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민시레나(민긍호 의병장 손녀)
"나는 민긍호 할아버지의 큰손녀입니다. 할아버지는 한국의 민족영웅입니다."
민긍호 원주 진위대대 특무정교
"군대가 없는 나라를 어찌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참령 박승환 시위대 제1연대 1대대장 - 1907년 8월 1일) 한발의 총성. 그것은 구국전쟁의 신호탄이었다. 1907년여름 대한제국 국군의 총포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구국분전이 시작된 것이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됐다.
"한국 광복군은 일찍이 1907년8월 1일 국방군이 해산되던 때에 성립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국군을 해산하던 날이 곧 우리 광복군 창설의 때이니..."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보고서 중
한국광복군군과 우리 국군의 뿌리인 대한제국국군. 그들은 1907년 대한제국 사수 전쟁에 몸을 바쳤다.
<한일강제병합 100년 기획 잊혀진 전쟁 1907>
제1편 대한제국을 사수하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막대한 국민의 세금을 들여서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의 목적입니다. 그것은 바로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기 위함입니다. 때문에 국군은 외적의 침략이 있을 때 목숨을 던져서라도 이를 격퇴해내야 합니다. 오늘 우린 쓰러져 가는 조국을 지켜내기 위해 산화한 진정한 군인들을 만나봅니다.
지난 1월. 전주 4대륙 피겨스케이팅 선수권 대회가 열렸다. 아사다 마오를 비롯한 세계적인 선수들이 벤쿠버 동계 올림픽을 납두고 기량을 겨눴다. 그런데 이 대회에 특별한 선수가 참가했다. 카자흐스탄 국가대표 선수인 데니스 텐. 카자흐스탄에선 우리나라의 김연아 선수와 같은 존재다. 17살인 그는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선수다. 데니스는 감성적인 피겨 연기로 항상 관객에게 감동을 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날 데니스는 실수로 아쉽게 4위에 머물렀다.
데니스 텐 카자흐스탄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어제는 기분이 별로 안 좋았는데 오늘은 좀 낫습니다. 경기를 마치자마자 바로 내일 있을 프리 경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물론 실수를 만회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괜찮습니다. 내일은 더 잘하고 싶습니다."
대회가 큰난 후 데니스는 빠듯한 일정에도 어딘가로 향했다. 그가 찾은 곳은 강원도 원주에 한 야산에 위치한 산소다. 익숙하지 않지만 엄마와 같이 한국식 참배를 했다. 이곳은 뜻밖에도 민긍호 의병장의 산소였다. 민족영웅 민긍호. 민긍호는 1907년 정미의병전쟁 당시 강원도와 충북일원에서 치열하게 일본군과 싸웠던 군인출신 의병장이다.
데니스 텐
"할머니와 이모할머니는 우리 형제, 사촌들에게 민긍호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당시에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옛날이야기처럼, 마치 요즘 사람들이 슈퍼맨 이야기를 듣듯 들었습니다. 마치 재미있는 동화 같았습니다. 이야기가 매우 마음에 들었고 우리들은 다들 할아버지를 닮고 싶어했습니다."
데니스 텐은 바로 민긍호 의병장의 5세손이었다. 민긍호 의병장과 카자흐스탄 피겨선수 데니스 텐 사이엔 어울리지 않는 이름만큼이나 긴 100년의 간극이 있다.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나라 카자흐스탄. 왜 의병장의 후손이 카자흐스탄 국가대표일까.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니스 텐의 모습은 여느 카작족 청소년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그는 이곳의 유명인이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언론에서 데니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벤쿠버 동계올림픽 쇼트와 프리 프로그램에 경기 출전권을 확보한 데니스의 대한 관심은 대단히 높다. 데니스는 어릴 때부터 피겨를 배웠고 지금은 러시아에서 세계적인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하고 있다. 데니스 텐의 할머니는 민긍호 의병장의 손녀다. 데니스는 집에 방문할 때마다 할머니로부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다.
민 시레나
"아마 그 중에 배신자들이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일본인들이 그들을 에워쌌지. 할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셨고 다른 의병들도 죽었어. 그 틈에도 할아버지는 부하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했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지."
이곳 카자흐스탄 알마티에는 민긍호 의병장의 후손들이 벌써 6대째 50여명의 일가를 이루고 살고 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나자 민긍호 의병장의 손자 며느리가 뭔가를 취재진에게 보여 준다. 그것은 옛날 조선의 백자항아리와 밥그릇이었다.
유가이 로자 민긍호 의병장 손자며느리
"어머니가 물려주신 겁니다. 국이나 김치를 담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뭔가를 보여줬다.
민 시레나
"원본입니다.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여흥민씨 족보였다. 민긍호 의병장의 부인이 한국에서 떠나올 때 품에 고이 간직하고 온 것이라고 했다. 여흥민씨 27세손 민긍호라는 글이 뚜렷하다. 원주진위대의 특무정교를 지냈다는 내력도 기록돼 있다. 아들 영욱까지는 같은 글씨로 쓰였고 손자 안똔은 서툰 한글로 기록했다. 여흥민씨의 가계보. 그것은 민긍호 의병장과 데니스 텐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할머니들은 민긍호 의병장의 부인 사진도 보여줬다. 백년전에 순국한 민긍호 의병장의 부인과 아들 그리고 그 후손들이 불쑥 나타난 느낌이다. 그들은 취재진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들을 풀어 놓았다.
알렉산드라 민긍호 의병장 손녀
"할머니는 평생토록 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 묘지에 가서 절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단 한번도 남편의 산소에 가보지 못한 체 생을 마친 증조할머니의 한이 오늘 카자흐스탄 피겨 국가대표가 된 데니스를 통해 전해질 수 있을까.
데니스 텐
"할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셔서 슬프기도 합니다. 할아버지가 이루신 업적은 믿기지가 않을 정도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할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여기에 오니까 힘을 얻는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언젠가 이곳에서 사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도 바로 이 자리에서 계셨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사관의 신분으로 군을 장악하고 의병투쟁에 중심에 섰던 민긍호. 그해 치열했던 1907년의 전쟁과 그 후손들의 백년에 걸친 유랑을 따라가 보자.
의병장 민긍호 장군. 그리고 그의 5대손인 카자흐스탄 피겨 국가대표선수 데니스 텐. 나라를 위해 목숨을 잃은 의병장의 자손들은 머나먼 카자흐스탄에 있고 우린 그들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 체 백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걸까요. 자 이쪽을 보시죠. 제가 들고 있는 이것은 1907년 8월 4일자 프랑스의 르 쁘티 주르날집니다. 보시는 것처럼 화염사이로 태극기가 보입니다. 그리고 건물사이엔 대한 제국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백병전이 묘사돼 있습니다. 바로 이 장면은 실제 1907년 8월 1일 서울에서 있었던 사건을 묘사한 것입니다. 데니스 텐. 민긍호 의병장의 후손이 카자흐스탄의 국가대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바로 이 날의 사건으로부터 비롯됩니다.
1907년 8월 1일.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의 관저엔 이른 아침부터 각급 한국군 부대장들이 속속 도착했다. 곧바로 병무대신 이병무가 순종황제의 조서를 낭독했다. 그것은 대한제국 군대해산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내용이었다.
백기인 박사 군사 편찬위원회
"완전히 비무장으로 해체시켜서 집으로 돌아가라 하는 얘기는 마치 우리가 오늘 대한민국 국군을 하루아침에 해산하고 우리 국군이 필요 없다. 당신들은 집으로 가라. 하는 그런 이야기와 동일하기 때문에 정말 설명할 수 없는 기가 막힌 일을 1907년 8월 1일 우리 조선 시위대의 장병들은 당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군대해산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온몸으로 저항한 군인이 있었다. 대한제국군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
"나라의 군병이 있는 이유는 나라를 지키기 위함인데 지금 왜적이 온 강토에 가득한 데 홀연히 군대를 해산한다는 것은 황제의 뜻이 아니고 적신이 황명을 위조한 것이다. 나는 죽을지언정 명을 받을 수 없다."
그는 군대해산은 곧 망국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박승환은 18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8살 때 무과에 급제했지만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자 강력한 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896년 9월 무관학교에 입학 이듬해에 보병참위로 임관했다. 황궁수비대에 배치된 그는 1899년 제1연대 제2대대 소대장, 1900년 제1대대의 중대장을 맡았다. 1904년 2월 참령으로 진급했고 군대해산 당시는 제1연대 1대대장이었다. 망국을 지켜봐야만 하는 치욕적인 군인. 대한제국 군인 박승환은 그 치욕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 시각 일본군은 해산식장인 훈련원을 완전 포위한 체 한국군의 반발에 대비했고 박승환의 대대원들도 무기 반납 후 막 훈련원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한장의 유서로 모든 것을 정리했다. 군인으로써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써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다.1) 그의 나이 38살이었다. 대대장 박승환의 죽음은 당번병이 맨 먼저 발견했고 대대원들의 분위기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대장의 뒤를 따를 자 누구 없느냐"
1연대 1대대원들의 놀라움은 순식간의 분노로 바뀌었다. 격분한 대대원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총기를 되찾았다. 한편 그 시각 인접한 제2연대 1대대도 무기를 반납하고 해산식장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당시 2연대 1대대는 대대장 이기표 참령이 군을 통제하는 회의에서 항명하다 해임된 상태라 격앙돼 있었다. 이럴 때 이웃 대대로부터 총성과 함성이 들리더니 1연대 1대대원 3명이 총을 쏘며 달려왔다. 곧바로 제2연대 1대대 병사들도 일제히 무기고를 파괴하고 총기를 되찾은 후 일본군과의 격전에 대비했다. 이때부터 제1연대 1대대, 제2연대 1대대원 1200여명은 전원 일본군과 전면전에 들어간다. 그리고 두 대대 외에도 300여명의 다른 부대원들도 항쟁에 참여했다. 그것은 기나긴 구국전쟁의 장엄한 서막이었다.
죽음으로 항전하라. 대한제국시위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참령. 그는 명령을 따라야만 했던 군인이라는 길과 또 망해가는 조국이라는 갈림길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은 부하들에게 가장 강력한 구국성전의 명령이었습니다.
일본도쿄의 방위연구소엔 100년 전에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문서가 있다. 하세가와 한국 주둔 일본 사령관이 일본 육군성에 보낸 전투보고서다. 대한제국군의 항쟁이 시작된 지 일주일 후인8월 7일 작성된 보고서로 시간 때 별 기록과 병력투입 상황이 정확히 남아 있었다. 첨부된 작전지도엔 병력 이동상황, 진행상황, 주격전지 등이정밀하게 기록돼 있었다. 당시사건의 현장은 남대문과 소공동 상공회의소 주변이었다.
일본군 보병 9중대와 보병10중대 등 2개 중대, 공병대와 기관총 3정이즉시 현장에 투입됐다. 일본군 9중대는 한국군 제2연대1대대를 10중대는 제1연대1대대를 담당했다. 대한제국 군인들은 적군이 접근하자 맹렬한 사격을 가해 접근을 차단 시켰다.
백기식 박사
"일본군은 굉장히 조선군 시위대를 쉽게 생각했는데 일본군이 골목을 따라 오자 조선 시위대는 병영막사를 엄패물로 해서 내부나 외부의 벽을 통해서 일본군을 조준사격 해가지고 저격을 했습니다. 의외로 전세가 쉽게 되지 않자일본군은 결국은 증원군을 요청했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9시 30분 일본군은 대기중이던 중대 전병력을 투입한다. 하지만 일본군의 군세를 막아낸 1연대1대대는 10시부터는 오히려 무서운 기세로 일본군에게 총공세를 취했다. 이때부터 일본군 10중대는 공세를 멈춘체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이때한국군은 큰 위기에 빠진다. 2층 건물이 한국군의 병영이다. 당시의 서울 건물은 대부분 단층 건물이었다.
서울에선 남대문과 동대문이 가장높은 건물이었다. 훈련중인 한국군 병영 뒤로 남대문이 우뚝솟아 병영을 내려다 보고 있다. 바로 이 남대문 석루에 일본군이 기관총 2정을 내걸어 맹렬한 사격을 한 것이다. 한국군은 일본군 기관총에 사정권에 완전노출 됐다.
한편 일본군 9중대와 공병대는 10시 20분경부터 기관총을 앞세우고 2연대 1대대 병영 뒷문을 향해총공격을 가해왔다. 일본군은 수차 공격을 감행하지만 한국군은 벽과 창문을 이용해 집중사격 했다. 고전이 계속되자 일본군 지도부는 일본군 12중대와 7중대 병력을 증파한다. 증원부대의 12중대를 고전하고 있던 제9중대에 붙여 한국군 제2연대 1대대를 집중공격 한다. 일본군 9중대장인 가지와라는 선두에서 2연대 1대대 병영후문을 돌파했다. 하지만 가지와라와 함께 영내에 돌입한 일본군은 한국군의 집중사격에 노출됐고 가지와라는 절명했다. 그런데 전세가 흐트러진 것은 일본 공병대의 폭약(爆藥)이었다.
화염과 연기에 한국군의 전열이 순간적으로 흐트러지자 이 틈을 타 일본군 9중대, 12중대가 잇따라 병영 안으로 돌입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한국군은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지만 전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10시 50분 결국 제2연대 1대대 병영은 일본군에게 점령되고 만다. 그리고 제2연대 1대대 병영이 함락되고 일본군 제7, 9, 12중대와 공병대가 증원되자 한국군 제1연대 쪽을 공격하던 일본군 10중대는 총공세를 취한다. 이무렵 지금까지 잘 버티던 제1연대 1대대 병사들은 탄약이 떨어지기 시작해 곤경에 빠진다. 제1연대 1대대 병사들은 결사적인 항전을 벌였지만 결국 11시 50분경 일본군에게 병영을 내주고 만다.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엔 구한말 초대한국 교구장을 지낸 뮈텔 신부의 일기가 보관돼 있다. 뮈텔일기엔 구한말 우리나라 사정을 잘 알 수 있는 내용들이 생생히 담겨 있다. 뮈텔 신부는 8월 1일자 일기에 그날 자신이 목격한 장면을 세밀히 묘사2)했다. 외신들도 이날의 일들을 긴급 타전했는데 1907년 8월 4일자 르 쁘띠 주르날지의 전면삽화는 마치 8월 1일에 격렬했던 시가전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듯 생생하다.
그런데 얼마 전 발굴된 프랑스의 일라스트라시용. 이 신문은 사건발생 한 달 여후인 9월 7일자 신문에 서울의 쿠데타라는 제목으로 6장의 사진과 함께 3페이지에 걸쳐 이 사건을 증언했다. 포로가 된 한국군이다. 손이 묶이고 굵은 밧줄로 목이 감긴 충격적인 모습이다. 성벽 근처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사진엔 너무나도 아픈 해설 기사3)가 실려 있다. 그것은 1907년 8월 1일 조국을 지키려다 죽은 고귀한 대한제국 용사들의 버려진 주검들이었다.
제2연대 제1대대 참위 이준영은 1900년 7월 육군무관학교를 수료한 후 이날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순국했다. 이날 68명의 국군이 순국했다. 1907년 8월 1일 기울어져 가는 조국을 사수하다 사망한 국군들 그들은 대한제국의 영웅들이었다.
이곳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군대가 일본의 침략군과 죽음의 혈투를 벌인 그 현장입니다. 나라가 망하는데 국군이 총을 들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박승환 대대장과 한국군 제1연대 1대대와 제2연대 1대대원들의 자발적인 항전. 그들은 비록 그날 전투에선 패했지만 역사의 승리자로 남아 우리를 숙연케 합니다. 일제는 친일반역자들과 함께 간신히 8월 1일 오후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습니다. 고관대작들이 나라를 팔아먹는데 정신이 없을 때 하급 장교와 병졸들은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지켰습니다. 남의 손에 의한 강제군대해산. 이것은 그 나라가 실질적으로 망했음을 의미합니다. 1907년 8월 1일 해산 당시 대한제국 군대는 서울의 시위대 2개 연대 총 5000명과 지역의 8개 진위대대 총 2000명이 있었습니다. 서울의 1연대 1대대와 2연대 1대대원들의 장렬한 패배는 항전의 끝이 아니라 구국전쟁을 위한 위대한 신호탄이었습니다.
강원도 춘천의 한 가정집엔 특이한 칼 한 자루가 보관돼 있다. 손잡이는 세밀히 양각된 문양들도 꽉차있는데 특히 꽃과 별 문양이 눈길을 끈다.
이인섭 씨 강원도 춘천시
“진흙이 한 1cm 정도로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어느 나라 칼인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 것인지 우리 것인지 이것을 가져다가 며칠 동안 석유에 담가 놓은 뒤 솔로 닦아내고 보니까 이 문양이 나오게 된 겁니다.”
예사롭지 않은 이 칼의 용도는 무엇일까. 전문가에게 칼의 정체를 의뢰했다.
박재광 학예사 전쟁기념관
“대한제국 때의 장교들이 사용했던 군도로 보여지고요, 그것은 여러 개의 이화문양이라든가 문양들이 나타내는 특징들을 봤을 때 그 당시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고 출토지역이 원주 쪽이라고 한다면 원주의 진위대라든가 그 쪽에 근무했던 장교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대한제국 상징인 이화 즉 오얏 꽃문양이 새겨진 칼. 그것은 바로 대한제국 장교의 상징인 의전용 군도였다. 왜 대한제국 장교의 칼이 흙투성이로 강원도에서 발견됐고 의전용 군도에 왜 전투의 흔적이 있을까. 조선 500년 동안 강원감영이 있었던 원주. 1907년 이곳엔 대한제국 지방군인 진위5대대가 있었다. 260여명의 진위5대대는 8월 10일 해산당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원주 진위대 역시 해산을 거부하고 8월 5일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특무정교 민긍호가 그 중심에 있었다. 원주 진위대대 봉기는 전국적인 항쟁의 시작이었다. 여주 파견대가 6일 봉기했고 8월 9일엔 강화 분견대가 반대하는 장교들을 축출하고 봉기했다. 8월 10엔 홍주 분견대가 9월 2일엔 진주 분견대가 봉기했다. 안동분견대는 해산에 반대하며 무장탈영을 하는 등 전국적인 무장봉기가 이뤄졌다.
가장 먼저 봉기한 원주 진위대의 중심인물 민긍호(1865~1908). 그는 원주 진위대의 고성분견대의 하사로 군생활을 시작했고 춘천분견대를 거쳐 1901년 오늘날의 준위에 해당하는 특무정교로 승진해 원주 진위대대에 근무 중이었다. 일찍부터 그는 지방의병들과 비밀리에 교류했고 부하들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왕현종 교수 연세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상당히 오랫동안 원주 진위대에 근무하고 있었던 사람이고요, 지역적으로 이 지역 출신은 아니지만 지역적인 인망이 높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의병장으로 활동했을 때 지역주민들이 굉장히 따랐고 상당히 의병부대의 활동에 자금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보조했습니다.”
민긍호는 정위 김덕제와 함께 거사를 제지하던 중대장 권태희 등 장교 6명을 감금한 후 대대를 장악했다. 민긍호는 무기고의 소총 1200정과 실탄 4만발로 주민들을 무장시키고 남은 무기는 은밀히 숨겨든다. 대대를 완전 장악한 것은 원주 진위대뿐이어서 이때 확보한 무기는 이후 대일전쟁에서 큰 위력을 발휘한다. 또한 오정묵이 거느린 산포수 부대가 민긍호 부대에 합류한다.4)
원주 진위대의 무장봉기에 놀란 일본군 사령부는 충주 수비대를 원주로 급파한다. 하지만 민긍호는 원주외곽에서 일본군을 맞아 치열한 교전 끝에 승리를 거둔다. 곧바로 민긍호 부대는 8월 12일 여주 경무분견소를 기습해 일본경찰을 처단한 후 의병을 모집한다. 음죽을 거쳐 장호원에 이르렀을 때에는 부대원이 천여 명으로 증가했다. 민긍호 부대는 8월 15일 죽산을 기습해 일본인을 처단하고 그날 밤 제천에서 이강년 부대와 협공해 일본군을 몰아낸다. 16일엔 일본군 충주수비대와 격전을 치루고 18일엔 장호원을 공격했다. 8월 23일엔 충청도의 중심지인 충주성 탈환을 시도한다.
윤병진 사무국장 원주 문화원
“충주성은 일본군이 병참으로 이용을 하던 일본군의 핵심이 들어가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충주성 공략은 실패로 끝났지만 적어도 의병부대들이 봉기한 의병부대들이 충주성을 공략을 하려고 마음을 가졌다라는 얘기는 당시 의병들의 전투력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의병들의 전투력이 일본을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막강하게 조직이 될 수 있었다는 부분이 있고......”
의병들의 무기는 화승총이었다. 화승총은 화약을 넣은 격실에 불붙은 심지가 점화하는 방식이었는데 항상 불붙은 심지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비오는 날이면 전투를 할 수 없었다. 군인들의 대일항쟁 참여는 의병들의 고민해결에 큰 기여를 한다. 원주 진위대의 소총 1600정과 탄알 4만발이 의병 진영으로 들어간 것이다. 체계적으로 훈련 받은 군인들이 의병 진영에 합류하면서 의병전력이 급격히 높아진 것이다. 자연스레 기존 의병 진영과 합류한 민긍호 부대는 강원 의병의 중심이 되어 백여 차례 전투를 치른다.
당시 강원도 춘천을 중심으로 한 강원의병들에겐 일반주민들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다. 산속 깊숙이 자리 잡은 이곳은 백여 년 전 의병들의 군수공장이었다. 의병에 나가지 않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창칼을 만들어 후방지원을 감당했다. 가장 큰 문제는 화약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오줌을 끓여 생기는 염초를 모아 화약을 제조했다. 그것도 의병들에게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요긴하게 사용됐다. 밥과 의복, 잠자리 등은 은밀히 주민들에 의해서 제공됐다.
박민영 연구위원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일제의 그 군경은 의병과 주민사이에 구별하기 힘이 들다. 그래서 거의 전국민이 의병 직접 의병에 투신했거나 또 의병을 도우는 준의병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전 국민의 의병화). 그것이 일제 정보자료에 무수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거의 2천만 민족 전체가 의병으로 일치단결돼 있던 그러한 양상을 보이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그 단계의 7년, 8년 더욱이나 7년 8년 단계의 의병을 구국의 성전이다. 의병전쟁 의로운 전쟁의 단계라고 인정을 하는 것이죠.”
영국인 종군기자 존 맥켄지는 의병들을 만나기 위해 1907년 접전지에 들어가 강원도 의병들을 직접 만난다. 구한말 의병의 상징적인 이 사진은 바로 이때 존 맥켄지가 찍은 것이다. 존 맥켄지는 의병들을 만나면서 받은 감명을 훗날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하지만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낳습니다.”
박민영 연구위원
“그 의병에 나간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에 뛰어 드는 것이죠.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고 또 그래서 당시 의병 자신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기고 지고 또 유리하고 불리하고 이거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는......”
1907년 일제는 고종을 쫓아내고 군대를 해산하며 행정 사법권을 강탈했다. 그러나 어떤 왕족도 나서지 않았고 고관대작들은 매국행위에 앞장섰다. 국가존망에 그 다급한 순간 이름 없는 백성들에 목숨을 건 구국전쟁이 시작됐다.
이것은 100여 년 전 구국성전에 나섰던 한 애국장교가 썼던 칼입니다. 군인으로서 가족과 조국을 지키지 못하고 침략군에 의해서 강제 해산 당한 한이 얼마나 컸으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대한제국군 출신의 한 노병은 군에 자원입대해서 해방된 조국에 군인이 됩니다. 만일 의병장 민긍호가 일제에 저항하지 않고 협력을 했다면 과연 그와 그의 가족의 삶은 어땠을까요. 아마 여타 친일파들과 마찬가지로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친일파에 대한 청산 작업도 없었으니 당연히 어떠한 단죄도 받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의병장 민긍호는 조국과 민족을 선택했습니다. 과연 그의 후손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1907년 여름 이후 한반도 전역에서 전투가 격화되자 일제와 친일관리들은 의병을 폭도라 부르며 대대적인 공세를 편다. 항쟁이 장기화 되자 민긍호 부대는 본격적인 유격대 활동에 돌입한다. 1908년 2월 혹한기 동안 치악산 인근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있던 중 1908년 2월 27일 일본군이 공격한다. 민긍호 의병장 부대와 일본군은 치열한 혈전을 벌인다. 27일에 이어 29일 오전 일본군과 또 다시 접전이 있었고 20명의 의병이 전사한다. 민긍호 부대는 타격을 입고 인근지역으로 흩어져야 했다.
교전이 벌어졌던 원주시 강림면 일원에선 아직도 당시 전투에 관한 생생한 증언들을 들을 수 있다. 이틀 동안에 격전을 치른 민긍호 장군은 부하 몇 명과 바로 이집에 잠복해 있었다.
장기성 원주시 강림면
“그 때 당시 이 동네에 심씨라는 구장이 있었어요. 심구장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밀고를 했대요. 의병들이 여기 와서 자다가 접전이 벌어진 거죠. 그 다음에 의병들이 심구장을 붙잡아서 이 밑의 둑에서 세워놓고 대창으로 찔러서 죽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결국 민긍호 장군은 접전 끝에 체포당하고 만다. 민긍호 장군을 호송하던 일본군은 강림 5리에 한 주막에서 숙박을 한다. 그런데 그날 밤 민긍호 부대의 60여 명이 전열을 정비해 일본군 숙소로 은밀히 접근해 온다. 민긍호 의병장 구출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날이 밝기 전에 구출작전을 끝내야 하는 의병들에게 구출작전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의병들의 총공세에 일본군은 포로로 호송하기 힘들다고 보고 민긍호 의병장을 사살한다(1908년 2월 29일). 그의 나이 44살이었다.
원주시 강림면엔 특이한 무덤 하나가 있다. 민긍호 장군과 같이 활동하다 순국한 체 인근지역에 방치됐던 무명 의병 5분의 유해를 모신 무명의병총이다.
윤병진 사무국장
“그래서 민긍호 의병장은 결국은 순국을 했습니다만 그때 당시에 희생되는 그 의병들 5분을 이 자리에다가 모신 산소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 산소에 있는 분들은 5분밖에 안 되지만 이곳 산하 군데군데에는 당시에 희생당한 의병들의 시신들이 이름 모를 의병들의 존재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평화로운 시절 나라는 왕과 벼슬아치들의 것이었다. 하지만 망국의 위기에 국가를 책임진 사람은 이름 없는 백성들이었다. 의병 그들은 불길처럼 일어나 전설이 돼 사라졌다.
박민영 연구위원
“나라가 위태로울 때 그 위태로운 나라를 살신성인한 그러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 분들은 당연히 의로운 군대 그래서 의병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죠. 그래서 백암 박은식 선생은 의병을 이름 해서 우리나라의 국수다. 나라의 정신의 엑기스다. 나라의 핵심이다. 이렇게 국수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게 당연한 이야기죠.”
민긍호 장군이 순국하자 일곱 살짜리 딸과 두 살짜리 아들은 엄마의 손을 잡고 북만주로 탈출해야만 했다. 100년에 걸친 길고 긴 유랑의 시작이었다.
민 시레나
“할머니와 아버지는 매주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일본 스파이들이 우리 가족을 특별히 감시했습니다. 민긍호의 식구들을 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는 곳을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내무장 세력들과 연결을 시도하고 있던 안중근 의사가 남은 가족의 만주 생활을 보살펴 줬다. 하지만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자 민긍호의 유족들은 다시 피신을 한다.
알렉산드라
“안중근 의사가 죽자 정말 생활이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일본인에게 쫓겨 할머니가 연해주로 옮겨 가셨습니다. 연해주로 와서는 혼자서 모든 생활을 감당하셔야 했습니다.”
서른에 남편을 잃은 민긍호의 부인과 아들 민영욱의 연해주에서의 삶이 자리를 잡은 1937년 또 다시 위기가 닥친다. 소비에트 정부가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킨 것이다. 민긍호의 손자 민안톤과 손녀 알렉산드라는 터울이 14살이나 된다.
민 시레나
“여건이 너무 안 좋았습니다. 의사들은 보러 오지도 않았습니다. 의사도 없는데 어떻게 나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여동생, 남동생 다섯 명이 그 때 죽었습니다.”
모진 시련 속에 민긍호의 아들 영욱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척박한 중앙아시아에서 의병장에 후손이란 자부심으로 버텨냈다. 네 자녀도 카작족과 슬라브족 속에서 훌륭히 성장했다. 남편과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땅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민긍호의 부인과 아들에게 마침내 조선의 광복은 찾아왔다.
알렉산드라
“할머니와 아버지는 해방이 되었을 때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기뻐하셨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남북으로 갈라졌습니다. 그 때 이미 그곳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대단히 슬퍼하셨습니다.”
알마티시 외곽에 자리 잡은 공원묘지엔 민긍호의 아들 민영욱과 손자 민안톤, 민로냐가 묻혀 있다. 민영욱은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한국에 돌아갈 수 없자 북한을 통해서라도 돌아가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1977년 결국 이곳에 묻혔다. 부인도 아들도 손자도 의병장 민긍호가 피를 뿌린 조국엔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알렉산드라
“미안합니다. 한국말을 잘 못해서 한 해 두 번 옵니다(한식날, 추석). 내 손자들 다 데리고 다 같이 옵니다. 저쪽에는 동생 로냐도 묻혀 있습니다. 언니랑 둘이 같이 옵니다.”
한국말을 못하는 걸 왜 당신이 미안해합니까? 당신의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조국을 돌려줬는데 우린 당신이 한국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민 시레나
“손자들이 자라면 자신의 아이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대대손손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절대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이야기는 계속 전해져야만 합니다.”
제가 들고 있는 이 책이 바로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회에서 지난 2007년도에 펴낸 조사보고서입니다. 우린 해방된 지 60년이 넘어서야 간신히 이 한권의 조사보고서를 냈을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나라를 위해 순국한 의병장 민긍호의 후손들이 순국열사의 후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한 체 머나먼 이국 땅 카자흐스탄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또 이들 외에도 수많은 순국열사들에 후손들이 이국땅에서 비참한 삶을 살다가 죽어갔고 또 자신이 누구의 후손인지도 모른 체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린 피로써 조국을 지켜낸 의병들의 공로로 오늘날의 안락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독립전쟁, 잊혀진 순국열사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독립전쟁 중입니다.
※ 내용의 저작권은 KBS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로는 금합니다.
※ 주
1. 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
2. “8시 반 시내에서 몇 발의 총성이 들렸다. 곧 연발사격으로 변하더니 정오까지 계속되었다...”(뮈텔일기 8월 1일)
“12시 반부터 사상자들이 실린 들것이 창 밑으로 실려갔다...... 들것을 든 자들이 희죽희죽 웃으면서 죽어가는 사상자들을 요 위에서 헹가래를 치는 것은 참으로 슬픈 광경이었다.”
3. 한국의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 죽은 ‘용감한’ 이들의 시신은 동대문 밖에 전시 되었다. 부모들은 자식들의 흔적을 찾으러 왔고 그들을 장례 지냈다. 일본인들도 이 ‘영웅들’의 죽음에 경의를 표했다. (일라스트라시옹 지 9월 7일)
4. 때를 만나지 못해 탄식하다가 원주 진위대의 봉기 소식을 듣고 포수 수백 명을 지휘하여 사지에 뛰어 들었다. (신유일기 중)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괴물열전 (0) | 2010.07.23 |
---|---|
비어 (0) | 2010.07.20 |
[역사추적] 천태만상 족보위조 (0) | 2010.05.13 |
제주 민담 효자와 구렁이 (0) | 2010.05.05 |
와이브로 軍 통신인프라 접수 (0) | 2010.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