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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님달님설화와 단군설화가 만날 때

_______! 2011. 10. 10. 20:05

해님달님설화와 단군설화가 만날 때

 

 

서양동화 ‘빨간망토와 늑대’ 닮은 해님달님 설화 앞부분에 등장하는 호랑이 이야기를 단군설화와 접목해 풀어내면서 우리 전통의 채색그림자놀이를 활용한 가족음악극 ‘자장가’. 연희단거리패 제공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우리에게 익숙한 해님달님 설화에 등장하는 호랑이의 대사입니다. 산골마을에 남매를 두고 온 잔칫집에 품팔러온 엄마가 잔칫집에서 준 떡을 싸들고 귀가하다가 만난 호랑이로부터 듣는 말이지요.

  이 말은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열려라 참깨’에 비견될 만큼 한국인의 의식세계에 깊이 각인돼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의 심층 무의식을 풀어낼 수 있는 열쇠어가 아닐까요. 연희단거리패의 창단 25주년 기념공연 <자장가>(강석현 원작·이윤택 극본·남미정 연출)는 그 가능성을 흥미롭게 파고듭니다.
 
  연극의 무대는 산골마을 방한칸짜리 허름한 오두막집. 십장생도가 그려진 여섯 폭 병풍 아래 아이가 홀로 잠들어있습니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해도 엄마 안 오시네’라는 기형도의 시 ‘엄마걱정’을 떠오르게 하는 ‘내 유년의 윗못’ 풍경입니다.

우리 전래의 채색그림자극 만석중놀이의 형식을 차용한 그림자놀이 장면.

  아이가 꾸는 꿈은 병풍 속 움직이는 그림자놀이로 형상화됩니다. 대부분 무언극으로 진행되지만 관객 대부분은 그 내용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바로 해님달님 설화의 앞부분입니다. 꿈은 흑백이겠지만 병풍 속 그림자놀이는 형형색색 아름답습니다. 경기 개성일대에서 사월초파일에 펼쳐진 우리 전통 채색그림자놀이인 만석중놀이의 형식을 차용한 장면입니다.

  만석중놀이란 불공을 명분으로 쌀 만석(萬石)이나 받아먹은 중의 탐욕을 풍자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 파계한 지족선사를 풍자하기 위한 놀이라는 설도 있구요. 연극은 그 만석중놀이의 채색그림자 무언극 형식을 끌고와 무대 뒷면을 장식하는 육폭 병풍을 환상적으로 장식합니다.
 
  남매만 있는 집 앞에 엄마가 막 도착하는 순간 아이는 꿈에서 깹니다. 한참을 잠투정 하던 아이가 혼자 밥을 먹고 다시 잠이 들자 꿈의 공간이던 병풍은 도깨비들의 공간으로 바뀝니다. 역시 ‘어둡고 무서워/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아주 먼 옛날’로 이어지는 ‘엄마걱정’의 시구 그대로입니다.

  그것은 비단 시인만의 ‘내 유년의 윗목’ 풍경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 엄마의 부재에서 비롯한 고독을 겪어본 이라면 누구나 눈시울을 뜨겁게 할  유년의 윗목 풍경입니다.

다음 순간 반전이 이뤄집니다. 잠든 척하고 있던 아이가 도깨비들을 놀래킵니다. 그리고 아이와 도깨비들은 이야기 스무고개 놀이를 펼칩니다. 아이가 읽는 동화책 내용에 맞춰 도깨비들이 그림자놀이를 펼치는 것이지요. 이번에도 해님달님 설화의 앞부분 이야기입니다.

   다음 순간 반전이 이뤄집니다. 잠든 척하고 있던 아이가 도깨비들을 놀래킵니다. 그리고 아이와 도깨비들은 이야기 스무고개 놀이를 펼칩니다. 아이가 읽는 동화책 내용에 맞춰 도깨비들이 그림자놀이를 펼치는 것이지요. 이번에도 해님달님 설화의 앞부분 이야기입니다.
  이번엔 엄마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순간 일나갔다가 돌아온 아이의 엄마(김미숙)가 문을 두드리며 중단됩니다. 엄마는 과연 진짜 엄마일까? 아니면 엄마의 탈을 쓴 호랑이일까?
 
  꿈과 동화, 현실로 이뤄진 3겹의 중층구조로 이뤄진 연극은 해님달님설화와 단군설화에 등장하는 호랑이를 하나로 연결시킵니다. 그것은 ‘상처받은 모성(母性)의 끝없는 회귀’라는 뫼비우스의 띠로 형상화됩니다.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온 배우 김미숙 씨의 실감나는 호랑이/엄마 연기가 그 핵을 이룹니다.

호랑이의 발톱과 꼬리를 지닌 엄마는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을 따르는 아이의 응석에 어쩔 줄 몰라한다.

 털북숭이 손으로 아이를 쓰다듬으며 야수의 본능과 모성애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자아실현의 꿈과 모성 실현의 간극에서 번민하는 현대여성의 딜레마를 절묘하게 포착합니다. 그래서 김 씨가 들려주는 자장가 ‘아이야, 청산가자’는 호환마마 보다도 출산과 육아를 더욱 두렵게 만드는 ‘불모(不母)의 시대’에 대한 애가(哀歌)처럼 들립니다.

  날카로운 호랑이 발톱을 뺨에 비비며 “세상에서 엄마 품이 제일 따뜻해”라는 아이의 대사는 또 어떤가요. 제게는 돌아가 안길 품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근원적 외로움에 대한 역설적 표현처럼 들려왔습니다.

  해님달님설화의 호랑이엄마 부분은 서양의 ‘빨간 망토와 늑대’ 설화와 닮았습니다. 서양에선 이 이야기가 환기하는 타자(他者)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에 초점을 맞춘 극예술적 변주가 많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빨간 망토의 비밀’이나 영화 ‘레드 라이딩 후드’에서처럼요. 따라서 이를 상처받은 모성의 회귀와 연결시킨 이 작품의 지극히 한국적인 변주는 확실히 주목할만합니다.

  아쉬운 점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열쇠어를 정작 전체 이야기와 맞물려 풀어내지 못한 점입니다. 연희단거리패가 창단25주년을 맞아 기획한 ‘한국연극의 원형을 찾아가는 이야기 스무고개’의 첫 작품으로서 한계일지도 모릅니다. 스무고개의 이야기보따리를 다 풀어놓을 때쯤 그 비밀이 함께 풀리기를 기대해봅니다.

   동화와 그림자, 음악이 어우러졌지만 공연시간은 1시간뿐이라 초등학생 이상 자녀를 둔 가족은 모두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아홉 살 난 아들과 함께 공연을 봤는데 무대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보고나와서 최근 본 공연중에 가장 좋다며 “아빠가 꼭 기사를 써주라”고 하더군요.^^  10월 7일까지 서울 대학로 게릴라극장. 1만5000~2만5000 원. 02-763-1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