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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吉祥祠]

_______! 2007. 5. 5. 01:57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 있는 김유신 장군의 사당.

 
지정번호   충북기념물 제1호
지정연도   1975년 2월 22일
소재지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산19
시대   1970년대
면적   흥무전 30평, 관리사 16평, 내삼문 6.2평
분류   사묘, 제단

1975년 2월 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김유신(:595~673)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원래 길상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輿)》에 신라시대부터 김유신의 태()가 묻힌 태령산 아래 사당을 건립하고 나라에서 제를 지내오다가 1399년(태종 8)부터 관행제()로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어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당이 소실되자 1851년(철종 2)에 정재경, 박명순() 등이 백곡면 가죽리에 죽계사()라는 이름으로 사당을 재건하여 조감과 함께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죽계사가 철거된 이후 진천읍 벽암리 소흘산() 아래 서발한()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사당을 짓고 계속 제향하였으나 1922년 홍수로 유실되었다.

1926년에 후손인 김만희()의 주선으로 현재의 위치인 벽암리 도당산성() 안에 길상사를 건립하였다. 6·25전쟁 때 심하게 파손되어 중수하였고 1976년 사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전면 신축되어 현재에 이른다.

김유신은 만노군(:충북 진천) 태수였던 김서현()과 만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나 673년(문무왕 13)에 79세로 별세한 신라의 명장이다. 후일 삼국통일의 이룩한 공으로 835년(흥덕왕 10)에 흥무대왕()으로 추존되고 경주의 서악서원(西)에 배향되었다. 그의 묘(사적 21)는 경북 경주시 충효동에 있다.

입구의 홍살문과 본전인 흥무전(殿)을 비롯한 관리사·내삼문·협문 2동 등 총 6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흥무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주심포집으로 벽면과 기단 등을 콘크리트로 지은 현대식 목조건물이다. 안에는 장우성()이 그린 가로 98cm, 세로 187cm의 영정이 있는데 1976년 11월 5일에 봉안된 것이다. 그 밖에 뒤뜰에 흥무대왕신성비, 안뜰에 김유신장군사적비, 입구에 길상사중건사적비 등이 있다.

진천군에는 길상사 이외에도 장군의 여러 유적들이 있는데 장군의 태를 묻은 태령산의 김유신태실 및 돌담(충북기념물 108), 탄생지인 상계리김유신장군유허지(충북기념물 79) 등이 있다. 특히 탄생지와 태실을 포함한 상계리 일대의 129필지가 1999년 6월 11일 사적 제414호로 지정되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축약

삼국통일의 주역이였던 김유신(595∼673)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김유신은 15세 때 화랑이 되었고, 무열왕 7년(660) 상대등이 되었다. 그 뒤 중국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하고 삼국통일(676)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신라와 고려 때에는 장군이 태어난 태령산 아래 장군의 사당에서 봄과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서 관리가 소홀하다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것을 철종 2년(1851) 백곡면에 ‘죽계사’를 세워 장군의 영정을 모셨다. 고종 1년(1864)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는데 1926년 후손 김만희의 노력으로 지금 있는 자리에 길상사를 다시 세웠고, 1975년 정비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장우성이 그린 그의 초상화와 흥무전, 흥무대왕신성비 등이 있다.

 

1975년 2월 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김유신(金庾信:595~673)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원래 길상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신라시대부터 김유신의 태(胎)가 묻힌 태령산 아래 사당을 건립하고 나라에서 제를 지내오다가 1399년(태종 8)부터 관행제(官行祭)로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어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당이 소실되자 1851년(철종 2)에 정재경, 박명순(朴命淳) 등이 백곡면 가죽리에 죽계사(竹溪祠)라는 이름으로 사당을 재건하여 조감과 함께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죽계사가 철거된 이후 진천읍 벽암리 소흘산(所訖山) 아래 서발한(舒發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사당을 짓고 계속 제향하였으나 1922년 홍수로 유실되었다.

1926년에 후손인 김만희(金萬의 주선으로 현재의 위치인 벽암리 도당산성(都堂山城) 안에 길상사를 건립하였다. 6·25전쟁 때 심하게 파손되어 중수하였고 1976년 사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전면 신축되어 현재에 이른다.

김유신은 만노군(萬弩郡:충북 진천) 태수였던 김서현(金舒玄)과 만명부인(萬明夫人) 사이에서 태어나 673년(문무왕 13)에 79세로 별세한 신라의 명장이다.

후일 삼국통일의 이룩한 공으로 835년(흥덕왕 10)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고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에 배향되었다. 그의 묘(사적 21)는 경북 경주시 충효동에 있다.

입구의 홍살문과 본전인 흥무전(興武殿)을 비롯한 관리사·내삼문·협문 2동 등 총 6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흥무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주심포집으로 벽면과 기단 등을 콘크리트로 지은 현대식 목조건물이다. 안에는 장우성(張遇聖)이 그린 가로 98cm, 세로 187cm의 영정이 있는데 1976년 11월 5일에 봉안된 것이다. 그 밖에 뒤뜰에 흥무대왕신성비, 안뜰에 김유신장군사적비, 입구에 길상사중건사적비 등이 있다.

진천군에는 길상사 이외에도 장군의 여러 유적들이 있는데 장군의 태를 묻은 태령산의 김유신태실 및 돌담(충북기념물 108), 탄생지인 상계리의 김유신장군유허지(충북기념물 79) 등이 있다. 특히 탄생지와 태실을 포함한 상계리 일대의 129필지가 1999년 6월 11일 사적 제414호로 지정되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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