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스크랩] 의릉(懿陵) 개방 10年을 맞이하며

_______! 2007. 5. 5. 02:13

 

의릉(懿陵) 개방 10年을 맞이하며

 

 

 

의릉(懿陵)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산1-5번지 천장산(天臧山) 아래 위치하며 조선 제 20대 경종(景宗)과 그의 계비 선의 왕후 어씨(宣懿王后魚氏)의 능이다. 경종은 숙종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일반적으로 잘알고 있는 장희빈(張禧嬪)으로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 장씨의 소생이다. 시호(諡號)는 덕문익무순인선효 대왕이다.

 

경종은 병약하여 재위 4년 만에 승하하였는데 기록에 따르면 모두 장희빈이 사사된 후부터 질환이 있었다는 것이다. 경종은 성격이 온유하였으며 자녀가 없 
고 병이 많아 이복동생 연잉군(후날 : 영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4년 동안의 경종 재위 기간중에는 집권세력이었던 소론(少論)이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던 노론(老論) 세력을 숙청한 경종 원년(1720)의 신축옥사(辛丑獄事)와 경종 2년(1722)에 임인옥사(壬寅獄事) 등의 두 번의 옥사(이른바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경종은 재위 기간 중에 서양의 수총기(手銃器:소화기)를 모방하여 이를 제작하게 하였다.
의릉이 조성된 천장산 아래 마을의 옛 지명은 양주(楊洲) 중량포(中梁浦)이며, 능 관리면적은 460,193㎡(139,208평) 이다.


 

조선왕조실록에....

「景宗4年(1724)8月25日(乙未) 丑時(01-03時)에 昌慶宮의 環翠亭에서 昇遐하니 王位에 있은지 4年였고 春秋가 37歲였다....중략...........영조 즉위년(1724)9월4일(甲子)에 山役을 시작하여 9월25일 (乙丑) 卯時(05-07時)에 풀을 베고 흙을 팠다. 11月10日(庚戌) 辰時(07-09時)에 壙中을 파기 시작하여 穴 깊이를 營造尺 8尺4寸을 팠다. 12月15日(甲申)축시(01-03時)에 發靷하여 12月16日(乙酉)午時(11-13時)에 楊洲 남쪽 中梁浦의 天藏山에 申坐寅向(南西에서 北東方向)에 葬事지내고 陵號를 懿陵이라하였다.」

 

석관동은 마을 동쪽에 있는 천장산 天臧山(해발141m)의 한 맥에 검정 돌을 꽂아 놓은 즉, 수수떡이나 경단을 꼬치에 꿰어 놓은 것 같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돌곶이 마을이라 부르다가 1724년 의릉(懿陵)이 이곳에 조성된 뒤부터 돌곶이를 ‘능말(마을)’로 불렀다고 하는데 돌곶이를 한문(漢文)으로 표기한 이름이 석관(石串)으로 현재의 동명이 되었다고 한다.

 

의릉은 조선시대의 왕릉 중 드물게 봉분을 좌우배치가 아닌 상하로 조성한 동원이봉릉(同原異封陵)으로 이러한 전후능설제도((前後陵設制度)는 경기 여주에 있는 조선 제 17대 효종의 영릉(寧陵: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에서 처음 나타난 형식인데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생기가 왕성한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두 개의 봉분을 앞뒤로 놓아 능을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영릉과 다른 점은 영릉은 왕과 왕비의 두 봉분이 약간 엇비슷하게 배치하였다면 의릉은 두 봉분이 앞뒤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왕릉과 왕비릉은 각각 단릉(單陵)의 상설을 모두 갖추고 있으나, 왕릉 뒤에만 한 개의 곡장(曲墻)이 둘러진 쌍릉(雙陵)형식으로도 볼 수 있는데 한울타리에 왕과 왕후가 한집에서 함께 머물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봉분은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欄干石)만 두르고 있다. 난간석주에 방위 표시를 위한 십이지문자가 조각되어있다. 석물(石物)은 혼유석(魂遊石)·장명등(長明燈)·망주석(望柱石)·문인석(文人石)·문무석(文武石)과 능을 지키는 수호신인 석마 · 석양 · 석호가 쌍으로 배치되어 있다. 비문에는 "朝鮮國 景宗大王懿陵 宣懿王后 祔(조선국 경종대왕의릉 선의왕후 부)" 라 음각되어 있다.

 

능석물의 배치와 양식은 명릉(明陵: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과 같이 규모가 작고 간소한 후릉제도(厚陵制度)를 택하였는데, 이는 <속오례의(續五禮儀)>를 따른 것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의릉은 1970년 5월26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204호로 지정되었으나, 1962년 국가정보원(구,중앙정보부)이 들어서면서 일반인들의 접근이 철저히 통제되고 왕릉의 원형은 심하게 훼손되기 시작했다.

 

 

왕릉의 우측 능선을 깎아서 넓은 축구장 조성과 콘크리트 청사 건물을 세우는가 하면, 좌측 능선 역시 청사를 짓기 위해 산허리를 잘라냈다. 이뿐만 아니다. 1972년경에 정자각 앞 과 홍살문 사이 사초지의 땅을 파서 인공으로 연못을 만들고 관상어를 기르며, 외래수종 식재와 전통에 어울리지 않은 조경시설물들을 설치하였다.

 

또한 기록에 보면 “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추존: 익종(翼宗)>의 능도 순조 31년(1831) 8월 4일에 이곳 의릉 좌강(左岡 좌측언덕)에 자리 잡아 연경묘(延慶墓)라 하다가 헌종 즉위년에 추존하여 능호(陵號)를 수릉(綏陵)으로 높였는데 철종 6년(1855)에 동구릉으로 이장하였다.”라고 하는데 능 터 마저 묘연하다.

 

경종은 당쟁 속에 짧은 삶이 순탄하지 못했듯이, 음택 역시 편안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국정원이 1995년 9월에 내곡동으로 새로운 청사를 짓고 이전하게 되어 1995년 11월에 능역 부지에 대한 1차 반환이 이루어지면서 그 동안 베일 속에 가려있던 의릉이 34년 만인 1996년 5월 1일 일반시민들에게 첫 선을 보였다. 그리고 1997년 4월 2차 반환, 1998년 12월 3차 반환, 2002년 11월 4차 반환, 2006년 1월 토지 5필지 25,812㎡(7,808평)을 5차에 걸쳐 반환받고 현재는 국가정보원연구소(15,851㎡)를 제외한 대부분의 능역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1996년부터 반환 토지 39%와 건물 대부분은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사용을 하고 있어 완전한 반환은 2006년12월쯤 되서야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 청은 원형에 맞는 능제(陵制)복원정비를 위해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반환 받은 의릉 능역 일부에 대하여 2003년 7월부터 동년 10월까지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와 의릉복원정비지역에 대한 문헌조사와 현장 시굴조사를 시행하게 되었는데, 의릉복원정비지역 발굴조사보고서(문화재청 궁원문화재과, 2004년 발행) 내용을 보면 발굴조사는 정자각 월대에서 금천교까지 이르는 건물지 및 시설물에 대한 관련 매장유구를 확인하였으며 상당부분의 유구는 이미 유실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자각 월대는 대체적으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으나 일부분은 근래에 보수하면서 변형되었다. 참도는 전체 폭과 형태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문헌조사 결과 삼도(三道)가 아닌 이도(二道)임을 알 수 있었고 그 길이가 태계로부터 홍살문까지 250척임을 알 수 있다. 수복방의 유구 일부가 확인되었으며 수라간의 유구는 노출되지 않았다. 그리고 홍살문의 위치는 현 위치에서 보다 안쪽으로 이동할 것으로 보이는데 다른 사례를 등을 검토하면 추정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어구는 현 홍살문의 좌측 초석 아래에서 어구석축이 노출되었고, 노출된 석축 중 다른 석축에 비해 구조적으로 튼튼하게 축조되어 있어서 금천교터로 추정되었다. 어구의 시작점과 끝 지점은 정밀한 발굴조사가 필요하며 대개 어구의 끝 지점은 연지(蓮池)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건상 조사할 수 없었다.’」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발굴조사보고서를 참고하기 바람)

 

발굴조사 당시 현존한 고건축물로는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뿐이었으며, 수복방, 수라간, 재실은 멸실되어 남아있지 않았다. 1968년에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면 대략적인 시설물의 위치를 추정해 비교해 볼 수 있는데 그 당시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에는 연못이 없었으므로 이후에 조성된 것이 확실하다. 조선왕릉지(목을수 編著 · 문성당/의릉 篇)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홍살문 북쪽 264步(주척1보=1.2m)에 재실 13칸[間], 전사청 8칸, 제기고 3칸이 위치하며, 그리고 273步에 안향청(安香廳) 6칸이 위치했다. 재실 남쪽으로 100步에는 연지(蓮池) 있는데 길이가 140尺(주척5尺=1m), 너비가 89尺으로 약 150평 규모의 연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러나 의릉의 재실은 1973년에 영원(英園)재실로 옮겨졌다고 하니 정확히 말하면 멸실되었 다기 보다 이건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발굴조사는 본래의 능역을 모두 복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자각부터 금천교에 이르기까지 그 주변의 일부 건축물과 시설에 대한 배치와 형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원위치 여부를 추정할 수 있었으며, 또 각 건축물과 시설물을 비롯한 주변 지반에 대한 높이를 추정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는 복원정비를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하고자 했던 목적이었다. <송림으로 변한 축구장>이를 토대로 2003년 12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리기다소나무 등 외래수종제거, 소나무를 비롯한 전통 수종 식재, 축구장 철거, 인공연못 성토, 금천교를 복원했다. 어구복원에는 구재(舊材)와 신재(新材)를 사용해 복원하였다. 이렇게 하여 2년간에 걸친 기초적인 의릉 능제복원정비공사를 마치게 된다.

 

 

지금 의릉은 왕릉 바로 우측에 조성되어 있던 넓은 축구장은 전통 소나무 420여 그루를 심어 송림(松林)으로 변해있고 오염된 물로 악취가 풍기던 인공연못은 흙으로 성토해 사초지로 복원돼 풀 향기로 가득하며 또한 사라진 어구를 복원하여 금천교가 놓여져 있다. 아쉽긴 하지만 멸실된 건축물들은 이번 복원정비사업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고요히(?) 34년간 닫혀 있던 조선 왕릉 의릉이 1996년 5월 1일 국민들 앞에 모습을 보인 이후........그 동안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되찾기 위한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며 국민들에게는 역사교육장으로, 휴식공간으로 개방 활용되어 온지 2006년 5월 1일로 「사적 제 204호 의릉」은 공개관람 10年을 맞이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들 한다.

 

능역 전체 규모로 볼 때 의릉 능제복원정비공사가 미약해 보일 수 있지만 조선 왕릉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자 하는 그 시작의 의미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역사의 진정성(眞正性) 회복을 위한 좋은 선례(先例)가 되었다고 본다. 이를 계기로 훼손된 모든 조선 왕릉을 최선의 방법으로 복원하여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온전하게 계승 발전되기를 진정(眞情)으로 기대한다. .

 

 

글쓴이: 의릉지구관리소장 김흥년

출처 : 문화재청
글쓴이 : 문화재사랑 원글보기
메모 :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살문 [紅─門]  (0) 2007.05.17
10대 한국 문화 상징  (0) 2007.05.05
충장사 (광주 북구)  (0) 2007.05.05
길상사[吉祥祠]  (0) 2007.05.05
현충원 홍살문 (철근콘크리트제)  (0) 2007.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