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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령 하달

_______! 2008. 7. 13. 17:11

1907년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령 하달

훈련중인 대한제국 군대.



1907년 오늘 일제가 작성한 대한제국 군대해산조칙(軍隊解散操飭)이 순종 황제의 재가를 받습니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총리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병무, 법부대신 조중응 등이 순종을 찾아가서 군대해산령에 제가를 받은 것은 이날 밤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형식상 순종 황제의 이름으로 하달된 문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현재 우리나라 군대는 군대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경비와 능률상에 문제가 있어 차후 징병법을 발표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코자 하노라. 이에 대하여 짐은 유사(有司)에게 명령 하였느니 황제의 시위부대만 놔두고 기타부대는 모두 해대(解隊)하노라. 이번 조치로 제위는 일체 동요하지 않기를 명하노니 혹 폭동자가 있을 시에는 엄중히 진압할 것을 통감에게 의뢰하였으니 장병들은 경거망동하는 것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 해,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위한 국제적 지지를 호소하던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7월19일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일제는 순종 황제를 등극 시킨 후, 조선의 국가체제에 마지막 숨통을 죄기 위해 관리 임명권, 법령제정권, 일본 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정미7조약을 7월 24일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 명의로 체결합니다.

군대해산은 침략에 맞설 정규군의 소멸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이었지만 당시 1만5천명 남짓한 대한제국군은  조선병합의 마지막 걸림돌이었습니다. 대한제국 군대의 주력은 서울에 주둔한 시위대 5개대대,  지방 진위대 8개대대로서 이의 해산은 일제의 침략에 맞설 정규군대의 소멸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이를 위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고 군대해산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먼저 중요 무기와 탄약을 일본군 주둔지로 옮겨 군대 해산으로 발생할 무장 봉기에 대비했습니다. 또 군대해산으로 인한 반발이 조선민중으로 번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군인들의 외출을 전면금지 시켰습니다. 일본본토에서 추가로 1개 여단의 병력과 6만정의 총기를 긴급 수송해서 배치를 완료한 상태였죠. 일제는 서울에 주둔한 시위대 병력부터 해산에 들어갑니다.



해산령이 하달된 다음 날인 8월 1일은 아침부터 억수 같은 장대비가 내렸습니다. 철저하게 비밀로 붙인 탓에 몇몇의 지휘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군인들은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요. 오전 10시 맨손훈련이 있으니 무장을 해제하고 집합하라는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동대문 밖 훈련원에 모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군부협판 한진창이 순종의 군대해산 조칙을 낭독합니다. 이미 주위는 중무장한 일본군 헌병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장병들은 치욕에 몸을 떨며 한 사람 한 사람 계급장을 강제로 떼였고, 은사금 명목의 푼돈을 쥔채 종로나 을지로로 걸어 나오며 길거리에서 대성통곡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실 근위부대인 시위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현재의 소령에 해당)은 울분을 이기지 못해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가슴을 쏘아 자결합니다. 제2연대 1대대 중대장 오의선 정위(현재의 대위)도 박승환 참령을 따라 목숨을 끊습니다.

박승환 참령, 1869~1907



무장을 해제하고 훈련원으로 출발하기 직전 대대장의 항의 자결에 충격을 받은 시위대 제1연대 1대대가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봉기 합니다. 이 봉기는 옆에 주둔하고 있던 제2연대 1대대에도 파급되어 2개 대대 전체가 항쟁에 돌입하게 되죠. 일이 심상치 않게 벌어지자 일본군은 보병 13사단 51연대 2대대, 3대대 병력과 기관총 3문, 남대문과 서소문 위병까지 투입하여 대한제국군과 전투를 벌입니다. 대한제국 최후의 항전과도 같았던 이 전투에서 대한제국군은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4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대한제국군도 사망 68명 중상 일백여명의 피해를 입습니다.



일제는 서울 시위대 해산에 이어 지방 진위대도 차례로 해산시켜 나갔습니다. 그러나 진위대 역시 호락호락 해산당하지 않았습니다. 민긍호가 지휘하는 원주 진위대는 일본 경찰서를 점령하고 진압을 위해 파견된 일본군 충주수비대를 격파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이 각 지역의 의병들과 합류함에 따라 일본군을 도처에서 공격하여 심대한 타격을 입혔으며, 두 차례의 서울 탈환 작전을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병력과 화력이 우세한 일본군 증원 병력 때문에 결국 일본군 격퇴에는 실패하지만 이 시기 합류한 대한제국 군인들은 이후 광복군 형성에도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