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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잊혀진 전쟁

_______! 2008. 7. 13. 17:46

안녕하세요. TheGodfather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 중에 괜찮은 글이 있어서 퍼왔습니다. 읽어보십시오. 1차 출처는 네이버 밀리터리 카페 http://cafe.naver.com/nuke928 입니다. 2차출처는 다음카페 Europa Universails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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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은 6월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위한 국제적 지지를 호소하던 고종황제의 헤이그밀사사건을 구실로 7월19일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로 양위시키고 순종황제를 등극시킨 이후 7월 24일 정미칠조약 체결 차관통치를 시작하였고 7월 31일에는 일제는 작성한 군대해산조칙을 새로운 황제 순종으로부터 재가받은 형식을 취하여 8월 1일에는 대한제국군을 훈련원 소집한뒤 대한제국군의 해산식을 강행합니다.

 

이로서 대한제국은 치욕적인 군대해산을 맞이 하게 됩니다.

 

당시 대한제국군의 병력은 수도 서울에 시위대 2개연대 기병 1개대대 2개군악대와 친위대 2개연대와 공병.치중 2개중대 호위대 헌병대 지방으론 수원.청주.원주.대구.광주.해주.안주.북청 8곳에 진위대 8개 대대와 전국 8개 구역 요충지의 분견대로 고종황제와 많은 이들의 염원 속에서 신식무장과 군사훈련을 받은 잘 정돈된 군사력으로 일제는 조선의 신민지화에 앞서 이들의 조직과 훈련을 방해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고 숙원해 마지 않던 해산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 군대는 해산되었다- 는 중간이 생략되고 뒷이야기가 생략된 반쪽짜리 진실입니다.

 

해산식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조선군의 저항을 대비해 서울시내 곳곳에 무장병력을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삼엄한 경계속에 진행된 해산식에 일제와 바람과는 달리 대한제국군은 격렬히 저항하였습니다.

 

해산식이 진행되던 1907년 8월 1일.

 

제1연대 1대대장이었던 참령 박승환은 -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번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 - 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자결하였고 중대장인 정위 오의선도 칼로 자결하였습니다.

 

이 직후 시위대 제1연대 1대대는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였고 이 소식을 접한 직후 제2연대 1대대는 참위 남상덕님이 - 나라를 위해 죽음으로 의로움을 보였는데 내가 어찌 홀로 살기를 바라겠는가 마땅히 저 적들과 결사 항전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자 - 라고 하며 시위대 봉기를 주도하였습니다.

 

시위대들은 곧 탄약고를 접령한 뒤 무장을 하였고 그들은 곧 애초 해산식 내내 무장한체 병영을 포위하고 있던 일본군과 8월 1일 오전 8시부터 11시 40분까지 3시간 40분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뒤 일본군의 포위를 벗어나 시가로 나왔고 일본군은 시위대의 저항이 있을 것으로 어느정도 예상하고 미리 전개해 놓은 병력으로 시위대에 대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였습니다. 보병 13사단 51연대를 중심으로 한 일본군과 조선 시위대는 남대문과 서소문 사이에서 충돌하였고 러일전쟁의 영웅 9중대장 가지하라를 사살하는 등 전과를 세웠습니다.

 

일본군에 비해 시위대는 소수의 병력이었고 일본군은 미리 주요지에 병력을 전개해 놓은 상태였기에 시위대의 활약에도 불과하고 전황을 뒤바꾸지 못하였고 결국 시위대가 보유한 탄약이 바닥나면서 시위대 병사들은 일본군과 백병전에 돌입하였고

 

전사자 68명 부상자 100명 포로 516명을 남긴체 살아남은 시위대 병사들은 시가를 빠져나와 의병에 합류하였습니다.

 

일본군은 - 해산된 군인의 대부분이 지방으로 도망하여 폭도의 무리에 뛰어들어 오랫동안 화란의 불길을 종식시키지 못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 고 기록합니다.

 

일제는 서울 시위대 해산에 이어 지방 진위대도 차례로 해산시켜 나갔습니다.

 

그러나 진위대 역시 일제가 원하는대로 조용한 해산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진위대 역시 대다수 봉기하여 일본군과 교전 후 의병과 합류하였습니다. 의병전쟁은 5단계로 분류되는데 대한제국군이 의병과 합류한 부분은 4단계 고양기 단계로 전국 수많은 의병부대들이 봉기하여 의병운동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의 의병운동으로 1907년 8월 1일부터 1909년 10월 31일까지의 의병운동이 이 단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 시기의 의병운동에서는 구 대한제국군들이 의병과 합류함에 따라 의병부대들에 실질적 전투력이 생기어 일본군을 도처에서 섬멸하고 공격해서 일본군에 심대한 타격을 줄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의병연합부대를 편성되어 두 차례의 서울탈환작전을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끝없이 증파되는 일본군에 비해 무기와 탄약이 턱없이 부족한 구대한제국군과 의병들은 무기와 탄약이 고갈되어 일본군의 격퇴에는 사실상 실패하지만 이 시기 합류한 구 대한제국군은 이후 광복군의 형성에도 막대한 기여를 하게 됩니다.

 

특히 원주진위대는 당시 봉기한 구대한제국군중 가장 화려한 전과와 강력한 세력을 보유하였던 것으로 평가되어집니다.

 

진위대 5대대 원주진위대의 해산 예정일은 8월10일이었습니다.

 

서울 시위대 해산과 봉기의 소식이 8월 1일 오후에 알려지자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대대장 참령 홍유형이 군의 명령에 의해 서울에 오르자 해산명령을 받으러 가는 것임을 판단한 병사들은 특무정교 민긍호의 지휘하에 8월 5일 오후 2시 봉기하였습니다.

 

무기고를 열어 병사들과 봉기에 가담한 민간인들에게도 무기와 탄환을 지급하였는데 소총 1600여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주읍의 우편취급소 군사시설 경찰분견소를 장악한뒤 이어 그들은 약 300명을 급파해서 남산에 도망간 일본경찰대를 추격하여 남산을 점령하였습니다. 일본군은 곧 충주수비대를 급파하자 남산 부근에서 2시간 동안의 치열한 교전끝에 일본군 기십명을 사살하였고 충주수비대는 패주하였습니다.

민긍호는 처음부터 의병부대를 다수의 소집단으로 분할하여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원래의 일본군수비대를 끊임없이 공략하였습니다.

 

일본군은 8월 6일 서울 보병 제47연대 제3대대를 중심으로 보병 2개 중대 공병 1개 소대로 된 토벌대 편성한뒤 8월 7일 서울을 출발해서 8월 10일 원주에 도착하여 작전을 시작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없습니다.

 

이후 원주진위대는 1907년 8월 12일의 여주읍 점령 전투를 시작으로 72번의 전투와 그외 소규모 교전을 벌이며 지휘관 민긍호가 전사할때까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민긍호의 전사 이후 소규모부대로 독립적으로 활동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