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의 어울림 [전통 조경] | |||||||||||||||
아름다운 집-한옥의 어울림 [전통 조경] 이번 장에선 앞으로 구체적으로 한옥에 대해 서술하기 전 언제나 자연과 친화적인 삶을 살아오던 우리 조상들의 삶의 모습에 일부인 전통조경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기로 하며 우리 한옥의 주변 경관부분을 처리하는데 있어 나타나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 중 연못, 정자, 화계, 담장, 다리, 보도, 동물, 석가산, 굴뚝, 화목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중요한 세 가지 연못, 정자, 화계에 대하여 알아보겠으며 추후 담장에 대해선 별도로 다뤄 보겠습니다. 가] 연못
한국에서 연못의 기원은 관개경작과 연관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와 신라에서 연못을 논밭에 물을 대는 데에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러한 저수지의 예로는 백제가 조성해 놓은 전라북도 김제군에 있는 벽골제, 신라 때의 것으로 알려진 충청북도 제천시에 있는 의림지, 경상북도 상주시에 있는 공검지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군사상의 필요에 따르는 군용지도 조성되었으며 신라의 반월성과 고구려 안학궁 등은 수비를 위하여 성루 밑에 파놓은 해지와 안학궁에 딸린 피난산성인 대성산성 속에 파놓았던 수많은 용수지들이 있다. 점차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왕궁이나 권력자들의 저택 안에 정원이 꾸며지기 시작하면서 정원 안에 못을 팠으며 못의 운치를 돋우기 위하여 물속에 섬을 쌓아올리거나 수초를 심어 아름답게 가꾸는 방법 등이 전해져 왔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성행하면서 송나라와의 잦은 교류에 의해 수초로서 ‘연’을 즐겨 가꾸는 경향이 생겨나 마침내 정원 안에 꾸며놓은 못을 연못 또는 ‘연지’, ‘연당’으로 부르기에 이르렀다. 관상을 위해 꾸며졌던 연못의 역사는 꽤 오래된 것으로 짐작되지만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백제의 진사왕이 391년에 한산성 안에 못을 파고 가산을 쌓아 아름다운 못새를 키우고 진귀한 꽃을 심어 가꾸었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고구려 장수왕은 427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안학궁을 지었는데 중궁지 서편의 물가에 가산이 쌓인 연못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500년에는 백제의 동성왕이 공산성 안에 못을 파서 놀이터로 삼았다고 하며 634년에 무왕이 부여의 남쪽에 궁을 짓고 오늘날 궁남지라고 하는 큰 연못을 팠다. 신라는 674년(문무왕 14년)에 반월성 밖에 큰 연못을 꾸몄으며 이것이 오늘날 안압지라고 널리 알려진 연못이다. 고려시대가 되면 수많은 절이 지어져 절마다 연못이 꾸며지는 이 풍습이 일반 저택까지도 널리 퍼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민간 주택에서도 대문 밖의 바깥마당 좌우에 하수를 처리하고 화재 때 용수로 쓰기 위해 2개의 못을 꾸몄다. 처음에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꾸며졌으나 못에 연을 심어 관상을 위한 연못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궁궐의 경우는 주로 후원에 못이 꾸며져 놀이를 위한 자리로 쓰였으나 경복궁의 경회루지와 향원지처럼 후원이 아닌 곳에 꾸며지기도 하였으며 그밖에 풍수설이 가리키는 바에 의해 광화문 안에도 두 개의 연못이 꾸며졌고 광화문 밖의 육조에도 각기 못이 있어서 여름이 되면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났다. 우리나라에 물을 이용한 수경의 조성은 삼국시대부터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으며 그 종류는 지당(池塘), 계간(鷄澗), 정천(井泉)등이 있다. 낮은 곳에 물이 괸 것을 지[池], 뚝을 쌓아 물이 괴도록 한 것이 당[塘]이라 하는데 이를 다시 호안에 곡선으로 조성한 曲池와 직선으로 처리한 方池, 곡선과 직선을 혼합한 苑池로 나눌 수 있다. 오랜 옛날에는 곡지와 방지 두 가지가 모두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곡지는 없어지고 방지만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못 한가운데 둥근 섬을 만드는 기법이 시작되면서 이를 ‘방지원도형’ 이라고 한다. 방지원도형의 못은 음양의 결합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대자연의 섭리를 상징하며 자손이 번영하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으며 이는 유교의 영향에 기인 한 것 같다. 백제의 궁남지, 진주지, 통일신라시대의 안압지 등이 연못 안에 섬을 만들었으며 연못 안의 섬은 신선 사상에서 연유한 삼신산, 즉 영주(瀛州), 봉래(蓬萊), 방장(方丈)의 섬으로 불로장생을 기원했던 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나 정자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지어 주변 경관을 감상하면서 휴식을 취하거나 즐기기 위한 공간건축이며 ‘정자’라는 명칭은 한자어이다. 따라서 그 의미도 한자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정자 정(亭)자는 경치가 좋은 곳에 놀기 위하여 지은 집이라는 뜻의 글자이다. 우리나라는 산천의 자연 경관이 아기자기하고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여, 철따라 변하는 산과 뜰과 강의 풍정을 즐기고 자연과 더불어 생활한 우리 민족에게 정자는 극히 자연스러운 존재였다. 신체의 휴식이나 잔치, 놀이를 위한 기능보다는 자연인으로서 자연과 더불어 삶을 같이 하려는 정신적 기능이 더 강조된 구조물이라 할 수 있는데 깎아지른 듯 절벽 위,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옆에, 삶의 터전인 주거지 연못 옆에, 산천 경계나 들이 잘 보이는 곳엔 어김없이 정자가 있다. 정자가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지어졌는지는 정확히 단정할 수 없으나 형태상의 특징으로 보아 그 연원을 고구려의 부경이라는 소창과 시골에서 쉽게 몰 수 있는 원두막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고대부터 이미 정자를 지을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으나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삼국사기」권 27 백제본기중 의자왕조의 의자왕 15년(655)에 태자궁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을 세웠다는 기록이 최초이다. 그러나 정자보다 규모나 법식에 있어서 상위에 있는 ‘루’에 대해서는 이보다 앞선 무왕 37년(636)에 망해루에서 군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자는 풍류를 즐기고 경치를 완상하고 놀이를 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자는 지배층의 문화적 단편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조원 기법과 장식적인 치목 기술에서 선조들의 빼어난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직선적이고 윤곽적인 처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한국의 조경은 그 주위를 형성하는 수목에도 많은 배려가 있었다. 수목에 인위적인 조형 처리를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라는 형태로 이끌며 4계절의 변화에서 주는 자연의 색상으로 구조의 단순함을 보완하였다. 정자의 평면 유형은 주변 환경과의 조화, 기능 수용 등의 여건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정자는 단일 건물이므로 평면 구성을 비교적 자유로운 형태로 할 수 있다. 외부의 독립 공간으로서 주위 환경과의 조화를 위해 한옥의 일반적인 평면 형태인 칸(間)의 형식에서부터 정(丁)자형이나 아(亞)자형의 평면까지도 시도하고 있다. 또한 수원의 방화수류정과 같은 다각형의 평면 구성도 있다. 정자의 초석은 격식 있는 건축물에 두는 가공된 초석과는 달리 자연 암반이나 자연 초석 위에 세워지는 것이 상례이다. 초석의 위치는 건축 구조상의 평면 형태 또는 건축 목적에 따른 기둥 배치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정자의 가구 구조에는 일반적으로 가구 구성의 기본이 되는 3량 집의 작은 건물로부터 건물의 규모에 따라 큰 량을 두고 있는 건물도 있으나 보통 5량 집 구조의 정자가 가장 흔하다. 일반적으로 정자의 바닥은 지면으로부터 동바리, 멍에 ,장선, 등으로 구성되는 표상(表象) 바닥이거나 한 층 또는 반 층 높이의 기둥을 달아 마루를 구성하는 누마루 형식이다. 정자의 천장은 연등장과 빗천장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으며, 난간이 설치되는 주공간은 성격에 따라 형태와 구조를 두 가지로 대별 할 수 있다. 평난간은 걷거나 움직이는 동성 위주의 공간에 가설되며 계자난간은 공간의 연속, 시각의 연속을 요구하는 정적 공간에서 안정 보호를 위한 시설을 부과한 형태이다. 난간은 그 구조 자체가 갖는 조형성뿐만 아니라 건물 전체의 조형미를 이끌어 가는 부분이며 더 나아가 공간 연출에 따른 이상적인 시각 예술이기도 하다. 정자는 소규모 건축이므로 많은 의장적요소를 지니고 있지는 않으나 현판이나 주련, 낙양, 난간의 하엽무늬 단청 등으로 치장하고 있다. 정자에 걸 맞는 시구나 정자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기도 하고 곡선을 연속적으로 초새김한 낙양이나 하엽 역시 직선 또는 수직, 수평적인 기둥이나 난간의 단조로움을 덜기 위한 변화의 요소이다. 그리고 외관상으로 많은 의장적요소를 주는 정자의 지붕은 초가지붕의 초정에서부터 팔모지붕, 다각지붕 등 많은 형태가 있다. 정자는 자연과의 동화를 위하여 주위를 대부분 개방하고, 바닥은 마룻바닥으로 처리하며 난간을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나. 때로는 마루와 더불어 온돌방을 설치하여 겨울에 대비한 것도 있었다. 정자 주변의 숲이나 냇물, 강 등을 그대로 두어 외부공간을 형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연못을 파거나 나무를 심어 조원(造苑)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서양의 인위적이고 기하하적인 것과는 달리 자연적이며, 냇물이 흐르면 계정(溪亭)을 짓고, 냇물이 없는 동산에는 산정(山亭)을 지었다. 옥산 독락당의 계정과 연경당의 농수정이 이러한 예에 속한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여 정자 주변의 자연경관은 절기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 친화적임을 보여주고 있다. 정자의 예로는 애련정, 능허정, 관란정, 의상대, 추월정, 삼련정, 독락정, 백화정, 농월정, 부용정, 관람정 등 이 밖에 많은 정자들이 있다. 다] 화계
'화계'라는 것은 담장 밑에 석단을 계단 형태로 쌓아 만들어 계단에 화초 및 관목류를 심어 가꾸는 것으로 건물의 터를 고르는 과정에서 형성된 독특한 형식으로 옹벽과 화단을 겸한 형식으로 조성되며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전이공간으로서의 기능을 가진다. 이러한 화계는 마당과 건물 사이에 만들어지는데, 주로 산지 사찰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식으로 사찰의 공간이 점층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접점을 처리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옛집의 입지 상 배산임수를 따라 집 후면의 언덕을 깎아 만든 계단에 조성되어 가옥의 가장 은밀한 곳에 만들어 졌는데, 화목류(앵두, 살구, 능금나무, 철쭉, 진달래 등) 외에도 괴석 및 장식문양을 새긴 석물이 놓이기도 했다. 화계는 조선 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조선 시대에 많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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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5 [02:30] ⓒ 문화저널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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