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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무릎 꿇을 밖에

_______! 2008. 12. 24. 00:44
문화일보

나, 무릎 꿇을 밖에

기사입력 2008-12-23 14:30 |최종수정2008-12-23 15:30 기사원문보기

보은의 삼년산성에 오르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되짚어보기도 전에 먼저 거대한 성곽의 풍모앞에 압도당하게 된다. 성곽을 딛고 도는 길에서는 속리산의 주능선이 주르륵 펼쳐진다.

충북 보은에는 도처에 ‘크고 높은’ 풍경이 있습니다. 먼저 널리 알려진 것만 꼽아봅니다. 속리산 법주사의 우람한 금동미륵불이 그렇고, 가지를 높이 뻗어올린 정이품송이 그렇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보은에는 까마득한 높이로 세워진 웅장한 삼년산성이 있고, 무려 22년 동안 지어진 99칸짜리 집 ‘선병국 가옥’이 있습니다. 미륵불이나 정이품송이야 워낙 잘 알려져 그렇다고 쳐도, 산성과 가옥의 규모는 탄성이 나올 정도로 대단하답니다.

난공 불락의 요새.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 서문지 쪽의 성벽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까마득한 높이의 성벽은 처음입니다. 성벽의 높이는 20m가 넘습니다. 성벽 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기에도 아슬아슬하고, 성벽 아래서 올려다보기에도 까마득한 성은 그야말로 웅장했습니다.

삼국시대였다지요. 보은 일대는 신라, 고구려, 백제가 치열하게 다투던 영토분쟁 지역이었고, 상주 사벌성을 점령한 신라가 자비왕 13년(470년)에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이 성을 쌓았다고 했습니다. 무려 1500년도 더 된 아득한 세월이지요. 한때 관산성 전투 부대가 이곳에 있었고, 태종무열왕이 이곳에서 당나라 사신을 접견했으며, 헌덕왕 때 김헌창반란군이 여기서 무릎을 끓었다는군요.

그러나 이런 역사보다도, 성 앞에 서면 그 규모와 웅장함에 먼저 입이 딱 벌어지고 맙니다. 3000여명의 인부들이 3년에 걸쳐 한장 한장 납작한 돌을 골라 쌓아올린 정성의 흔적 앞에서는 감탄사가 먼저 터져나옵니다.

이렇듯 웅장하고 장대한 성을 쌓은 이들의 의지, 혹은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은 이 성을 무너뜨리러 나섰던 이들의 집념에 먼저 마음이 가닿는 것이지요. 보은에는 속리산이며 법주사며 정이품송 등 이름난 명소들이 곳곳에 있지만, 보은군의 학예사는 “삼년산성 하나만 제대로 봐도 ‘본전’은 뽑는다”고 했습니다.

여기다가 독특한 느낌의 ‘선병국 가옥’은 또 어떻구요. 호남지방 제일의 만석꾼이던 보령 선씨 일가가 당대 제일의 풍수지리 대가와 함께 ‘큰 인물이 나올 땅’을 찾아 전국을 유랑하다가 잡은 땅이 이곳 속리산 아래 자락이었습니다.

뒤로는 속리산이 솟아있고 앞으로는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너른 들이 펼쳐진 이곳은 문외한이 한 눈에 척 봐도 ‘명당중의 명당’으로 꼽힐 만합니다. 구한말 지어진 이 집은 장대합니다. 끝간데 없이 이어진 집 담 안쪽에도 찻길이 뚜렷할 만큼 큰 규모입니다. 집이라기보다는 ‘마을’의 규모에 더 가깝지요. 여기에 공(工)자 모양의 안채와 사랑채가 웅장하게 들어서있습니다. 마당에는 장독대가 즐비합니다.

구한말에 지어진 집이라 그리 오랜 시간이 묻어있지는 않지만, 옛 것을 잘 간수해 오롯이 남겨놓은 집주인의 정성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곳입니다. 따지고 본다면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어 목적지가 아니고서는 지나칠 일이 없는 보은 땅의 때묻지 않은 풍경이 다 그런 듯 싶었습니다.

보은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