10「新羅本紀, 興德王」
  -中略-'三年冬十二日{月}, 遣使入唐朝貢. 文宗召對于麟德殿, 宴賜有差. 入唐廻使大廉, 持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 茶自善德王時有之, 至於此盛焉.'-下略-

* 召對.....召命을 받고 入對함.
* 麟德殿...唐나라 宮殿의 이름.
* 大廉.....新羅 興德王 때의 朝臣.
* 地理山...智異山의 異稱.

5) :
  중국 전국시대의 명의인 편작(扁鵲)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를 장사지낸 무덤에 처음으로 돋아났다는 전설이다. 편작의 아버지는 8만4천의 약방문을 알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6만2천에 대해서는 그의 아들 편작에게 전수하고 나머지 2만2천은 차나무로 남겼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차나무는 비방(秘方)덩어리인 셈이다. 그래서 나무인지 풀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워 풀(艸)과 나무(木)를 합쳐서 차(茶)라고 적었다는 것이다.
  불제자인 의원 기파(耆婆)가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스무 살 된 딸이 숨져있었다. 속죄의 뜻으로 딸의 무덤에 좋은 약을 뿌렸더니 차나무가 돋아났다는 설이다. 기파는 고대인도 왕사성(王舍城)의 명의였다. 빙파라사왕의 아들로서 석가에 귀의(歸依)하였다. 그는 의술을 배우고 돌아와서 부처님의 풍병, 아나율(阿那律)의 실명, 아난의 부스럼을 고쳤다고 한다. 그런데 기파가 여행을 떠난 사이에 딸이 죽었다. 며칠 후에 집에 돌아온 기파는 딸이 앓고 있었을 때 좋은 약을 못 쓴 것이 후회되어 좋다는 그 약을 무덤위에 뿌렸다. 얼마 후에 그 위에서 나무 한그루가 돋아났다. 사람들이 이를 보고 스무 살짜리 사람의 나무라고 하여 차(茶=十十人木)자를 써서 차나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BC 225년 촉(蜀)나라 승상 제갈공명(諸葛孔明)이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에 '5월에는 노수를 건너 그 거친 오랑캐 땅 깊이까지 들어갔습니다.(五月渡瀘 深入不毛)'라고 표현한 것은 남만(南蠻)의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혔다가 일곱 번 놓아 주었다는 칠종칠금(七縱七擒)의 고사로 잘 알려진 남정(南征)을 말하는 것으로, 그곳은 오늘날 보이차(普耳茶)의 고향으로 알려진 운남(雲南=윈난)성 서쌍판납(西雙版納)지역인 맹해현의 남나산과 망지산일대로 육대(六大) 차산(茶山) 지역을 말한다.
  운남성의 육대 차산지역은 보이차(普耳茶)의 주산지다. 이 지역 일대에서 자생하는 차나무의 잎(차엽)을 발효시켜 만든 차가 보이차로 서쌍판납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태족(傣族)의 주산물이다. 보이차라는 이름의 유래는 옛날에 각 산지에서 만들어진 차를 보이라는 지역에서 모아 출하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보차(普茶)라고 불리어졌다가 나중에 보이차(普耳茶)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보이차 또는 푸얼차(Puer Tea)라고 한다. 이 차는 명나라 말기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청나라 옹정 10년(雍正十年 1729년, 드라마 웅정황제의 주인공)에는 황실에 진상차(貢茶)로까지 선정되었다. 그 후로 현재까지 200여 년 동안 보이차는 국내외에서 최고의 명차 중에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보이차를 만드는 찻잎은 운남성(雲南省) 대엽종(大葉種, 키가 큰 차나무)의 잎(葉)으로 다성(茶性)이 워낙 강하여 녹차처럼 제다해서 먹기에는 향과 맛이 너무 진하고, 부드럽지 못하다. 오래전 유목민들은 저장과 숙성이라는 독특한 방법을 터득한 후에 비로소 마실 수 있는 차를 만들었다. 이것이 보이차가 만들어진 유래다. 보이차는 후발효차로 흑차군(黑茶群) 중에 하나이며, 크게 청(靑, 生)차와 숙(熟)차의 두 종류로 나눈다. 청차는 차청(차엽, 찻잎)을 찌지 않고 만든 차를 가리키며, 숙차는 차청을 쪄서 만든 차를 말한다.
  생차를 만들 때는 발효과정에서 물을 더하지 않고 쌓아둔 채로 발효시켜서 차를 만든다. 이 생차는 최소 3년 이상이 되어야 마시기에 좋은 차가 된다. 시간이 짧은 차는 다소 떫은맛이 짙게 난다. 색깔을 보면 덩어리가 갈홍색을 띠고 있고, 차색 또한 붉은 색이 돈다. 숙차는 1975년 이후 자연 발효 과정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하여 고안 된 방법이다. 발효 과정에서 찻잎에 물을 뿌려주어 발효 과정을 빠르게 진행시켜 만든 차로 요즘은 대부분 이 방법으로 차를 만든다. 덩어리 색깔은 검은 빛이 강하고, 차색갈도 검은색이 난다. 1년 미만의 차라도 처음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마시기 좋게끔 만든 것이 장점이다.
  외관에 따라 보이차의 이름도 다양하다. 병차(餠茶)는 일반적인 둥근 모습이고, 타차(沱茶)는 만두 모양이다. 전차(磚茶)는 벽돌처럼 생겼고, 방차(方茶)는 정사각형 모양으로 만들었다. 긴차(緊茶)는 송이버섯 모양으로 지금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산차(散茶)는 눌러 만든 형태(緊壓成型)를 갖추지 않은 차를 말한다. 차의 등급은 특급에서 10급까지 나뉘어 진다. 이중에서 보이금아(普耳金아)나 궁정보이(宮廷普耳)는 최상의 특급제품으로 생산되는 양이 극히 적다. 할아버지가 만들어 손자가 마신다는 차로서 일반 차와는 달리 오래될수록 더욱 그 가치가 높아진다는 차다. 오래되면 될수록 그 맛과 향이 다른 차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출사표(出師表)》관련부분 발췌.
선제께선 신을 비천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되게도 스스로 몸을 낮추시어, 세 번이나 신의 초옥 안으로 찾으시어, 신에게 당세의 일을 물으시니.
이로 말미암아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께 힘써 일할 것을 허락하였더니, 그 후에 국운이 기울어짐을 만나, 패군의 때에 임무를 받고, 명령을 위급한 때에 받은 것이 그 이래로 21년이 됩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삼가고 조심함을 아시는지라, 그러므로 돌아가심에 임하여, 신에게 큰일을 맡기셨으니, 명령을 받은 이래로,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근심하고 탄식하며, 부탁하신 일에 효과가 없어서, 그것으로써 선제의 밝으심을 해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에 깊이 들어갔나이다.
지금은 남쪽이 이미 평정이 되고, 무기와 갑옷이 풍족하니, 마땅히 삼군을 권려하여 거느리고, 북으로 중원을 평정하고, 노둔한 힘이나마 다하여,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쳐 없애고,
다시 한의 황실을 일으켜, 옛 도읍지로 돌아가는 것이, 선제께 보답하는 방법이요, 폐하께 충성하는 직분인 것이옵니다.
'-前略-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由是感激, 許先帝以驅馳. 後値傾覆, 受任於敗軍之際, 奉命於危難之間, 爾來二十有一年矣.
先帝知臣勤愼. 故臨崩, 寄臣以大事也. 受命以來,
夙夜憂慮, 恐付託不效, 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奬率三軍, 北定中原, 庶竭駑鈍, 攘除姦凶,
以復興漢室, 還于舊都, 此臣所以報先帝, 而忠陛下之職分也.
-後略-'

6) : 달마대사(達磨大師=보리다라, 香至國의 셋째왕자)가 嵩山(쑹산)의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 동안 벽을 마주 대하고 좌선하여 오도(吾道=번뇌를 해탈하고 불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길)한 고사이다. 구전(口傳)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한 폭의 그림으로 볼 수가 있다. 단원(壇園=김홍도)이 그렸다는 미공개 화첩 안에서 그림이 발견되었다. 화첩의 크기는 37.8x33.8cm 크기이다. 화첩은 단원이 60세 전후의 말년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10폭의 수묵담채화를 담고 있다. 그 화첩에는 당시(정조) 사람들의 생활상이나 사회상을 한국적인 해학과 정취를 곁들여 생생하게 표현해 낸 단원의 절정기 화풍의 경향과 특색이 고루 반영된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10폭의 작품 가운데에 달마대사의 '구년면벽좌선(九年面壁坐禪)' 장면이 그려져 있다.

7) :
'주공단(周公旦)이 보좌하고 필공(毕公) 등이 도와 문왕의 사업을 계속했다. 여상의 보좌아래 맹진에서 제후를 모이게 하여 주왕(纣王) 군대와 싸운 목야(牧野)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왕을 자살케 하고 상조(商朝)를 멸망시켰다.'
'周公旦为辅,毕公等为主要助手,继续文王的事业,在吕尚的辅佐下在盟津会诸侯,商讨纣王,在牧野和纣王的军队会战,太公带头挑战,纣王大败,纣王自焚而死,商朝灭亡.' 《丹书》

  주공단(周公旦)은 고대 주 왕조(周王朝=서주西周, BC 1046∼BC 771)의 건국(建國)에 일조한 주나라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강태공으로 잘 알려진 여상 강자아(吕尚 姜字牙)와 함께 무왕을 보좌하여 상(商=은殷)을 멸하고 건국의 기초를 든든히 하는 데 진력하였다. 무왕 사후(死後)에는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어린 성왕(成王)을 도와 주 왕조를 안태(安泰)하게 했다. 밖으로는 황하 하류의 평원을 손에 넣고, 안으로는 종법(宗法), 봉건제도를 정비하고, 국정의 확립에 힘썼다.
《선시초(選時秒)》에 보면 주공단이 자식을 훈계한 고사(故事)가 있다.
"나는 누구와 만나더라도 예(禮)를 져버린 적이 없다. 세발(洗髮)하고 있을 때에도, 식사하고 있을 때에도, 내객(來客)이 오면 두 번 이라도 세 번이라도 하던 일을 중단하고 응대하였다. 객(客)을 기다리게 하면, 예를 저버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너도, 누구에게라도 예를 다하여라. 결코, 교만한 태도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 주공단의 인품과 엄격한 자식사랑의 일면이다. 주공삼태(周公三笞)에 얽힌 고사성어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무왕(武王)은 상(商)을 멸한 후에 주공단의 아들 백금(伯禽)을 상공(上公)으로 삼고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 후에 노(魯)나라 - 백금(伯禽)도 노후(魯侯)로서 오래도록 주(周)나라의 기틀을 다지는데 힘썼다.

8) : BC 2세기경에 쓰였다고 전해지는 《이아(爾雅)》「석목편(釋木第十四)」에 '가는 쓴 도다(檟, 苦荼)'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오래전부터 차(茶)를 가(檟)로 부르고 있음도 알 수 있다.

* 이아(爾雅)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훈고학서(訓詰學書)로 13經의 하나다. 당(唐)의 개성석경(開成石經)인 《12경》이나 송(宋)나라 때 확립된 《13경》경전의 하나로 포함된 책이다. 한나라 유희(劉熙)는 이아(爾雅)에서 爾는 '가깝다'는 의미이고, 雅는 '바르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말을 이해할 때 가깝고 바른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함을 의미한다. 이 책은 문자의 뜻을 고증, 설명하는 사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종의 의미별 어휘집이고 유의어자전(類意語字典)으로 석친(釋親)ㆍ석천(釋天)ㆍ석초(釋草) 등 19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후에 고증학의 기본 분야인 문자학의 자료로서 청(淸)나라 학자들에게는 상당히 존중되었다.
  이아(爾雅)는 누가 만들었나? 이아는 언제 누구에 의하여 쓰여 졌을까? 이에 대해서는 주장하는 학설이 구구(區區)하다. 첫 번째 주장은 주노공이 최초로 이아 한편을 지었고, 그 후에는 공자와 자하가 계승해서 증보(增補)하였다는 설이 있다. 위(魏)의 장읍(張揖), 당(唐)의 육덕명(陸德明)<참고 자료 1>등이 이설의 대표자이다. 이들은 이아의 성립시기를 서주(西周)에서 춘추(春秋)를 거쳐 전한(前漢)에까지 이른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는 공자의 문인들이 지었다는 설이다. 정현(鄭玄), 유협(劉勰) 등이 이설의 대표자이다. 이들은 이 책의 성립시기를 동주(東周, BC 770∼256) 때로 본다. 한(漢)나라 유자(儒者)들이 지었다고 주장하는 송(宋)나라 조수중의 설도 유력하다. 이아(爾雅)를 누가 지었는지를 현재로서는 규명할 수가 없다. 시기도 주노공설부터 조주성의 설까지는 자그마치 800년이 넘는 시차가 있으므로 이아의 년대를 기준으로 삼을 수가 없다. 따라서 이아에 나오는 기록들을 참고할 뿐이다. 다만 본고 정리의 편리를 위하여 가장 연대가 늦은 조주승의 설을 기준하겠다.

*《이아(爾雅)》의 각 편명을 소개한다.
「釋詁第一」,「釋言第二」,「釋訓第三」,「釋親第四」,「釋宮第五」, 「釋器第六」,「釋樂第七」,「釋天第八」,「釋地第九」,「釋丘第十」,「釋山第十一」,「釋水第十二」,「釋草第十三」,「釋木第十四」,「釋蟲第十五」,「釋魚第十六」,「釋鳥第十七」,「釋獸第十八」,「釋畜第十九」

* 참고로 광아(廣雅)는 위(魏 AD 220∼265)의 명제대에 박사를 한 장읍(張揖)이 이아(爾雅)를 보충해 넓힌 글이다. 박아(博雅)라고도 한다.

9) : 《茶經》下「七之事」, 《晏子春秋》, 孀相齊景公時, '食說粟之飯, 炙三戈五卯, 茗菜而已.'
  《다경》에 보면 《안자춘추》에 안영이 齊나라 景公의 재상일 때에(BC 547∼BC 490) '메조미 밥과 세 꼬치의 구이와 다섯 가지 푸성귀와 차 나물을 먹을 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춘추시대(BC 770∼BC 476)에는 찻잎을 여러 용도로 이용하였으며, 그중에 하나가 나물류로 음식을 만들어 여러 사람들이 먹었다.
  《시경(詩經)》에 '誰謂荼苦, 其甘如薺.'란 글귀가 있다. 십오국풍(十五國風) 중에 패(邶)나라의 노래를 모은 패풍(邶風 谷風篇)에 나오는 구절로 '그 누가 차를 쓰다 하던가, 냉이처럼 달고도 단데.'라는 뜻으로 비유로 쓴 글이다. 여기에 보이는 도(荼)의 의미도 주ㆍ진(周秦)까지 차를 '荼作二解,一爲茶,一爲野菜.'로 병용하였음을 볼 때 여러 용도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시경》은 주(周)나라 초기(BC 11세기)부터 춘추시대 중기(BC 6세기)에 이르는 약 500여 년간의 시(詩)를 모아 놓은 것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詩歌集)이다.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의하면 '옛날에 시(詩) 삼천여 편이 있었는데, 공자(孔子)가 그 중에서 중복되는 것은 제하고, 적합한 것만을 골라서 305편을 뽑았는데 공자는 그것들을 모두 현가(弦歌)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논어(論語)》「자한편(子罕篇)」에 공자는 '내가 위(衛)나라로부터 노(魯)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음악은 바로잡히고, 아(雅)와 송(頌)도 각각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子曰, 吾自衛反魯, 然後樂正, 雅頌各得其所.)'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이 음악의 전반적인 정리에 대하여 말한 것일 뿐. 꼭 짚어서 《시경》305편에 대해서만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경》안에서도 「국풍(國風)」을 제외한「아(雅)」ㆍ「송(頌)」은 공자의 손이 가장 많이 갔던 것임은 알 수 있다. 공자가 14년의 편력을 끝내고 위(衛)나라로부터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애공(哀公) 11년, BC 484년이다. 공자는 노(魯)나라의 풍부한 문화와 전승 덕택으로 고전의 정리에 몰두할 수 있었으며, 예부터 노(魯)나라에 전해져 내려오던 삼천여 편의 옛 시(詩)를 근거로 하여 《시경》을 편찬하였음은 확실하다.
  《시경》에 담겨있는 시(詩)가 주는 의미는 여러 가지다. 그 당시의 시(詩)는 그 의미가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옛날에는 민의(民意)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詩)를 수집하였다. 채시(采詩), 진시(陳詩), 헌시(獻詩) 등의 방법에 의하여 채시관(采詩官)이 각 지방의 시가(詩歌)를 수집하였으며 그 수만도 수천에 달하였다. 수집된 시(詩)에는 시류(時流)과 들어있고, 당연히 세습(世習)도 표현되고 있었다.

10) : 《茶經》下「六之飮」, '茶之爲飮 發乎神農氏 聞於魯周公.'

11) : 《茶經》下「七之事」, '炎帝食經云 茶茗久服 令人有力說志.'

12) : 박정도, 2001, 《중국차의 향기》

13) : 염제(炎帝)는 불의 덕(火德)이 주제하는 것을 일컬은 것으로 계절은 여름이다. 불이니 상징색은 붉은색이며 방위는 남방이다. 적제(赤帝)라고도 부르며 농경(農耕)이 여기에 속하게 되어 신농씨라 하기도 하고, 염제신농씨라 합칭(合稱)하여 부르기도 한다.
* 반론 : 왕웨이 외 著, 박점옥 譯, 2001,《손에 잡히는 중국 역사의 수수께끼》, '저자들은 염제와 신농씨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신농이라는 단어는 전국시대에 생겨났으며 그 당시의 저작인 《국어》와 《좌전》의 기록을 보면 염제와 신농씨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지 않고 있으며 두 사람의 발상지도 신농씨는 후베이 쉐현(水縣), 염제는 산시의 웨이수이(渭水) 유역으로 다르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세본》이라는 책에서부터 동일시되다가 사마천의 《사기》를 거쳐 동한시대 반고의 《한서》에는 염제와 신농씨를 완전히 동일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 오늘날 염황(炎皇)이라는 단어를 일반적으로 쓰지만 엄밀히 말해서 권력의 강약이나 시기적인 관계로 봤을 때 황염(皇炎)이 옳다고 한다.'

14)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의 내용은 약 365종의 본초(本草)를 상품(上品)ㆍ중품(中品)ㆍ하품(下品)으로 구별하여 각각 불로장생(不老長生), 양성(養性), 치병(治病) 등의 효과가 있다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도교(道敎)의 사상적 영향에서 저술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상품엔 120종을 실었으며 상품 약은 먹으면 먹을수록 몸에 이로우며 또 오래 살 수 있다는 보성약(補性藥)에 속하나, 그중에는 많이 써서는 안 되는 약도 없지 않다. 이것은 그때까지도 약성의 구명(究明)이 불비(不備)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중품에도 역시 120종을 실었다. 이 중품에 속하는 약은 병을 치료하되 약의 독성이 없어 오래 쓸 수는 있으나 상품 약에 비해 신체를 보(補)하는 힘이 적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하품에는 125종으로, 이들은 질병 치료를 위주로 하는 약으로 질병을 낫게 되면 바로 약을 중지해야 하며 너무 오래 사용하면 오히려 이롭지 못한 약이다.
  《신농본초경》은 그 이전까지 중구난방이던 본초학에 체계적인 바탕을 세웠다. 그 것을 계기로 본초학은 더욱 알차게 발전하였다. 양(梁)나라 도홍경(陶弘景 AD 452∼536)은 그 위에 교정과 주석을 달아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註)》- 본 문헌에 고구려와 백제 지역에서 자생하였던 인삼이 약재로 기재되어 있다. 특히 백제의 인삼은 모양 등을 자세하게 소개하며 양종(良種)이라고 수록한 것은 약효의 우수성을 증명한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당시부터 인삼이 소중한 약재로 취급되어 온 것을 증명해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 를 저술하고 약종(藥種)을 추가하여 730종을 수록하였다. 당(唐)나라 고종 때는 이적(李勣)이 《신수본초(新修本草) AD 659》를 펴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서역(西域)의 여러 가지 약종이 추가로 기재되었고, 동ㆍ식ㆍ광물의 그림이 실렸다. 739년에 나온 진장기(陳藏器)의 《본초습유(本草拾遺), 不傳, 증류본초(證類本草) 參考》에는 약효에 따라 선(宣)ㆍ통(通)ㆍ보(補)ㆍ설(泄)ㆍ경(輕)ㆍ중(重)ㆍ조(燥)ㆍ습(濕)ㆍ활(滑)ㆍ삽(澁) 등 10종으로 약을 분류했다. 송(宋)나라에 와서 《가우보주신농본초(嘉祐補註神農本草)》가 계속해서 간행되었다. 이것은 도경(圖經)으로서 원품의 그림이 붙어 있으며, 1,082종이 수록되었다. 이어서 당신미(唐愼微)의 《경사증류비급본초(經史證類備急本草, 일명 大觀本草), AD 1086∼93》가 출간되었고 1,800종의 약물이 수록되어 있다. 제가(諸家) 중 마지막으로 집대성한 본초학서는 명(明)나라 이시진(李時珍)이 AD 1552년에 27년간의 노력 끝에 펴낸 《본초강목(本草綱目)》이다. 이 책의 특징은 처음으로 동물과 식물과 광물로 분류하여 별개로 기록하였으며, 역대 제가들이 수록한 약종보다 374종의 신약을 증약하였다. 처방 8,160종과 함께 1,892종의 약물을 16부, 62류(類)로 분류하고, 석명(釋名)ㆍ집해(集解)ㆍ수치(修治)ㆍ기미(氣味)ㆍ주치(主治)ㆍ발명(發明)ㆍ부방(附方)의 순서로 설명해놓았다.
  이상으로 간단하게 《신농본초경》의 저작과 그 이후 거처 온 과정에 대하여 알아봤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원본은 사라지고 현재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신농본초경》은 도홍경이 원문에 자신의 연구와 성과를 첨가해서 후대에 전한 내용을 청대(淸代, AD 1636∼1912)의 학자들이 송대(宋代, AD 960∼1279)의 《증류본초(證類本草)》등에서 편집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것이 원본과 일치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다. 하지만 도홍경이 정리할 당시 원문과 자신이 첨가한 부분을 붉은색(朱)과 검은색(墨)으로 구별하여 정리하였다는 하였으므로 원본의 손상은 크게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15) : 《茶經》上「一之源」, '揚執戟云 蜀西南人爲茶曰蔎.'

<참고 자료 3>'蜀西南人謂荼曰蔎'에서 말하는 도(荼)는 사천성 서남부에서 차(茶)를 칭하는 속어(俗語).

* 양집극(揚執戟) : 한(漢)나라의 양웅(揚雄 BC 53~AD 18)을 말한다. 궁궐의 경비를 맡는 황문랑(黃門郞)이라는 벼슬을 지냈는데 갈라진 창(戟/극)을 잡고 근무하기에 집극(執戟)이라 불렀다.

16) : 《華陽國志》 券1「巴志」第2, '周武王伐紂, 實得巴蜀之師, 著乎.《尚書》巴師勇銳, 歌舞以淩商人, 商人倒戈. 故世稱之曰, 「武王伐紂, 前歌後舞」也. 武王既克商, 以其宗姬於巴, 爵之以子. 古者, 遠國雖大, 爵不過子. 故吳楚及巴皆曰子. 其地, 東至魚復, 西至僰道, 北接漢中, 南極黔涪. 土植五榖. 牲具六畜. 桑、蠶、麻、苧, 魚、鹽、銅、鐵、丹、漆、、蜜, 靈龜、巨犀、山雞、白雉, 黃潤、鮮粉, 皆納貢之.'
* 화양국지는 사천성(四川省)의 방지(方志)다.
* 여기에 기록된 차(茶)의 용도는 마시는 음료용보다는 전쟁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약제용으로 사용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17) : 《이아(爾雅)》「석목편(釋木第十四)」에 보면 '도는 고채다.(荼, 苦菜.)'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도(荼)는 '씀바귀'를 일컬으니 고채(苦菜)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자는 《신농본초경》에서 말하는 고채(苦菜)와 같은 문자다. 그렇다면 도(荼)는 차(茶)와 관계가 없을까? 「석초편(釋草第十三)」의 의미는 무엇일까?「석목편」은 목본식물의 해설이니, 가(檟)를 차(茶)로 해설한 것은 옳으며, 가(檟)의 맛이 씀바귀의 맛과 같다는 의미이다. 「석초편」은 초본식물의 해설이므로 도(荼)를 고채(苦菜)로 설명한 것은 도(荼)는 차(茶)가 아니고, 이름 그대로 '씀바귀'라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차(茶)자의 의미로 가(檟)보다는 도(荼)를 점점 더 많이 쓰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도(荼)가 '씀바귀'보다는 '차'의 의미가 더 강한 상태로 고채(苦菜)와 함께 쓰였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로 진문회(陳文懷)의 《차의 품음예술(茶的品飮藝術)》<참고 자료>에서 '가(檟)의 고음(古音)은 고(古,gǔ)와 같이 읽는데, 이것은 고(苦,kǔ)와 도(荼,tú)의 합음(合音)이다. 이렇게 가(檟)자가 고ㆍ도(苦ㆍ荼) 두 글자를 합음(合音)한 가차자(假借字)에서 말미암았고, 게다가 사람들이 가(檟)보다는 주로 도(荼)자만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이다.'고 해설하며 차(茶)자의 의미로 '도(荼)'자가 주로 쓰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기록에 전하는 최초의 차를 지칭하는 문자는 《시경(詩經)》에 나온다. '그 누가 차를 쓰다 하던가, 냉이처럼 달고도 단데.(誰謂荼苦 其甘如薺.)' 이 글에서 도(荼)는 차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가(檟)보다는 도(荼)를 차(茶)의 의미로 주로 쓰다 보니 고채(苦菜)와 혼용하게 되었다. 고채(苦菜)를 도(荼)로 쓰고, 도(荼)를 차(茶)의 의미로 쓰다 보니, 삼단 논법으로 고채를 일러 차가 되므로 같은 의미로 병용해서 사용했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하겠다. 그만큼 도(荼)자가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다. 차가 음료용으로 크게 성행하게 되고, 가(檟)를 대신하여 도(荼)가 일관되게 차(茶)자로 사용하게 되면서, 도(荼)자는 위의 고채(苦菜)를 의미하는 도(荼)보다는 차(茶)를 의미하는 도(荼)의 뜻이 더 큰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BC 59년에 작성한 《동약(僮約)》에 표기한 '무양매도(武陽買荼), 팽도진구(烹荼盡具)'에서 차를 도(荼)로 표기한 것을 보면 차(茶)자로 자리를 잡은 느낌이 든다. 남북조(南北朝 AD 420∼589)시대에 이르러 음다(飮茶) 풍조는 민간에까지 많이 보급되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도(荼)'라는 문자는 민간의 음다풍속 속에서 차(茶)자를 의미하는 문자로 제대로 정착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차(茶)자의 의미로서는 서서히 퇴색되어 갔으며, 이에 따라 차(茶,chꐁ)자와 도(荼,tú)자의 함의(含意)는 구분되어 사용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당(唐)나라 고조(高祖) 때의 국학박사(國學博士) 육덕명(陸德明 AD 618∼626)이 저술한 《경전석문(經典釋文)》과 《제경독음(諸經讀音)》에서 도(荼,tú)자의 독음(讀音)은 이미 차(茶,chꐁ)자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것도 발음만 바뀐 것이지, 아직은 글자가 도(荼)자에서 차(茶)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 《茶經》上「一之源」에 ‘從艸當作茶 其字出開元文字音義 從木當作梌 其字出本草 草木幷作茶 其字出爾雅.’
'초두(艸)를 따르면 당연히 다(茶)가 만들어지며, 그 글자는 《開元文字音義》에 나온다. 나무목(木)을 따르면 당연히 도(梌)가 만들어지며, 그 글자는 《本草》에 나온다. 풀초와 나무목을 합하면 다(茶)자가 만들어지며, 그 글자는《爾雅》에 나온다.'고 기록하고 있다.
* 《康熙字典, AD 1716, 張玉書, 陳延敬》에 '茶의 音은 直加切, 鋤加切로 모두 垞(차) 평성, 木荼 의 속자, 봄에 잎을 갈무리했다가 마실 수 있다. 茗으로 본 자는 荼 혹 木荼 이며 지금은 茶로 쓴다.'고 했다.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는 '艸 밑에 余'자를 가리켜 옛날에는 荼라 하였으나 오늘에는 茶라 한다고 하여 도(荼)가 차(茶)자의 옛 글자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18) : 진장기(陳藏器)는 《본초습유(本草拾遺)에서 '제약(諸藥)은 각병지약(各病之藥)이고, 차(茶)는 만병지약(萬病之藥)'이라고 하며 차(茶)의 효능을 중시하였다. 본초(本草)를 집대성한 이시진(李時珍)의《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는 역대(歷代) 차(茶)의 의약지식(醫藥知識)에 대해 전면적으로 총결(總結)하여 차의 약리(藥理) 공능과 효능을 변증적으로 다음과 같이 논술하고 있는 점이다. '차는 쓰고 찬 것으로 열(熱)을 내리는 데는 최고이다. 화기(火氣)는 백병(百病)의 근원이니 화기(火氣)를 내리면 곧 위(上)가 맑아진다. 따뜻한 것을 마시면 곧 한기(寒氣)로 인해 화기(火氣)는 내리고, 뜨거운 것을 마시면 곧 차(茶)는 화기(火氣)를 빌어 상승하여 흩어지게 하며, 또한 술과 음식의 독을 해독하는 작용까지도 겸하게 되니,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이 상쾌하게 하며, 혼수(昏睡)하지 않게 하니 이것이 바로 차(茶)의 공능(功能)이다.'고 차의 약리적 효능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차를 마시는 대상에 따라 주의해야 할 점도 잊지 않고 지적하였다. '만약에 기(氣)가 허(虛)하고 차(寒)며 혈압(血壓)이 약한 사람이 지나지게 차(茶)를 오랜 기간 마셨다면, 비위(脾胃)에 오한(惡寒)이 나며, 원기(元氣)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상(損傷)이 된다. 따라서 혈압이 낮거나(低血壓), 기(氣)가 허(虛)한 사람은 지나친 음용(飮用)을 삼가 해야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고 체질에 따른 음용방법을 의학적인 견해로 기술해 놓았다.
  《동다송(東茶頌)》「第三頌」에 '수문제(隋文帝)가 어렸을 적 꿈에 神人이 그의 뇌골을 바꾸니 그때부터 뇌를 앓았는데 홀연히 나타난 한 스님이 이르기를 산중의 차(茗)로 치료가 될 것이라고 했다. 황제가 마시니 효험이 있었다. 이로부터 천하 사람이 차를 알고 마시기 시작했다.(隋文帝微時夢 神人易其腦骨 自爾腦痛 忽遇一僧云 山中茗草可治 帝服之有效 於是天下 始知飮茶)'는 개국황제(開國皇帝)의 뇌로 인한 병을 차로 치료하였다는 《수서(隋書)》의 기록을 인용하며 차의 효능과 음다풍속을 말하고 있다.

* 수문제 양견(隋文帝 楊堅 AD 541∼604)은 섬서성 홍농(弘農)의 화음(華陰) 출신으로 명문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400년 가까이 이어지던 대륙의 혼란기를 마감하고 통일중국을 이룩한 수나라의 개국황제다. 그는 승상의 지위에 있다가 40세가 되던 해에 북주(北周)의 어린 황제 정제(靜帝)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으며 국호도 수(隋)로 바꿨다(AD 581). AD 587년에는 후량(後梁)을 항복시키고, 2년 후인 AD 589년에는 진(陳)까지 멸망시켰다. 이로서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시작된 육조시대(六朝時代 AD 220∼589)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수문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하였다고 전해진다. 위의 이야기는 수문제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여러 일들 중에 한 토막이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귀신이 나타나 자기 뇌를 바꾸는 꿈을 꾸었다. 이를 몹시 걱정하며 여러 날을 보냈다. 상심이 너무 깊은 나머지 병석에 눕게 되고,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때 스님 한분이 그 집을 지나다 이 말을 듣고는 처방 하나를 써주었는데, 그 처방에는 '차를 마시면 나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차를 정성들여 달여 마셨더니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심신이 가벼워졌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해들을 세상 사람들이 비로소 차의 효능을 깨달고, 그 후로 차를 즐겨 마셨다는 이야기이다. 유정일(劉貞一)이 말하는 다선십덕(茶扇十德)이나 이시진(李時珍)의 '화기(火氣)를 다스린다.'는 말은 그 요체가 같다고 하겠다. 차를 마시면 마음이 명경지수와 같아지니 그 속에 든 근심걱정이 무엇이겠는가!

19) : 《茶經》下「六之飮」, '...滂時浸俗 盛於國朝 兩都幷荊兪間 以爲比屋之飮'
'...이제 번진 풍속으로 당나라에도 성(盛)하여 낙양(洛陽)과 장안(長安), 형주와 유주사이에 집집마다 마시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차문화에 따른 시대구분을 말할 때에 당(唐)을 '차의 극성시대(極盛時代)'로 분류한다. 그 만큼 차문화가 크게 발달하였으며, 실질적으로 오늘의 차문화가 있게한 시대였다.
  현종(玄宗, AD 685∼762, 唐 6대 황제 재위 AD 712∼756)대에 봉연(封演)이라는 진사가 있었는데 그가 쓴 《봉씨문견기(封氏聞見記)》「음다(飮茶)」편을 보면 이런 글이 실려 있다. "남쪽사람들은 차 마시기를 좋아하였으나 북쪽사람들은 처음에 차를 많이 마시지 않았다. '개원(開元 AD 713∼741)연간에 태산(泰山) 영엄사(靈嚴寺)에는 강마대사(降魔大師)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좌선수행 중에는 잠을 못 자게하고, 저녁에는 밥도 먹지 못하게 하였으나, 모두에게 차 마시는 것만은 허락하였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차가 몸에 이롭다는 사실을 알고는 가는 곳마다 차를 달여서 마셨다. 이후 따르고 본받아 옮아서 마침내 풍속을 이루었다.(開元中泰山有降魔大師,與禪教學禪,務於不寐,又不夕食,皆許其飲茶,人自依挾,到處煮飲,從此轉相仿傚,遂成風俗.)' 이 풍속은 산동(山東)으로부터 장안(長安)에 전해져 장안에는 곧 다관(茶館)이 생겼고 돈만 있으면 모든 이들이 차를 즐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다송(東茶頌)》「第二頌」에 당시의 음다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태백이 말하기를 형주에 있는 옥천사에는 푸른(?, 맑은) 개울이 있는 여러 산이 있고, 차나무가 더부룩이 자라고 있는데, 가지와 잎이 푸른 옥 같으며, 옥천의 진공이 늘 따서 차를 만들어 마신다.(李白云 荊州玉泉寺 靑溪諸山 有茗艸羅生 枝葉如碧玉 玉泉眞公常采飮.)라고 하였다.'
- 이 글은 이태백(李白 AD 701∼762)의 《분류보주이태백시권(分類補註李太白詩卷)》의 오언고시(五言古詩) 중에서 답족질승중부증옥천선인장다 병서(答族姪僧中孚贈玉泉仙人掌茶 幷序)의 서문 내용 중에서 몇 구절만 인용하여 주석(註釋)으로 달았다.
* 2006년 3월 모봉형진이 본문에 대한 이견으로 올린 글에서 '본문 글 중에서 靑溪諸山의 靑은 淸의 오타로 보인다.'고 주장하였다. 차와 연관 지워보면 '푸른 개울'보다는 '맑은 개울'이 詩感에도 어울린다. 이백의 원문 중 관련부분 일부를 소개한다.
「여문형주옥천사(余聞荊州玉泉寺) 근청계제산(近淸溪諸山) 산동왕왕유유굴(山洞往往有乳窟) 굴중다옥천교류(窟中多玉泉交流) 기중유백편복대여아 (其中有白蝙蝠大如鴉) 안선경(按仙經) 편복일명선서(蝙蝠一名仙鼠) 천세지후체백여설(千歲之後體白如雪) 서즉도현개음유수이장생야(栖則倒懸蓋飮乳水而長生也) 기수변처처유명초라생(其水邊處處有茗草羅生) 지엽여벽옥(枝葉如碧玉) 유옥천진공(唯玉泉眞公) 상채이음지(常采而飮之) -後略-

20) : 張自烈, 明, AD 1671,《正字通》, "《魏了翁集》「引文」에 '茶를 처음에는 그 字를 荼로 했다.' 또 春秋時代 齊의 《荼漢志》「茶陵之類」에 '陸顔의 여러 사람이 비록 이미 茶音으로 轉入했으나 音은 모른다.' 다만 字文을 고치기는 오직 陸羽, 盧仝 이후에 마침내 荼를 바꾸어 茶로 하니 그 字는 從艸從人從木(艸+人+木→茶→會意字)이다. 살피니 《後漢書》「年表」에 茶陵을 顔師古(AD 584∼648)가 註에 '荼音은 塗이다.'라 하였다."

* 노동(盧仝, 약 AD 795∼835)은 당(唐)나라의 유명한 시인이며, 호는 옥천자(玉泉子), 제원(濟源, 지금의河南)출신이다. 후세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엽성(葉聖)이라고도 한다. 그는 평생을 차를 사랑했으며, 특히 그가 만든 다가(茶歌)인 칠완차(七碗茶)는 송(宋), 원(元), 명(明), 청(淸)을 거쳐 천년동안 차인(茶人),시인(詩人)들에 의해 가장 즐겨 읊어진 차시(茶詩)인 것으로 전해진다.
  당 문종(文宗, AD 826∼840, 太和 AD 827∼835, 開城, AD 835∼840) 태화 9년(AD 835)에 일어난 감로지변(甘露之變) 때 마침 재상 왕애 (王涯)의 집에 머물러 있다가 함께 살해되었다.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곡노동(哭盧仝)」에 '사십 평생에 흰옷만 걸치는구나.'라는 시구(詩句)를 보아 사십대에 살해되지 않았나? 추정 되고 있다. 청나라 소응식(蕭應植)의 《제원현지(濟源縣誌)》에 '마을 서북쪽으로 20리 떨어진 석촌(石村) 북쪽으로 가면 노동(盧仝)의 별장과 팽다관(烹茶館)이 있고, 그의 묘는 마을에서 서북쪽으로 12리 밖에 있는 무산(武山)꼭대기에 있다. 또한 산속에 그가 즐겨 이용한 샘물 옥천천(玉泉泉)이 있는데, 이 샘물의 이름을 본떠 자신의 호를 옥천자(玉泉子)로 지었다.'라고 기술되어있다.
  당나라의 차문화 중에는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세 가지가 있다. 육우(陸羽)의 '《茶經》저술'과 조찬(趙贊)의 '다금(茶禁=茶稅)제도'이고 또 하나는 노동(盧仝)의 '차가(茶歌)보급'이다. 노동(盧仝)의 차가(茶歌)는 중국의 차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1) : 중국에서 염제신농씨와 많은 관련이 있는 지역을 꼽으라면 단연코 섬서성(陝西省) 보계시(寶鷄市) 남쪽 교외에 위치하고 있는 천대산(天臺山)일 것이다. 주봉(主峰)인 연화정(蓮花頂)과 천주봉(天柱峰), 인두봉(人頭峰), 계마장(系馬?)의 세 봉우리가 돌 연꽃모양으로 하늘을 향해 활짝 피어 있다고 하여 '삼미생기화(三味生奇花)'라 불리는 연봉은 장관이다. 특히 계봉산(鷄峰山)은 산세가 웅장하고, 그 모습도 수탉의 볏과 같아 보계란 지명을 얻게 한 산으로 유명하다.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수십 곳의 기암절벽과 단애(斷崖)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계곡을 만들고, 그 아래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샘들이 끊임없이 맑은 물을 솟아내니 위와 아래의 산수(山水)가 어우러져 조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천대산의 많은 샘들 중에는 염제(炎帝)가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였다고 전해지는 구룡천(九龍泉)이 있다. 맑고 시원한 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물맛도 단것이 일품인 샘이다. 예부터 신성하다고 하여 성천(聖泉)으로 봉하였다. 천대산지역은 염제(神農氏)가 태어나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었던 곳이다. 염제가 비록 신화 속의 인물이라고 하지만 중화민족 발원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지위에 놓여 있는 인물이다. 염제는 이곳에서 홍수를 막아 백성들을 살렸고, 백성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쳤으며, 모든 풀을 직접 맛을 보며 시험해 보았기에 천대천하고(天臺天下古=천대는 천하 옛 산)라 일렀다. 후세에는 도교의 시조인 노자(老子)가 교리를 만든 곳이라 하여 더욱 유명한 산이 되었다.
  천대산에는 신농묘(神農廟)가 있고, 황제(黃帝)가 분향하면서 염제에게 가르침을 구했다는 소향대(燒香臺)가 있다. 염제가 처음으로 일중위시(日中爲市)를 만든 태양시(太陽市) 유적과 염제의 침전골대(寢殿骨臺)가 있다. 이밖에 노군동(老君洞), 현녀동(玄女洞), 팔경궁도원(八景宮道院), 손빈(孫賓=孫子)의 수도지(修道地)인 월남동(月南洞), 점장대(点將臺), 관상대(觀象臺), 논도처(論道處) 등 많은 유적을 품고 있어 그 자체가 역사라 할 수 있다.

22) : 삼국시대가 시작되기 훨씬 전인 후한(後漢, AD 25∼220)말에 유비(劉備) 현덕(玄德)이 한적한 시골에서 돗자리를 짜고 있을 때의 일이다. 현덕의 모(母)는 낙양(洛陽)의 명차를 죽기 전에 한 모금이라도 맛보고 싶다고 말했다. 시골구석에서 돗자리나 짜고 있는 아들에게 넓은 세상을 보게 하여 뜻을 크게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후세사람들은 이 구절을 그렇게 해석했다. - 현덕은 천리 길을 마다않고 낙양까지 달려갔다. 상인들에게 가진 돈을 다 내놓고 얼마만큼의 차를 달라고 사정하였으나 시골 청년의 푼돈으로 찻값을 치르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그러나 현덕의 효성에 감동한 상인은 찻잎을 한줌 쥐어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 당시의 차는 금은보석이나 다름없는 고가품이었다. 차는 대중들이 항시 이용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23) : 소병기(蘇秉琦), AD 1981,《關于考古學文化的區系類型問題》「文物」, 중국문명의 기원과 형성과정에 대한 다원설(多元說)을 주창하는 저자는 전국에 걸쳐 발견되는 신석기시대문화를 대별하여 독립된 6개 구역(區域)으로 나눌 수 있으며, 당시의 시대적 특성이지만 공간적 제약으로 인한 지역 간의 문화적 발전은 큰 편차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록 지역 간에 발전단계는 불균형적이라 해도 개별지역마다 각기 독립적인 문화연원(文化淵源)과 특징 및 발전단계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구분한 6개 구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北方 : 燕山 남북과 長城地帶.
나) 東方 : 山東 지역.
다) 中原 : 關中(陝西), 晋南, 豫西 지역.
라) 東南部 : 太湖 주변 지역.
마) 西南部 : 洞庭湖 주변과 四川盆地.
바) 南方 : 鄱陽湖와 珠江三角洲.

24) : 삼성퇴(三星堆)지역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유물이 발굴된 지점이 별 세 개가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삼성(三星)이라 칭하고, 거기에다 낮은 구릉지를 뜻하는 퇴(堆)를 붙였다. 이곳의 많은 유물들은 대개 청동과 옥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발굴 지층을 보면 약 3천 년 前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심지어는 5천년 前의 유물도 상당수에 달한다. 신석기와 청동기에 걸친 문물로 황하문명과 비슷한 수준의 문명이 이 지역에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유물을 살펴보면 청동기제조의 섬세함과 예술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대영박물관의 태스크 로즌(Task Rosen)의 말처럼 '서안(西安)의 병마용(兵馬俑) 갱(坑)보다도 우수하다.'는 평가가 타당함을 실감할 수 있다. 그 당시의 남방문화(사천문명)를 대변하는 고촉국(古蜀國)의 문화는 황하문명으로 대변되는 중원문화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삼성퇴 유적에 대해 무엇이라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문명의 기원과 형성과정에 대한 다원설(多元說)을 주창하는 소병기(蘇秉琦)의 학설을 인정하고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라고는 확언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황하문명(중화사상의 토대)이외에는 어떠한 학설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장강문명도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새롭게 제시된 장강문명을 중화로 넣기 위한 공정을 벌려 중화와 같은 울타리로 넣으려는 범위 안에서 인정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이란 어둠 속에 잠자코 숨어 지내다 결정적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역사를 인위적으로 만들고 싶은 자들이 있을 때에는 더욱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나와 그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역사가 비록 과거의 지나간 일일라 할지라도 올바른 밝은 빛을 찾으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은 중화문명의 우월성을 지금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다만 지나온 역사를 가감(加減)없이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야 그들의 주장도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부분이 부족하다고하여 인위적으로 감추거나 새로 만드는 과오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역사관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치적인 의도가 개입되어 오류를 범한다면 그 역사는 어떠한 가치도 인정받을 수가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제는 여러 곳에 걸친 고고학적 발굴로 인하여 중원문화 중심론은 유명무실해졌다. 내몽골 적봉(赤峰)지역의 홍산문화(紅山文化) - 동이문화(東夷文化)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만 보아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홍산문화는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의 고고학적인 고증만 가지고도 중원문화보다 훨씬 더 오래되고 수준도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의 원로고고학자인 소병기(蘇秉琦)는 ‘홍산문화는 중화문명의 서광’이라며 '이 문화는 이미 씨족사회단계를 뛰어넘어 국가 형성의 초기단계에 이르렀다, 홍산문화는 중국 문명사를 1000년이나 앞당겼다.'고 평가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의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으로 대변되는 소위 중원문화를 중심으로 하려는 '역사바로세우기운동'은 오히려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우(愚)를 범하는 치졸한 짓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중원문화권이 문명의 중심이고 다른 지역은 변방임을 증명하려고 하였으나, 삼성퇴 유적은 거꾸로 가는 그들에게 역사의 오류에 대한 경고로 거대한 변방문명(?)의 우수성을 보여줘 그들의 잘못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한족에 의한 중화문화가 아니라 다민족도 포함된 다중심문화를 인정하여야 한다는 중국의 원로 역사학자 소병기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25) : 《華陽國志》券3「巴志」第1, ‘周失紀綱, 蜀先稱王. 有蜀侯蠶叢, 其目縱, 始稱王. 死, 作石棺、石槨. 國人從之. 故俗以石棺槨為縱目人冢也. 次王曰柏灌. 次王曰魚鳧. 魚鳧王田於湔山, 忽得仙道. 蜀人思之, 為立祠於湔.

26) : 『華陽國志』券3「蜀志」第1, '功秦至雍.', '진나라를 공격하여 옹에 이르렀다.' 옹(雍)은 현재 섬서성 봉상현 남쪽 보계(寶鷄)지역이다. 촉의 영토는 사천지역을 벗어나 섬서성 일대에까지 폭넓게 확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7) :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는 중국 최초의 청동기문화로 BC 16세기 이전에 발달한 문화로 추정된다. AD 1959년에 하남성 언사현 이리두(河南省 偃師縣 二里頭)지역에서 하남 용산 문화층(河南 龍山文化層)위에서 청동기를 포함한 각종 유물과 함께 상당한 규모의 크기를 가진 궁전유적지와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출토된 청동기 유물의 양은 많지 않았고 제조기술도 조잡한 단계의 수준이었다. 夏(하)대 문화일 가능성이 높다.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는 정주(鄭州) 이리강문화(二里岡文化)를 만드는 기초가 된 중요한 문화이다. 이리강문화는 이리두문화보다 청동기 제조기술이 훨씬 세련되었다. 거대한 성벽과 각종 수공업 작업장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상당한 정치권력을 중심으로 한 사회조직이 잘 발전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정주문화(鄭州文化)는 대체로 안양기(安陽期)의 전 단계에 속하는데, 이와 비슷한 시기의 유적이 호북성 황파현 반용성(湖北省 黃坡懸 盤龍城)을 비롯한 양자강 유역의 여러 곳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정주성(鄭州城)의 지배자는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정치적, 문화적인 지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8) : 섬서성(陝西省) 남부지역일대는 고대 남방문화와 중원문화가 충돌과 융화라는 흔적으로 남아있는 중요한 유적지 중에 하나다. 고대 남방문화의 상징인 고촉국의 문화와 중원문화권의 상(商)나라의 문화가 혼재되어 복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섬서는 고촉국의 북쪽지역이고, 상(商)나라에서는 서쪽 땅이었다. 양 문화권의 접경지역이였기 때문에 양측의 문화가 혼재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런 문화적 교류는 이후 주(周)대까지 이어지는데 특히 섬서성 보계(寶鷄)지역에서 발굴되는 서주(西周, BC 1046∼BC 771)시대의 유물을 살펴보면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주거지와 묘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하나같이 상(商)과 주(周)대의 전통적인 중원문화와 서남부지역의 남방문화(고촉문화), 그리고 서북지역의 강족(羌族)과 저족(氐族)의 원시문화인 사와문화(寺洼文化)까지 유기적으로 혼합된 양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29) : 《사기(史記)》「주본기(周本紀)」, 에는 '무왕(武王) 11년 12월에 대군을 거느리고 맹진(盟津: 지금의 하남성 맹현(孟縣) 남쪽)에서 황하를 건너 상(商=殷)나라 도성 남쪽에 있는 목야(牧野) -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지현부근이라고 추정된다.- 까지 진군하였다. 상의 주왕(紂王)은 군사 70만으로 대적하였으나 목야에서 크게 패하였다. 상의 주왕은 불 속에 빠져 자살하고, 상왕조(商王朝)는 멸망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참고 자료

차(茶)자로 정착된 변천과정


* 참고로 본고(本稿)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고자 하여 촌안(村顔) 박영환(朴永煥)선생의 '차'자에 관하여 발표한 글의 일부를 발췌하여 옮겼다. 이 글도 하나의 주장일 뿐이나 본고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박선생은 진문회(陳文懷, 대만대 차학과 교수)선생의《차의 품음예술(茶的品飮藝術)》중에서 '차'자에 관한 내용의 일부를 위주(爲主)로 하여 요약ㆍ번역하여 그 바탕 위에 해석상에 필요한 본인의 의견을 덧붙였다고 밝혔다.

1. 도(荼)―(音:涂,tú)
  이 글자가 맨 먼저 보이는 문헌은 《시경(詩經)》, 《이아(爾雅)》, 《신농본초(神農本草)》,《동약(僮約)》 에서 보이는 데 그 내용들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시경》
  수위도고(誰謂荼苦)―누가 씀바귀(차)를 쓰다했나.
  채도신저(採荼薪樗)―씀바귀(차) 캐고(따고) 개똥나무 베어
②《이아(爾雅)「석목편(釋木第十四)」》
  가(檟), 고도(苦荼)―가(檟)는 쓴 씀바귀(차)이다.

③《신농본초(神農本草)》
  도생익주, 삼월삼일채(荼生益州,三月三日采)―도(荼)는 익주(益州)에서 나며, 삼월 삼일에 딴다.
④《동약(僮約)》
  무양매도(武陽買荼)―무양(지금의 팽현)에서 도(차)를 사다.
  팽도진구(烹荼盡具)―도(차)를 다릴 도구를 깨끗이 씻는다.(일설에 의하면 盡은 淨이다.)
  포이개장(餔已蓋藏)―차를 다 마신 후에 다구를 다시 정리해 놓는다.

  고대에 도(荼)자의 뜻은 매우 여러 가지이므로 반드시 차(茶)를 가리킨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대부분의 《시경(詩經)》 번역서들을 보면 하나같이 도(荼)자를 씀바귀 정도로만 번역이 되어있지 그것을 차(茶)라고 번역한 책은 극히 보기 드물다. 진(晉)나라 곽박(郭璞 AD 276∼324)이《이아(爾雅) 석목편(釋木第十四)》의 '가(檟), 고도(苦荼)'에 대해 설명한 주석(註釋)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소사치자(樹小似梔子), 동생청(冬生靑), 엽가자갱음(葉可煮羹飮). 금호조채자위도(今呼早采者爲荼), 만취자위명(晩取者爲茗), 일명천(一名荈), 촉인명지고도(蜀人名之苦荼).'
'나무는 마치 치자와 같고, 겨울에는 푸르게 나며, 잎은 삶아서 국을 만들어 마실 수가 있다. 지금에 부르기를 일찍 딴 것은 도(荼)라고 하며, 늦게 취한 것은 명(茗)이라 하고, 일명 천(荈)이라 하며, 촉 땅의 사람들은 이것을 고도(苦荼)라고 이름 한다.'
  이것은 도(荼)가 바로 차수(茶樹)였다는 사실을 최초로 명확하게 지적한 기록이라 하겠다. 아울러, 이것은 최초로 차수(茶樹)의 특징과 특성을 묘술 함과 동시에 차의 채적시기의 이르고 늦음에 따라 각기 다른 명칭으로 불러지고 있음을 잘 설명해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남북조(南北朝 AD 420년∼589)에 이르러 음차(飮茶) 풍조는 민간에까지 보급되었다. 아울러 많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던 도(荼)자는 이미 민간의 음다풍속 속에서 차(茶)자의 대체 문자로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서서히 도태되어 갔으며, 이에 따라 차(茶,chꐁ)자와 도(荼,tú)의 함의(含意)는 점점 구분되기에 이른다. 당(唐)나라 고조(高祖) 때의 국학박사(國學博士) 육덕명(陸德明 AD 618년∼626)이 저술한 《경전석문(經典釋文)》과 《제경독음(諸經讀音)》에서 도(荼,tú)자의 독음(讀音)은 이미 차(茶,chꐁ)자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것도 발음만 바뀐 것이지, 글자가 도(荼)자에서 차(茶)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2. 타(詫)―(音:du)
  이 글자 역시 고대(古代)의 차(茶)자 중의 하나이다. 고증에 의하면 도(荼)자 보다 그 역사가 더 오래된 것 같다. 서한(西漢)의 사마상여(司馬相如 BC 179∼118)가 지은 《범장편(凡將篇)》―약 BC 130년 전후로 추정―에 '원화(芫華)ㆍ패모(貝母)ㆍ누로(漏蘆)ㆍ천타(荈詫)ㆍ창포(菖蒲)' 등의 20여 종의 약물(藥物)이 기재되어 있다. 무릇 《범장편(凡將篇)》이란 후세(後世)의 계몽잡자(啓蒙雜字) 교과서와 비슷한 것이며, 동시에 일종의 고자서(古字書)이기도 하다. 타(詫)자는 차(茶)자의 옛날 정자(正字)이다. 음운학상으로 분석해보면 타(詫)자와 도(荼)자는 동성자(同聲字)이다.
  타(詫)의 원래 뜻은 뚜껑과 그릇 받침이 있는 마실 거리의 도구(飮具)이다. 그 음(音)은 도(荼)와 동음(同音)이다. 이것은 바로 고대의 다기(茶器)를 가리키는 말로써, 아마도 후대의 뚜껑과 차탁(茶托)이 있는 다완(茶碗), 즉 개완찻잔(蓋碗茶杯)에 상당하는 다기(茶器)였을 것이다.

3. 가(檟)―(古音:古 gǔ, 今音:假 jiꐂ)
  이것은 유일한 목(木)변의 고대 차자(茶字)이다. 《이아(爾雅) 석목편(釋木第十四)》의 '가(檟), 고도(苦荼)'조에 처음으로 보인다. 《광아(廣雅)》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형파(荊巴)지구에서는 가도의 잎을 구워, 콩잎(콩의 어린잎)ㆍ생강ㆍ껍질 등을 넣어 명(茗:차)을 만들어 그것을 마셨다.'
  '형파간구가도지엽(荊巴間灸檟荼之葉), 가입숙ㆍ강ㆍ귤자등위명이음지(加入菽ㆍ薑ㆍ橘子等爲茗而飮之).'
  《다경(茶經)》에도 이 글자가 보인다. 《다경(茶經)》에서 말하기를 '그 맛이 달으니 가(檟)이다.'라고 하였다.
  가(檟)의 고음(古音)은 고(古,gǔ)와 같이 읽는데, 이것은 고(苦,kǔ)와 도(荼,tú)의 합음(合音)이다. 이렇게 가(檟)자가 고ㆍ도(苦ㆍ荼) 두 글자를 합음(合音)한 가차자(假借字)에서 말미암았고, 게다가 사람들이 도(荼)자만을 주로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차사(茶事)에 대한 역사 기록 중에서는 오직 '고도(苦荼)' 두 글자만이 많이 보이고, '가(檟)'자의 사용은 매우 드물게 보이게 되었다.

4. 설(蔎)―(音:設shè)
  양웅(楊雄)의《방언(方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촉서남인위도왈설(蜀西南人謂荼曰蔎).' 즉, '촉땅 서남인들은 도(荼)를 일러 설(蔎)이라고 한다.'라 하였다. 이는 사천성 서남부에서 차(茶)를 칭하는 속어(俗語)임을 입증하는 기록이라 하겠다. 육우의 《다경(茶經)》에서도 '설(蔎)'자를 일러 차의 별명(別名)이라 하지 않았는가.

5. 천(荈)―(音:喘 chuꐂn)
  이 글자는 초(草)변으로 오직 차엽(茶葉)만을 가리키는 고대의 차(茶)자이다. 이 글자는《범장편(凡將篇)》에서 제일 먼저 보인다. 그 외에도 이 글자는 다음과 같은 문헌 등에서 보인다.
  《삼국지(三國志) 오지(吳志)》「위요전(韋曜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요(韋曜)는 주량(酒量)이 겨우 두 되밖에 되지 않으므로 손호(孫皓)는 처음부터 요(曜)에게 예를 달리하여 몰래 차(荼荈)를 하사하여 술을 대신토록 하였다.'라고 기록되어있다.
* 역자 주(註) :《三國志》券65「吳書」第20〈王樓賀韋華傳〉, '皓每饗宴, 無不竟日, 坐席無能否率以七升爲限, 雖不悉入口, 皆澆灌取盡. 曜素飮酒不過二升, 初見禮異時, 常爲裁減, 或密賜茶荈以當酒, 至於寵衰, 更見偪彊, 輒以爲罪.'
  진(晉)나라《손초가(孫楚歌)》에 '강계도천출파촉(姜桂荼荈出巴蜀)' 즉, '생강ㆍ계피ㆍ차는 파촉(巴蜀)에서 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상에서 나타난 도천(荼荈)은 지금의 차(茶)이고, 파촉(巴蜀)은 현재 사천성, 성도(成都)와 중경(重慶)을 합칭(合稱)하는 말로써 삼국시대 때의 촉나라 영토를 말하는데,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일대가 된다.
  이 글자의 원래 뜻은 정제(精製)되지 않은 거친 차(粗茶) 혹은 늦게 딴 차(茶)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아(爾雅)》에 이를 입증하는 기록이 있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서술한 본문 1. 도(荼)조에서 언급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대체로 동한(東漢) 때부터 시작하여 천(荈)이란 글자가 차츰차츰 명(茗)이란 글자를 대신하여 차(茶)라는 글자의 의미로 쓰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6. 명(茗)―(音:酩,mǐng)
  《신농식경(神農食經)》에 이르기를, '도명구복(荼茗久服), 영인유력열지(令人有力悅志)' 즉, '차를 오래 복용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힘 있게 하고, 뜻을 기쁘게 한다.'라고 하였다. 또《이아(爾雅)》에도 이 글자의 기록(내용 생략, 上文 참고 바람)이 보이며, 당(唐)《옥편(玉篇)》에 이르기를 '명(茗)은 차아(茶芽)이다.'라고 하였다. 차의 발상지인 사천성(四川省)의 방지(方志)인《화양국지(華陽國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파촉(四川)지방의 뜰에는 향기로운 부들 싹이 있으니, 향명(香茗)이라(巴蜀園有芳蒻, 香茗) ….'
  이상에서 살펴 본 명(茗)자는 비교적 늦게 출현한 글자이다. 그 출현이 도(荼)나 천(荈)보다 훨씬 늦다. 한(漢)나라 허신(許愼)의《설문(說文)》에 보면 이 글자를 새로 추가로 첨부하였기 때문에 명(茗)자의 해석이 없다. 어떤 이는 추측하기를 '이 글자가 동한(東漢)시기에 차엽(茶葉)을 표시하는 글자로 쓰이지 않았을까?'하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는다. 그러나 어원(語源)에 근거하여 보면 명(茗)자는 운남성(雲南省) 일대에서 주로 사용했던 차(茶)자의 토착어(土着語)이다. 태국어의 차(茶)의 독음(讀音)은 아마 이 명(茗)자에서 유래된 것이라 생각된다.
* 역자 주(註) :
《說文解字》(後漢, 許愼, AD 2世紀前期) ‘荼 苦荼也 從艸余聲 同都切 臣鉉等曰 此卽今之茶字, 茗 荼芽也 從艸名聲 莫廻切’

7. 고로(皐蘆)
  《동군록(桐君錄), 성서(成書)년대가 불확실하다. 춘추(春秋)설과 동한(東漢)설이 있다.》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남방에 과로목이 있는데, 이 또한 명(茗)과 같이 아주 쓰고 떫다. 그것을 가루로 취하여 끓여 마시면, 또한 밤새도록 잠을 잘 수 없다.'
  '남방유과로목(南方有瓜蘆木), 역사명(亦似茗), 지고삽(至苦澀), 취위설(取爲屑), 자음(煮飮),역통야불면(亦通夜不眠).'
  남북조(南北朝)대에 심회원(沈懷遠 AD 557년∼589)의《남월지(南越志)》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용천현에 고로가 있어, 과로(瓜蘆)라 이름 하는데, 잎사귀는 마치 명(茗)과 같다. 토착 인들은 그것을 일러 과라(過羅) 혹은 물라(物羅)라고 하는데 모두가 오랑캐의 말이다.'
  '용천현유고로(龍川縣有皐蘆), 명과로(名瓜蘆), 엽사명(葉似茗), 토인위지과라(土人謂之過羅),혹왈(或曰) 물라(物羅), 개이어야(皆夷語也).'
  당대(唐代)《본초(本草)》에는 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고로는 일명 과로(瓜蘆)라고도 한다. 지금 남방에 사는 사람들이 그것을 쓰는데, 고등(苦登)이라고 이름하며, 잎사귀가 마치 명(茗)과 같다.'
  '고로(皐蘆), 일명과로(一名瓜蘆), 금남인용지(今南人用之), 명왈고등(名曰苦登), 엽사명(葉似茗).'
  고증(考證)에 의하면 고로(皐蘆)는 고도(苦荼)의 회역음(回譯音) 문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중국 남방(雲南ㆍ四川일대)에서 야생(野生)하는 대엽형의 차나무를 광범위하게 통칭하는 말로써, 가끔씩 차(茶)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근대의 식물분류학자들은 역사에 나타난 고로(皐蘆)라 하는 것을 아예 차나무의 유형을 대표하는 일종의 차수(茶樹)의 변종(變種)이라 결론짓고 'Camellia sinensis var. macrophylla'이라 명명(命名)하였는데, 이는 곧 '중국대엽변종(中國大葉變種)'이란 뜻이 된다.(1958년 J.R.Sealy가 명명)

8. 차(茶)
  차(茶)자가 최초로 보이는 것은 당대(唐代) 소공(蘇恭)의 《본초(本草)》에서이다. 당(唐)《본초(本草)》는 당나라 고종(高宗) 영휘(永徽) 년간(AD 650∼655년)에 이적(李勣) 등이 편찬한 것인데, 현경(顯慶) 년간(AD 656∼660)에 소공(蘇恭)ㆍ무기(無忌) 등이 주석(注釋)을 단 것이다.
  소공(蘇恭)이 당(唐)《본초(本草)》를 중수(重修)한 이후, 차사(茶事)에 대한 기술은 모두 차(茶)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더 이상은 도(荼)자로써 차(茶)자를 대신하는 일은 없었다.《당운(唐韻)》에 '도자중당(荼自中唐), 역작차(亦作茶).' 즉 '도(荼)는 중당부터 또한 차(茶)자로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당나라 문종(文宗 AD 827∼840)과 선종(宣宗 AD 841∼859) 기간 동안에는 이제까지 차(茶)자를 대신하여 사용해오던 일체의 모든 별명(別名)을 폐용(廢用)하고, 오직 차(茶)자 하나만을 사용하도록 통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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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살며 사랑하며
글쓴이 : 동초(垌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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