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번 포스트에 다음엔 진지한 이야기를 한다고 했으니, 약속을 지켜야 겠죠. 어떻게 보실지는 모르겠지만요....^^;;
노스페라투의 한 장면
1차대전이 겪은 1920년대 유럽인들 사이엔 어둡고 절망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한 세대가 통채로 사라진 1차 대전의 참상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유럽이란 지역엔 수많은 갈등과 수많은 사회적인 병폐들이 잠재하고 있었고, 그 누군가 방아쇠를 당긴다면 이런 문제점들은 쉽사리 불타오를수도 있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수많은 학자들과 역술가들 역시 암울한 미래를 전하고 있었는데, 그들에 따르면 세계경제는 앞으로 2개의 축을 중심으로 발전될 것이며 고정될 것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2개의 축은 바로 미국과 범아시아권이었고 유럽은 빠져있었습니다. 서방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 그리고 범 아시아 경제권의 도래 이들에겐 한 마디로 부족한게 없었습니다. 농사를 짓기에 적당한 기후 그리고 풍족한 자원들은 이들이 구태여 유럽에 의지하고 않고도 독자적인 경제권을 구축하기에 충분해 보였지요.
서구인들의 잠재의식에 자리잡은 황화(黃禍) 콤플렉스
결국, 부족한 농경지와 한줌의 자원뿐인 유럽은 경제적으로 고립되고 말것이라는게 예언의 내용이었고, 간신히 전화를 수습한 유럽인들에게 이런 예언은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만들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유럽에 한 줄기 서광을 비추는 예언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독일 출생의 건축가 헤르만 쇠르겔Herman Sörgel이었습니다. 건축가답게 그가 들고온 해법은 전 유럽을 관통하는 전대미문의 건설 프로젝트였으며, 상당수의 유럽인들은 이 미칠듯한 초거대 프로젝트에 매료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가 들고온 의외로 해법은 간단했는데.....
지브랄타 해협과 쇠르겔
"그까이 꺼, 기냥 지중해를 댐으로 둘러치면 만사O.k여."
그의 이런 상상을 초월하는 원대하고 기발한 발상은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 감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쇠르겔은 수년동안 이 연구에 몰두해 왔고 나름대로 수많은 논리들을 개발해왔던 겁니다. 거대한 터빈들이 생산해내는 막대한 전력과 이로 인해 옥토로 탈바꿈한 사하라는 유럽을 가난과 빈곤 그리고 만성적인 실업에서 구할수 있는 유일한 타개책임을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더구나, 당시 사람들은 여전히 기술과 공학의 무한한 진보에 대한 무오류성을 확신하고 있었고, 그런 그들에게 쇠르겔의 원대한 구상은 '어쩌면...'이라는 생각을 품게 만들기에 충분했던 겁니다.
1885년 4월 2일 독일 레겐스부르그Regensburg에서 출생한 쇠르겔은 20세기로 접어들자 뮌헨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1908년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한 쇠르겔 보기좋게 딱지를 맞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그 5년후 다시 한번 논문을 제출한 쇠르겔은 전과 다르게 대 호평을 받고 논문이 출판으로 이어지는 기분좋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좀 어처구니 없는 사실은 이 2개의 논문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거의 같은 논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차이가 있다면 후자에 좀 더 미사여구가 들어간 것 뿐이었죠.
이 사건으로 인해 쇠르겔은 인생의 중요한 교훈하나를 얻게됩니다.
'넌 결코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물건의 가치는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라는 것으로 결국 이 교훈은 그를 완고한 고집쟁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포장이 비슷하다고 품질까지 비슷할 순 없다.
1914년 1차대전이 터질때 쇠르겔은 건축가겸 언론인으로 재직중이었습니다. 그의 조국 독일은 전쟁의 중요 당사국이었지만 반전주의자인 그는 참전을 거부하게 되지요. 결국, 전쟁은 독일의 패망으로 막을 내리고 쇠르겔은 피폐한 조국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가지 결심을 굳히게 됩니다. '조국과 유럽의 영구적인 번영을 통한 갈등의 종식.'이 바로 앞으로 그가 해야할 일이자, 의무였습니다.
예언자들이 전하는 미래의 고립을 해소하고 유럽을 유토피아로 만들기 위해 쇠르겔이 선택한 것은 무한한 가능성의 기술과 공학을 통해 빈곤과 실업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보다 더 구체적인 방안은 에너지, 즉 전력의 생산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타당한 방안은 저렴하고, 개발 가능하며, 무한한 자원인 물을 이용하는 수력발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작 하천 따위에나 건설하는 댐 정도로는 쇠르겔에겐 새발의 피에 불과했고, 그는 1927년 판로파Panropa라 부르는 계획을 발표 자신의 계획을 구체화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2년 후에는판로파의 모호한 점을 개선하고 좀 더 명쾌하게 기술한 아틀란트로파Atlantropa라는 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르고 전유럽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는데 성공합니다.
나도 구원자가 필요해. ㅠㅠ
이 아틀란트로파 프로젝트에 따르면 지중해와 흑해에 여러개의 거대한 댐이 들어설 것이었습니다. 일단 지브랄타 해협의 최단 부분에 모로코와 스페인을 잇는 길이 18마일의 댐이 들어설 것이며 2번째 댐은 흑해 동쪽에서 시작되어 보스포러스 강어귀까지로 건설될 것 이었습니다. 이 두 댐의 거대한 터빈이 돌리는 막대한 양의 전력은 전 유럽과 아프리카에 공급되고도 남을 정도였고, 지중해의 해수면 저하(약 300피트)로 모습을 드러내는 약 9만 제곱마일 새로운 토지가 농경지로 공급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실리는 이탈리아와 시실리는 육로로 연결될 것이었으며, 시실리와 튀니지는 또 다른 댐으로 이어져 아프리카의 식민화를 위한 교통로를 제공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이루어져야 할것이 있었는데, 바로 안락하고 쾌적한 주거환경과 농경지를 조성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해 주면 커집니다.
그 방안으로는 콩고 전역를 가로지르는 댐을 건설해서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중 하나인 차드호를 약 13만5천 제곱마일의 내해로 변모시키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콩고 저지대의 "비 생산적인" 산림, 토착종들은 그대로 수몰될 것이었고, 또한 수많은 부락들과 원주민들의 역시 쓸려나갈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아프리카의 지도자체가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단일 공급 체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막대한 전력의 공급은 유럽제국들을 서로 의존하게 만들것이며, 또한 무한했기에 더 이상의 분쟁거리는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한 인구 폭증으로 인한 갈등에 대한 대비책은 바로 아프리카 이주가 제안되었습니다. 그 당시 아프리카는 문명도 문화도 없는 미개인들이 사는 불모지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쇠르겔과 그의 지지자들은 식민화야 말로 토착민들에게 식수와 직업을 제공하는 혜택이라고 주장했고, 이 프로젝트 최대의 피해자인 아프리카의 희생(?)에 대한 비난은 그저 묻혀 지나가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거대한 호수들이 아프리카를 비옥하게 만들것이었다.
행성개조계획Terra reform(?)에 가까운 내용을 담은 아틀란트로파 프로젝트는 쇠르겔에게 크나큰 명성을 안겨주었으며, 그는 단박에 유명인사로 급부상하였습니다. 광적인 지지자들과 재정 후원자들이 그에게 몰려들기 시작했고, 언론은 그를 슈퍼 스타로 만들어 추종하는 기사들을 토해내기에 바빴습니다. 이런 대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쇠르겔은 마침내 아틀란트로파 연구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이런 열광적인 지지에도 불과하고 쇠르겔은 삽 한번 뜨지 못하는데....당시 유럽의 어느 정부도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또한 이를 추진할 통합된 국제 기구도 없었으며, 민간차원에서 이를 추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탈리아는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했는데 지중해는 그들에겐 생활의 터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먼 이상보다는 지금의 현실이 우선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 당시 쇠르겔의 전 지구적인 계획에 관심을 보이는 집단이 있었다면? 넵! 그건 바로 나찌였습니다. 1933년 나찌는 진지하게 검토해보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돌아온건 냉소적인 거절이었습니다. 나찌가 관심을 가진건 아프리카로 향하는 관문이었지, 전 유럽의 혜택이 아니었으니까요. 게다가 1942년 그들은 쇠르겔의 작업에 대한 출판을 전면 금지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가공할 위력의 무기가 될수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하라는 옥토로 변한다.
어쨌든 아틀란트로라 연구소는 2차대전에서도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점점 사그라 들었고 대중들은 언제 그랬냐는듯 싸늘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쇠르겔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었고, 그런 자신의 이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하지만 쇠르겔은 단 하나도 포기 못한채 프로젝트의 실현을 위해 열정적으로 밀어 붙였습니다. 그리고 1952년 크리스마스에 뮌헨에 있는 대학에 강연을 하던 그는 뺑소니에 의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목격자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규정을 잘 지키고 있었지만, 범행차량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쇠르겔은 죽을때까지 이 프로젝트의 실현가능성을 믿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브랄타 댐의 건설은 그 당시 전 세계 콘크리트 생산량을 상회하는 것이었으며, 조그마한 해수의 흐름에도 기상이변이 속출하는 지구에서 지중해를 가둔다는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예상하기 힘듭니다. 비록 사하라 사막이 옥토로 변한다 하더라고 전 지구인이 겪어야 되는 재앙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약과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무기로서의 전용 가능성도 핵이 개발된 이상 의미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무엇보다 이 계획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난은 맨 처음엔 그냥 묻혀져 있던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유럽의 번영을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되는 아프리카와 그 원주민들을 더 이상 무시할수는 없었던 겁니다. 1960년 아틀란트로파 연구소는 그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습니만, 그들의 전통은 그들이 예상치 못한 다른 분야에서 꽃을 피우고 있었으니....그건 바로 SF였습니다.
엔터프라이즈는 영원하리!!!
스타트렉의 제작자이자 원작자인 진 로든베리 Gene Roddenberry는 댐으로 둘러싸인 지브랄타 해협과 중앙 아프리카의 내해를 묘사했는데 이는 쇠르겔의 아이디어에서 차용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1950년대 소련의 인기 SF작가인 그리고리 그레브네프Grigorii Grebnev는 Flying Station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과 더불어 북극에 잔류한 나찌 패잔병들과의 전투를 그리고 있는데, 나찌의 거대한 사보타지 계획으로 지브랄타에 거대한 댐을 건설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고, 이 부분에 기술적인 묘사과 지형 변화에 있어 쇠르겔의 연구가 동원된 것은 물론입니다.
또한 '블레이드 런너'와 '마이너리티 리포트'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SF작가 필립 K. 딕의 대체역사물 '높은 성의 사나이들'The Man in the High Castle들은 지중해를 고갈시키려는 나찌를 그리고 있으며, 또한 얼마전 타계한 SF의 대부 아서 C. 클라크경Sir Arthur C. Clarke 의 걸작 '라마와의 랑데뷰' Rendezvous with Rama 역시 고갈된 지중해를 묘사하는 등 수많은 SF작가들이 쇠르겔의 연구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SF의 큰 별이 지다.
전대미문의 행성개조계획(?)을 꿈꾼 쇠르겔, 그는 다행스럽게 삽한번 못뜨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연구가 우리의 문화 생활을 조금 더 윤택하게 만든건 부정할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고인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요.^^;;
* 한반도 대운하 따위는 그야말로 껌에 불과한 구상이었군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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