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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어? 한국어!!

_______! 2009. 9. 21. 21:59
요약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족(韓族)이 쓰는 언어. 남한·북한의 약 7000만 명이 공식 국어로 사용하며, 중국·일본·미국 등지의 약 350만 해외교포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고 있다.

설명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족(韓族)이 쓰는 언어. 남한·북한의 약 7000만 명이 공식 국어로 사용하며, 중국·일본·미국 등지의 약 350만 해외교포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고 있다. 전세계 6000여 개 언어 가운데 언어사용인구가 20위 안에 든다. 특히 고대로부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온 동아시아에서 한국어는 중국어·일본어와 함께 3대 문명어를 이루고 있다.

한국어의 계통
한국어의 기초적 요소가 어떤 계통에 속하는지는 아직 명확히 증명되지 못하였으나,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 오면서 한국어 계통에 대한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는데, 그 중에는 우랄알타이어족·일본어·중국어·아이누어·드라비다제어를 비롯, 인도유럽제어 등에 한국어를 결부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우랄알타이어족이 과학적 근거의 부족으로 20세기에 들어와 우랄어족과 알타이어족으로 나뉜 뒤에는 알타이계통설로 발전하였다. 시베리아로부터 볼가강 유역에 걸친 퉁구스제어·몽골제어·터키제어는 19세기 이후 알타이어족으로 분류되었는데, 알타이어족에 한국어가 첨가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공통적인 구조적 특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공통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모음조화: 알타이제어와 한국어는 기원적으로 후설모음(後舌母音)과 전설모음의 대립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 세부규칙에 이르기까지 일치를 보여준다. 언뜻 보기에 터키어와 몽골어의 모음조화 규칙은 비슷하고 퉁구스어와 한국어의 모음조화는 다른 것 같지만, 이는 역사적 변화 때문일 뿐 기원적으로는 같은 유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② 두음법칙: 어두 위치에 오는 자음에 가해지는 특수한 제약 규칙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중요한 것은 유음(流音)과 자음군(子音群)이 어두에 오지 않는다는 규칙이다. 한국어에서의 유음 <ㄹ>과 알타이제어에서의 유음 <r·l>로 시작되는 단어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중세한국어에 어두자음군이 존재하긴 하였으나 곧 된소리로 변해간 일시적 현상으로 보인다.
③ 교착성: 언어를 형태적으로 분류하면 굴절어(屈折語)·교착어·고립어(孤立語)로 나뉘는데, 한국어와 알타이제어는 모든 단어의 파생과 굴절이 접미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착어에 속한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첫째 접미사의 연결이 매우 기계적이어서 이들 언어는 규칙적이고, 둘째 모든 접미사는 단일한 기능을 가져 인도유럽제어처럼 한 어미가 둘 이상의 기능을 가지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④ 모음교체·자음교체가 없는 것: 교착어의 특징과 관련되는 것으로 접미사에 의존하기 때문에 인도유럽제어에서처럼 모음교체 및 자음교체가 문법적 기능을 가지지 않는다.
⑤ 관계대명사·접속사가 없는 것: 한국어와 알타이제어의 공통적 특징이며, 그것을 보충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일치한다.
⑥ 부동사(副動詞)의 존재: 인도유럽제어에서 2개의 동사는 보통 접속사로 연결되지만, 한국어와 알타이제어에서는 선행동사가 부동사형을 취함으로써 접속사의 부재를 보충한다. 예를 들면 한국어의 <날아 가다> <먹고 가다> 등의 <아> <고>와 같은 어미가 그대로 접속사 구실을 하며, 몽골어의 경우 nis-un ire-be(날아 왔다), abu-ra ire-be(가지러 왔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본디 접속사가 없었다. 오늘날 한국어와 알타이제어는 접속사라 할 만한 것이 더러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후대에 와서 생긴 것이다.

이처럼 한국어·알타이제어 사이에는 공통적인 구조적 특징을 갖고 있다. 물론 구조적 특징은 없어지기도 하고 새로 생겨나기도 하기 때문에 이들만으로 친족관계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한국어·알타이제어처럼 여러 가지 매우 중요한 특징들이 일치하는 경우 친족관계일 개연성은 매우 높다. 한편 언어 비교방법의 기본이 되며 친족관계증명의 가장 높은 신빙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음운대응이 있다.

차용으로 들어온 단어가 아니면서 서로 공통되는 의미를 가지고 모음이나 자음의 대응을 보여줌으로써 한국어와 알타이어 비교에 도움을 주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① 한국어 <아래>, 에벤키어 <alas(脚)>, 몽골어 <ala(사타구니)>, 고대터키어 <al(下面)>
② 중세한국어 <(馬)>, 만주어 <morin(馬)>, 몽골어 <morin(馬)>
③ 중세한국어 <믈(水)>, 만주어 <muke(水)>, 에벤키어 <m?(水)>, 몽골어 <moren(江)>
④ 중세한국어 <-(注)>, 만주어 <fusu-(물뿌리다)>, 몽구르어 <fuzuru-(붓다)>, 몽골어 <usur-(뿌리다)>, 터키어 <uskur-(입으로 뿜다)>
⑤ 한국어 <발(足)>, 골디어 <palgan(足)>, 에벤키어 <halgan(足)>
⑥ 중세한국어 <흙(土)>, 골디어 <siru(砂)>, 솔롱어 <siruktan(砂)>, 몽골어 <siruai(土, 먼지)>,
⑦ 중세한국어 <(눈)보라>, 중세몽골어 <boro'an(눈보라)>, 야쿠트어 <burx?n(눈보라)>
⑧ 한국어 <-로(向格助詞)>, 고대터키어 <-ruu(ab-im-ru;내 집으로)>, 몽골어 <-ru(ina-ru;이쪽)> 등의 예들이 있다.
이 밖에 주목할 만한 것으로 동명사의 어미가 있다. 알타이제어나 한국어에서 동명사는 거의 모든 동사형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알타이제어의 비교연구에서 밝혀진 동명사의 어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n, -r, -m> 등이다. 이들 반사형(反射形)들은 알타이제어에서 동명사의 어미나 동사파생명사를 형성하는 접미사로 쓰이고 있는데, 한국어에서도 바로 이러한 반사형들이 발견된다. 한국어의 예를 들어보면 현대문법에서 관형사형 어미인 <-(으)ㄴ>이나 <-(으)ㄹ>은 본래 동명사의 어미였던 것으로 보이며, 중세한국어에 분명한 증거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용비어천가》 제11장에 <虞芮質成로> <威化振旅로>가 보이는데 이들은 각각 <·신>이라는 동명사에 조사 <로>가 붙은 것이다. 그리고 <-(으)ㅁ>은 중세한국어에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동명사의 어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제주도 방언에서는 현재진행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위에서 말한 3개 어미는 과거(완료)·미래(추측)·현재(계속)의 의미를 보여주는데, 알타이제어의 <-n, -r, -m>의 용법도 이와 매우 가까운 의미를 지녔다. 이들 3개 어미가 모두 한국어와 알타이제어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이들의 구조가 합치된다는 사실은 이들의 일치가 결코 우연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종합해 볼 때 한국어의 계통은 알타이제어에서 찾는 것이 가장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형성과 시대구분
언어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그 자체의 역동성에 의하여 변화하며, 한국어도 그 예외는 아니다. 고대에 오늘날의 한반도와 만주(滿洲)를 연결하는 광대한 지역에는 여러 언어들이 쓰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언어들은 고대 사적의 막연한 기록에 의해서만 겨우 그 분포와 상호관계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기록에 의하면 동이(東夷;중국의 북동부지방)에는 숙신계(肅愼系)·부여계(扶餘系)·한계(韓系)의 3가지 어군이 있었으며 부여계제어로는 부여어·고구려어·옥저어(沃沮語)·예어 등이 있었다. 이 책에서는 고구려를 부여의 별종으로 보아 언어 등 여러 가지가 부여와 같고, 동옥저는 고구려와 언어가 같으며 예도 언어가 대체로 고구려와 같다고 하였다. 한편 읍루에 대해서는 사람 모습은 부여와 비슷하나 언어는 부여나 고구려와 같지 않다고 하였다. 숙신의 후신이 읍루이고 이로부터 물길(勿吉)·말갈로 계통이 이어지며 이들과 부여계제어의 구별이 중국 사적에 일관되게 기록된 것으로 보아, 숙신족은 퉁구스족의 어느 선조로 보이며 이는 이미 고대에 한국어와 퉁구스제어가 확연히 구별되었음을 말해 준다. 한편 한반도 남부의 삼한에서 쓰인 언어에 관해서는 자료가 매우 적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극심한 언어의 분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진한과 변한은 언어가 비슷하고 마한은 다르다고 기록되었으며, 《후한서》 동이전은 진한과 변한에 대해 언어와 풍속에 다름이 있다고 하였다. 상고시대 언어사에서 제기되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부여계제어와 한계(韓系)제어의 상호관계에 관한 것인데, 중국이나 한국의 사적 어디에도 이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한국어는 대개 시기별로 고대한국어·중세한국어·근대한국어·현대한국어로 분류된다. 고대한국어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약 1000년 동안의 한국어를 가리키며, 신라어 말고는 단편적인 기록밖에 없어 그 전반적인 모습을 알기 어렵다. 중세한국어는 고려 건국(936)부터 16세기 말까지의 한국어를 가리킨다. 15세기 중엽(1446년)에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한국어를 전반적으로 기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중세한국어를 전기 중세한국어와 후기 중세한국어로 구분한다. 근대한국어는 임진왜란 후인 17세기 초부터 오늘날까지의 한국어를 가리킨다. 다만 현재 쓰이는 한국어는 현대한국어라 하여 근대한국어와 구분하며, 그 시기는 멀리 잡으면 갑오개혁 이후부터이지만 대체로 8·15 전후부터로 본다.

고대한국어
고대 한반도 및 만주지역 일부에서는 고구려어·백제어·신라어가 연립해 있었는데, 신라의 삼국통일로 한반도에서는 신라어가 통용되게 되었다. 이 언어들의 구체적인 모습은 국내외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인명·지명 등의 표기와 이두문(吏讀文)의 표기 및 《삼국사기》 지리지(地理志)의 지명표기 등을 통해 단편적으로 살필 수 있는데, 연구대상으로 삼을 어휘수는 많지 않지만 신라어와 백제어는 서로 비슷하고 고구려어는 이들과 뚜렷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신라어는 이들 자료 외에도 향가의 차자표기(借字表記) 자료, 고대일본어에 반영된 차용어 등에 나타나 그 성격을 좀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고구려어
고구려어는 《삼국사기》 지리지의 지명 등 고유명사의 표기에서 그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권37의 <買忽一云水城> <水谷城縣一云買旦忽>에서 <買·忽·旦>은 각각 <水·城·谷>을 뜻하는 고구려어 단어이며 물(水)의 고구려어는 mai나 mie(買), 城은 홀(忽), 골짜기(谷)는 tan(旦·呑·頓) 등으로 재구성된다. 고구려어는 분명히 알타이어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mie(水)는 에벤키어 m?(水), 중세몽골어 moren(江·海), 중세한국어 믈(水), 고대일본어 midu(水) 등과 매우 비슷하다. 한편 <王逢縣一云皆伯>에서 pak(逢)이란 동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만주어 baha-(得), 에벤키어 baka-(찾다), 터키어 bak(보다) 등과 일치하며 kai<皆(王)>는 부여 관명의 ka(加), 몽골어 qaan, qan, 신라어 관명의<翰, 干> 등과 일치한다. 특히 고구려어 어휘는 신라어 및 중세한국어·일본어·퉁구스어 등의 어휘와 공통요소가 많다. 예를 들면 고구려어의 奴·惱·內·那(土·壤)는 nua로 재구성되는데 이는 남방 퉁구스제어의 na(地), 신라어의 內(世), 중세한국어의 나랗(國, 랗은 접미사), 고대일본어의 na(地)와 비교된다. 중세한국어와 고구려어 사이에는 현저한 어휘의 일치가 보인다. 고구려어의 es 於斯(橫)는 중세한국어 엇(橫)과 일치하고 <kmr 今勿(黑) → 검-(黑)> <paxe 波兮, pa'i 波衣, 巴衣(巖)→ 바회(巖)> <suni 首泥(峰) → 수늙(嶺)> <?u 首(牛) → 쇼(牛)> 등은 서로 일치한다. 한편 고구려어는 일본어와도 많은 공통점이 있다. 고구려어의 tan·tuan <旦·呑·頓(谷)>, usaxam 烏斯含(兎), namer 乃勿(鉛) 등은 고대일본어의 tani(谷), usagi(兎), namari(鉛) 등과 음운에 있어 각각 대응한다. 특히 고구려어 수사로 mir 密(三)·uc 于次(五)·nann 難隱(七)·tk 德(十)이 확인되는데, 이들과 고대일본어 mi(三)·itu(五)·nana(七)·towo(十)와의 유사함은 특기할 만하다. 알타이제어 사이에는 수사의 일치가 매우 드문데, 이 사실은 고구려어와 일본어의 분화 연대가 그리 오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위의 예들을 종합해 볼 때 고구려어는 분명한 알타이계 언어로 퉁구스제어와 가까운 일면이 있으며, 신라어 및 일본어와 각별한 친족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어와 알타이제어, 특히 퉁구스제어의 관계는 신라어와 알타이제어의 관계보다 훨씬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고구려어가 알타이제어와 신라어의 사이에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신라어·일본어의 관점에서 보면 고구려어는 가장 가까운 친족관계를 보여주는 언어이다.

백제어
전하는 자료가 거의 없어 그 단편적인 모습만 추정할 수 있다.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 <백제어는 고구려어와 대체로 같다(今言語服章 略與高驪同)>고 하였는데 이는 백제의 지배계급인 부여족의 언어에 관한 것으로 짐작된다. 《주서(周書)》 이역전(異域傳) 백제조에는 <임금의 성은 부여씨(夫餘氏)로 eraha(於羅瑕)라 이름하며 백성들은 kenkilci(?吉支)라 부른다>라고 하여 지배계급의 부여계 언어와 백성들이 쓴 한계(韓系)제어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백제어는 신라어와 매우 가까웠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지배계급 언어가 피지배계급의 언어를 동화시키지 못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백제어는 마한어(馬韓語)의 계속으로서 부여계 언어의 상층을 지닌 점을 특징으로 한다. 백제어 자료도 대부분 《삼국사기》 지리지에 남아 전하며, 지명의 특징으로 puri(夫里)를 들 수 있다. 이는 신라지명 pr(火)와 같은 것으로 고구려 지명 <忽>과 대조된다. 또한 백제어는 신라어와 달리 어말모음을 보존하는 경향이 있었던 듯하다. 그 밖에 곰을 고마(熊), 돌(石)을 turak(珍惡), 새(新)를 sa(沙), <맑->을 murke(勿居)라고 하여 백제어 어휘는 신라어 및 중세한국어와 대체로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신라어
신라의 삼국통일은 한국어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신라어 중심의 언어통일이기도 하였다. 중세한국어가 신라어의 기반 위에 성립된 것도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늘날 전하는 신라어 자료는 고구려어·백제어 자료보다 풍부하나 그 음운·문법·어휘의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신라어의 주요자료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향가(鄕歌)와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인명·지명·관명 등과 금석문(金石文)에 나타난 이두(吏讀) 등이다. 이런 자료를 통해 볼 때 신라어는 중세한국어와 전반적인 일치를 보인다. 이는 중세한국어가 신라어를 근간으로 이루어졌음을 뜻하는 것이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한자를 받아들였으나 한자로 자국어를 표기하는 방법이 가장 발달하였다. 신라어를 표기하기 위해 한자를 차용하여 만든 표기법으로 이두와 향찰(鄕札)이 있었다. 이두는 문법형태 파악에 큰 구실을 하며, 향찰은 단어뿐 아니라 문장 모습까지 보여준다.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한 차자표기는 규칙적이어서 어떤 1음 표기에 동원되는 한자는 고유명사의 표기에서나 향찰에서나 거의 통일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a → 阿, i → 伊, na → 乃·奈·那, ra → 羅, ta → 多, ki → 己·只, ri → 利·理·里, ku → 古, tu → 刀·道, kan → 干, han → 翰, mil → 密 등이 있다. 한편 어떤 한자들을 음독(音讀)으로 읽었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일정하게 어떤 1가지 음만 나타낸 것으로 良 → 라 (또는 아/어), → 며(는 彌의 약자, <-며>는 연결어미), 遣 → -구(연결어미, 현대한국어의 -고), 尸 → ㄹ(받침, 尸의 발음은 <시>), 叱 → -ㅅ(받침, 사이시옷) 등이 있다. 신라어 표기법은 이처럼 음차(音借)에 의한 것 이외에 <쇠, 불(블)>을 (金, 火)로 표기하는 것과 같은 훈차(訓借)에 의한 것도 많았다. 그리고 이른바 말음첨기(末音添記)라 하여 훈차에 의한 표기법에 음차에 의한 글자 하나를 더 첨가하여 그 단어의 말음(末音)을 중복하여 표기하는 방식도 있었다. <밤, 날> 등을 각각 <夜音> <日尸>로 표기한 것이 그 예이다. 음운면에서 정확히 어떤 음운체계를 가지고 있었는가는 자료 부족과 당시 한자음을 정확히 밝혀낼 수 없어 확실히 알 수 없다. 대개 자음체계에 있어 평음과 유기음의 대립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居柒夫>의 <柒(漆)>이나 <佛體>의 <體>가 <ㅊ, ㅌ> 등의 유기음 표기에 쓰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된소리계열은 나타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에서는 중세한국어의 <ㅸ> <ㅿ>과 똑같은 음가를 갖지는 않았어도 이들이 <ㅂ> 및 <ㅅ>과 구별되는 음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어 모음체계는 밝혀내기가 어렵지만 대개 다음과 같은 7모음체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중모음은 오히려 중세한국어보다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어의 문법적 특징은 이두와 향찰에서 단편적으로 드러나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주격조사 <이(伊·是)>, 속격조사 <의/(矣·衣) 및 <ㅅ(叱)>, 대격조사(對格助詞) <ㄹ(乙)>과 <홀>, 구격(具格)조사 <루(留)>가 쓰였다. 처격조사로 <中, 良中>이 쓰였는데, 이 가운데 <良中>은 근세의 이두 자료에서 <아>로 읽고 있어 확실치 않으나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중세한국어와 현대한국어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수조사로 <ㄴ(隱), 두(置)> 등이 보이며, 역시 중세한국어와 일치한다. 활용어미로 관형사형어미 <-ㄴ(隱)>과 <-ㄹ(尸)>이 去隱春(간 봄), 慕理尸心 (그릴 ) 등에서 확인된다. 접속어미로 <-고(古·遺)> <-며()> <-다가(如可)> 등이 확인되고, 종결어미로 평서문의 <-다(如)>와 의문문의 <-고(古)>가 확인되며, 모두 중세한국어 형태와 일치한다. 경어법의 선어말어미(先語末語尾)로 주체경어의 <-시-(賜)>와 객체경어의 <--(白)>이 쓰였는데 모두 중세한국어 형태와 일치한다. 다만 중세한국어에서 쓰인 <-//->의 교체는 아직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상대경어법의 어미는 어떤 것이 쓰였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중세한국어
중세한국어는 10세기초 고려왕조가 건국된 때부터 16세기말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때까지의 한국어를 일컫는다. 이는 다시 14세기를 경계로 전기 중세한국어와 후기 중세한국어로 나뉜다. 전기 중세한국어에는 고구려어의 흔적도 조금 보이는데, 예를 들면 고구려어의 namr <乃勿(鉛)>은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鉛俗云 那勿>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13세기 <那勿(나 )>이라는 단어로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러한 요소는 후기 중세한국어에서는 거의 소멸하였다. 후기 중세한국어는 훈민정음 창제로 그 전모를 거의 파악할 수 있다.

음운
전기 중세한국어의 모음체계는 고대한국어의 모음체계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가 <>로, <a>가 <e>로 이동한 사실이 있을 뿐이다. 전기의 단모음은 다음과 같은 7단모음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후기 중세한국어의 모음체계도 7단모음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15세기 이전의 어느 시기에 모음추이를 겪어 전 시대와는 다른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ㅓ>가 중설(中舌)의 <ㅡ>의 위치로 이동하면서 연쇄적으로 <ㅡ>가 <ㅜ>로, <ㅜ>가 <오>로, <오>가 <>으로 이동하여 막다른 곳에 밀려난 <>가 불안정한 상태에 있게 되었다. 그 결과 15세기말 <>가 그 음가를 잃어버리는 <>ㅡ>로의 제1단계 비음운화(非音韻化)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15세기 단모음체계는 다음과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 중세한국어에는 아직 <ㅐ, ㅔ, ㅚ, ㅟ>가 단모음화하지 않아 단모음은 위의 7개 뿐이었다. 그만큼 중세한국어에는 이중모음이 많았으며 그 체계는 다음과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서처럼 후기 중세한국어에는 상향 이중모음으로 <y>가 앞선 <ya·y·yo·yu> 등이 있어서 <ㅑ·ㅕ·ㅛ·ㅠ>로 표기되었다. <y·y·yi>에 대한 문자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당시의 중앙어에는 이런 이중모음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w>가 앞선 상향 이중모음으로는 <wa·w·wi>가 있었다. <wa·w>는 <ㅘ·ㅝ>로 표기되었으나 <wi>를 표기할 적절한 방법이 훈민정음에는 없었다. 15세기에 <>가 <wi>로 변화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위(uy)>로 표기되었던 것이다. 하향 이중모음으로는 <y>로 끝난 <y·ay·y·oy·uy> 등이 있어 각각 <ㅣ·ㅐ·ㅔ·ㅚ·ㅟ·ㅢ>로 표기되었다. 자료를 분석해 보면 <iy>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이것 역시 표기할 적절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2모음이 연결되면 ㅏ-ㅏ>ㅏ, ㅓ-ㅓ>ㅓ, -ㅏ>ㅏ, ㅡ-ㅓ>ㅓ, -ㅗ>ㅗ, ㅡ-ㅜ>ㅜ, ㅣ-ㅣ>ㅣ처럼 되는 규칙이 있었다. 중세한국어의 모음 연결규칙 중에서 가장 현저한 것은 모음조화였다. 물론 모음조화는 중세한국어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지만, 특히 이 시기에 그 규칙이 잘 지켜졌다. 중세한국어의 모음조화는 모음이 양모음 <·ㅗ·ㅏ(ㅛ·ㅑ··ㅚ·애)>, 음모음 <ㅡ·ㅜ·ㅓ(ㅠ·ㅕ·ㅢ·ㅝ·ㅔ)>, 중성모음 <ㅣ> 등의 3계열로 나뉘어 양모음은 양모음끼리, 음모음은 음모음끼리 결합하였으며 이때 중성모음은 어느 쪽 모음과도 결합할 수 있었다. 이 규칙은 1단어 안에서 뿐만 아니라 명사와 조사 또는 어간과 어미, 어기(語基;base)와 접미사 사이에도 나타나 그 적용범위가 상당히 넓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가 <ㅡ>와 대립하였기 때문인데 나중에 이 <>가 소실되면서 모음조화의 적용범위가 훨씬 줄어들었다. 전기 중세한국어의 자음체계는 된소리 계열의 등장을 그 특징으로 한다. 된소리는 본래 단어나 형태소의 연결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짐작되는데, 예를 들면 고대어에서도 속격의 <叱(ㅅ)>이나 동명사 어미의 <尸(ㄹ)> 뒤에 오는 단어의 두음 <ㅂ·ㄷ·ㅅ·ㅈ·ㄱ> 등이 된소리로 발음되었으리라 짐작되며 이것이 어두에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음운체계 속에 확고히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는 어두에도 된소리가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계림유사》에는 아직 어두 자음군이 형성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기록이 있어 후기 중세한국어에 <(米)>로 기록된 어휘가 <菩薩>로, <(女兒)>로 기록된 어휘가 <寶?>으로 표기되어 있어 나중에 <> <>과 같이 자음들 사이에 있던 모음이 탈락하면서 점차 어두 자음군이 생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음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파찰음의 발음이다. 현대 한국어의 <ㅈ>은 [] []로 발음되지만 13세기에는 이 발음이 [ts] [dz]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계림유사》와 《향약구급방》은 <ㅿ(z)>의 존재를 분명히 보여주며, <새삼> <널삼>으로 읽혀야 할 것들이 후기 중세 문헌에 <새> <너>으로 읽혀 14세기 무렵 s>z의 변화가 있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s>z의 변화는 이중모음의 부음(副音) y와 r, n과 모음 사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만 일어났음이 확인된다. 한편 <ㅿ>은 음절 끝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ㅸ>은 분명히 나타나지 않지만 한국 한자음(東音)에는 순중음과 순경음의 구별이 없어 <ㅸ>과 <ㅂ>을 구별하여 표기할 방법이 없었을 뿐 <ㅸ>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ㅸ>에 있어서도 <ㅿ>에 있어서처럼 확실하지는 않지만 <y> <ㄹ>과 모음 사이에서 [b]>[β]의 변화가 15세기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음절 끝에서의 자음들은 아직 내파화(內破化)가 일어나지 않아 대부분의 자음대립이 유지되었다. 13세기 중반에는 아마도 <ㅈ>과 <ㅊ>은 중화된 것으로 보이지만 <ㅅ>과 <ㅈ>의 중화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ㅎ>도 발음되었으리라 추정된다. 평음과 유기음이 중화되었던 것으로 가정하면 13세기 중반에 음절 끝 자음의 대립은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ㅿ ㆁ ㅈ ㅎ> 등이 있었던 셈이다. 후기 중세한국어에서 필수적으로 일어났던 설음(舌音)과 치음 앞에서의 <ㄹ>탈락 현상은 이 시기에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아마도 15세기초 새로이 생겨난 음운현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 중세한국어의 자음체계는 평음 <ㅂ ㄷ ㅈ ㄱ>과 유기음 <ㅍ ㅌ ㅊ ㅋ>의 대립을 특징으로 하였지만, 어휘에 있어 유기음의 출현, 특히 어두에 있어서는 평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적었다. 한편 전기 중세한국어에는 어두에 새로이 나타났던 경음계열이 있었다. 어두의 경음은 <ㅆ>을 포함한 ㅅ계 합용병서와 <ㆅ>로 기록되었으나, 어중의 경음은 ㅅ계 합용병서와 주로 동명사 어미 <-ㄹ> 밑에서만 쓰였던 각자병서 <ㄲ ㄸ ㅃ ㅉ> 등으로 기록되었다. <ㅎ>의 된소리 <ㆅ>은 본래 <ㅎ혀-(引)>라는 동사어간에만 존재한 것으로 <ㅅ바ㅎ혀-(拔)> <니르ㅎ혀-(起)> <도ㅎ혀-(廻)>에서처럼 반모음 <j[j]> 앞에만 나타났다. 나중에 <ㆅ>이 <썰물>이나 <켜다>에서처럼 <ㅆ>이나 <ㅋ>으로 바뀐 것을 보면 <ㅎ>과는 구별되는 일종의 된소리였음이 분명하다. 한편 <ㅈ>의 된소리가 어두에 존재한 증거는 보이지 않으며, 특히 초성 합용병서에 <ㅾ>이 없었음이 주목된다. 15세기 문헌에 <ㆀ>이 있었으나 어두에는 없었고 하향 이중모음을 가진 일부 피동 및 사동 어간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것도 <ㅇ여니라> <괴ㅇ여>처럼 [j] 앞에만 나타났던 것으로 보이는데 <ㅇ>가 어떤 구체적인 음가를 가지기 어려웠던 만큼 이 각자병서가 어떤 된소리를 나타냈다기보다 모음이 긴장되어 발음되는 상태를 나타낸 정도로 추정된다. 15세기 중반 훈민정음 창제 당년에는 유성마찰음으로 <ㅸ> <ㅿ> <ㅇ>이 한 계열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매우 제한된 분포를 가지고 있었으며, 모두 유성적 환경에만 나타난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들이 얼마 뒤 소실되고 만 것은 이러한 편재로 구조적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ㅸ>은 《훈민정음》 제자해에서 <입술 가벼이 다물어 후성(喉聲)이 많이 섞인 소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ㅂ>음에 비하여 입술이 덜 다물어지는 양순마찰음 [β]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분포는 매우 제한되어 <사> <글> <리>처럼 모음과 모음 사이, <ㄹ> 및 <ㅿ>과 모음 사이에서만 나타나던 소리였으며 실제로는 유성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ㅸ>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 이미 소멸되는 과정에 있었고 세조 때 문헌에서는 이미 찾아보기 어려워졌으며 글>글왈, 더>더워처럼 반모음 [w]로 변하였다. <ㅿ>은 <> <몸> <한> <리> <애(剪)>처럼 모음과 모음 사이, <ㄴ> 및 <ㅁ>과 모음 사이, 모음과 <ㅸ> 및 <ㅇ> 사이에서만 나타났다. 《훈민정음》에서 불청불탁(不淸不濁)의 반치음이라고 하였듯이 유성음으로써 음가는 [z]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ㅿ>은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이르러 영(零;zero)으로 바뀌어 <이> <어버>어버이> <> 등에서처럼 아무 음의 자취도 남기지 않고 탈락하고 말았다. <ㅇ>은 기능에 따라 어두음이 모음임을 표시하거나 어중에서 두 모음 사이에 쓰여 서로 다른 음절에 속함을 표시하는 것과, 하나의 자음 역할을 한 것 등 2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ㅇ>의 소실은 먼저 <ㅿ ㅇ>에서 일어났다. 15세기 <애> <위> 등은 16세기 <> <거> 등으로 나타나며, 이들은 <ㅇ>의 소실로 <ㅿ>이 제2음절의 두음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ㄹ ㅇ>은 명사에 있어서는 16세기 말까지 변함이 없었으나 동사활용에 있어서는 <ㄹ ㄹ>로 변하였다. 위의 예들을 토대로 볼 때 15세기 자음체계는 다음과 같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 중세한국어에 있어서도 폐쇄음과 파찰음은 어두에서 무성음 [p, t, k, ts]로, 모음 사이를 비롯한 유성적 환경에서는 유성음 [b, d, g, dz]로 발음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ㅇ>과 <ㄹ>이 어두에 올 수 없었음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어두에 2자음이 올 수 있었던 것은 후기 중세한국어의 특징적인 면으로, 그것은 <ㅂ>과 <ㅄ>계의 합용병서<ㅳ, ㅄ, ㅶ, ㅷ (ㅴ ㅵ)> 등으로 표기되었다. 예를 들면 (意), -(躍), (米), (種), (隻), -(彈), (蜜), (時) 등이 있었는데, <ㅂ>계는 <pt, ps> 등을 나타냈고 <ㅂㅅ>계의 <ㅂ>도 발음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이 어두 자음군은 안정된 하나의 자음상태를 지향하여 17세기부터 점차 된소리로 바뀌어 갔다. 단자음의 경우 음절 끝 위치에서 완전히 내파적으로 발음되어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의 8자음이 발음될 수 있었다. 또한 <ㅿ>은 <ㅇ>이 선행한 위치에서는 제 음가대로 실현될 수 있었지만 16세기 초에는 <ㅿ>이 소멸하여 음가가 변하였고, 한편 <ㅅ>과 <ㄷ>이 중화되어 음절 끝 자음체계는 <ㄱ ㄴ ㄷ ㄹ ㅁ ㅂ ㅇ> 7자음만이 발음되었다. 복자음(複子音)의 경우 <ㄹ ㄴ ㅁ> 뒤에서는 다 발음된 듯 보이며, <ㄹㅌ·ㄹㅍ> <ㄴㅈ> <ㅁㅊ> 등의 2번째 자음 <ㅌ ㅍ ㅈ ㅊ> 등은 각각 <ㄷ ㅂ ㅅ ㅈ>으로 중화되어 발음되다가 음절 끝 위치에서 <ㅅ>과 <ㄷ>의 대립이 없어지면서 <ㅅ>이 <ㄷ>으로 발음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는 순수자음과 비음이 연속될 때 앞의 순수자음이 비음으로 동화하는 현상이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었다. 현대한국어에서는 <ㅅ ㅈ ㅊ ㄴ ㄷ ㅌ>이 모음 <이>나 반모음 [j] 앞에 분포되는 일이 크게 제약받지만, 당시에는 <샤공> <셤> <쇼> <쟈> <쳔> <쵸> <닢> <뉴월 뉵일에> 등처럼 이들 자음의 분포가 자유로왔다. 중세국어가 현대한국어와 크게 다른 점은 성조(聲調)를 음운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한글 문헌은 방점으로 성조를 나타내었는데 평성(平聲)에는 아무 표시도 하지 않고 거성(去聲)은 점 1개, 상성(上聲)은 점 2개로 표시하였다. 평성은 저조(低調), 거성은 고조(高調)로 추정되며 상성은 처음에 낮다가 나중에는 높은 소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저조와 고조가 복합된 성조로 인식된다. 특히 <부텨+이→ 부:톄>에서 보듯 평성과 거성이 결합하면 상성이 되는 현상에서 상성이 복합적인 성조라는 특성이 잘 드러난다. 이들 성조에 의하여 <손(客)/·손(手)> <가·지(種)/·가지(枝)/·가·지(種)> <솔(松)/:솔(刷)> <·발(足)/:발(簾)> 등에서처럼 어의(語意)가 분화된다. 한편 고유어의 입성은 종성이 <ㄱ ㄷ ㅂ ㅅ> 등일 때 촉급하게 발음되는 성질을 표시하는 것이어서 성조상으로는 입성도 평성·상성·거성 가운데 하나에 해당하였다. 그에 비해 한자어의 입성은 거성적인 것만 있었다. 15세기 한국어에서는 정연하던 성조체계는 16세기부터 문란해져 16세기말 이후 소멸하였다.

문법
전기 중세한국어 단계에는 용언의 어간과 어간이 직접 통합되어 복합어를 이루는 비통사적인 복합동사가 나타나고 있었다. 속격조사는 선행하는 명사구가 유정체언(有情體言)일 때는 <矣>, 무정체언(無情體言)일 때는 <叱>나 <之>가 쓰였으며, 후기 중세한국어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선어말어미 <-더->의 다른 형태로는 <-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정법(否定法)은 일종의 비통사적 복합어와 같은 구성을 보이는 특징이 있었다. 부정을 담당하는 어사는 <-i>계와 <-이>계의 2종류가 있어 앞에 것은 주로 명사문 부정에, 후자는 주로 용언문 부정에 쓰였다. 후기 중세한국어에서는 전기에서처럼 용언의 어간끼리 결합한 복합어가 많았고, 특기할만한 것으로는 현대한국어의 단일어인 <같->은 부사 <>과 <->가 결합된 복합어였다는 점과 오늘날에는 접두사인 <, ?>이 명사로 쓰여 파생어인 <암, 수>이 당시에는 복합어였다는 점이다. 파생명사를 만드는 <-/음>은 오늘날의 <-음>과 그 기능이 같았으나 다만 이들 앞에 <-오/우->가 결합하면 명사가 아니라 명사형, 즉 동명사가 되는 점이 특이하다. 한편 <-암/엄>은 이미 <구지람> <무덤> <주검> 등의 파생명사를 만들었고, <-이>도 역시 파생명사를 풍부하게 하였다. 현재는 관형사형의 어미로만 쓰이는 <-ㄴ> <-ㄹ>이 당시에는 동명사 어미로도 쓰였다. 사역동사를 파생시키는 접미사로는 <--, -으-> 외에 <-이-, -히-, -기-, -리-, -오-, -우-> 등이 쓰였다. 피동형은 오늘날과 비슷한 방식으로 파생되었지만 [j]로 끝나는 어간의 피동형은 <-->라는 독특한 접미사를 취하였다. 파생형용사를 형성하는 접미사로 주목할 만한 것은 <-ㅸ///브->가 있었다. 접미사 <-/->도 동사를 형용사로 바꾸는 기능을 하였으며, <->과 <-//->는 이때에도 명사에 결합되어 형용사를 파생시켰다. 격조사로는 주격·대격·처격·속격조사 등이 있었는데 주격조사로 <이>가 쓰였고 <가>는 16세기 후반에야 나타났다. 대격조사로는 <ㄹ//을//를>이 쓰였고, 모음조화에 따른 이형태(異形態)가 있었던 이외에 현대한국어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으며, 처격조사로는 </애/의/에/예>가 쓰였다. 속격조사로는 </의>및 <ㅅ>이 쓰였는데 </의>는 처격조사와 형태상 구별되지 않는 점이 특이하며, </의>는 유정명사(有情名詞)에만 연결되고 무정명사(無情名詞) 및 존칭(尊稱)의 유정명사에는 <ㅅ>이 연결되었다. 대명사 <나> <너>의 속격형은 주격형과 마찬가지로 <내> <네>였는데 이들은 성조에 의해 구별되었다. 현대의 여격조사에 해당되는 중세한국어의 조사는 속격 <> 및 <ㅅ>에 <게·그에·거긔·손> 등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복합격조사였다. 중세의 특수조사로 오늘날의 <부터>와 <조차>에 해당되는 <브터>와 <조차>는 <?-(附)>과 <좇-(隨)>의 부사형이 굳어진 것이며, 비교를 나타내는 <두고>는 <두-(置)>의 활용형이 굳어진 것이다. 중세한국어의 활용도 선어말어미와 어말어미에 의해 수행되었다. 선어말어미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오/우->로 이 어미는 주어가 1인칭일 때만 결합되는 인칭어미로서 보통 말하는 사람이 자기 주관을 더하여 표현하는 의도법어미로 이해된다. 객체경어법을 담당하던 어미로 <-//->이 쓰였는데 어간말음이 <ㄱ ㅂ ㅅ ㅎ>이면 <-->, <ㄷ ㅈ ㅊ>이면 <-->, 그리고 모음이거나 <ㄴ ㅁ ㄹ>이면 <-->이 분포되었다. 시제는 오늘날처럼 선어말어미에 의해 실현되었으며 <-리->는 미래 내지 추측을, <-거-/-아-/-어->는 과거를, <-더->는 회상시제를 나타내었다. 특히 <-->는 현대 한국어의 <먹는다, 간다>의 <-ㄴ/는>의 전신(前身)으로 현대한국어에서는 현재 시제를 담당하는 이러한 형태소가 따로 분석되지 않는데 비해 당시에 이 <-->는 현재시제를 활발히 담당하고 있었다. 의문문어미로는 <-가, -고, -녀, -뇨>가 쓰였고, 이 밖에 <-ㄴ다, -ㄹ다>가 있었다. 형태음소론적 측면에서 특수교체도 주목되는데 <나모>>과 같은 특수한 교체가 동사와 명사에서 함께 일어나고 있다.

어휘
전기 중세한국어 자료에는 고구려어의 흔적을 보이는 일부 어휘들이 있다. 한편 고려와 몽골의 접촉으로 말(馬)이나 매[鷹(응)]의 명칭, 군사어휘, 궁중어휘 등에 몽골 차용어가 많이 들어왔다. 특히 예를 들면 가(黑馬)·아질게(兒馬)·졀다(赤馬)·보라매(秋鷹)·숑골(海靑)·빛(吏)·슈라(御飯) 등이다. 또한 함경도 지명에는 여진어(女眞語)로부터 차용된 어휘들이 많다. 이 시기부터 한자어가 많이 나타나며 시대가 지나면서 점차 확대되었다. 후기 중세한국어의 어휘체계에서도 한자어가 많이 발견된다. 중국어로부터의 차용어는 당시 문헌에서 한자로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한국어화된 정도가 큰 것은 예외적으로 한글로 표기한 경우도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가난·긔약(期約)·답(對答)·뎌(笛)·부텨(佛體)·비단·?(衆生)·차(茶)·편안(便安) 등이 있다. 당시 널리 쓰이던 어휘로 중국어로부터의 차용어에 밀려 오늘날에는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고유어들도 상당히 많다. 《훈민정음》의 <슈룹>은 《계림유사》에 <傘曰聚笠>, 《조선관역어》에 <傘 速路>라고 하여 오랫동안 쓰인 고유어였는데, 《훈몽자회》에서는 이미 <우산>으로 대체되었다. <온>과 <즈믄>도 16세기 말에는 <일>과 <일쳔>으로 대체되었다. <다가>도 16세기에 이미 <萬一>에 밀려 자취를 감추었다. 그 밖에 <(江)>이나 <뫼(山)> 등 현대한국어에서는 볼 수 없는 많은 고유어들이 당시에는 활발히 쓰였다. 한국어 전반의 특징인 모음전환 현상에 의한 대립어들이 당시에도 많았다. 예를 들면 <곱다(曲)>와 <굽다(屈)>, <다(古)>와 <늙다(老)>, <다(淸)>와 <다(淡)>, <다(明)>와 <?다(赤)> 등이며, 비록 < →아>의 음운변화는 겪었지만 현대한국어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한편 <?(衆生)>이 <짐승>으로, <어엿브다(憐)>가 <예쁘다> 등으로 어형은 비슷하나 의미가 바뀐 단어들이 많고 <진지> <뫼> <겨시-> <좌시-> <자시-> 등과 같이 어휘적으로 경어법을 표현하는 어사(語辭)가 발달하였던 점도 주목된다.

근대한국어
근대한국어는 임진왜란 후인 17세기부터 현대한국어가 시작되는 시기(갑오개혁이나 8·15) 이전까지의 한국어를 말한다. 근대한국어에서는 중세한국어로부터 현대한국어로 넘어오는 여러 가지 과도기적 현상을 겪는다. 현대한국어가 지닌 특징은 이미 이 시기에 갖추어졌거나 그 중간단계의 모습을 보인다.

음운
근대한국어에서 가장 큰 음운변화는 <>의 소실이다. 16세기 후반 <>는 먼저 제2음절 이하부터 소실되기 시작하여 17세기 초부터는 제1음절에서도 <>가 <아> <오> <으> 등 다른 모음으로 바뀌게 되었다. 표기상으로는 20세기 초까지도 쓰였으나 이미 18세기 중반 <>의 음가(音價)는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의 소실 다음으로 중요한 음운변화는 <애·에>의 단모음화이다. 중세국어에서 [j] [j]와 같은 이중모음으로 발음되던 이들이 [ε] [e]와 같은 단모음으로 바뀐 것은 18세기 말쯤으로 추정된다. <>의 소실로 <>는 일단 <애>로 바뀌었으므로 <>가 [ε]로 단모음화한 것도 같은 시기의 일이었을 것이다. <외>와 <위>의 단모음화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18세기 말을 중심으로 근대국어의 모음체계는 대개 다음과 같은 8모음체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 <>가 비어두(非語頭) 음절에서 <으>로 변한 것은 근대어의 모음조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두음절에서는 여전히 <>는 양모음, <으>는 음모음이었으나 비어두 음절에 있어서는 <으>만 나타났던 것이다. 이리하여 <으>는 부분적인 중립성을 가지게 되었다. 모음조화의 붕괴가 중립화 증가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이 <으>의 부분 중립화는 한국어의 모음조화 붕괴를 결정적으로 촉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비어두 음절에서의 <오>우>경향이 다시 추가되어 근대한국어는 어간의 모음조화나 어미의 모음조화를 막론하고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한편 17세기말 <ㅁ ㅂ ㅍ ㅃ>등의 순음 아래에서 평순모음 <으>의 원순모음 화가 일어나 <므, 브, 프> 등이 <무, 부, 푸> 등으로 바뀌었다. 자음에 있어서는 어두의 합용 병서 가운데 ㅄ계의 ㅴ과 ㅵ이 사라지고 각각 ㅲ과 ㅼ, 그리고 ㅳ과 ㅼ이 그것을 대신하였다. <ㅂ>계 합용병서와 <ㅅ>계 합용병서도 서로 혼란되게 쓰여 15세기 중반 이후 사라졌던 <ㄲ, ㅆ> 등의 각자병서가 다시 쓰여 경음표기는 3종류가 되었다. 15세기 <ㆅ>에 이어 17세기 초반 <ㅅㅎ>이 <ㅎ>의 된소리를 나타냈으나 17세기 후반 <ㅋ>으로 합류되었다. 이미 15세기말 이후 종성의 <ㅅ>과 <ㄷ>이 표기상 <ㅅ>으로 쓰는 경향이 많았지만 발음상 <ㄷ>으로 중화되었는데, 이것은 이미 음절 말 자음체계가 <ㄱ ㄴ ㄷ ㄹ ㅁ ㅂ ㅇ>의 7자음체계로 굳어졌음을 뜻한다. 어중의 <ㄹ ㅇ> 표기는 동사의 활용형 에서 뿐 아니라 17세기에는 <놀애(歌)>놀내, 놀래>로 표기되어 명사에 있어서도 <ㄹ ㄹ>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놀애>노래>라는 <ㄹ>형도 보이며 18세기에 와서 <ㄹ>형으로 일반화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것은 <ㅇ>의 유성마찰음이 소멸하였음을 뜻한다. 근대한국어의 초성 자음체계는 다음과 같이 중세한국어에 있던 유성마찰음 <ㅸ ㅿ ㅇ>이 소멸하고 <ㅈ>의 경음 <ㅾ>이 더 추가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자음에 있어 두드러진 음운변화로는 먼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일어난 구개음화를 들 수 있다. 먼저 <ㅈ·ㅊ> 등의 치경음이 <이>나 [j] 앞에서 경구개음으로 변하고, 다시 치경음의 음가를 유지하고 있던 <ㅈ·ㅊ> 등도 경구개음으로 중화되어 합류함으로써 <ㄷ ㅌ ㄸ> 등의 다른 치경음이나 <ㄱ ㅋ ㄲ> 등의 연구개음이 <이>나 [j] 앞에서 그 모음과 같은 위치에서 발음되는 <ㅈ, ㅊ, ㅉ> 등의 경구개음으로 변화하여 발음되었다. 구개음화와 관련된 현상으로 <ㅅ, ㅈ, ㅊ> 다음에서의 <야 여 요 유>가 <아 어 오 우>의 단모음으로 바뀌었으며 어두의 <니, 냐, 녀, 뇨, 뉴> 등에서 <ㄴ>이 탈락하는 현상도 나타났는데, 이는 위와 같은 환경에서의 <ㄴ>이 이 시기에 구개음화를 겪게 된 것으로 그 구개음화된 <ㄴ[]>을 어두에 허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한편 곶다 →다, 곳고리 →꾀꼬리, 닷 →탓, 블무 →풀무 등에서처럼 평음이던 것이 된소리 및 유기음으로 바뀐 것이 많다.

문법
이 시기에는 중세한국어의 잡다한 형태가 단순화된 것이 특징이다. 16세기 문헌에서도 주격조사 <가>가 나타난 예가 없지 않지만 17세기에 들어와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났다. 존칭의 주격조사 <셔(셔)>가 이미 이 시기에 등장하였는데, 이는 존칭여격조사 <>에 <-셔>가 결합한 형태이다. 조사 가운데 중세에 구별되던 것이 단일화하여 그 기능이 달라진 것이 많이 있는데 <>의 소멸로 </을> </의>의 구별이 없어졌으며, 속격조사로 쓰이던 <ㅅ>은 복합어를 형성하는 사이시옷으로 그 기능이 바뀌었다. 여격조사로는 존칭의 <> 이외에 <의게>가 쓰였다. 활용어미 가운데 두드러진 변화로는 중세에 <-->로 통일되어 있던 현재시제의 선어말어미가 어간말음이 자음인가 모음인가에 따라 <-ㄴ-/-는()->으로 갈린 현상이다. <-->는 먼저 모음 뒤에서 <-ㄴ->으로 축약되었다가 나중에 그 짝으로 <-는()->이 나타났는데 이 변화는 처음에 내포문에만 나타났다. 과거시제의 선어말어미로는 <-앗/엇->이 등장하였으며, 이는 부사형어미 <-아/-어>에 <잇-(有)>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객체경어법의 선어말어미 <-->이 근대한국어에 와서 그 기능을 잃은 것도 큰 변화로, 이에 의하여 한국어 경어법은 거의 주체경어법과 상대경어법으로 2원화되고 객체경어법은 화석화된 몇몇 단어들에 의해서만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의 변화형 <-->은 이 시기에 와서 <-이다, -이다> 등의 형태로서 상대경어법의 일부를 담당하게 되었다.

어휘
근대한국어는 고유어가 한자어로 대체된 것이 많았고 중세한국어의 어의 변화 가운데 많은 것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한편 중세한국어에 쓰이던 단어 가운데 쓰이지 않게 된 것도 많아 예를 들면 <다>가 <愛>의 의미를 가지게 되면서 애초 이 의미로 쓰이던 <다>가 없어졌고, <괴다(寵)>도 역시 사어(死語)가 되었다. 중국어의 차용은 여전히 활발하였지만 중세와 달리 서양어로부터의 차용어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대개 중국을 통해서였지만, 이는 한국어 역사에서 새로운 장(章)이라 할 만한 것이다. 이 당시 차용어로는 포르투갈어 타바코(tabacco)를 차용한 <담배> 등이 있다.

현대한국어

음운

음운의 분류
① 자음: 자음은 〔표 1〕과 같이 조음위치(調音位置) 및 조음방식(調音方式)에 따라 분류된다. 조음위치에 의한 자음 종류는 양순음(兩脣音)·치음(齒音)·구개음(口蓋音)·연구개음(軟口蓋音)·후음(喉音)이 있고, 조음방식에 의한 자음 종류는 폐쇄음(閉鎖音)·파찰음(破擦音)·마찰음(摩擦音)·비음(鼻音)·유음(流音)이 있다.

② 모음: 모음은 〔표 2〕와 같이 혀의 위치 및 입술의 모양으로 분류되며, 혀의 위치는 다시 위치의 높낮이와 전후(前後)로 나뉘어 분류된다. 혀의 높낮이에 의해 고모음(高母音)·반고모음(半高母音)·반저모음(半低母音)·저모음(低母音)으로, 혀의 전후에 따라 전설모음(前舌母音)·중설모음(中舌母音)·후설모음(後舌母音)으로 분류된다. 입술의 모양으로 나눌 때는 원순모음(成脣母音)·비원순모음(非成脣母音)으로 분류된다.

음운의 체계
현대한국어의 자음체계는 폐쇄음과 파찰음이 평음(平音;예삿소리)·경음(硬音;된소리)·격음(激音;거센소리)으로 변별되는 질서정연한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게 특징이다. 평음 <ㄱ ㄷ ㅂ ㅈ>은 약한 기(氣)를 수반한 무성음이며 모음 사이에서 유성음으로 실현되고, 경음 <ㄲ ㄸ ㅃ ㅉ>은 성문(聲門) 폐쇄를 수반한 무성음이며, 격음 <ㅋ ㅌ ㅍ ㅊ>은 강한 기를 수반한 무성음으로 실현된다. 격음과 경음은 모음 사이에서도 유음화하지 않는다. 마찰음의 평음 <ㅅ>과 경음 <ㅆ>은 격음이 없고 언제나 무성음으로 실현되며, <ㅎ>은 그것에 대응하는 경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모음은 〔표 2〕의 단모음 음소 이외에 반모음 음소 [w]와 [j]가 더 있다. 그리고 이들과 단모음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이중모음들로 <와 워 왜 웨 야 여 요 유 얘 예 의> 등이 있다. 이 중 <의>는 특이한 이중모음이다. 다른 [j]계 이중모음은 모두 [j]가 모음 앞에 결합하는데 <의>만은 그 반대이다. 운소(韻素)체계에 있어 음장(音長)은 하나의 음소자격을 가지며, 이 음장은 제1음절에서만 변별적이라는 제약을 갖는다.

음운의 규칙
음소들이 모여서 음절을 이루고 나아가 단어를 형성하여 문장이 될 때, 음소가 놓이는 자리에 따라 어떤 제약과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현상을 음운규칙이라고 한다. 음소에 따라서는 그 놓이는 자리가 크게 제약을 받아 [ŋ]은 어두, 더 나아가 음절 첫머리에는 분포될 수 없다. <ㄹ>도 어두에 분포되기 어려운 두음법칙 현상이 있으나, 오늘날 영어권에서 들어온 외래어의 영향으로 <ㄹ>을 발음하는 현상이 점차 확산되어 가고 있는데 <라디오> <로켓> 등이 그 좋은 예이다. <ㄴ>도 <이 야 여 요 유> 등의 모음이 있을 때 어두에 오기 어렵다. 현대한국어는 어두에 자음이 하나밖에 허용되지 않고 음절 끝에서도 표기상 자음이 2개 오더라도 발음에 있어서는 하나로밖에 실현될 수 없으며, 그 자리에 올 수 있는 자음도 <ㄱ ㄴ ㄷ ㄹ ㅁ ㅂ ㅇ> 등 7개 뿐이다. 음절 끝에 올 수 있는 7개 자음 다음에 비음 <ㄴ ㅁ>이 오면 <ㄱ ㄷ ㅂ>은 각각 <ㅇ ㄴ ㅁ>으로 실현되어 폐쇄음이 비음 앞에 이웃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뒤에 오는 자음이 <ㄹ>일 때는 <ㄹ> 이외의 어떠한 음절말 자음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중모음 <얘 예 의> 앞에는 자음이 잘 분포하지 않으며 <계산, 희망, 무늬> 등의 예가 있으나, 실제로는 <예 →에> <의 →이>로 실현되며 <얘>의 경우 <걔, 쟤> 정도가 있을 뿐이고 그나마 이중모음의 실현은 그리 명백하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 음절 끝에 올 수 있는 7개 자음 외에 다른 자음이 오면 그 7자음 가운데 어느 하나로 바뀌어 <ㅅ ㅆ ㅈ ㅊ ㅌ> 등은 <ㄷ>으로, <ㅍ>은 <ㅂ>으로, <ㅋ>은 <ㄱ>으로 발음된다. 이처럼 처음에 대립되던 음소들이 특정 환경에서 대립을 상실하는 현상을 중화라고 한다. 그러나 음절 끝의 <ㅅ ㅈ ㅊ ㄷ ㅌ>은 <디귿이 →디그시> <꽃이 →꼬시> <젖이 →저시> <밭이 →바치> 등에서처럼 점차 <ㅅ>으로 단일화되는 경향을 보이며, 이처럼 성질이 먼 2개 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같아지거나 비슷해지는 현상을 동화(同化)라 한다. 동화에는 <칼날 →칼랄>처럼 앞음의 잔영(殘影)이 남아 있다가 뒤에 오는 소리에 영향을 미치는 순행동화가 있고, 구개음화·움라우트·비음화 등의 역행동화가 있다. 구개음화는 <밭이 →바치> <같이 →가치> <굳이 →구지> 등이나 일부 방언에서 <길>질, 기름>지름, 키(箕)>치, 끼다>찌다> 등과 같이 구개음이 아닌 자음이 뒤에 오는 모음 <이>나 반모음 [j]의 영향을 받아서 구개음으로 바뀌는 현상이다. 움라우트란 <아비 →애비> <손잡이 →손잽이> <죽이다 →쥑이다> <학교 →핵교> <구경 →귀경> 등에서처럼 뒤에 오는 모음 <이>나 반모음 [j]의 영향으로 그 앞의 모음 <아 어 오 우>등이 <애 에 외 위>로 바뀌는 현상이다. 비음화란 폐쇄음이 뒤에 오는 비음에 동화되어 비음으로 바뀌는 현상으로 <독립 →독닙 →동닙> <십리 →십니 →심니> 등에서처럼 뒤에 오는 자음이 <ㄹ>이던 것이 일단 <ㄴ>으로 바뀐 다음에 일어나기도 한다. 앞의 비음화와 비슷한 동화로 <천리 →철리> <논리 →놀리> <칼날 →칼랄> 등에서처럼 <ㄹ>과 <ㄴ>이 만났을 때 <ㄹ>의 영향으로 <ㄴ>이 <ㄹ>로 바뀌는 설측음화도 있다. 모음조화도 일종의 동화로 앞의 것들과 다른 점은 기본형이 주위 환경에 의하여 동화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양모음계열은 양모음끼리, 음모음계열은 음모음끼리 짝지어 만난 것이다. 이것은 특히 <보아라> <보았다> <주어라> <그었다> <피었다> 등의 활용이나 <팔팔-펄펄> <찰찰-철철> <알록달록-얼룩덜룩> 등의 의성어·의태어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지만 중세한국어에 비하여 엄격하지는 못하다.

어휘
한국어 어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의성어·의태어의 발달이다. 모음조화에서의 양성모음과 음성모음의 대립, 폐쇄음에서의 평음·유기음·된소리의 대립에서 오는 표현가치를 최대한 이용하여 어감의 미묘한 차이를 나타낸다. 여기에 1음절이나 2음절·3음절의 반복이 색다른 효과를 더한다. 한국어 어휘는 고유어와 한자어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한자어는 한국어 어휘의 50% 이상을 차지하며 대체적으로 일상생활에 관한 것은 고유어가 많고, 추상적이고 지적(知的)인 개념은 대부분 한자어로 이루어졌다. 같은 사물이나 개념에 대하여 고유어와 한자어가 함께 쓰이는 경우도 적지 않으나 <이>와 <치아(齒牙)>에서처럼 한자어는 경어의 뜻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한문이 한국의 문자생활을 지배해온 결과 많은 고유어가 사멸하였으며 이른바 기초어휘에 속하는 단어들까지도 사라지게 되었다. 일찍이 고대한국어에서부터 지명·인명 등 고유명사의 한자화가 시작되어 인명에서는 고유의 요소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시골 지명에서는 아직도 한자지명과 고유지명의 이중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곳이 많다. 20세기에 들어와 한국어 어휘에서 일어난 주목할 만한 현상은 고유어휘재료에 의한 신어(新語)가 많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한편 현대에는 약어(略語)가 대량 생성되고 그 자체로는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기 어려운데, 이런 현상은 고유어·한자어·외래어·외국어 등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방언
한국어의 방언권은 보통 6개로 나뉘며 필요에 따라 더 세분할 수 있다.

동북방언
함경북도·함경남도·양강도의 대부분 지역이 이에 속하며 고저(高低)와 억양에 특색이 있고, 음운면에서는 동남방언과 비슷하다.

서북방언
평안북도·평안남도·자강도가 이에 속하며 황해도 북부지역이 해당된다.

동남방언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및 그 주변지역이 해당되며 성조(聲調)를 가지고 있다. 이들 방언은 단모음 <애>와 <에>의 대립과 <의>와 <으>의 대립이 없으며 자음 가운데 <ㅅㅅ>을 된소리로 발음하지 못하고 <ㅅ>으로 발음한다. 한편 어미에는 중세한국어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서남방면
전라북도와 전라남도가 이에 해당되며 중세의 <ㅿ, ㅸ>이 <ㅅ, ㅂ>으로 살아 있다.

제주방언
제주도와 그 부속도서가 이에 속하며 한국어 방언 가운데 가장 동떨어진 방언이다. 가장 큰 특징은 중세한국어의 <>가 독립된 음운으로 살아 있는 점이며, 그 밖에 많은 고어들이 살아 있다.

중부방언
경기도·충청북도·충청남도·강원도·황해도의 대부분 지역이 이에 해당된다. 강원도의 명주(溟州)·삼척(三陟)·영월(寧越)·정선(旌善)·평창(平昌)지역은 성조에 있어 동남방언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고려 이후로 중앙어가 되어왔다.

출처:네이버, 야후 백과사전
출처 : I can do it !!
글쓴이 : 물망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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