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왕비의 처소인 옥호루를 포위한 후, 명성 황후을 시해한
일명 을미사변이 일어나게 됩니다.
명성황후가 사라지자 일본은 조선조정에 관섭이 더욱 심해졌으며
고종황제는 러시아공사관 으로 피신 일명 아관파천
약1년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정상을 찾게 됩니다.
황실의 권위가 하락한 조선황실은 서둘러 대원군과 국민의 합의로
1897년 8월 12일 대한제국을
건국합니다.
이미 갑신정변사건 전부터 근대식군대를 원하던 고종황제는 친일세력세거와
일본의 제국침략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새로운 군대편성을 도입합니다.
(대한제국 건국전에는 근대식 군대가없던것이 아닙니다. 시위대는 대한제국군의 핵심부대로 왕궁 경비와 국왕 호위을 담당했습니다. 처음에 1895년 5월에 설치되었을 때에는 2개 대대로 구성된 1개연대로서 각 대대가 2개 중대고 각 중대는 3개 소대 였습니다. 정원 약800명 가량으로 추정되며
을미사변때 일본군을 저지하다 실패했고 곧 해산되었지만 1897년 1월에 러시아 군사고문의 지도로 시위대가 다시 편성되었고 인원은 1,100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아래사진:대한제국의 육군 예복입니다.)
고종황제는 구식무기로는 더이상 효율적인 군대를 운영할수없다고 판단하여
서양의 무기를 도입하였습니다.
(기존에도 서양의 여러화기가있었으나 모두 낡은기종이었습니다.)
(대한제국 근대군대의 무기)
독일제 마우저 권총
독일제 마우저 M1871 소총
미국제 레밍턴 롤링블럭 소총
영국제 맥심 기관총
미제 개틀링 기관총
독일제 크루프 야포
영국제 암스트롱 야포
최초의 신식군함- 양무호(揚武號)
총배수량 :3432 톤
최대출력 :1750 마력
최대속도 :13.5 노트
함선크기 :전장 105미터 폭 12.5미터
보유무장 :80mm 포 4문,5mm기관포2문(각 좌우 배치)
승무원 : 72명
도입시기 :1903년 4월15일
도입예산 :55만엔(우리돈110만원-당시 국방예산 약 30%투입)
이 양무호는 원래 1881년 영국 미드스버그에 있는 알딕슨사에서 만든 화물선으로
이름은 '팰라스(Pallas)'였습니다.
당시로선 적지않은 크기의 화물선 이었죠.(당시 일본의 화물선 평균 톤수가 600톤)
이를 일본의 미쓰이 상사가 선탁운반선으로 구입하였고
이후 무장을 입혀 대한제국에 되판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고장이 잦은 낡은 배였고 석탄비용도 많이 들어가는 고철덩어리였습니다
일본이 속여 판것이지요.(그것도 살때 25만엔이었던 배를 9년만에 55만엔으로 부풀려서-_-;)
결국 양무호는 제구실한번 못하고 1907년 일제에 의해 무장해제된 후
선원실습선으로 사용되다가1909년 일본 해운회사 하라다상점(原田商店)에
4만2천엔에 매각된 후1916년 동지나해에 수장되었다고 합니다
재미난사실은 군함구입비용인데,당시 대한제국 전체 국방예산이 약412만원이었다고합니다.
헌데,구입비용이 110만원(55만엔)이면 거의 국력을 기울여서 구입한거네요.
...사기를 당해 그렇지
본격군함-광제호(廣濟號)
총배수량 : 1,056톤
진수시기 : 1904년 6월15
인수시기 : 1904년 12월 20일
보유무장 : 3인치포 3문
통신시설 : 무선시설및 선박용 무선통신안테나인 더블렛트 2기
광제호는 일본 가와사끼 조선소에서 막 건조된 신삥~!군함으로대한제국정부로 인수될때부터
무선시설과 비교적 최신식인 3인치포를 보유했다는것말고
제원에 대해선 더자세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_-;
(특기할만한 일은 우리나라 무선전신의 개통이 광제호가 그 효시군요.)
광제호 역시 일제에의해 무장해제후
해안경비함, 등대순시선 및 세관감시선등의 다목적 선으로 활용되다가
1912년 조선우선주식회사에 넘어가 상선으로,
인천에 해원양성소(교장겸 선장 신순성)와 진해 해원양성소에서 실습선으로,
원산-청진간 연락선으로,
마지막엔 1941년부터 석탄운반선으로 사용되다가 해방을 맞았다고합니다.
(대한 제국의 군대 편성)
근대시위대는 1898년에는 시위 1대대와 2대대를 합쳐 시위연대로 개편 포병 1개 중대를 새로 편성하여 맥심 기관총, 개틀링 기관총, 크루프 야포와 암스트롱 야포등이 보급되었고 2년 뒤에는 포병 중대를 포병 대대로 확장하고 시위기병대대를 설치하였으며 군악대 2개 소대도 설치하였습니다. 후에 보병도 2개 연대로 늘어나서 1902년경에는 총병력 5000여명의 막강한 전력이 구성됩니다.
호위대는 국왕의 직접 경호를 담당했던 부대로서 총원 700명 가량으로 추정됩니다.
진위대는 창설시 1개 중대 220명, 1개 대대가 500명 가량의 일본식 편제로 평양과 전주에 1개 대대씩 설치 되었고 1900년부터 본격적으로 증강되어서 총 6개 연대, 18개 대대로 편성
총병력은 2만1천명 가량으로 추정됩니다.
헌병대는 1900년 설치된 원수부元首府 직할의 부대로 최대 5개 중대 규모 지금의 헌병과 같습니다.
일본의 제국침략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고종황제는 강력한 근대식 군대를 원했으며
약8년이란 단기간동안 준비한 대한제국의 군대는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요구로 무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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