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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 전통도검 연구가 이석재 경인미술관장

_______! 2009. 1. 20. 17:13
위클리조선

[화제] 전통도검 연구가 이석재 경인미술관장

기사입력 2009-01-20 09:57 기사원문보기
photo 김승완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칼에 미친 30년… 수천 점 수집 “진검 찾기에 인생 진검 승부 걸다”

어린 시절부터 칼 만지며 자라, 전통도검 관련 논문만 20여편

칼 등 무구류 1만2000점 가진 국내 최대 소장가… 박물관 준비


최근 고려대박물관에서 ‘칼, 실용과 상징’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는 여러모로 세간의 눈길을 끌었다. 국내에서 도검 전시회가 열린 것 자체가 드문 일인 데다 한·중·일 삼국의 전통도검을 한데 모아 비교·감상할 수 있게 한 것은 더 희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살상용 도검이 별반 비중이 없는 시대지만 총포가 발달하기 전의 전통시대에는 어느 나라든 도검이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다. 문사(文士)가 지배했던 조선의 경우도 퇴계 이황과 동시대 인물로 쌍벽을 이뤘던 남명 조식(曺植) 선생이 칼을 차고 다니는 등 일상생활에서 도검이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보다 컸다.

이 행사는 고려대박물관과 경인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것이다. 고려대박물관은 국내 박물관 중 전통도검을 가장 많이 소장한 기관의 하나로 유명하니 수긍이 가지만 경인미술관은 왜 이 행사의 중책을 같이 맡았을까? 바로 경인미술관에 전통도검 전문가가 있기 때문이다. 이석재(李碩宰·46) 경인미술관장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사계(斯界)의 권위자다. 그는 도검수집은 물론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쳐왔다. 주요 논문만 20여편에 달한다. 그의 연구로 학계에 정착된 이론이 적지 않다. 인검(寅劍)연구가 대표적 사례다. 조선시대 대표적 칼 중의 하나인 인검은 특별한 시기에 왕실에서 제작, 주요 대신들에게 하사한 칼이다. 그는 사인검·삼인검 이론에 대한 전반적 토대를 구축했다. 사인검(四寅劍)은 십이지상의 인년(寅年)·인월(寅月)·인일(寅日)·인시(寅時)에 제작된 검이고, 삼인검(三寅劍)은 인년·인월·인일에 제작된 검이다. 인검은 잡귀를 물리친다고 믿어졌다. 그는 또 도검과 모극(矛戟·창)의 도량형인 척관법(尺貫法)이 영조척(營造尺)이 아니라 주척(周尺)임을 입증해 조선시대 도검 연구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각종 자를 미터법으로 환산해보면 평균 수치가 주척은 약 20㎝, 영조척은 약 30㎝다. 조선시대 도검의 유형과 구조에 대한 기준점을 제시한 것도 그의 주요 업적이다.

그는 대단한 기술자이기도 하다. 오래된 도검은 다른 문화재와 마찬가지로 부식되게 마련이다. 도검의 녹을 벗기는 방청(防     )처리 작업은 고도의 기술이 요구된다. 이론과 경험이 조화를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최고 적임자다. 그가 만져본 칼만 3000자루가 넘기 때문이다. 그는 고려대박물관 소장품 20여자루를 방청처리한 것을 비롯, 지금까지 50여자루의 칼을 원형대로 복원시켰다.


그는 전통도검과는 아무 상관 없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그가 독보적 전통도검 연구가가 된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관심사에서 비롯됐다. 우선 성장환경이 일조했다. 그의 부친이 사업가이면서 태권도계의 원로였던 것이다. 그도 자연스레 무술을 배웠고 칼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어릴 때 집에 한·중·일 세 나라 전통도검이 열대여섯 자루 있었다”고 말했다. 부친이 선물 받거나 모은 것이었다. 그는 중학생이 되자 부친의 허락을 받아 칼을 만져보고 해체도 해봤다. 사내아이라면 대부분 힘을 숭상하는 편인데 그는 정도가 더했던 모양이다. “칼이 멋지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대학 입학선물을 칼로 받기도 했다. 삼촌이 조카가 명문대에 합격하자 평소 칼에 관심이 많은 조카의 취향을 감안해 전통도검을 선물한 것이다. 그는 대학시절인 1984년에도 이태원, 황학동 등지에서 무술 연습용 칼을 샀다. 1986년 학군장교로 군대에 간 그는 장교월급을 모아 1987년에 드디어 진검을 구입한다. 그때 이후 그는 틈틈이 칼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집한 칼 등 무구류(武具類)는 칼 수천 점을 포함, 1만2000여점에 달한다. 이 정도면 개인 차원에서 국내 최대 소장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진면목은 전통도검 연구가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전통도검을 수집하는 것도 지난(至難)한 일인 것은 틀림없지만 연구하는 것은 더 어려운 게 우리네 현실이기 때문이다. 전통도검 전문가가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현실에서 그의 학구열을 충족시켜 주는 존재는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대학 1학년 때부터 2년간 여름방학마다 전국 박물관 순례를 시작했다. 용돈을 아껴 도록도 샀다. 그러나 그가 확인한 것은 전통도검 전문가가 없다는 열악한 현실뿐이었다. “물어봐도 명쾌한 답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전문가라는 사람들 자체가 서화·도자기·불상은 잘 알았지만 칼은 잘 몰랐으니까요.”

그는 1988년 ㈜대우에 입사했다가 이듬해 개인사정으로 퇴사한 후 대학 동기들과 동업도 하는 등 다양한 사회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1998년 가업인 경인미술관의 관장에 취임한다. 당시 경인미술관은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는 경영수완을 발휘해 6개월 만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하는 등 경인미술관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후 한동안 미뤄놨던 전통도검 연구에 다시 매진하기 시작했다. 전통무기 권위자들과 본격적으로 교유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화포·궁시(弓矢)의 권위자인 육군박물관 학예실장 강신협 박사, 화포·총통류 전문가인 전쟁기념관 박재광 박사 등이 대표적 인사다.

전통도검 수집도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가 미국·유럽 등 외국에서 들여온 우리나라 칼도 많다. “전통도검 수집 초기였던 1990년대 후반에는 한국 칼을 입수하기 쉬웠습니다. 한국 칼은 일본이나 중국 칼의 아류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들여온 전통도검이 10년간 30여점에 달한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 칼의 몸값이 많이 올라 수집하는 데 애를 먹는다. 한국 전통도검은 수 자체가 적은 데다 이웃나라 칼과 다른 점이 점차 인식됐기 때문이다.

그는 사재(私財)를 털어 칼을 수집하는 데 썼다. 덕분에 그 흔한 주식이나 부동산·펀드 투자를 해본 적이 없다. 취미가 도검수집 및 연구인 까닭에 고스톱이나 당구도 칠 줄 모른다. 그는 전통도검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확보했다. 그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칼 박물관을 만들라는 권유를 많이 받고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그가 칼 박물관을 세우면 지금 확보한 자료만으로도 국내 유수의 사설 박물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아직 성에 안 찬다는 표정이다. “어설프게 박물관을 만들어서는 효과가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며 이를 위해 최대한 콘텐츠를 확보할 계획이다. 그는 소장품과 자료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할 생각도 갖고 있다.

그는 전통도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개선되기를 바란다. “전통도검은 훌륭한 문화재입니다. 중국은 이미 전통도검의 중요성을 깨닫고 해외 유출된 전통도검을 회수하고 보존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는 “전통도검은 나라를 지키는 수단이었다”며 “국민들이 전통도검을 통해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 박영철 차장대우 ycpark@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