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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련선 이름 없는 유령 우주인 … 미국선 우주왕복선 폭발

_______! 2010. 1. 28. 23:36

옛 소련선 이름 없는 유령 우주인 … 미국선 우주왕복선 폭발

 

 


[중앙일보]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인류의 달 착륙은 기적이었다. 한계에 도전하는 불굴의 정신은 새 역사를 만들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따랐다. 많은 우주비행사가 예측 못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아무의 기억에도 남지 못하고 무대 뒤편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희생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희생과 노력을 딛고 인류는 이제 화성을 향한 꿈을 가꾸고 있다. 그는 달을 밟는 우주인으로 선택되지 못했다.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올드린이 달 표면에 인류 최초의 발자국을 남기는 동안 마이클 콜린스는 달의 궤도를 돌고 또 돌았다. 28시간 동안 사령선에 홀로 남아 컴퓨터에 850개가 넘는 명령을 내려야 했다. 자동차 운전석보다 좁은 사령선 벽면은 700개가 넘는 스위치, 경고 버튼, 계측기, 키보드로 가득했다. 달 뒤편을 지나는 동안 콜린스의 눈앞에는 어둠뿐이었다. 달이 햇빛도 별빛도 가렸기 때문이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 표면에서 미국 대통령과 교신했다. “닐과 에드윈, 여러분이 해낸 일 덕분에 천국도 인간 세상의 일부가 됐군요.” 하지만 콜린스와 교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달 뒤편을 지날 때는 지구와 교신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47개 나라 6억 명의 사람이 지직거리는 텔레비전으로 달 착륙 장면을 봤지만 단 한 사람, 콜린스만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나는 지금 혼자다. 정말로 혼자다. 이곳에서 생명체는 나뿐이다. 달의 저편에는 30억하고도 두 명이 있겠지만 이쪽에 무엇이 있는지는 신과 나만 안다. 내가 가진 이 강렬한 느낌은 두려움이나 외로움이 아니라 깨달음, 기대감, 만족감, 자신감 그리고 환희에 가깝다. 나는 이 느낌이 좋다(콜린스가 달의 뒤편을 비행하며 쓴 메모)'.

사람들이 그에게 “아쉽지 않으냐”고 물을 때 콜린스는 “아폴로 계획의 99%를 함께하며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좋은 역할이 아니라는 점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베아 우스마 수페르트, 『달의 뒤편으로 간 사람』).

1969년의 달 착륙은 인류의 우주 개발 역사상 최고 하이라이트였고, 최상의 역할은 암스트롱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인류는 무수한 희생을 치러야 했고 수많은 우주비행사가 이름 없이 스러져야 했다.

첫 우주인 가가린도 훈련 중 숨져

당시 우주는 미국과 소련의 대결장이었다. 초반엔 소련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57년 10월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렸고, 61년 4월에는 유리 가가린을 태운 보스토크 1호가 지구 궤도를 한 바퀴 도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그해 5월 유인 궤도 비행이 아닌 탄도 비행을 한 번 성공한 게 다였다. 지구 주위를 도는 게 아니라 상공 480㎞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해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은 60년대가 끝나기 전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지구로 안전하게 귀환시키는 목표를 달성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미국은 연간 예산의 4%를 우주 개발에 쏟아 부으며 달을 향한 행진을 했다. 1인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머큐리 계획, 2인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제미니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하지만 '방 하나 크기만 한 컴퓨터가 지금의 소형 컴퓨터만 못 하고, 웬만한 것은 연필로 계산하고, 우주선은 수동 조작하던' 당시, 모든 게 예측대로 이뤄지는 건 불가능했다. 많은 시도가 실패로 끝났고 여러 우주비행사가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미국인들에게 가장 큰 충격은 아폴로 1호 승무원들의 사망이었다. 발사를 앞두고 모의 카운트다운을 하던 67년 1월 27일 화재가 발생해 선실에 있던 3명 모두 사망했다. 아폴로 11·12호에 이어 발사된 아폴로 13호도 실패의 역사로 기록됐다. 이륙 56시간 뒤 산소탱크 폭발로 13호는 달을 코앞에 두고 지구로 귀환해야 했다.

귀환 못한 개·원숭이도 많아

옛소련은 우주 개발 계획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성공했을 때만 공개했다. '유령 우주비행사'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이탈리아 무선인들은 60년 11월 “러시아와 영어 코드로 보내진 '전 세계에 SOS'라는 신호를 세 번이나 포착했다”고 주장했다. 61년 5월엔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왜 대답이 없지…. 세상은 우리를 모를 것”이라고 러시아어로 말하는 우주비행사의 목소리를 수신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유령 우주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유령이 된 소련 우주인은 10여 명이 넘는다.

가가린이 우주 비행에 성공하기 6일 전 소련 우주비행사 블라디미르 일루신은 달 궤도 비행에 성공했지만 중국에 비상 착륙한 탓에 공식 기록에서 지워지고 말았다는 설도 있다. 61년 우주선 화재 사고로 발렌틴 본도렌토가 사망한 사실은 86년에야 밝혀졌다. 조종사 레도브스키크, 샤도린, 미츠코프가 57~59년 준궤도 비행 중 사망했던 것도 소련 붕괴 뒤 러시아 우주기술진에 의해 폭로됐다.

우주 개발의 희생자로 동물 우주비행사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 최초의 동물 우주비행사는 벵골원숭이 앨버트. 탄도 로켓 V-2에 실려 48년 발사됐다가 로켓 내 선실에서 죽었다. 58년부터 10년 동안 미국에선 동물 우주비행 시도가 일곱 차례 있었지만 살아 돌아온 동물은 없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비운의 동물 우주비행사로는 라이카 종의 개 쿠드랴프카가 있다. 스푸트니크 2호에 실려 궤도 비행을 시도했지만 기내 과열과 산소 부족으로 죽고 말았다. 실패를 거듭하던 동물비행사의 귀환은 59년 겨우 성공했다.

실수와 조바심이 빚은 챌린저호 폭발

미국이 달 탐험에 앞장서자 소련은 지구 궤도에 우주정거장을 건설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70년 소련은 세계 최초의 우주정거장 살류트 1호를 발사했고, 86년에는 좀 더 발전된 우주정거장 미르를 발사했다. 미국도 아폴로 계획이 끝난 뒤 우주정거장(스카이랩)과 우주왕복선(컬럼이바호·챌린저호) 개발에 나섰다. 우주왕복선은 한 번 쓰고 버리는 달 탐사 로켓보다 비용이 적게 들고 위험성도 덜했다.

이 가운데 86년 1월 28일 발생한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 사건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7명의 승무원은 챌린저호가 이륙 73초 만에 공중 폭발하는 바람에 전원 사망했다. 챌린저호 참사는 사소한 실수와 인간의 조바심에서 비롯된 인재였다. 당시 강추위로 네 차례나 발사가 미뤄지자 미국 언론들은 '챌린저호가 오늘도 발사되지 못했다'는 식으로 연일 '비꼬는' 보도를 했다. 여론에 못 이겨 무리하게 발사된 챌린저호는 추위로 손상된 이음매 부속 하나 때문에 폭발했다. 당시 챌린저에는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초등학교 과학교사 크리스타 매컬리프(37)도 타고 있었다. 우주에서 무중력에 관한 강의를 할 예정이었던 그가 가장 좋아했던 말은 '불가능에의 도전'. 하지만 도전은 비극으로 끝났다. 2003년 2월 1일에도 컬럼비아호가 우주 비행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폭발해 승무원 7명 전원이 사망했다.

매컬리프가 꿈꿨던 우주 강의는 21년 뒤 바버라 모건이 이뤄 냈다. 매컬리프가 사망한 챌린저호의 탑승자 후보였던 그는 2007년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머물며 사상 첫 우주 원격 수업을 했다. 동료의 비극과 고통을 딛고 인류의 또 다른 꿈을 이룬 셈이다. 무명의 수많은 우주인의 도움과 희생을 딛고 이뤄진 우주 개발의 업적처럼 말이다.

미국도 달 유인 탐사 재개 계획

우주 개발 경쟁은 냉전 종식과 함께 시들해졌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다시 불붙는 양상이다. 앞서는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은 2007년 달 탐사위성 '창어 1호' 발사에 성공한 데 이어 창어 2·3호를 달에 착륙시킬 계획이다. 일본과 인도도 각각 2007년과 2008년 달 탐사위성을 쏘아 올렸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도 '이대로 있으면 뒤진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박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