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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전문기자의 &joy]고창 질마재 100리 길

_______! 2009. 9. 19. 16:13

[김화성 전문기자의 &joy]고창 질마재 100리 길

 

 


[동아일보]

《굽 높은 구두나 한 켤레 신고

고단한 名士(명사)나 해선 뭘 하니?

언젠가 뒷구석에 감춰 두었던

그 고무신 꺼내서 두 발에 꿰고

고향에 가 고구마나 가꿔 보아라.

색씨야 그래도 그게 그중 돟갔다.

고구마는 한 뿌리에 여나무 개씩

그래도 먹을 것이 달래달래 열리니,

새끼들을 우수리로 좀더 깐대도

몇 개씩 안겨주면 태평하겠지.

허기진 名士(명사)노릇 그만 집어치우고

고향에 가 고구마나 가꿔 보아라

<서정주 ‘고구마타령’ 전문>》

허튼 노릇 집어치고 고구마나 키워볼까

가을햇살은 고슬고슬하다. 말랑말랑하다. 맨발로 이슬 젖은 황토 흙을 걷는 것 같다. 발바닥이 아득하다. 온 몸의 작은 세포들이 우우우 눈을 뜬다. 바싹 마른 햇살은 산들바람과 잘 버무려졌다. 소슬한 바람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와삭와삭 사과 깨무는 소리가 난다. 슈베르트의 피아노곡 소리가 미끄러진다.

질마재는 미당 서정주 시인(1915∼2000)의 고향마을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질마는 소나 말의 안장을 뜻하는 ‘길마’의 사투리. 결국 질마재는 ‘안장을 닮은 고개’를 말한다. 진마마을도 ‘질마재 동네’의 한자 투 표현일 가능성이 크다.

‘길마재’라는 이름은 전국에 수없이 많다. 고개라는 게 언뜻 보면 양쪽 언덕 사이에 걸려있는 안장 같은 생김새 아닌가. 서울 무악재도 한때 ‘길마재’라고 불렸다. 하지만 이제 질마재는 미당 고향의 전유물이 됐다. 이래서 시인은 위대하다. 시인은 언어의 사제다.

질마재는 야트막하다. 길이는 1km나 될까. 미당 생가가 있는 진마마을 뒷덜미 쪽에 있는 가리마고갯길이다. 진마마을은 곰소만 갯벌과 바닷물을 바라보고 있다. 바다 너머엔 전북 부안 변산반도의 첩첩 산들이 아슴아슴하다. 변산 발아래 왼쪽엔 모항, 가운데엔 곰소항이 웅크리고 있고, 오른쪽 움푹 들어간 곳엔 줄포항이 있다. 진마마을과 곰소 사이는 곰소만 바다가 누워있다. 두 곳 사이는 맨눈으로도 빤히 보이는 거리. 하지만 굽이굽이 해안도로를 따라 가려면 곰소나 모항까지는 수십 km나 된다.

질마재는 진마마을 사람들이 해산물이나 소금등짐을 지고 넘던 고개이다. 주민들은 소금이나 마른 해산물 등을 내륙 장터에서 곡식으로 바꿔 돌아왔다. 해 저물 녘 곡식자루를 메고 질마재 마루에 올라선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물씬 코에 걸리는 비릿하고 짭조름한 바다냄새. 발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딱지 같은 초가 마을. 그 속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발 벗은 아내와 코흘리개 아이들. 붉게 물들어 출렁이는 곰소만 바닷물….

미당은 그곳에서 아홉 살 때까지 살았다. 다섯 살부터 고독에 맛을 들였다. 온종일 집에 혼자 있는 날엔, 뒤꼍에서 늑대가 들이닥치지 않을까, 누가 어머니를 업어가지 않았을까, 별의별 생각을 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런저런 걱정에 가위 눌려서/툇마루가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까닥이다간/툇마루의 다듬잇돌에 머리 대고 뺨 대고/그렁저렁 어느 사이 잠이 듭니다./먼 산에서 울려오는 뻐꾸기 소리/다듬잇돌에도 스미는 뻐꾸기 소리에/무섬무섬 안기어 잠이 듭니다.’ <서정주의 ‘어린 집지기’ 중에서>

질마재 100리 길(43.7km)은 고창읍 죽림리 고인돌박물관에서 시작한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삶의 흔적. 모두 447기가 흩어져 있다. 탁자모양의 북방식, 그냥 맨땅 위에 솥처럼 얹혀 있는 남방식, 두 가지가 혼합된 절충식 등 고인돌 백화점이라 할 수 있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어른들은 이곳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거나, 심지어 고인돌을 식탁삼아 음식추렴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사람들의 접근이 통제되고 있지만 대신 고인돌마다 죄수 번호표 같은 숫자표시가 달려있다. 번호표만 크게 잘 보이도록 하면 관리가 잘 되는 걸까. 고인돌은 그저 수천 년 동안 가부좌를 틀고 묵언정진 중이다. 그 사이사이엔 붉은 꽃무릇 부리가 쭁쭁쭁 올라오고 있다.

아산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뒷산에 오르면 솔바람이 솔솔 분다. 병바위 앞 모정에서부터는 인천강 둑길. 술병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병바위는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 어느 풍수가는 이 부근에 천하명당이 숨어있다고 주장한다. 아직 정확한 혈의 위치를 못 찾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풍수가는 ‘그 혈은 아무도 찾을 수 없으며 결국 그곳엔 걸인이 우연히 묻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습다. 천하명당은 각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 아닐까.

인천강은 서해 바닷물과 민물이 수시로 몸을 섞는 강이다. 장마 땐 민물이 우우 바다로 밀려갔다가, 갈수기 땐 바닷물이 도둑처럼 뭍 쪽으로 슬며시 차오른다. 이른바 풍천이다. 예로부터 이곳에서 잡히는 민물뱀장어를 으뜸으로 친다. 요즘도 가끔 몇 마리씩 잡히기도 하지만 그 수는 미미하다. 필리핀 바다 밑에서 태어난 어린 실뱀장어가 다시 인천강으로 돌아올 때, 강 하구에서 대부분 촘촘한 그물에 잡히기 때문이다. 양식업자들은 그 실뱀장어를 사다가 사료를 먹여 키운다. 요즘 고창에선 ‘자연화 갯벌장어’가 유행이다. 양식장에서 1년쯤 키운 뱀장어를 갯벌에 6개월 정도 풀어놓는 것이다. 물론 이땐 사료를 일절 주지 않는다. 육질이 양식보다 훨씬 탄력이 있다는 설명이다. 값도 비싸다.

인천강둑길은 코스모스길이다. 양쪽 길섶에 빛바랜 자주 싸리 꽃도 흔들거린다. 수수머리 같은 갈대꽃이 춤을 춘다. 은빛 억새도 물결친다. 마른 몸을 서로 부비며 끝없이 서걱댄다. 하얀 왜가리들은 멍하니 앉아 도를 닦고 있다. 길섶 까마중 열매가 농익었다.

강정다리에서 전망대를 거쳐 능선을 타고 가는 길이 으뜸이다. 넉넉잡아 2시간 거리. 가팔라서 조금 힘들지만, 한 걸음씩 오를 때마다 발아래 황홀한 경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떡시루 황금들판, 검은 갯벌, 구렁이처럼 구불구불 흐르는 인천강. 능선의 끝자락 봉우리에 이르면, 문득 바다냄새가 가슴을 흥건히 적신다. 저 멀리 곰소 앞바다가 늙은 어머니처럼 누워있다. 젓국물처럼 곰삭은 바닷물, 여기저기 굵게 파인 갯벌, 그 위에 내팽개쳐진 폐선, 자식들에게 다 줘버려 쪼글쪼글해진 몸. 자꾸만 졸아들어 검불처럼 가벼운 몸피. 서산에 지는 붉은 해를 베개 삼아 가는 숨을 쉬고 있다.

‘세상일 고단해서 지칠 때마다,/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앳되고도 싱싱히는 나를 부르는/질마재. 질마재. 고향 질마재.//소나무에 바람소리 바로 그대로/한숨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을./지붕 우에 바가지꽃 그 하얀 웃음/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서정주‘질마재의노래’중에서>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형님 9세 때까지 여기서 살아…옆동네 서당마을서 한학 공부”▼미당의 친동생 서정태 씨

진마마을엔 미당 생가가 그대로 복원돼 있다. 시문학관과는 200m 거리. 미당의 친동생 서정태 옹(86·사진)이 생가와 나란히 붙어있는 초가에서 살고 있다. 서 옹도 오랫동안 객지생활을 하다가 올봄 고향에 돌아왔다. 거동은 약간 불편하지만 목소리는 정정하다. 밥도 손수 지어 먹는다.

“나이 먹은 사람이 이제 어디로 가겠습니까. 먼 여행길 떠나러 고향에 돌아온 것이지요. 몸 말 안 듣는 거야 기꺼이 감수해야지요. 생활하는 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 형님 미당 선생은 장남으로 알려졌지만 원래 그 위에 큰형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어렸을 때 돌아가셨지요. 미당 선생은 1924년 줄포초등학교에 입학할 때(9세)까지 이곳에서 사셨는데, 여기 살 때는 바로 옆 동네인 서당마을에서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당시 부안 줄포는 여기서 육지로 돌아가면 멀지만, 뱃길로 가면 금세였지요. 사람도 많이 살고 가장 개화된 곳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집은 모두 그곳으로 이사를 갔고, 그 이후로 이곳은 친척이 살며 관리했습니다.”

생가에서 50m 아래쪽엔 미당 외가도 있다. 원래는 평범한 가정집이었는데, 지금은 마을방앗간으로 변했다. 어린 미당은 집에서 꾸지람을 들으면 쪼르르 외할머니 품으로 달려갔다.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에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정주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중에서>

서 옹은 “우리 가족들은 그 후에도 이곳을 자주 찾았습니다. 선산이 안현 마을 뒤에 있을 뿐만 아니라, 친척 친지들과의 크고 작은 일이 많았기 때문이지요.”라고 말했다. 미당은 바로 그 선산에 그의 부친(1942년 타계)과 함께 묻혀있다. 무덤 주위에선 매년 늦가을 선운문학제(올해는 11월 6∼8일)가 열리고, 그때쯤이면 주위 3만9670㎡(1만2000여 평)에 국화꽃이 만발한다.

미당(未堂)은 ‘미완성의 집’을 뜻한다. 미당은 아홉 살에 고향을 떠나 인생의 팔할을 바람처럼 떠돌이로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고향에 돌아와 누웠다. 비로소 그의 집을 완성한 셈이다. 그 집이 초가집이든 대궐 같은 집이든,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시비일 뿐이다.

‘단풍에 가을비 내리는 소리/늙고 병든 가슴에 울리는구나./뼉다귀 속까지 울리는구나./저승에 계신 아버지 생각하며/내가 듣고 있는 가을비 소리./손톱이 나와 비슷하게 생겼던/아버지 귀신과 둘이서 듣는/단풍에 가을비 가을비 소리!’ <서정주 ‘가을비 소리’ 전문(76세 작품)>

|트레킹 정보|

◇ 교통=▽고속버스=서울 강남고속터미널 서울∼고창(3시간 50분 소요), 서울∼정읍(3시간 소요)→정읍에서 고창행 시외버스 ▽승용차=서울∼서해안고속도로∼선운산 나들목∼고창 나들목∼고창, 서울∼호남고속도로∼정읍 나들목∼고창 방향∼고창 ▽기차=서울∼정읍 KTX∼정읍에서 고창행 시외버스

◇ 먹을거리=고창엔 신덕식당(063-562-1533) 연기식당(063-561-3815) 유신식당(063-561-2932) 등 장어요리 전문점만 있는 게 아니다. 갯벌에서 나는 각종 해산물 요리도 일품. 꽃게장과 굴 요리 우정회관(063-561-2486) 수궁회관(063-564-5035),참게장백반 전주식당(063-563-1203), 민물새우탕 인천장가든(063-564-8643), 백반정식 동백가든(063-563-4141), 백합요리 전문점 호수가든(063-563-5694), 갈비탕 냉면 오복식당(063-564-8229), 주꾸미 용궁횟집(063-563-0031), 해장국 뭉치네집(063-562-5055), 학원농장보리밥식당(063-564-9897), 한우고기 참예우(063-561-2522) 등도 발길이 붐빈다.

◇ 숙박=미당 생가 주변엔 진마마을뿐만 아니라 안현, 신흥, 서당마을도 있다. 이곳에서 민박을 하면서 밤하늘 별자리나 미당 시문학관, 묘소 등을 둘러보고 길을 나서면 느끼는 게 남다르다. 문학관에선 미당이 쓰던 원고지 만년필 돋보기 고무신 안경 등을 볼 수 있다. 미리 마을 이장에게 문의하면 된다. 단체인 경우 마을회관 사용도 가능.▽ 진마마을 정인석 이장(063-564-4839) ▽안현마을 국지호 이장(063-562-1417) ▽서당, 신흥마을 노태환 이장(063-563-3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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