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다도. 중정(中正)
차를 마실 때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마시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둘이서 차 한 잔씩을 앞에 놓고 마주보며 얘기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좋습니다. 그 상대가 친구나 연인이면 더 좋고, 부부라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친구끼리라면 세상 돌아가는 얘기가 화두가 될 것이고, 연인 사이라면 장래의 부푼 꿈을 꾸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부부라면 당연히 집안 얘기를 하면서 정감을 나누면 됩니다. 다신전(茶神傳) 음다(飮茶)편에도 '차 마실 때 손이 적어야 귀하다.(飮茶以客少爲貴)'고 하여 차를 마실 때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고 말했습니다. '차를 마시는 손(客)이 많으면 소란스러워 아담한 정취가 모자란다. 세넷이면 그냥 마시는 취미처럼 되고, 대 여섯이면 분위기가 들뜨며, 일곱 여덟이면 술잔을 주고받듯이 베풂과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혼자 앉아 마시는 것도 이상(신령)하게 보인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마주하고 마시는 것이 으뜸이다.'고 하여 둘이서 마주보며 차를 마시는 것을 제일로 치며 권장하고 있습니다. 하기야 속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사람과 정감을 나누면서 차를 마시는 즐거움을 어디에다 비할 수 있겠습니까. 다신전의 말이 아니더라도 찻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세상 돌아가는 큰 얘기나 주변의 잡다한 작은 얘기들을 주고받으며 차를 마시는 그림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 집니다. 차(茶)라는 것을 알고 생활화 하면서 내방하는 손님께 차를 내는 일이 이제는 제법 이력이 붙었습니다. 얼마 전에 절친하게 지내는 이웃분이 찾아와 차를 대접한 일이 있었습니다. 손님을 찻자리로 안내하고 서툰 솜씨지만 정성을 다해 차를 우리고 있었는데 그러한 내 행동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엄숙하게 보였습니다. 매번 차를 낼 때마다 느끼게 됩니다만 차를 마시면서 그 이유를 물어보면 머뭇거리다가 역시나 '어색해서 그렇습니다.'고 말하며 계면쩍게 웃습니다. 아마도 그 안에는 차를 든다는 것에 연상해서 다도(茶道)를 떠올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도라는 글자에 도(道)가 들어가니 수행(修行)을 하거나 도를 닦는 것처럼 신성(神聖)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긴장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부터 차는 신성한 음료로 다뤄져 왔습니다. 나아가 그것에 걸맞은 정신을 부여하고 그 정신을 추구해왔습니다. 석용운은 '다도(茶道)란 숙달된 차생활(常識的 수준)로 법도(法道)에 맞도록 잘 우려낸 차(科學的 차원)를 마시면서 느끼는 현현(玄玄)한 아취(雅趣)(哲學的 차원)가 지극(地極)한 경지에 이르러 묘경(妙境)을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絶對的 眞理 차원)'고 다도를 정의하였습니다. 이렇듯 차의 신성함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 상징성이 갖는 정신을 추구하였습니다. 다도를 철학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이것을 동양 삼국에서는 다도(茶道)라고 정의(定義)하였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는 다선일여(茶禪一如)라 하여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이 말은 차(茶)와 선(禪)을 한 맥락으로 본 것으로 차 마시는 정신에 선이 있고 그 과정에 다(茶)의 도(道)가 통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차를 마시는 정신과 태도와 정성을 모아 나름대로의 도를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극동을 대표하는 한중일 3국은 고유한 차(茶)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3국은 각각 상이한 차(茶) 역사의 배경을 바탕으로 오랜 동안 상이한 방법의 차(茶)생활을 통하여 차(茶) 문화를 발전시켜왔습니다. 당연히 상징하고 추구하는 차(茶)의 정신인 다도(茶道)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차(茶)의 제조방법과 음용방법이 다르고, 다례(茶禮)의 표현형식과 차(茶)를 통해 강조하는 의미도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처럼 각기 다른 차(茶) 문화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려는 방식 역시 다른 것은 당연하다 하겠으며, 나아가 독특하고 창의적인 언어적 표현형식을 찾고자 노력하는 것도 또한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 안에는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역사관과 사상은 물론이고 민족이 가지는 보편적인 정서(情緖)도 빈틈없게 포함되고 충실하게 표현되어야하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언어를 찾는 것이 요체(要諦)이며 이를 위해 다인(茶人)들이 고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식(形式)이란 실질(實質)을 구체적으로 표현(表現)하는 것이지만 실질내용 또한 표현하는 형식에 의해 그 내용이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양쪽을 다 충족시키면서 고유한 다도(茶道)에도 마땅히 일치하여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문질빈빈(文質彬彬=내용과 형식이 함께 빛남)의 요체요, 표리일체(表裏一體)의 미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에서는 화경청적(和敬淸寂)이라는 표현을 빌려 다도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센리큐(千利休, AD 1522∼1591)에 의해 정립된 것으로서 화(和)는 화합과 조화이며 경(敬)은 공경과 존경을 표현합니다. 화목을 느끼게 되면 자연히 상대방을 존중하게 되고, 서로 존중해야 화목해집니다. 그리고 화목하여 서로 상대방을 존중하면 자기의 주위도 깨끗이 정리되고 누구나 마음이 맑아집니다(淸寂). 거추장스러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다인(茶人)은 '서로 화목하고 존경하며 깨끗하고 고요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의 원류(源流)는 일본다도의 창시자인 이큐선사의 근경청적(謹敬淸寂)이었습니다. 이큐선사 이전에는 '다도(茶道)'라는 것이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송나라 때 전해진 음다(飮茶)풍속의 일환인 투차(鬪茶, 차 겨루기)만이 성행했을 뿐입니다. 이큐 소우준선사는 차의 살림살이에 대해 '사람이 다실(茶室)에 들어가면 겉으로는 남과 나의 구별을 떨쳐버리고, 안으로는 부드럽고 온화한 덕을 함양하며, 서로 간에 교제함에 있어서는 삼가고(謹), 공경하고(敬), 사념을 품지 않고(淸), 평온해지며(寂) 결국 온 세상이 평안해진다.'는 말로 다도를 세웠습니다. 이큐선사의 근, 경, 청, 적은 후일 센리큐에 의해 화(和), 경(敬), 청(淸), 적(寂)으로 바뀌었으며 그 이후 지금까지 일본다도의 핵심사상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다도계에서는 정행검덕(精行儉德)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과연 어떠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무엇을 추구하려 하였을까요? 정(精)은 세밀한 선택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수련의 결과로 나타나는 정교함이기에 정행(精行)은 일본에서 말하는 화경(和敬)보다 더욱 엄격한 다인의 행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검덕(儉德)은 소탈하고 검소한 다인(茶人)의 덕(德)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산(茶山 丁若鏞)의 해석에 따라 덕(德)을 '行+直+心'으로 해자(解字) 해본다면 검덕은 곧은 마음으로 행하는 다인의 검소한 행실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국의 다도정신인 정행검덕(精行儉德)은 육우(陸羽, AD 733∼804)의 《다경(茶經)》에서 논(論)한 후로 시작되었습니다. 다인은 '행동을 바르게 하고 생활은 검소하고 순수하며 성품은 덕(德)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경(茶經)》「上 一之源」에 보면 차의 기원에 대해 소개하면서 다도(茶道)정신인 정행검덕(精行儉德)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차의 성질이 매우 차므로 이를 음료로 마시기에 알맞은 사람은 행실이 바르고 단정하며 검소하고 겸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茶之爲用,味至寒,爲飲最宜, 精行儉德之人.)'고 하였습니다. 즉, 차의 한랭(寒凉)한 기운은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며 조용하여 외부의 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일종의 선천적인 대자연의 기질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은 차(茶)는 바로 정행검덕(精行儉德)하는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음료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중정(中正) 우리가 내세우는 다도의 정신입니다. '중정'은 윤병상 교수에 의해 연구발표 되었으며 많은 다인(茶人)들의 지지에 의해 정(定)해지고 현재까지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그 내력에 대하여 윤교수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다도정신을 '중정(中正)'이라고 결정한 내력은 이러하다. 1975년에 한국 차의 정신은 《동다송》에 있는 '중정'이어야 한다고 연구 발표하였으며 대다수의 다인들이 동의하고 '중정'을 한국의 다도정신으로 삼게 되었다. 효동원에서 모이던 다인들의 모임이 모체가 되어 1977년 1월 15일에 다솔사에서 한국다도회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립되고 회장에 효당 최범술 스님을 옹립하였다. 그때 정식으로 한국의 다도정신은 '중정'이라고 채택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다도회가 발전하여 1979년 1월 20일에 한국 다인회가 결성되고 한국다인회의 회지격이었던 《다원》이란 차에 관한 전문적인 잡지가 창간될 때 한국 차의 정신은 '중정'이란 글을 처음으로 쓰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 다인들은 한국 차의 정신은 초의선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중정’이란 것을 따라야 할 것이다." 중정(中正)은 중국이나 일본의 개념보다 더 먼 거리에 있습니다. 초의(艸衣)선사의《동다송(東茶頌)》에 따르면 차의 본령(本領)은 중정(中正)에 있다고 했습니다. 《동다송》에는 중정(中正)을 다음과 같이 두 번에 걸쳐 쓰고 있습니다. 즉 본문에서 '체신(體神=몸과 신)'이 '수전유공과중정(雖全猶恐過中正=비록 온전해도 中正 지나칠까 두려우니)하니, 중정불과건영병(中正不過健靈倂=中正을 넘지 않으면 건전한 신령 아우른다)'이라 쓰고, 주석(註釋)에서 '다과의작(多寡宜酌=차의 많고 적음을 가늠하여 마땅하게), 불가과중실정(不可過中失正=中正을 넘거나 잃지 않도록 한다)'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요지는 물과 차(茶)는 각각 차(茶)의 몸(體)과 신(精神)이기 때문에 중과 정이 넘침을 두려워해야 하며 '중정'이 균형을 이룰 때 체와 신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석(註釋)에서는 이를 물과 차(茶)의 양을 적절히 조절함으로써 중(中)이 넘쳐 정(正)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으로 부연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차인(茶人)들에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최적의 균형 상태를 강조하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중정(中正)의 어원을 살펴보면 근원은 보다 먼 곳에 있습니다. 중용(中庸 31章)에 보면 '제장중정 족이유경야(齊莊中正 足以有敬也)란 구절이 나옵니다. 이 말은 '엄숙하고 올바름은 족히 공경함을 있게 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중(中)이란 기울거나 치우침이 없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내외(內外)가 가지런하고 엄숙하면 족히 존경받을 만하다.'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중(中)은 외형을, 정(正)은 내면 즉 실제 이치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곧 '중정'이란 군자의 덕목으로서 내용과 형식의 표리일체(表裏一體)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주역에서는 중정이 괘효(卦爻)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중은 효의 위치를 보여주고 정은 음양의 이치에서 효의 위치가 바른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즉 중(中)은 형상을, 정(正)은 형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선조들의 다도는 우리민족의 정서처럼 온화한 가운데 정성을 다 하였습니다. 좋은 차를 마시기 위해 새벽에 산길을 걸어올라 가장 맑은 윗물을 길어다 그 물을 차물로 썼습니다. 차물을 끓일 때도 너무 급하지도 않고 너무 약하지 않은 불로 끓였습니다. 차를 마시기 전에 고개를 숙여 잠시 차 빛깔을 감상하고 입술에 살며시 적셔 향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다도입니다. 물이 맑지 않으면 아름다운 빛깔이 나오지 않으며, 불이 급하거나 모자라면 향기가 잘 어우를 수 없습니다. 안과 밖이 똑같은 것을 순향(純香)이라 하고, 설지도 않고 너무 익지도 않은 것은 청향(淸香)이라 하며, 불기운이 고르게 든 것을 난향(蘭香)이라 하고, 곡우(穀雨) 전 차의 싱그러움이 충분한 것을 진향(眞香)이라 하여 향(香)에도 격(格)을 매겼습니다. 불을 다룰 때도 체계를 두었습니다. '차를 달이는 요령은 불을 가늠하는 것이 먼저 중요하다. 화로에 불이 벌겋게 달아오르면 다관을 얹고 가볍게 부채질 하다가, 물 끓는 소리가 들리면 한층 세게 부치는데 이것을 문무지후(文武之候)라고 한다. 불기운이 너무 약하면(文火) 물이 유연한데, 물이 유연하면 다신(茶神)이 가라앉는다. 불기운이 너무 세면(武火) 불이 극렬한데, 불이 극렬하면 물이 너무 끓어 노수(老水)가 되고 차가 눌리게 된다. 이는 모두 중화(中和=中正)를 잃은 것으로 다인(茶人)이 취할 바가 아니다,' 이와 같이 물을 긷는 과정에서부터 차를 끓이고 마시며 음미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중정(中正)을 깨우치며 실천하는 차 문화를 만들고 꽃피었습니다. 차를 마시는 과정에서도 정신의 수행과 중용의 의미를 깨닫는 선조들의 지혜가 바로 우리의 다도입니다. 어느 분의 말씀처럼 '중정(中正)의 의미를 확대하여 한국 차(茶)의 기본정신을 두 글자로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이는 과도한 의식에 빠지지 않으면서 일상사(日常事)처럼 함부로 차(茶)를 다루지도 않는 자연스러움 속에서 형식과 실질면의 균형을 찾으려했던 선조들의 고유한 차(茶) 정신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입니다. 다도(茶道)는 차를 마시는 방법이나 태도나 몸가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도라고 말할 때는 차 마시는 사람이 지녀야할 정신과 다도가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인은 품격을 지녀야 합니다. 차를 마실 때는 물 흐르듯 상대의 이야기에 수긍하는 예(禮)를 갖춰야 합니다. 이 또한 함께 차를 마시는 일이 정신적인 나눔임을 뜻한다 할 수 있겠습니다. 차를 마시는 일은 정감(情感)을 나누는 일입니다. 사발에 물을 따르고 손길로 온도를 식히며 사람의 체온과 비슷하게 되었을 때, 마주하는 사람의 찻잔에 차를 따라줍니다. 따르는 소리가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같습니다. 차이야기들을 들려주며 정(情)을 나누어 마십니다. 차 한 잔에서 흐르는 향기와 빛깔이 천수를 살아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차를 마시는 일에는 여러 가지의 의미를 둘 수가 있습니다. 재미난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1200년 전 중국 당(唐)나라의 조주선사는 '끽다거(喫茶去=차나 한잔 마시고 가시게)'라는 화두(話頭)를 세웠습니다. 끽다거의 유래는 조주선사의 다음의 선문답(禪問答)으로 지금까지 널리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어느 날 선사가 절을 방문한 한 학승(學僧)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전에도 여기에 온 일이 있는가?" "온 일이 없습니다."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 다른 학승에게도 똑같이 물었습니다. 그 학승도 대답하였습니다. "예, 한 번 와본 적이 있습니다."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 원주가 조주선사께 여쭈었습니다. "노스님께서는 무슨 연유로 전에 온 일이 있다는 이에게도 '차를 들고 가라' 하시고 온 일이 없다하는 이에게도 '차를 들고 가라‘ 하십니까?" "원주야!" "예" "차나 한 잔 들어라."
이것이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역설하는 끽다거의 유래입니다. 선(禪)의 맛을 모르면 차(茶)의 맛도 모른다고 불가에서는 말합니다. 그래서 이큐 소우준선사는 주광문답(珠光問答)에서 일미청정(一味淸淨)하고, 법희선열(法喜禪悅)하니 조주선사(조주종=趙州從=조주종심 AD 778-897)는 이를 체득했지만, 육우(陸羽, 다경의 저자)는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고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질타 반을 섞어 말하며 그 의미를 강조하였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복잡다단한 세상살이에는 어렵고 힘든 일도 많고, 짜증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좋은 일에도 좋지 않은 일에도, 중도(中道)나 중정(中情)에도 평상심(平常心)을 가진다는 의미만큼은 다인(茶人)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 되새겨 볼만한 일일 것입니다.
끝으로 차의 정신(精神)에 대한 바른 정의라고 생각되는 석용운의 《韓國多藝, 1988.2.15 初版발행, 도서출판 초의》에서 발췌한 글을 올려봅니다. 『차생활에는 법도(法)가 있고 의식(儀)이 있고, 절도(度)가 있고, 예절(禮)이 있고 일거리(事)가 있고 기술(術)이 있고 기교(技)가 있고 즐거움(樂)이 있고 예능(藝)이 있다. 이러한 경지를 초월하여 달관한 경지에 이르면 절대자의 경지인 다성(茶聖)이요 다신(茶神)이요 다선(茶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밥 먹 듯 숭늉 마시듯 하는 생활로 차생활을 한다면 이러한 차생활은 상식적인 수준이다. 여기에는 법도나 예절이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갈증을 메우는데 있어야 하는 숭늉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차생활이 오랜 세월을 두고 거듭하다가 보면 나름대로 법도와 체계가 갖춰지게 되는 데 이쯤 되면 과학적 차원으로 승화하게 되는 것이다. 즉 차생활의 일정한 법도와 의식과 예절과 차를 만들고 끓이는 기술과 그에 따르는 제반의 익숙한 솜씨는 모두가 과학적 차원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차를 끓이는 일정한 법도와 관혼상제(冠婚喪祭) 때에 차를 올리는 의식과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예절과 차를 잘 만드는 기술과 차를 맛있게 끓이는 솜씨와 차를 다룰 때 행하는 일반적인 모든 일거리 등이 일사불란하게 잘 이루어져야 하며 이러한 제반 행동은 모두가 과학적 차원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익숙한 솜씨와 정돈된 행다법(行茶法)에서 얻어지는 쾌락과 예술적 심미감이 있다면 이는 철학적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평소에 차생활을 통해서 얻는 정서적 안정감이나 정신작용에 의한 자기 구현이 바로 철학적 경지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차생활이나 그 발전 향상으로 얻어진 법도와 의식과 예절과 행다에 따른 기술적인 동작은 모두가 행동규범에 따른 육체적인 동작이요, 물질적인 행동반경의 영역에 속하므로 형이하학적인 얘기가 된다. 그러나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동작과 과정을 통해서 승화된 정신세계의 예술적 심미감이나 마음의 편안과 쾌락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문제로서 정신작용의 영역이다. 그래서 물질적 변화가 정신적 변화를 고무시킬 수 있도록 이루어진 의식과 법도가 바로 차생활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즈음 항간에 많이 행해지고 있는 전통다도 강좌나 전통다례의식 발표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지만 더욱이 차를 끓여 대접하는 예절과 방법을 '다도'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는 지극히 위험한 생각으로 하루 속히 고쳐져야 할 일이다. 다도(茶道)란 차생활을 통해서 얻어지는 깨달음의 경지이지 차생활의 예절이나 법도 그리고 차를 끓이는 행다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차를 대접하는 예법이요 차 끓이는 방법일 뿐이지 결코 다도는 아니다. 또 하나는 '다도(茶道)'가 옳다 '다예(茶藝)'가 옳다 또는 '다례(茶禮)'가 옳다고 하여 많은 시비와 논란의 대상이 된 바 있는데 이는 도(道)와 예(藝)와 예(禮)가 의미하는 뜻을 잘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 시비라고 할 수 있다. 도(道)의 경지와 예(藝)의 경지와 예(禮)의 차원이 각기 다르다고 하는 점을 알게 되면 그러한 논란은 자연히 해소될 줄로 믿는다. 예(禮)는 차생활의 예법이요 행동의식인 과학적인 차원이요 형이하학적인 범주이다. 그리고 예(藝)는 과학적 차원인 차생활의 예의범절과 법도를 통하여 얻어지는 정신세계의 심미안적 예술세계요, 그 예술성을 포함한 정신적 만족감 등을 말한다. 그리고 도(道)라고 하는 경지는 형이상학적 경지에서 최고도로 승화되어 이루어진 절대의 경지요 진리의 차원이다.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을 우리는 성인(聖人)이요 군자(君子)요 도인(道人)이라고 말한다. 이 경지는 완벽한 깨달음의 경지로서 상대적인 것이 무너지고 오직 하나의 세계로 선악과 시비와 유무와 색채와 형상과 언어가 떨어진 경지이다. 이처럼 도(道)는 절대 경지요, 예(藝)는 철학적 경지요, 예(禮)는 과학적 차원으로 엄격한 차별이 있는데 이것이 옳다 저것이 그르다고 말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조상이 완성해 놓은 차문화에 도(道)와 예(藝)와 예(禮)의 경지가 다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위로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