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자료

[스크랩] 허준선생 묘

_______! 2008. 2. 9. 22:54
 

허준선생  묘(경기 기념물 128호)              

                             

허준선생 묘는 경순왕릉 개방과 함께 개방된다는 소식만 듣고 기다려 왔었다. 어느날 신문 지상에 2007년 부터 "명의 허준 선생 묘, 54년만에 일반에 개방" 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바로 가지는 못하고 수개월이 지난 12월 어느 날, 나홀로의 12차 번개 답사로 다녀 왔다.

 ▲ 허준선생 묘역 진입하는 주변전경  ▲ 다리 건너 좌측편의 묘역 들어가는 입구전경

그 동안 파주시는 도라산역(경의선)~도라산전망대~제3땅굴의 A코스(21.4㎞·관람시간 2시간30분)만 운영해 왔으나 이번에 신설된 안보 관광 코스는 임진각~도라산 전망대~제3땅굴~해마루촌~허준 묘의 B코스로 왕복 45.6㎞에 4시간가량 소요되며 요금은 성인 9000원 이다.

 ▲ 허준선생 묘역 오르는 길  ▲ 묘역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전경(좌측에 보이는 건물은 재실)

허준선생 묘를 갈수 있는 B코스는 관광객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는 모양이다. 미리 예약 할때도 인원이 적으면 운행을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다행히 나홀로 14명에 일반인 6명으로 총 20명이어서 운행을 한것 같다. 다음에 가시는 분들은 이 점을 고려하시기 바란다.

▲ 허준선생 묘역을 올라서 바라본 전경

안보관광 B코스는 하루에 한번, 13시에 출발한다. 버스가 출발하면 제일 먼저 가는곳이 제3땅굴 이다. 영관관에서 7분간의 영상을 보고, 전시물을 돌아 보고 나온후 땅굴로 들어간다. 엄청 깁니다. 땅굴 입구는 가파르고 길어서 산에 오르내린 느낌입니다. 땅굴에서는 머리 수그리고 다니느라 힘들고, 땀 엄청 흘렸습니다.

▲ 우측에서 바라본 허준선생 묘역 전경(상단에 있는 묘가 허준 선생의 어머니 묘입니다.)

도라산 전망대에서 북한 지역을 조망하고는 허준선생 묘로 향했다. 허준선생 묘 입구에서 현지 문화유산 해설사 분이 탑승하셔서 간단한 설명을 해 주시고, 주차장에서 버스 하차 후, 다리를 건너면 허준선생 묘역으로 들어가는 해설사 부스가 있는 입구가 보인다.

▲ 허준선생 묘비와 비문이 남아있는 부분을 가르키시며 설명 하는 해설사.

200여 미터 정도 길을 따라가면 우측 언덕에 재실이 있고 전방에 허준 선생 묘역이 보인다. 허준선생 묘는 북향이라 그런지 최근에 내린눈이 아직 녹지 않았다. 묘역으로 오르면 최근에 조성 한듯한 묘비가 서 있었다.

▲ 허준선생 묘비에서 비문이 남아 있는 하단 부분

허준선생 묘는 쌍분으로 봉분 좌우로는 문인석이 한쌍 서있으며, 묘역 앞에는 반쯤 깨진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있다. 해설사에 의하면 허준선생 묘를 찾게된 연유와 묘비에 남은 글씨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을 해다. 허준선생 묘를 찾게된 연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신문기사를 읽어 보시면 됩니다.

 ▲ 허준선생 묘위에 위치한 선생의 어머니 묘.  ▲ 허준선생 묘지 뒷편에서 내려다 본 전경.

동양의 의성(醫聖), 동의보감의 저자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명의 허준(許浚 1539∼1615) 선생의 묘이다. 선생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岩)이다. 용천부사를 지낸 허론의 서자로 김포에서 출생하여 당대의 명의인 유의태의 문하에서 의학을 배웠다. 선조 7년(1574) 내의원 취재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혜민서 봉사를 거쳐 전의로 발탁되어 왕실의 진료에 많은 공적을 세웠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때 어의로서 왕을 의주까지 모셨으며 1604년 충근정량호 성공신(忠勤貞亮扈 聖功臣) 3등이 되었고 1606년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지며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어 의인(醫人)으로는 최고의 명예를 누렸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파직, 유배를 당했다가 광해군 원년 (1609)에 다시 복직되었다. 저서로는 『동의보감(東醫寶鑑)』,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등이 전한다.

 

광해군 2년(1610) 16년의 연구끝에 이루어진 『동의보감』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청나라 등지 에서도 간행 보급되어 조선의학 내지 동양의학의 성전(聖典)이 되었다. 선생은 우리나라가 낳은 대표적인 명의·의학자로서 한의학 중흥의 거봉이자 동양의 의성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별세 후 숭록대부에 추록되었다. 그 동안 선생의 묘는 확인되지 않다가 1991년 9월 30일 재미 고문서 연구가 이양재씨등이 『양천허씨족보』에 기록된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선좌 쌍분"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조사한 결과 발견되었다.

 

묘역은 약 50평의 규모로 우측 묘는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의 묘로 추정된다. 이들 두묘 위에 허준 선생의 생모의 묘로 추정되는 묘가 한개 더 있다. 묘소에는 묘비, 문인석, 상석, 향로석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원래의 묘비는 두쪽으로 파손되어 땅속에 매몰되어 있었다. 발굴 당시 원비의 마모된 비문 가운데『陽平(君) (扈)聖功臣 (許)浚』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선생의 묘인 것이 확인되었다.

 

                                                                                                              - 파주시청 홈페이지 내용 발췌 -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5) 파주 진동 허준의 묘
입력: 2007년 03월 30일 15:08:55
1982년 어느 날. 서지학자 이양재씨는 어떤 골동품 거간꾼으로부터 한 통의 간찰(편지)을 입수했다. 눈이 번쩍 띄었다.
“7월17일 허준 배(許浚拜). 비가 와서 길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내용이야 그렇다 치고 글쓴이가 허준이라고? 서지학자는 그만 흥분했다.

“사실확인에 들어갔죠. 허씨 대종회를 찾아가 종친회 족보에서 준(浚)자를 썼던 분을 몇몇 발견했는데요.”
1991년 도굴로 처참하게 파헤쳐진 채 발견된 허준 선생의 묘소(이양재씨 제공). 민통선 이북인데도 도굴꾼의 극성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준(浚)자 이름을 지닌 분들 가운데 이런 초서의 글을 멋들어지게 쓸 만한 학식과 지위에 있었던 이는 단 한분이었다. 바로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선생이었다. 더구나 글자체도 16~17세기쯤으로 추정됐다.

‘양천허씨족보’를 검토한 결과 한국전쟁 이후 실전(失傳)된 허준의 묘가 ‘장단 하포 광암동 선좌 쌍분(雙墳)’이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허준 선생의 묘소를 찾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이는 모래 속에서 바늘찾기격. 게다가 민통선 이북지역. 그러나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도도, 지번도 없는 상태에서는 일제시대 때의 토지대장을 찾으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미공개자료였다. 무시로 열람시킬 경우 재산권 분쟁이 생길 수 있기에 군청이 공개를 거부했다. “허준 묘만 찾으면 된다”고 지역 지주회장 등을 통해 신신당부했다. 간신히 토지대장을 열람할 수 있었다. 샅샅이 옛 지번을 확인하다가 하포리라는 곳에서 주목할만 한 이름이 보였다.

“허준의 13대 종손인 허형욱의 아버지 이름이 보이지 않겠어요? 그래! 이제 찾을 수 있겠다 하고 생각했죠.”

사실 허준의 종손인 허형욱(1924~?)을 비롯한 자손들은 해방 전까지 황해도 해주 대거면에 살았다. 마을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남북분단이 고착화하기 전인 1947년까지 자손들이 38선을 넘어 제사를 지내고 돌아갔다.

복원된 모습. <파주 진동/박재찬기자>
향토사학자인 이윤희씨도 “이 근방인 독정리와 우근리에는 100호가 넘는 양천 허씨 집성촌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 지주회장의 운전기사로 신분을 감추고 10년 가까이 옛 허씨 땅을 찾던 1991년 7월 어느 날.

짐작 가던 허씨의 옛 땅을 찾았으나 엉망이었다. 무덤이란 무덤은 모두 처참하게 도굴돼 있었다. 그런데 어느 무덤(역시 마구 파헤쳐진)에 눈길을 돌리는 순간 이양재씨는 숨이 멎는 듯했다.

“이상한 일이었어요. 그 무덤을 보는 순간 갑자기 온몸이 전기충격을 받은 것 같았아요. 바로 이거다! 하는 느낌이 들었죠.”

땅 속에서 비석이 나왔다. 그것도 두 쪽으로 동강난 명문비석이었다.

“‘陽平○ ○聖功臣 ○浚’란 명문이었어요. 바로 ‘양평군 호성공신 허준’이었습니다.”

의성(醫聖) 허준 선생은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후손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그의 자취를 찾기란 이렇게 힘들다.

생몰년도, 출생지도, 유배지도, 사망지도 그야말로 논쟁의 대상이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선생이 서자였고, 그때만 해도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의사였던 탓이겠지….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감히’ 최근 드라마 속의 ‘장준혁’과 비교해보자. 한마디로 가장 ‘장준혁’다웠지만, 가장 ‘장준혁’답지 못한 의사였다.

“본성이 총민하고… 의학에 조예가 깊어 신묘함이 깊은 데 이르렀다”(의림촬요)는 대목은 선생의 천재성을 말해준다. ‘조선사람 허준’을 쓴 신동원은 “선생은 스스로 기회를 개척하여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고 평가한다. 선생은 1590년(선조 23년) 왕자와 공주, 옹주 등의 두창(마마)을 성공적으로 치료한다. 선생은 드라마 속 장준혁처럼 과감하고 자신감 넘치는 결단을 내린다.

“왕자가 또 이 병(두창)에 걸렸는데… 모두들 약을 써서 허물을 얻을까 가만히 있어 병이 악화됐는데… 신이 세번 약을 써서…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허준의 ‘언해두창집요’에서)

만약 실패했다면 몸을 보전하지 못했을 상황.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처방을 내려 왕자(광해군)를 비롯한 왕가의 병을 고쳤으며 마침내 당상관의 반열에 오른다. 훗날 죽음을 앞둔 임금(선조)을 치료할 때도 그랬다. 다른 의관들처럼 후환이 두려워 대충 처방하지 않고, 더욱 센 약을 처방함으로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광해군 일기)’ 죽어가는 임금을 살리려 했다.

하지만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임금에 대한 계산없는 충성심이 출세의 비결일 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허준은 선조를 따라 의주 피란길에 오른다. 그런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신하들이 줄줄이 임금을 팽개치고 뿔뿔이 흩어진다.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요사스런 말이 퍼지자… 명망 진신(縉紳)들이 보신에만 뜻을 품고… 의주에 이르기까지 문·무관이 17인, ‘어의 허준’을 비롯한… 몇몇이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

정치적인 계산에 따라 명철보신한 사대부와 달리 허준은 끝까지 의리를 지킨 것이다. 선생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이어 보국숭록대부(정1품)에 오르자 질시하는 세력의 상소가 빗발쳤다. 급기야 선조가 죽고, 광해군과 대북파가 정권을 잡자 선생은 “망령되게 약을 써서 임금이 죽었다”는 탄핵을 받는다.

세자시절 허준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긴 광해군은 할 수 없이 귀양 보냈지만(1608년) 1년8개월 만에 방면한다. 그러나 허준이 귀양 간 곳은 남해 먼바다가 아니라 선대 임금과의 추억이 깃든 의주였다. 광해군은 또 “(망령되어 약을 써서 선조가 죽인 게 아니라) 허준의 의술이 부족하여 그랬다”고 변호하기도 했다. 대북파와 소북파 간 정치적인 소용돌이에서 빠졌지만 정치적인 계산에 의해 움직이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뭐니뭐니해도 허준의 ‘불멸의 업적’은 ‘동의보감’이다. 1596년부터 무려 14년 역작으로 완성된 동의보감. 허준은 86종의 수많은 의서들을 참고, 정리함으로써 고급지식을 임상의들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더욱 돋보이는 것은 병든 백성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특히 우리 국토에서 나오는 637개 향약(鄕藥)의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여 백성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두창과 성홍열, 티푸스 같은 전염병에 걸려 속절없이 죽어가는 백성들을 위해 헌신한 이가 바로 허준이다.

“그동안 어린아이의 마마는 약 쓰는 것을 금하고 앉아서 죽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것을 어의 허준이 약을 써서 살아난 사람이 자못 많았다. 민간 사람들이 어려서 죽은 것을 면한 자가 많았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 전한 허준 선생의 진면목이다. 2007년 봄, 민통선, 허준 선생의 고즈넉한 무덤. 문득 불후의 역사가 사마천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기환 선임기자〉

허준선생 묘역 위치도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 129                    화살표 위의 중간 부분에 허준선생 묘가 있습니다. ↑ 

출처 : 나홀로 테마여행 ㅣ 글쓴이 : 광나루
출처 : 산넘고 물건너
글쓴이 : 산넘고 물건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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