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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 고분

_______! 2010. 7. 20. 22:05

 

고구려 고분벽화의 의미

 

 현재까지 확인된 벽화고분은 만주지역〔집안일대〕에 23기, 평양·안악일대에 68기 등 91기에 이른다. 그중에서 만주일대에 남아있는 벽화고분을 정리하면 <표1>과 같다. 이러한 고분벽화에 대한 연구는 1907년 Chavannes가 산화연총을 학계에 소개한 이래 1930년도의 일본인 연구와 80년도의 중국인 연구로 이어지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90년 초 한·중 간의 국교수립과 한국인의 동북지방 방문러시에 따라 집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93년 고구려문화국제학술대회를 계기로, {아, 고구려전}(조선일보)와 94년 KBS의 {고구려고분벽화}로 국민적 관심사로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전호태의 정력적인 연구로 벽화가 지닌 성격파악이 구체화되었으며, 정재서의 연구로 벽화의 종교적 의미로서 {산해경}과의 관계로 확대되었다. 이어 필자는 최근에 벽화내용의 검토·훼손전후의 비교, 무용총 장천 1호묘의 기린도(천마도)와 천마총(경주)의 그것과 비교를 통해 문물교류상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벽화에 대해서 '인물풍속·동물·풍경·장식화' 등으로 구분하거나, '인물풍속과 사신도'로, 또는 '사회풍속·사신도·장식도안'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전호태는 벽화내용이 내세관의 의미속에서 시기에 따라 변화과정에 주목하여 3기로 구분하였다. 제 1기는 생활풍속계가 사신계와 공존하되 생활풍속화가 주류이며, 제 2기는 생활풍속계·사신계·장식무늬계가 공존하되 장식무늬화가 중심이 된다. 제 2기는 사신계가 주류이며 장식무늬와 생활풍속을 부수적으로 파악한 바 있다.

『인물풍속화』는 고구려고분의 주된 내용으로 주인공 단독의 그림이 아니라, 다양한 배경벽화가 공존하고 있다. 우선 고분(석실)에는 기둥과 두공을 그려 묘실내부를 실제의 木造建物과 같이 만들고, 다양한 무늬로 장식한 후, 천정에는 해·달 등 천상의 세계를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말하자면 벽에는 주인공의 현실 세계를, 천정에는 내세의 모습을 반영한 하나의 「小宇宙」를 표현하고 있다 . 이 때의 그림 주제는 주인공의 권위와 사치를 반영하는 생활상을 표현한 것으로

"먹고 입고 사는 풍속·무용·음악·씨름·사냥·행렬·전투·공양 등의 장면은 물론, 각 개인의 개성이 두드러지도록 형상되었다".

 와 같이 다양한 주제를 그리고 있으며, 실내장면에는 거실·부엌·마구간 등 각종 건물이 그려져 있다. 동시에 벽화에 나타나는 인물화는 幻想的 人物로 종교와 신화의 세계를 반영하여 '인간과 동물,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표현하고 있다. 즉, 神人으로서 비천·용· 기린·학을 타고 날으는 모습, 牛首人身의 神農氏, 製輪神 등에서 볼 때, 고구려인의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인물화의 경우, 舞踊塚의 接客圖에 나타난 侍者와 侍女들의 모습이나, 安岳 3호분(冬壽墓)에서 보여 준 다양한 수행자들을 거느린 모습, 그리고 藥水里古墳壁畵 주인공의 화려한 행렬에서 고구려귀족사회의 생활상을 살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耿鐵華,· 李淑英이 지적한 고구려귀족의 '사치하고 방탕한 향락생활과 부패하고 몰락한 의식'을 엿보기까지 한다.

 인물화의 경우, 安岳 3호분과 德興里古墳의 주인공 초상화와 같이 주인공의 권위와 위상을 높이기 위해 주인공 주변에 다양한 시종자를 거느리고 있다. 이 때의 주인공은 아담한 실내장식과 화려한 복장, 다양한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원래 고구려의 羅冠은

衣裳服飾 唯王五綵 以白羅爲冠 白皮小帶 其冠及帶咸以金飾 官之貴者 則靑羅爲冠 次以緋羅?二鳥羽 及金銀爲飾

 에서 보듯이 白·靑·緋羅冠이 있었다. 이러한 기록은 벽화에서 잘 나타나 있으며, 여인의 머리모양은 그 신분에 따라 다양한 멋을 부리고 있다. 특히 안악 3호분의 행렬도에는 수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있어 주인공의 권위를 나타내고 있다. 고구려고분벽화에 보여지는 白羅冠은 美川王陵에서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외 몇 개의 나관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고분벽화인물도에서 주목할 것은 다양한 머리모양이다. 남자의 경우, 折風은 주로 새털(鳥羽).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문관의 모자로 생각되는 責은 뿔이 난 것과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여자의 머리모양은 더욱 다양하여 「얹은머리]·[내린머리]· [올린머리] 등으로 멋을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인의 멋과 실용성의 능률을 위해 [머리수건]을 쓰고 있다. 약간 앞으로 젖힌 수건을 살짝 접고 있다. 그러나 벽화에 나타난 인물상에서 가장 화려한 것은 여인의 복식이다. 긴 두루마기의 섶과 선은 점박이 옷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었으며, 특히 다양한 머리(올린머리, 내린머리, 고리모양머리)와 사뿐한 버선발, 그리고 갸름한 얼굴 등이 공통된 특징이다.

 고구려고분벽화에 나타난 여인의 복식이나 외형에서 두드러진 것은 신분에 따라 저고리와 바지의 통이 다르다는 것이다. 지배계급일수록 남녀 모두 바지통이 넓어 坐食階級으로서 비활동적인 생활상을 나타낸 듯하다 . 그리고 남녀 공히 띠(帶)를 매어 멋과 활동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 소매끝·갓·아래단에는 ?을 달고 있다. 특히 안악2호분의 여인은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고구려 복식의 실용성과 장식성은 단정하면서, 아름다움보다 빈번한 외침과 혹한과 같은 자연적인 악조건을 극복하려는 독자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화려하고 번잡한 지배계급의 복식이 민족옷차림의 발전을 저해하였다는 북한학계의 지적은 문화발전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 과오라 하겠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남성상은 왕 이외에는 주로 騎士와 力士가 중심이 된다. 대체로 말을 타고 달리며 狩獵·戰爭을 상징하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특히 무용총의 기사도는 상무적이며 호전적인 고구려인의 기질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용감한 고구려인의 기질을 설명하는 것은 斬?圖(통구12호묘)와 攻城圖(삼실총)에도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 인물상을 대표하는 벽화는 三室塚의 力士圖이다. 가슴보다 굵은 팔뚝에서 패기에 넘치는 힘을 보게 된다. 그러나 둥글고 긴 얼굴, 짙은 눈썹, 그리고 크고 순한 눈을 볼 때 상무적이며 전투적인 고구려인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벽화에 나타난 외모(얼굴)는 결코 무섭지 않다. [삼실총의 力士]나 [안악 3호분의 주인공] 그리고 東山 중턱의 [高句麗石人像]은 결코 무섭게 생기지 않았다. 알맞게 살이 쪘고 갸름하며 여유있는 낙천적 모습이다. 삼실총의 무인상은 갑옷은 입었으나, 얼굴은 통통하고 순하게 생겼다.

 고구려 벽화에서 나타난 특징은 등장인물이나 동물, 그리고 모든 주제가 調和와 均衡을 이룬다는 점이다. 5회분 4·5묘의 [태양신과 월신]이나 [화염문 사이에 낀 남녀상] 등은 색감이나 구도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더구나 무용총의 기사의 경우 白馬(위)와 黑馬(아래)를 각각 타고 서로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그리고 무용도의 경우 무용수의 복장이 서로 상· 하복의 색깔이 엇갈리게 하였다. 즉, 전자가 상의(저고리)가 붉고, 하의(바지)가 흰색이면, 후자는 상의가 흰색이며 하의는 적색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좌우·전후의 대칭적 조화는 接客圖의 탁자 모습에도 보여진다. 이러한 조화와 균형의 미는 인동당초문의 경우에도 예외없이 나타나 있다.

 고구려인물화에서 특기할 또 다른 사항은 노래와 춤을 즐기는 歌舞圖이다. 빈번한 전쟁 속에서 여유와 긴장완화를 노래하는 고구려인의 현실감각은

其民喜歌舞 國中邑落 暮夜男女群聚 相就歌戱

 로 나타나, 음악을 통해 결속과 단합을 꾀하였을 것이다. 가무도에는 각종 악기가 보여지는데, 『隋書』에는 彈箏·臥?糊·琵琶·五弦·笛·笙· 簫·小禑?·腰鼓·貝 등 14종류를 들고 있다. 『三國史記』에도 이와 비슷하게 기록되었으나, 다만 樂工人에 대해서,

  紫色나사의 모자에 새깃(鳥羽)을 달고 노란색의 큰 바지에 붉은 가죽신을 신고 5색의 노끈을 매었다. 춤추는 4인은 상투를 틀고 붉은 수건을 이마에 동이고 금고리로 장식하였다. 2인은 노란색 치마저고리와 붉은 바지를, 2인은 붉은치마저고리와 긴소매, 그리고 검은 가죽신을 신었다. 쌍쌍이 함께 서서 춤을 춘다.

 와 같이 그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벽화가 거의 원형을 잃고 있기 때문에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으나, 다양한 악기는 찾을 수 있다. 특히 삼실총의 阮咸, 5회분 4호묘의 腰鼓 , 무용총의 橫笛(젓대), 강서대묘의 大角(쌍나팔), 집안 17호묘의 角(나팔)과 玄琴 등이 대표적인 악기들이다. 다만 臥?糊와 阮咸에 대해서는 엇갈린 견해가 보여지고 있다 .

 특히 다양한 악기의 모습에서 고구려귀족의 멋과 사치를 엿볼 수 있거니와, 고구려벽화가 전기에는 '인간의 향락'을 후기에는 '천당을 갈망'하는 지적도 생각할 수 있는 견해이다 . 더욱이 彈箏·臥?糊·琵琶·笛·腰鼓 등이 서역이나 중앙아시아계통의 악기라는 사실에서 당시의 활발한 동·서문물교류상을 확인할 수가 있다 . 무엇보다도 長川一號墓壁畵에는 橫吹를 비롯하여 비파·거문고(玄琴)·완함· 大角·長簫 등 여러 가지 악기가 등장하고 있어, 고구려음악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

 그 외 벽화에서 눈에 띠는 것은 동물과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낸 사실이다. 5회분 5호묘의 용을 탄 신선이나, 학을 탄 선인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인의 생활상을 나타낸 미천왕릉의 마구간의 그림은 한 집에 소와 말을 사육하여 경제적 여유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미천왕릉의 우물도와 부엌도 및 마구간 그림은 고구려인의 실제 생활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인물도나 풍속도에서 고구려귀족들이 삶을 즐기는 풍요를 느낄 수 있으며, 특히 [미천왕릉의 부엌도]에는 지붕에 새가 앉아 있어 하나의 신앙세계와도 연결되고 있었다 . 또한 [미천왕릉의 우물도]에서 도르래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물화]는 인물풍속화와 함께 고구려 고분벽화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동물에는 말·소·개·범·사슴·닭 등의 실제동물과 靑龍·白虎·朱雀 등 이른바 四神圖와 같은 환상적 동물이 있었다. 환상동물에는 그 외 [날개와 발을 가진 물고기](안악 1호분), 三足烏와 두꺼비의 日·月神(쌍영총·각저총), 기린도 등과 같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거북과 뱀이 겹겹이 꼬여있는 현무도와 方位神이나 道敎와 관련이 있는 사신도에 있어서 특히 『山海經』의 '鳥人一體'의 신화가 복희·여와의 경우와 같이 東夷의 영웅이라는 견해는 黃帝대신 神農氏나 製輪神을 갖고 있는 고구려의 도교가 지닌 非中原的인 특징에서 또 다른 문화전파로를 상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5?墳4號墓에서 보여주는 해와 달의 신은 세발까마귀와 두꺼비를 머리에 이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결합이라는 고구려벽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동물화에서 볼 수 있는 [날개달린물고기]나 [날개달린사슴](안악1호분)은 고구려인의 환상과 꿈을 반영한 것이며, 다신교적 의식세계를 표방한 것이다. 특히 [날개달린물고기]는 덕홍리고분(동벽)에도 보이고 있는 고구려 동물벽화의 특징의 하나이다. 이것은 天馬(날개달린 말)와 함께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표시한 예라 하겠다. 더구나 [날개달린 물고기]나 [人頭雀身]의 모습은 『山海經』에 보이는 모습이어서 비중원적 요인의 특징에서 고구려 문화의 성격을 찾게 된다.

 그리고 용을 탄 인간과 [牛頭人身 獸身兩頭人](아래는 동물이며 위는 머리 둘을 가진 인간), 그리고 人頭雀身(덕홍리 고분·삼실총)과 같이 인간과 동물의 공생을 통해 다신교적인 고구려인의 의식과 中原文化와 다른 북방 Scythian문화의 영향을 알려준다. 무엇보다도 해와 달의 신의 꼬리는 뱀(용)의 모습을 하고 있어 허리와 다리를 뱀으로 감고 있는 삼실총의 力士塚과 같이 유민족의 깊은 교류상을 엿볼 수 있다. 인간과 동물과의 공생관계는 용이나 뱀만이 아니고 5?墳5號墓에서 보듯이 소와도 연결되며 삼실총에서 보듯이 주작과도 공생하고 있음을 본다. 나아가서 동물 이외에 식물이나 다른 생명체와의 결합도 물론 보여지고 있다.

 동물화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사신도이다. 이는 단순한 환상의 동물이 아니라 方位神내지는 道敎를 포함한 종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선 靑龍은 東方의 守護神으로 네 발을 갖고 있어 외형상으로는 白虎와 비슷하다. 다만 머리 부분에서 차이가 있으며, 청룡은 긴혀를 갖고 있으나, 백호는 큰 눈과 날카로운 이빨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북방수호신인 玄武圖는 거북과 뱀이 뒤엉킨 모습이나, 약수리고분과 삼실총의 것은 양(염소)과 뱀이 어울린 모양을 하고 있다. 더구나 약수리 고분의 현무는 거북 잔등 모양을 하지 않고 있어 특이하다.

 남방수호신인 朱雀는 닭, 봉황, 꿩 등의 결합체로서 큰 날개를 갖고 있다. 따라서 때로는 무용총의 경우와 같이 닭이 주작의 위상을 대변하기도 하고, 5회분 5호묘의 주작은 빨간 큰 날개를 가진 새가 되기도 하였다. 청룡은 비늘모습도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뿔과 혀만이 길게 위로 뻗어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백호는 흰색 바탕에 털무늬가 있어 비늘무늬를 한 청룡과 다르다. 특히 5회분 5호묘의 백호는 부릅뜬 빨간 눈과 날카로운 이빨을 들어낸 큰 입, 그리고 위로 치켜 올라간 귀에 굵은 목을 쳐들고 있다. 어깨밑에는 붉은 나무가지무늬(화염문)의 날개가 붙어 승천의 의미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승천의 의미]는 무용총의 天馬圖에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어깨위로 뻗은 날개는 갈기와 같이 뒤로 뻗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날개 밑에는 빨간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낸 앞발이 곧게 뻗어지고 있으며, 사방에는 화염문으로 둘러 쌓여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청룡과 백호는 크게 훼손되어 있으므로 그 외형의 차이는 [긴 혀와 날카로운 발톱]뿐이다. 즉 청룡은 긴혀로 위로 힘차게 뻗고 있으나 백호는 없다. 그리고 백호는 날카로운 발톱을 갖고 있으나, 청룡은 발가락 속에 발톱이 들어가 있다. 다만, 백호도 날개를 갖고 있어 하늘을 날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표현하고 있다.

 남방수호신인 朱雀은 상상의 새로서 닭이나 봉황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날개와 꼬리가 길고 크다. 따라서 5회분 5호묘에는 유난히 빨간 날개를 가진 새가 주작이 되며, 무용총에는 수탉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玄武는 거북과 뱀이 얽킨 것으로 두 동물이 주둥이를 마주대고 있어, 힘과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교체되고 있으며 박력있는 생동감으로 고구려벽화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상상의 그림이 종교적·계급적 제약과 환상적 동물의 표현으로 회화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남겼다는 북한의 견해는 당시 사상과 의식세계를 외면한 서술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고구려인의 세계관과 우주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물화에서 특기할 것은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적 관련성이다. 태양 속의 까마귀(三足烏)가 결국 예언자로서의 새(朱雀)로 연결되었으며 고구려의 주작과 신라(天馬塚)의 새가 형태나 특징이 거의 같았다. 이러한 양국간의 상사성은 長川一號墓의 天馬(기린)와 天馬塚(경주)의 천마와의 상사성과 함께 고구려문화의 신라전파를 반영한 것이다. 고구려벽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새는 死者를 하늘로 연결하는 使者로의 의미를 갖고 있었으며, 弁辰에서 장례 때 새깃을 함께 묻어 죽은 사람이 하늘로 날아가기를 빈다는 기록을 구체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특히 삼실총에는 두 뱀이 엉켜서 싸우는 그림은 다른 벽화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장식화]에는 식물무늬·기하무늬·雲文·기둥무늬·별자리 등이 있다. 식물무늬는 연꽃무늬와 忍冬文이 특히 많은데, 전자는 무용총과 삼실총에서, 그리고 후자는 江西大墓와 사신총에서 진면목을 볼 수 있다. 기하무늬에는 원형·堪甲·톱날·병풍무늬 등이 있으며, 구름무늬가 크게 눈에 띈다. 기둥무늬는 무용총이나 각저총에서 볼 수 있는 지상건물처럼 보이게 한 것으로 기둥·두공·도리 등을 묘사한 것이다. 별무늬는 무덤 천정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진파리 4호분이나 長川一號墓의 星座圖도 그 일종이다.

 장식화에서 가장 많은 것은 연꽃이다. 대체로 下解放31號의 벽화와 같은 형태를 갖고 있으나, 무덤에 따라 그 모양이 약간 다르다. 이러한 연꽃무늬는 무용총·각저총·麻線溝 1호묘 등에서도 비슷하게 보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연화문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또한 연꽃봉오리 무늬도 무용총의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역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연꽃의 무늬에 따라 그 특징을 시기별로 정리한 孫仁杰의 견해에 따르면, 처음에는 藻井에만 그려 넣었으며, 다음에는 藻井이 꽉차게 장식되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묘실 벽에 장식되었으며, 다음에는 다른 그림속에 분포되었다는 것이다.

 연꽃무늬 중에서 가장 장식적 표현은 만개된 연꽃의 문양이다. [진파리 1호묘]의 연꽃모양이 가장 상징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꽃문양도 다양한 변화를 나타내 마치 와당을 보는 듯하다.

 연화문은 쌍용총이나 연화총의 것을 모델로 하여 약간씩 달랐으니, 이러한 다양한 연화문은 불교의 번창과 귀족들의 생활여유 속에서 화려한 문양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고구려인의 연꽃무늬는 蓮華化生으로 승화된 것이다

 또한 장식무늬에서 큰 비중을 갖고 있는 인동무늬는 여러 가지 모양을 하고 있다. 특히 사신총(집안)의 것은 나뭇잎 가운데 꽃망울이 있는 것과 새모양으로 색깔을 달리하면서 거꾸로 이어지는 것은 그 멋과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다. 그러나 대부분은 같은 무늬를 연결시킨 것이다. 그 외 雲文도 있으며, 무용총과 각저총의 半切蓮花文(博山文)도 있었다. 이러한 장식무늬는 그림의 주인공이나 주제를 부각시키며 공간을 메꾸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 무늬는 대개 천정 고임부분을 장식하였고, 그림과 그림사이를 연결시키는 고리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동당초문의 유행은 중동 및 서역문화와의 밀접한 관련을 찾을 수 있다.

 장식무늬 중에 특이한 것은 星座圖이다. 현실천정 꼭대기에는 대부분 성좌도가 있다. 동쪽에는 태양(3발까마귀)이, 서쪽에는 달(두꺼비)이 있고, 몇 개의 동심원이 그려져 있으며, 거의 北斗七星이 예외없이 나타나있다. 이러한 성좌도는 고구려의 천문학이나 과학의 수준을 반영한 것으로 高松塚에 영향을 주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성좌도의 내용에서 『三國史記』에 보여진 彗星·五緯(五星)·太白·土星 등의 출현은 단순한 天變이 아니라, 정치적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長川一號墓에 있는 성좌도는 북두칠성이 남북으로 교차되어 있으며, 달에는 두꺼비 외에 토끼(?)까지 등장하고 있다.

 그 외 風景畵가 있는 바 주제와 자연을 연결시키거나, 이것은 주제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풍경화에는 산, 나무, 구름 등이 중심이 되었으나 그 형태는 단순화하거나 상징화 또는 도식화하였다. 그러나 풍경화는 벽화의 주제도로서는 존재된 것은 흔하지는 않았으며 주로 수렵도의 배경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북한의 경우 다양한 벽화의 형태에 따라 「사회풍속화」,「도안화」, 그리고「神靈畵」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사회풍속화는 고구려 전기의 고분벽화로 宴樂·出行· 禮輦·狩獵·戰爭(攻城)·百戱·倉庫·부엌 등이 있으며, 도안화는 중기무덤의 고분벽화로 전통적 도안(기둥·나무·구름·비천·용)과 불교식 도안(연화)이 있었다. 그리고 신령화는 고구려 후기의 고분벽화로 사신묘·강서대묘·5회분(4·5호) 등의 사신도가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인동문과 용과 거북의 엉킨 모습, 구름과 용을 탄 신선 등 고구려고분벽화는 그 형태와 내용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고구려벽화는 당시의 사회생활이나 행동양식을 반영하기 때문에, 고구려인들의 실제 삶을 나타내고 있다. 벽화마다 나타난 宴會圖와 接客圖는 귀족들의 사치와 여유를 나타내고 있었고, 狩獵圖는 단순한 사냥이 아니라, 군사훈련과 인물발탁의 과정이 있다. 특히 고구려인의 귀족적 취미는 무용총 벽화에 나타난 수렵도의 화살촉에서 그 상징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아니라, 석류모양을 하고 있어, 동물(사슴, 호랑이)을 생포하려는 목적인 것이다. 동물을 기절·마취시켜 생포하여 집안에 가두어 즐기려는 취미의 모습이 역력하였다. 이러한 鳴鏑은 목표물을 단순히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맹수를 쫓아내서 작은 동물(사슴·토끼)을 잡는 방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벽화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인의 尙武的 氣風과 樂天的인 기질을 잘 알 수가 있다. 무영총에서 나타난 무사들의 사냥도나 삼실총의 역사들은 팔뚝이 가슴의 두배나 되고 있어 힘과 패기에 찬 고구려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무용총이나 각저총의 벽화에서 보여지는 연회도에서는 으레 화려한 실내장식과 무덤주인공에게 따른 시종자들의 그림은 고구려 귀족들의 생활상을 반영하고 있다. 동시에 여러 동물이 뒤엉킨 사신도의 환상적 표현은 내세에 대한 강렬한 투영을 엿보게 하며, 인간과 동물, 인간과 신과의 조화에서 고구려의 종교관과 사생관을 보여준다.

 더구나 벽화에서 보여지는 화려한 구도와 다양한 색상은 온도·채광·습도 등을 조절한 과학적 뒷받침에서 가능한 것임은 사실이다. 또한 고분벽화에서 고구려여인들의 「점박이」 옷이나 瓔과 折風과 같은 모자의 풍속은 어느 벽화나 비슷하게 나타나 있어 고구려인들의 전통적 습관으로 보인다. 특히 무용총벽화의 걸상과 평상생활이나, 마선구 1호묘에서 나타난 다락식 창고는 ?京의 원형을 찾게 해 준다.

 고구려벽화에는 당시 음악·무용·교예 등 예술의 발달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현악기·관악기·타악기 등 21종의 악기를 확인할 수 있다. 우선 王山岳의 거문고〔玄琴〕는 4현금(무용총)과 6현금(미천왕릉)에서 볼 수 있으며, 비파모양을 한 阮咸은 삼실총과 미천왕릉에서 찾을 수 있다. 관악기로는 나팔·저·소 등이 있으며, 타악기로는 북과 장고가 있다. 이러한 다양한 악기와 연주장면은 고구려인의 낙천적인 생활상을 엿보게 한다. 그 외 높은 나무다리 위에서 춤을 추는 교예도 있어 춤의 다양성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장식무늬의 발달은 진파리 1호분이나 흥륜사(경주)출토 와당에서 보듯이 고구려의 문양이 통일신라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고구려는 그 문화를 濟·羅에 전파함으로써 민족예술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나아가서 벽화의 인물이 동물뿐 아니라, 식물과도 공생하였으며 불교가 양자를 연결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長川一號墓의 蓮華化生은 만물태생의 의미였으며, 그후 통일신라로 연결된 것이다. 특히 이러한 연화화생에 등장하는 장식모양은 연화문 외에도 당초문, 보주연화문, 화염문 등으로 나타나지만 궁극적으로는 연화화생의 바탕에서 형성된 불교미술의 발전이라 하겠다.

 이러한 고구려의 벽화에 대해서 북한학계는 당시 사회생활을 반영한 것으로 힘과 미의 조화로서 생동하는 사실적 표현과 선명한 색감, 그리고 명암의 능숙한 이용성을 특징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점차 환상적 동물의 등장에 따른 실제인물 풍속도가 주류를 이루어 종교가 회화발전에 해독을 끼쳤다고 보았다.

 고구려고분벽화에서 보여진 이러한 불교적 색채외에도, 상상의 동물이나 날개달린 인간 등 특이한 모습이 눈에 띤다. 百獸의 으뜸으로서 麒麟 이외에 鳳凰·龍·거북 등 靈獸와 朱雀과 玄武도 결국은 상상의 동물이다. 특히 德興里古墳에서 보여진 「두사람 얼굴을 가진 짐승」(地軸;一身兩頭), 「날개달린 인간」과 安岳1號墳의 「날개달린 물고기」그리고 5회분 5호묘의 白虎도 빨간 날개를 갖고 있다. 결국 이러한 모습은 하늘로 비상하고 싶은 인간의 희망과 하늘(사후)세계를 넘나드는 인간의 욕구〔또는 소원〕를 나타냈다고 생각된다.

 또한 고분벽화 곳곳에서 산견되는 기린은 조상들의 영혼과 동일시로 神格化되어 실재의 동물(사슴·말)에다 하나의 뿔과 날개를 가미하여 초자연적인 靈物로 승화되었다. 기린은 5행사상의 화신이 되었으며, 사후세계의 인도자내지는 수호자로 받들면서 조선시대까지 숭배되었다. 더구나 기린은 德과 仁의 상징으로서, 사슴·말·소 등과 결합된 동물이었다. 따라서 무용총 서남천정은 꼬리가 둥근(짧은) 사슴형이고, 무용총 북동천정은 말형이다. 그러나 장천 1호묘의 그것은 말· 사슴의 혼합형이어서, 기린의 형태가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漢代의 기린이 사슴형이었으나, 남북조에 이르러 말·사슴형으로 바뀐 사실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동시에 고구려에 있어서 말의 중요성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또한 기린은 神氣를 내뿜어 내는 특징을 나타내며, 후한시대 이후 不死世界의 瑞獸에 포함되어 중국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다만 기린 역시 하늘을 날으는 날개를 갖고 있어 천마의 뜻을 지니고 있다. 한편 魯人面鳥身·獸頭人身·飛魚 등 瑞獸의 기원과 신선설화의 발생을 중국 동북방의 샤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발해만 지역으로 상정하는 주장은, 官房道敎와 다른 동북아시아의 특색으로서 고구려문화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 河南省의 學庄村 鄧縣의 彩色畵像?墓의 벽화와 德興里古墳壁畵를 비교할 때 상호연관을 찾을 수 있다. 더구나 襄陽賈家?의 畵像?墓에 보이는 「주작의 몸에 인간의 얼굴을 한」모습은 하늘을 날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반영한 것이며, 이러한 人頭鳥身像 역시 상호관련이 있어 고구려는 남북조뿐 아니라, 서역까지도 문물교류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덕흥리고분을 다각적으로 검토한 南秀雄의 주장에 잘 반영되어 있다.

 특히 神鳥토템이나 鳥人一體의 신화에 보여지는 벽화는 『山海經』의 내용에서와 같이 동이계통의 신화로 고구려의 벽화에 이르러 새로운 활로를 맞게 되었다고 하겠다. 우리는 『山海經』의 신화가 동이계 신화 특히, 고구려 신화와의 관련 속에서 고구려 문화의 특성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구려 벽화의 성립시기 「3세기 중엽」과 동이계 도교신화가 성립된 시점인 「2세기 후반」을 고려할 때 두 문화가 한 공간 내에 동시에 표출된 사실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벽화는 단순한 신화의 단계만이 아니라 예술의 차원을 넘어 종교와 과학과의 결합이며, 고구려인의 삶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벽화 속에서는 상무적이며 진취적인 고구려인의 특징이 나타나 있는가 하면, 노래와 춤을 통한 현실적인 낙천생활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여인의 화사한 복식에서 여유와 멋, 그리고 풍요의 일면도 볼 수 있으며, 특히 회화의 기교에서 보여지는 조화와 균형의 미는 무용총(수렵도)에서 보듯이 말의 색깔(흑과 백), 사냥하는 인물의 방향에까지 반영되어 있다. 나아가서 서역과의 교류상 및 제·라 그리고 일본과의 교류가 빈번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기린상에서는 천마총(경주)과 무용총의 모습, 성좌도의 내용(장천 1호묘와 다가마스총)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다만 고구려 벽화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山海經』의 내용과 도교와의 관계이다. 덕흥리 고분에서 보여진 萬歲之象과 『山海經』鳧?와는 여러 모로 비슷하다. 또한 5회분 4호묘의 용을 탄 신선은 『列仙圖』의 王子 喬와의 상사성은 양자간의 관련을 믿게 해 준다. 더구나 덕흥리고분이나 삼실총에 등장하는 말·사슴·주작·신선 등은 거의가 『山海經』에서 나타나는 모습과 너무 닮았다. 따라서 『산해경』에 나타난 동이계 신화와 고구려 신화의 관계를 통해 고구려 문화의 성격을 재조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고구려 문화가 中原文化와는 그 기원과 특징을 달리하는 것으로 우리 민족문화의 성격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고구려 고분 ( 高句麗 古墳 )

 

 압록강 대안인 통구 일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강 유역 일대, 황해도 안악 지방에 이르기까지 분포되어 있다. 이 무덤들은 대체로 돌을 쌓고 벽면에 곱게 회를 바른 다음 벽화를 그렸는데, 부분적으로는 화강석 혹은 대리석으로 벽을 만들고 돌로 된 벽면에 직접 그린 것들도 있다. 벽화는 무덤의 복도(연도), 문, 벽, 천장 등 여러 곳에 그려져 있는데 천장에는 주로 해, 달, 별, 성좌 등 천체에 대한 것이거나 혹은 연꽃무늬 등을 그리고 도리, 벽 부분에는 여러 가지 무늬, 생활 풍속과 가상적인 동물-방위신인 사신 등을 그렸으며 복도문 어귀에는 수호신 등을 그리기도 하였다. 고구려 지배층은 영혼 불멸을 믿었고 살아서의 영광을 죽어서도 지속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이 그림들 속에는 고구려 지배층의 생활 외에도 민중의 삶의 모습이 배어 있는 경우가 많아 당시의 생활을 반영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인물을 그릴 때에도 주인공 귀족은 매우 크게, 시종들은 매우 작게 그리는 등 신분상의 격차를 반영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1. 생활 풍속을 주로 그린 것, 2. 생활 풍속과 사신도를 곁들인 것, 3. 사신도를 주로 그린 것으로 대별할 수 있다. 생활 풍속을 주로 그린 것으로 안악 2 3호분, 각저총, 무용총 등이 있고, 사신도를 함께 그린 것으로는 쌍영총, 대안리 1호분이 있다. 사신도를 함께 그린 것으로는 강서대 중 소묘를 들 수 있다. 4세기부터 7세기까지 그려진 고구려 고분 벽화는 대체로 생활 풍속 위주의 그림에서 사신도 위주의 그림으로 변천하여 갔다.

 고구려 영역 내의 모든 지역에 걸쳐 조성되었을 터이지만, 초기의 중심지인 압록강 유역과 후기의 중심지인 대동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특히 5세기 초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던 중국 지안[集安] 일대에는 수만기의 고구려고분이 곳곳에 널려 있다. 고구려고분은 외형상의 특징에 의해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돌로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積石塚]이고, 다른 하나는 흙으로 덮은 봉토무덤이다. 양자 중 전자가 먼저 나타난 무덤양식으로서 대략 BC 3∼2세기경부터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며, 후자는 AD 4세기경에 비로소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돌무지무덤에 대해 살펴보면, 주로 압록강과 그 지류인 혼강(渾江), 독로강(禿魯江) 유역에 밀집되어 있으며,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나왔으나 대체로 랴오둥[遼東]반도에 분포하는 고조선시기의 돌무지무덤에서 찾는 견해가 유력하다. 고구려 돌무지무덤은 축조방식이나 용재(用材)의 차이에 의해 다양한 세부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기단(基壇)의 유무를 기준으로 삼아 무기단 돌무지무덤과 기단식 돌무지무덤으로 대별하고 있으며, 후자는 다시 외형상의 특징을 통해 단순기단식과 계단식으로 구분되고, 또 계단식의 경우 내부 매장주체시설의 차이에 따라 돌덧널무덤[石槨墓]과 돌방무덤[石室墓]으로 세분된다. 이러한 무덤양식들은 돌무지무덤의 시기적인 변화를 반영함과 동시에, 한편으로 같은 시기에 있어서는 신분에 따른 무덤양식의 차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가장 이른 시기에 출현한 무기단 돌무지무덤은 강가의 모래바닥에 냇돌을 사각형으로 깐 뒤 그 위에 관을 놓고 다시 냇돌을 덮은 간단한 형식의 것으로, 고구려 국가의 성립 이전인 BC 3세기경부터 조성되었다고 여겨진다. 한편 땅을 고른 후 그 위에 넙적한 판석 등으로 기단을 마련한 것이 특징인 기단식 돌무지무덤은 AD 1∼2세기경에 출현한 것으로 파악되며, 강가뿐만 아니라 산기슭에도 만들어져 있고, 이에 따라 무덤축조의 재료로서 냇돌 외에 모난 산돌도 많이 이용되었다. 그리고 계단식 돌무지무덤은 3∼5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기단 위에 덧널의 구획을 잡고서 돌로 곽벽을 쌓아 올린 뒤, 그 벽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덧널의 둘레에 다시 돌을 쌓아 마치 새로운 단을 만든 것처럼 해놓고, 덧널의 윗부분을 몇 겹의 돌로 덮은 것이다. 이로 인해 무덤의 테두리를 이루는 기단 즉 첫째단과 덧널의 벽체를 이루는 둘째단, 덧널의 상층부를 이루는 셋째단이 외형상 계단 모양을 취하게 된다. 장군총과 같은 초대형 계단식 돌무지무덤에서는 계단의 숫자가 3단이 아니라 7단까지 이르기도 하며, 이 경우 시체가 묻히는 장소는 둘째단이 아니라 정상부에 가까운 곳에 조성된다. 내부구조의 측면에서 볼 때, 고구려 돌무지무덤은 거의 대부분이 매장주체부를 지하나 지면에 바로 두지 않고 돌무지부 중에 마련하는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매장주체시설로는 흔히 돌덧널[石槨]이 설치되는데, 원래는 시체를 위로부터 묻는 구덩식[穴式]이 기본이었으나, 계단식 돌무지무덤 단계에 이르면 굴식[橫穴式]에서 볼 수 있는 널길[羨道]의 흔적이 나타나기도 하며, 장군총이나 태왕묘(太王墓) 등의 대형 계단식 돌무지무덤에서는 실제로 연도가 딸린 굴식의 돌방이 조성되어 있다. 한편 축조 재료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주로 냇돌이나 산돌 등의 막돌을 이용한 것이 많았지만, 계단식 돌무지무덤 단계에 이르면 정성들여 다듬은 절석(切石)을 사용한 것이 출현한다. 이러한 절석 계단식 돌무지무덤은 무덤축조에 들인 공력의 측면에서 다른 무덤양식을 압도하며 장군총의 예에서 보듯이 초대형인 경우가 많아, 대체로 왕이나 최고 귀족층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상에서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다양한 무덤양식과 그 특징을 살펴보았는데, 결국 돌무지무덤 축조방식의 발전과 분화는 신분에 따른 차별이 무덤양식에도 엄격하게 가해지는 모습, 즉 고구려 사회내의 계층분화가 심화되는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봉토무덤은 대체로 4세기경 평양지역에서 먼저 출현하였으나,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5세기 전반 이후에는 지안지역과 평양지역을 가릴 것 없이 고구려 지배층의 주된 묘제가 된 고구려 후기의 대표적 무덤양식이다. 봉토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매장주체시설로서 지상이나 반지하에 연도가 딸린 돌방[石室]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이 아닌 흙을 덮었다는 점인데, 이러한 축조방식은 재래의 돌무지무덤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고구려에서 봉토무덤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북한학계의 경우 돌무지무덤으로부터 자체 발전하였다는 주장이 정설처럼 되어 있으나, 자체 발전으로만 보기에는 묘제의 변화상이 너무 심해, 랴오둥지방의 중국 한(漢)나라 돌방무덤이나 낙랑의 벽돌무덤의 영향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히 4세기 중엽 고구려의 장악하에 있던 평양 부근에서 안악(安岳) 3호분과 같이 중국적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는 벽화무덤이 봉토돌방무덤으로 축조되고 있었던 사실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봉토무덤은 4세기 이후 1세기 이상 돌무지무덤과 공존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다양한 무덤양식을 파생시키는데, 예컨대 재래의 돌무지무덤에서와 같이 돌로 기단을 두른 후 흙으로 덮은 봉토돌방무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봉토무덤처럼 돌방을 지상에 설치하고 돌을 덮은 돌무지무덤, 즉 소위 봉석돌방무덤[封石石室墓]이 나타나기도 하였고, 완전한 봉토가 아닌 토석혼봉(土石混封)의 돌방무덤도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묘제상의 혼효는 봉토돌방무덤의 아이디어가 고구려 사회에서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과도기적으로 나타난 것이고, 고구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봉토돌방무덤 일색이 되고 만다. 봉토무덤은 규모의 대소, 널방[墓室]의 숫자, 널방의 축조재료, 널방천장의 조성방식, 벽화의 유무 등을 기준으로 다양하게 구분되고 있다. 여기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봉토무덤의 발전과정도 나타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피장자의 신분에 따른 무덤양식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다.

 서술의 편의상 소형분과 대형분으로 대별하여 양자의 특색을 살펴보면, 먼저 소형분의 경우 정사각형 혹은 직사각형 평면을 가진 외방[單室]을 반지하에 설치한 것이 대부분인데, 흔히 할석(割石)이나 괴석(塊石)을 여러 겹 포개쌓거나 다듬지 않은 거친 판석을 세워 벽면을 조성하였다. 천장조성방식으로는 널방 상부에 1장 또는 수 장의 큰 판석을 그냥 얹어놓는 평천장식이 많이 쓰였고, 벽화와 같은 내부장식은 거의 없다. 한편 대형분은 널방을 대규모의 외방으로 조성한 것이 많지만, 시기가 올라가는 것 중에는 전후 2방 구조 혹은 앞방[前室] 좌우에 옆방[側室]이 붙는 구조를 취하는 경우가 있고, 3방구조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널방의 벽면은 할석 등을 쌓은 후 회를 발라 다듬거나, 곱게 간 장대석(長臺石)을 이용하였으며, 여기에 벽화를 그려 장식한 경우가 많다. 옆방의 천장은 평천장도 많지만, 벽면이 위로 올라가면서 안으로 기울어 천장의 폭이 좁혀지는 궁륭식 천장과 네 벽의 상부 중앙에서 이웃한 벽의 상부 중앙으로 연결되는 삼각형의 평면 공간을 커다란 판석 등으로 덮어 네 모서리를 계속 줄여나가는 모줄임[抹角藻井]천장 등도 유행하였다. 또 대형분에는 널방 내에 널받침[棺臺]이 갖추어진 것이 상당수 있고, 널방 바닥에 배수시설이 만들어진 것이 많으며, 왕릉급의 초대형분의 경우 무덤 둘레에 잘 다듬은 돌을 깔아 묘역을 조성한 것들도 있다. 이상에서 고구려고분의 변천과정을 개관하였는데, 총괄해 볼 때 고구려고분은 다음과 같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돌무지무덤과 봉토무덤을 막론하고 외형상 사각방대형(四角方臺形) 혹은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을 취한다는 점인데, 이는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나 가야의 구덩식 돌덧널무덤[穴式石槨墳]이 대부분 원형의 봉분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크게 차이나는 것이다. 그리고 매장주체부가 대부분 지상에 위치한다는 것으로, 이 점은 돌덧널이나 돌방이 고분의 정상부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돌무지무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신라와 가야 고분에서는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을 제외하고는 매장주체시설이 대부분 땅을 파고 지하에 마련된다. 이러한 특색과 함께 고구려고분에서 가장 큰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벽화를 그린 무덤이 대단히 많다는 점이다.

 [지안현 지역 고구려 고분군] 현재까지 발견된 벽화분은 90여 기에 이르는데, 평양 일원에서 65기, 지안 일대에서 23기가 확인되었다. 이 중 돌무지무덤인 지안 우산하(禹山下) 41호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봉토돌방무덤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에서의 벽화분의 출현은 대략 4세기 무렵임을 추측 할 수 있으며, 아울러 벽화의 아이디어는 봉토무덤의 아이디어와 함께 랴오둥 지방의 벽화가 그려진 중국 돌방무덤에서 취해 온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벽화의 내용은 시기별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초기에는 묘주(墓主)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행렬도·배례도(拜禮圖) 등 그의 생전의 생활상을 주제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4세기 후반의 안악 3호분, 5세기 초의 덕흥리(德興里)고분 등이 그 대표적인 예로서, 여기에는 사후에도 생전에서와 같은 부귀와 영화를 계속 누리기를 염원하는 계세사상(繼世思想)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 5세기 이후 고구려 지배층에 불교가 파급됨에 따라서 불교적 내세관이 벽화에도 나타났는데,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연화화생도(蓮華化生圖)나 예불도(禮佛圖)가 인물풍속도와 함께 그려지거나 아예 인물풍속도 없이 연꽃무늬만이 사방에 그려지기도 하였다. 5세기 전반의 무용총, 5세기 중엽의 장천(長川) 1호분, 산연화총(散蓮華塚)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어 6세기 이후에는 도교사상의 확산으로 청룡·백호·주작·현무가 그려진 사신도(四神圖)가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고구려가 멸망하는 7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진파리 1호분 청룡도] 중화군 진파리(眞坡里) 1호분, 지안 사신총(四神塚)을 비롯한 많은 고구려 후기의 봉토무덤이 사신도를 벽화의 주제로 하였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이처럼 고구려 사회의 사상적 변화상이 잘 표현되어 있어, 문헌사료가 부족한 고구려사 연구에 귀중한 연구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한편, 고구려의 벽화무덤은 남쪽의 백제·신라·가야에도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미쳐서 공주의 송산리(宋山里) 6호분이나 부여의 능산리(陵山里) 1호분, 순흥 어숙지술간묘(於宿知述干墓) 및 읍내리(邑內里) 벽화고분, 고령 고아동(古衙洞) 벽화고분 등에서도 연화문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를 통해 본 사회생활의 변천

 

1). 문화의 변천
삼국 중에서 특히 고구려에만 고분 벽화가 많다. 이것은 무덤의 형식에 의한 것이다. 고구려는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돌로 현실을 만들고 현실의 벽과 천장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무덤은 거의 돌무지 무덤(적석총)으로 벽화를 그릴 곳이 없었다.
전기와 중기의 벽화에는 가무와 수렵 장면이 많으며 특히 중기 벽화에서는 창고와 갑옷, 투구, 무기 그림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은 4세기 이후 광개토대왕 시대 때 영토 확장으로 물자가 풍부해지고 잉여 생산물이 생겼기 떄문이다.
그러나 후기에는 수렵 장면이 드물다. 이것은 수렵이 농업 생산의 부족을 메울 필요가 없어졌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고구려 중기 이후 농업의 계속적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산수화의 발전 과정.
중기 무용총의 수렵도와 각저총의 씨름도에서는 손바닥 위에 주먹밥을 올려 놓은 듯한 나무와 굴곡의 파상선으로 산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으나,후기 진파리 1호 분묘의 산악도에서는 최초로 표현된 산의 주름을 볼 수 있으며 수목 현무도에서는 소나무 줄기와 가지의 곡선 등, 여태까지는 볼 수 없었던 가장 세련된 기법을 감상할 수 있다.


3). 사회 형태와 경제.

(1). 사회 형태
노예 사회 단계임을 알 수 있다. 주인의 옆에 남녀 하인들이 서 있고 때로는 무릎을 꿇고 있다. 또 주인과 하인의 크기를 다르게 해서 그렸다.

(2). 어로와 수렵.
수렵도가 많다. 집안(集安) 벽화 속의 36.8%가 수렵도이다. 이것으로 수렵이 고구려인의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음을 알 수 있다.

(3). 농업.
각저총과 무용총에서 소가 마차를 끄는 장면이 있는데 우경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선구 1호 분에는 높고 큰 창고(부경)가 있는데 당시 양식 저장량이 많았음을 알려준다. 동시에 이것은 귀족 소유의 창고임을 알려 주는데 일반 농가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기 떄문이다.

(4). 수공업 : 농업 생산에서 발전 했음을 알 수 있다.
①. 건축: 고성, 궁전, 주택 그림이 많다. 대부분 귀족 주택이며 정자, 주방, 마굿간 등의 부속 건물이 딸려 있다.
②. 야금술: 야금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철촉, 금장식, 도금 마구 등으로 뛰어난 자치적 야금술과 금속 제조업 기술을 가졌었음을 알 수 있다.
③. 토기 제작: 각저총, 무용총, 삼실묘의 벽화에 그려진 그릇의 색깔과 조형으로 질그릇임이 알려졌다. 그러나 이것은 천민의 일이므로 벽화로는 남지 않았다.
④.목제품: 목가구가 많고 나무 침상과 나무 마차 바퀴도 있다.
⑤. 방직: 긴치마, 꽃무늬 저고리, 긴 바지 등이 있고 다채로운 문양이 있다.

 

덕흥리고분 견우와 직녀

 덕흥리 고분의 천정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무덤을 죽어서 사는 공간으로 인식했다. 또 무덤의 벽과 평면은 땅으로, 천정은 하늘로 생각하여 벽에는 생전의 사는 모습을, 천정에는 천상세계를 그렸다. 그래서 죽어서 천상세계에 가려면 은하수를 건너야 하고 그러자면 견우와 직녀를 만난다고 생각했다. 이 신화는 농경사회의 일반적인 것으로 고구려의 특수한 것은 아니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고삐를 쥐고 소를 끄는 견우상, 그 뒤쪽에는 개를 데리고 서있는 직녀상이 그려져 있다. 견우지상, 직녀지상이라는 먹글이 씌여져 있다. 견우의 약간 일그러진 얼굴도 재미있고, 소의 얼굴이라든가 걸음걸이에 애교가 있어 해학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덕흥리고분 묘주도 및 13태수 하례도

 덕흥리 고분은 안악 3호분(동수묘) 다음으로 연대가 확실한 고분이다. 평양 서북방 대안시 덕흥리에 있다. 묵서명에 의해 오늘의 북경 지방인 신도현 출신으로 유주자사를 지냈고 불교신도이며 고구려에 와서 국소대형의 관작을 받고 호태왕(好太王) 영락(永樂) 18년(408)에 별세한 사람의 무덤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고분의 경우도 벽화의 내용은 안악 3호분과 같으나 견우직녀, 수렵도 등이 있다. 이 사진은 주인공에게 그 예하의 13군 태수가 하례하는 장면이다. 주인공은 화려한 장방 안 평상 위에 평좌를 틀고 앉아 있다.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갈색의 맞섶 겉옷에 넓은 검은 띠를 맸으며 오른손에는 검은 털 부채를 쥐고 왼손은 띠 앞까지 올리고 있다. 겉옷 밑에는 담녹색 옷을 입은 것이 보인다. 얼굴은 넓고 둥그스름하고 길고 진한 눈썹은 약간 높으며 가느다란 눈매에 약간 긴 콧등, 그리고 팔자형 수염을 잘 다듬고 턱수염을 길러 위풍당당한 풍모를 하고 있다.

 

수산리고분 교예도

 중앙에서 왼쪽에는 시종이 받쳐든 대가 굽은 박쥐 모양의 검은 양산 밑에 서서 교예를 구경하는 주인공이 있다. 주인공은 검은색 관을 쓰고 깃, 끝동, 단에 검은 선을 붙인 누런 겉옷을 입었으며 팔자 수염, 턱수염을 기른 둥근 얼굴에 미소를 짓고 교예를 구경하고 있다. 그런 주인공 바로 뒤에는 시종이 양산을 받쳐들고 있으며 그 뒤에는 검은 긴 저고리에 점무늬 바지를 입은 시녀가 뒤에서 받쳐든 검은 양산 밑에 서서 얼굴에 역시 미소를 지으면서 구경하는 주인공 부인이 그려있다. 부인은 큰 머리를 하고 풍만한 둥근 얼굴에 붉은 점을 찍어서 화장을 하였으며, 옷깃, 도련, 소매 끝에 무늬를 수놓은 붉은 선을 단 검은 긴 저고리를 입고 그 밑에 색동치마를 입고 있다.

 

수산리고분 주인과 하녀

 수산리 고분은 섬세하고 우수한 회화기법으로 유명하다. 평남 강서군 수산면 수산리에 위치하며 남으로 길게 뻗어내린 산줄기가 끝나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현실 서벽 윗단에 주인공 부부가 시종, 시녀를 거느리고 교예를 구경하고 있다. 교예도는 제한된 화면에서 많은 장면을 보여주기 위하여 위에는 긴 나무에서 다리 재주를 부리는 사람을 그렸고 그 밑에 다섯개의 둥근 고리와 끝에 둥근 고리가 달린 3개의 막대기를 엇바꾸어 던지는 사람들을 그렸다. 주인공이 미소짓고 흥겹게 구경하는 장면이나 세 교예사가 열심히 곡예하는 자태 그 모두가 움직이는 듯이 표현되고 있다. 교예를 부리는 사람이 시종과 같은 크기로 그려진 것을 보니 그들의 신분을 알 만하다.

 

강서대묘 현무도

 우리 나라 고분 벽화에 사신도가 그려진 것이 여럿 있지만 그 중 가장 힘차고 생동감을 주며 세련된 것으로 강서대묘의 것을 꼽는다(평남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 소재). 벽화는 돌벽에 직접 그렸는데, 현실의 남벽 입구 둘레에는 인동 초롱 무늬를 장식했고 좌우의 좁은 벽에는 봉황을 그려 주작을 나타냈다. 동벽에는 청룡, 서벽에는 백호, 북벽에는 현무를 그렸다. 사신 신앙은 대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서 비롯되며, 한대에 와서는 군진의 방위와 기치에 이용했다가 점차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한대의 거울과 기와류에 사신이 조각되었다. 그러나 사신사상이 가장 적극적으로 신앙된 것은 고구려에서이다. 특히 고구려 후기의 고분 벽화는 사신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북쪽을 지키는 방위신 현무는 둥근 원으로 능숙하게 그렸는데 달리는 거북의 몸뚱이를 뱀이 미끄러질 듯이 가볍게 감고 있고 거북은 머리를 뒤로 돌려 등 위에서 뱀과 마주보고 서로 물려고 하고 있다. 부드럽고 율동적인 선조로 처리하였으나 오히려 힘차게 보이니 비록 야생동물적인 측면을 두드러지게 강조하지는 않았으나 몇 배나 더 용맹스러우며 신령스러워 보인다.

 

강서중묘 현무도

 주작(朱雀)은 두 날개를 부채 모양같이 펼치고 입에는 빨간 둥근 구슬(여의주)를 물었으며, 갈색, 붉은 색, 연한 갈색으로 채색된 긴 꼬리를 힘있게 위로 올렸다. 특히 힘있는 가는먹선으로 섬세하게 그린 몸털은 실물을 방불케 하며 돌벽에 그린 것이 아니라 원숙한 솜씨로 종이나 비단에 그린 것같은 착각마저 일으키게 한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고 살아 있는 듯하다.

 

사신총북벽 현무도

 고구려 전성기의 기운찬 모습의 현무도이다. 사신총은 통구에 있는 석실무덤으로 분구의 밑변 한변이 27m, 높이 8m의 고분이다. 이 현무도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현무도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것으로 평가되는 그림이다.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거북과 뱀의 모습을 섬세한 선으로 매우 실감 있게 그렸다. 색의 배합이 매우 뛰어나다.

 

고구려 시대 미술

 

 고구려는 19대 광개토대왕 시대에 만주 통구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였다. 광대한 지리적 풍토와 외세의 영향을 받아 길러진 늠름하고도 분방하며 용맹스러운 고구려인의 기상은 그대로 미술에 반영되어 어느 나라의 미술보다도 힘과 정열이 넘쳤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의 미술은 옛 수도였던 국내성과 평양성 부근에 있는 고분, 불교 조각, 금속공예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 예술의 특징은 와당(瓦當)의 귀신상(鬼神像)과 사신도(四神圖)의 벽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힘과 정열이 넘친다. 특히 벽화는 고분(古墳:굴식돌방무덤)에서 그 대표적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무용총·수렵총·각저총(角抵塚) 등의 초기 벽화는 고졸(古拙)하고, 감신총(龕神塚) 등 중기의 그림은 섬세하며 사실적(寫實的)이고, 사신총(四神塚) 등 후기 벽화는 웅대하며 건실하다. 강서고분(江西古墳)에 그려진 사신도(四神圖)는 벽화 중에서 최우수 작품으로 흑·백·청·주홍·갈색 등으로 빛깔의 조화미는 물론, 힘과 패기가 넘치며, 쌍영총(雙楹塚)의 기마상(騎馬像)·남녀입상(男女立像), 30여 인물행렬도와 풍속도는 당시의 풍속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고구려의 고분에는 돌무지 무덤과 굴식 돌방 무덤이 있다. 초기에는 주로 돌무지 무덤이 만들어졌으나 점차 굴식 돌방 무덤이 주류를 이루었다.
돌무지 무덤으로는 장군총이 유명한데, 계단식으로 화강암을 7층으로 쌓아올렸다. 맨 아래층의 길이는 약30m이고, 높이는 약13m이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면서 각 층의 길이와 높이를 줄여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굴식 돌방 무덤 내부에는 벽화가 있기도 하여 당시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굴식 돌방 무덤은 흙으로 덮은 봉토 내부에 굴식 돌방이 있는 것으로 쌍영총, 무용총, 강서 고분등이 유명하다.

 여기에는 풍속도, 수렵도, 무용도, 사신도등이 그려져 있어 고구려인의 강건하고 남성적인 기질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무용총의 수렵도는 이러한 사실을 잘 입증해 준다. 말을 달리며 활을 겨누는 기마인물들이나 달아나는 짐승들이 모두 격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전에 비해 구성이나 묘사법이 훨씬 합리적이며 색채도 훨씬 선명해지게 되었다. 그림의 주제는 주로 영생사상을 반영해 주는 죽은 사람의 생활기록이 가장 많다. 선이 굵고 강직하며 주제를 상징적이고 박력있게 다루어 대담하고 웅혼한 고구려인의 대륙적 기상을 보여준다. 고구려의 회화는 표현 수법이 추상화되고, 다채로우며, 리드미컬한 묘사를 보여줌으로써 독자적인 미술이 형성되어 담징, 가서일(加西溢)등을 통해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 담징은 일본에 건너가 채색, 지묵(紙墨)의 방법을 전해 주었고, 법륭사의 벽화를 그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구려 미술의 특색은 회화 못지않게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을 비롯하여 불상들의 나부끼는 옷자락이나 화염문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은 두꺼운 법의를 입어 몸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신비하면서도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다. 공예는 통구와 평양 지방에서 나온 기와와 벽돌에 새겨진 장식 무늬에서 힘찬 고구려인의 기상과 솜씨를 알 수 있다.

 

【회화】

 

 무덤의 내부에 그린 고분벽화는 회를 바른 벽면 또는 돌벽에 그렸는데, 그 내용은 ① 인물화, ② 풍속화, ③ 동식물화와 산수화, ④ 신비화, ⑤ 천체도, ⑥ 건축 의장, ⑦ 장식무늬 등 다양하다. 이를 주제에 따라 몇 개의 유형으로 나누면, ① 인물풍속도, ② 인물풍속도 및 사신도(四神圖), ③ 장식무늬, ④ 장식무늬 및 사신도, ⑤ 사신도의 5가지로 분류된다. 그러나 장식무늬는 모든 벽화에 그려져 있으므로 부차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 다시 나누면 ① 인물풍속도, ② 인물풍속도 및 사신도, ③ 사신도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인물풍속도 : 주인공의 생전의 실내생활을 주로 그린 것이다. 주인공을 그린 그림의 위치는 왼쪽벽 또는 뒷벽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무덤에는 기둥·두공(枓)·도리 및 창방 등을 그려서 널방 내부를 목조건물과 같이 보이게 하였고, 각종 장식 무늬로써 방안과 같이 아담하고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각 벽에는 주인공의 실내생활을 비롯하여 주인공의 위엄을 나타내는 위풍당당한 행렬도(行列圖)와 힘차고 생동감이 넘쳐 흐르는 수렵도(狩獵圖)·전투도 외에 씨름·무악·남녀인물상·수문장 등 실생활을 묘사한 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또 장방(帳房)·전각(殿閣)·성곽·부엌·방앗간·푸줏간· 우물·차고·마구간·외양간 등의 각종 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천장에는 해·달·별을 그려서 하늘, 즉 천체를 표시하였다. 한편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비천(飛天)·선인(仙人) 등도 천장에 그렸다. 인물풍속도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장방 안이나 장방 밖에 주인공의 분부를 기다리는 듯 앉았거나 서 있는 여러 시자(侍者)와 시녀(侍女)를 그 직분에 알맞게 그려놓은 점이다.

 인물풍속도 및 사신도 : 인물풍속도에 비하여 더욱 복잡하고 다채롭다. 인물풍속도 및 사신도에서도 실내를 목조건물과 같이 보이게 하기 위하여 벽에 기둥·두공·도리·창방 등을 그렸다. 한편 요동성총(遼東城塚)·쌍영총(雙楹塚)·팔청리벽화고분(八淸里壁畵古墳) 등에는 8각 또는 4각의 돌기둥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림으로 기둥과 두공을 그렸다. 특히 벽화와 함께 우수한 건축기술과 건축미를 자랑할 수 있는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의 구조는 매우 뛰어나다. 그리고 대안리 제1호분(大安里第一號墳)에는 실물 활기를 벽 모서리에 붙이고, 그 활기를 기둥 대신에 힘센 장사(壯士)가 받쳐 든 모습을 그렸으며, 세방무덤[三室塚]에는 기둥과 두공을 그리고 겸하여 돌을 받쳐 든 장사를 그렸다. 네 벽면에는 주인공의 실내생활장면·행렬도·수렵도·무악·씨름장면· 공양도·직녀도(織女圖)·전투도·남녀인물상·수문장(守門將) 등과 장방·성곽·전각·부엌·방앗간· 외양간·마구간 등 각종 건물을 그렸으며 또 사신도도 그렸다. 그리고 천장에는 해·달·별과, 비천· 신선·기린·봉황·이금괴수(異禽怪獸) 및 사신수(四神獸)인 청룡·백호·주작·현무 등을 그리기도 하고, 각종 아름다운 무늬로 다채롭게 장식하기도 했다. 문 입구에 그린 수문장은 문을 지키는 신을 의미한 것으로 보이며, 공양도 및 비천은 불교신앙을 반영하는 것이고, 신선은 장생불로(長生不老)할 수 있다는 신선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비천은 하늘을 날면서 연꽃을 뿌리며 각종 악기를 연주하고, 신선은 십장생(十長生)에 드는 학·사슴과 상서로운 동물인 기린·봉황과, 이상한 짐승 또는 범· 용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다.

 사신은 방위신인데 방위신에는 청룡·백호·현무·주작·황룡의 다섯 신수(神獸)가 있다. 그러나 흔히 황룡을 뺀 나머지 네 신수를 사신이라고 한다. 이 방위신의 사상은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및 이십팔수법(二十八宿法)과 관련된 것이다. 즉, 28개의 별자리를 중앙· 동·서·남·북의 다섯 방향에 따라 나누고, 그 별자리들의 모양을 따서 환상적인 신수를 만들어 그것을 숭배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방위신이다. 방위신은 방위에 따라 빛과 형태를 각기 달리하며, 중앙에는 황룡, 동에는 청룡, 서에는 백호, 남에는 주작, 북에는 현무가 있다. 한편, 비천·신선 및 이상한 짐승 등을 벽화 내용으로 그린 것은, 불교의 영향도 있겠으나 동양적 신비사상의 소산으로 보이며, 벽사(邪)·수호(守護)·상서(祥瑞)·영원(永遠)·청정(淸淨) 등을 뜻하는 그림으로서, 중국의 한(漢)·위(魏)·육조시대(六朝時代)에 즐겨 그렸던 것들이다.

 사신도 : 유해를 안치하는 널방[玄室] 벽면에 청룡·백호·현무·주작 등 사신을 그렸다. 일부 벽화에서는 벽면에 사신도를 그리고 나머지 공벽에는 산수도·구름무늬·초롱무늬·인동잎 위에 사람이 선 그림이 들어 있는 나뭇잎무늬, 불꽃무늬 또는 인동무늬가 들어 있는 나뭇잎무늬 등을 가득 그려서, 마치 장식무늬 바탕에 사신도를 그린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널길[羨道]에는 수문장을 그렸고, 벽 모서리에는 굄돌을 받쳐 든 괴수를 그리기도 하였다. 천장 복판에는 황룡 또는 연꽃무늬를 그렸으며, 천장의 굄돌에는 해·달·별·산수·나무·비천·신선·이상한 짐승·기린· 봉황·연꽃무늬·구름무늬·엉킨 용무늬 등 다채로운 장식무늬를 그려 화면을 장식하였다. 이렇게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우수한 솜씨로 그려졌다. 고구려 벽화의 기법은 회를 바른 벽면이나 돌벽에 먹선으로 밑그림을 그린 다음에 여러 색으로 구륵(鉤勒)하여 그리기도 하고, 또는 밑선을 긋지 않고 색채를 써서 백묘(白描)도 하였다.

 밑그림을 그리는 먹선에는 좋은 유연묵(油煙墨)을 사용하였다. 돌벽에 직접 그릴 때에는 돌벽에 호분(胡粉)으로 엷게 밑바탕 칠을 하고, 그 위에 주색(朱色)이나 직접 먹색으로 기본형태를 잡는 밑그림을 그리고 나서, 결정적인 먹선으로 백묘를 하고 최후에 채색을 하였다. 그리고 밑그림이나 잘못된 그림은 다시 호분을 칠하여 그 자국을 지워나갔고, 밑그림을 그릴 때에는 정확한 형태를 잡기 위하여 우선 데생(dessin)하였음을 안악 제3호분(安岳第三號墳)의 말 그림에서 볼 수 있다.

 밑그림은 일반적으로 먹선으로 그렸으나, 그 밑선은 주선(朱線) 또는 참대 꼬챙이 같은 것으로 긋기도 하였다. 이 밖에 원형이나 직선을 그을 때에는 자와 컴퍼스를 사용하였다. 물상(物像)의 묘사에는 가는 먹선과 굵은 먹선을 섞어서, 대상의 모든 세부를 집약하여 특징만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간필묘적(簡筆描的)인 기법으로 그리기도 하였고, 대상의 세부를 치밀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내려고 세화적(細畵的)인 수법을 쓰기도 하였다. 그 필치는 세련되고 원숙하며, 섬세하면서도 억세고 호탕한 기세를 보여준다. 벽화에 사용된 채색의 종류는 검은색을 주로 하여 붉은색·누런색·자주색·푸른색·초록색·흰색 등을 사용하였는데, 붉은색은 다시 적·주·홍·자색 등 4색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다른 색도 농담(濃淡)의 변화가 풍부하여 다양한 색감을 준다. 때로는 중화군 진파리(眞坡里) 제4호분의 벽화에서와 같이 금분(金粉)을 쓰기도 하였고, 또 중국 퉁거우[通溝] 제4호분의 벽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덧칠을 한다든지 꽃술을 나타내는 데 금동(金銅) 같은 금속을 이용한 예도 있다. 벽화의 구도에서는 정연한 배치로 체계적으로 짜여진 것도 있으나, 한 벽면에 있는 2개의 주제가 서로 한계(限界)가 분명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러나 무용총(舞踊塚) 벽화의 경우와 같이, 한 벽면에 주제를 달리하는 수렵도와 우교차도(牛轎車圖) 사이에 큰 나무를 그려서 화면을 좌우로 명확하게 갈라놓은 것도 있다. 한편, 공간처리에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았으며, 원근을 나타내는 데도 사물의 형태를 크고 작게 그린다든지, 또는 계단식 배열법을 취한 경우가 많아 대체로 평면적이다.

 특색으로 중요한 것은 크게 그리고 종속적인 것은 대개 작게 그렸다는 점인데, 이로 말미암아 주인이 시종보다 엄청나게 크게 그려지고, 산 위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가 산보다도 더 크게 그려지는 등 실물 상호간의 비례가 흔히 무시되었다. 다시 말하면, 벽화의 그림들은 사물의 크기 비례를 자연의 현실적 비례에 맞추어 그린 것이 아니라, 사물 형상의 중요성에 따라, 또 인물 형상의 경우에는 엄격한 위계제도(位階制度)에 맞추어 그렸다는 것이다. 이는 미술사적으로 볼 때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한편 벽화의 배치상태는 무질서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나, 사건들을 벽면의 임의의 장소에 맹목적으로 나열한 것만은 아니다. 문지기인 수문장은 반드시 문 입구에 그렸고, 하늘에 있는 해· 달·별은 천장에 그렸는데, 해는 동쪽에, 달은 서쪽에, 북두칠성은 북쪽에 두었다. 그리고 비천· 선인 등 하늘을 나는 사물도 천장에 그렸고, 수렵도는 대체로 서쪽 벽에 배치하였다. 또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행렬도는 북쪽을 향하여 전진하게 그렸으며, 방앗간·푸줏간·부엌 등 살림과 관계 있는 사물은 동쪽에 그렸다.

 이러한 벽화의 배치는 구도상 일정한 규칙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형상의 진실성과 수준 높은 예술성과 함께 고구려 사람들의 진취적인 기상과 섬세한 정서감정이 한결같이 흐르고 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난 무덤의 주인공이 유계(幽界)에서 영원히 편안할 것을 기원하기 위해 그려진 유계의 미술이라고도 하겠다.

 

【공예】

 

 장신구류 중에서 주목되는 것을 추려보면, 평양 부근의 고분에서 드러난 투각초화무늬 금동관[透刻草花文金銅冠]과 평양의 청암동토성(淸巖洞土城)에서 발견된 투각화염무늬 금동관[透刻火焰文金銅冠] 및 고분에서 드러난 금동귀걸이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중화군 진파리 제7호분에서 출토된 투각용봉무늬 금동관형장식[透刻龍鳳文金銅冠形裝飾]이 있는데 그 용도는 분명하지 않다. 투각초화무늬 금동관은 폭이 좁은 금동관대에, 초화무늬를 투각한 금동입식을 앞면과 좌우에 각각 하나씩 세우고, 이 앞면의 입식에 접하여 뒷면 좌우에 투각한 사각형 장식을 각각 하나씩 부착한 구조의 것으로, 앞면 좌우의 입식 윗부분이 안으로 굽은 모양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흔히 보이는 절풍(折風)과 같은 인상을 준다. 또 투각화염무늬 금동관은 폭이 넓은 금동관대에 화염무늬를 투각한 금동입식 9개를 세우고, 관대 좌우에 옷고름 같은 수식을 각각 하나씩 달았다. 그리고 관대의 상단 둘레에는 인동무늬를 투각하고 하단 둘레에는 연주무늬[連珠文]을 돌렸으며, 상·하단의 중간에는 같은 간격으로 꽃모양 장식 7개를 배치하여 변화를 주었다.

 이 금동관의 투각화염무늬 입식은 백제 무령왕(武寧王)의 관식(冠飾)과도 기본적으로 통하고, 또 중국 북위(北魏)의 금동삼존불(金銅三尊佛)의 광배에서도 볼 수 있다. 투각용봉무늬 금동관형 장식은 관모형을 이루고 있는데, 중앙에는 2겹의 주문대 원형(珠文帶圓形) 안에 태양을 상징하는 세발까마귀를 두고, 그 테두리에는 불꽃 비슷한 구름무늬를 새겼으며, 구름무늬 속의 윗부분에는 봉황, 아랫부분에는 용 2마리를 각각 배치하였다. 그리고 테두리에는 다시 넓고 좁은 2겹의 테를 두르고 그 사이에 구슬무늬[珠文]을 양각하였다. 무늬는 정교하고 치밀하며 유려한 흐름을 보여준다. 이 금동관 뒤에는 같은 형태의 나무관을 댔는데, 금동관과 나무관 사이에 비단벌레의 날개를 깔아 금녹색의 바탕을 만들어,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금동관을 두드러지게 한 세련된 솜씨이다. 비단벌레의 날개를 장식에 쓰는 수법은 신라의 금관총(金冠塚)에서 드러난 마구에도 보이고, 또 일본의 호류사[法隆寺]의 불감(佛龕)에서도 보이나, 그것은 한국 기술을 도입하여 이룬 것이다.

 한편 금동귀걸이에는 신라에서 볼 수 있는 태환식(太式)은 없고 모두가 가는고리식[細式]이며, 가는 고리에 작은 고리를 달고 그 고리에 각추(角錐) 같은 장식을 매단 것이 기본형이다. 토기는 백제· 가야·신라에 비하여 장기간에 걸쳐 존속하였고, 또 넓은 영역을 차지하였으나 그 유품은 지극히 드물다. 주거지나 고분에서 발견된 토기 유품을 보면, 부분적으로는 사리기[卷上法]에 의하여 성형하고, 낮은 온도에서 산화염(酸化焰)으로 구워낸 것도 있으나, 물레를 써서 성형하고 밀폐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낸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한식(漢式) 계통의 전통을 이은 회색연질토기(灰色軟質土器)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회도(灰陶)·흑회도(黑灰陶)· 황록유도(黃綠釉陶)·채문도(彩文陶) 등이 알려지고 있다.

① 사리기법으로 만든 적갈색 토기도 있으나 주가 되는 것은 물레를 써서 성형한 토기이다. 가는 모래를 약간 섞고 차진 진흙을 잘 이겨서 만든 바탕흙에, 예새 같은 것으로 간 자리가 보이는 갈색마연토기와 흑색마연토기가 그것이다. 종류는 아가리가 넓적한 깊은 바리 모양의 단지·접시, 목이 짧고 배가 통통한 흑색마연도호, 네 귀가 달린 단지, 큰 띠손잡이가 4개 달린 시루, 뚝배기· 보시기 등 다양하다.
② 황록유도는 도기에 황록유(釉)를 올린 것으로 종류에는 단지, 네 귀 달린 단지, 반(盤) 등이 있다.
③ 채문도는 채색 돋을무늬의 도기로서 토포리대총(土浦里大塚)에서 드러난 뚜껑 2점 중의 하나는, 꼭지의 둘레에 8잎의 연꽃무늬를 그렸고, 측면에는 일종의 꽃모양의 무늬를 배치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앞의 것과 흡사하나 꼭지를 중심으로 연꽃무늬를 부각시켰다. 이 뚜껑의 무늬들은 우아하며 세련된 솜씨를 보여준다.

 이 밖에 고구려의 도기 중에는 부뚜막·벼루·기대(器臺) 및 각종 명기(明器) 등이 있다.
다음은 기와와 벽돌 공예이다. 이는 중국 퉁거우지방의 고구려 유적과, 평양 원오리사지(元五里寺址) 및 안학궁지(安鶴宮址)를 비롯한 평양의 근교유적에서 많이 드러났다. 기와는 중요한 건축부재의 하나로서 그 용도에 따라 수키와·암키와·막새·치미(尾)·귀면기와· 제형기와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훌륭한 공예품이다.

 [귀면 기와] 기와에는 다양한 무늬를 놓았는데 암키와에는 식물무늬·기하무늬 및 기타 무늬를 부각시켰다. 식물무늬로는 이깔잎무늬·넓은잎무늬· 꽃무늬 같은 것이 보이며, 기하무늬로는 노끈무늬·돗자리무늬·멍석무늬·사격무늬· 사각무늬와 원무늬·물결무늬 등이 흔하다. 기타 무늬에는 귀면·새·화염 같은 것이 보인다. 수키와에는 간단한 돋을 무늬의 것이 있다. 기와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막새기와이다. 막새에는 여러 무늬를 부각시켰으며, 대체로 연꽃무늬·인동무늬·귀면무늬 및 그 밖의 무늬로 나눌 수 있다. 다음은 귀면판이다. 이는 사각형과 구형의 판에서 아랫부분의 중앙을 반달형으로 도려 낸 2가지 모양이 있다. 귀면판에는 무섭고 흉물스러운 귀면이 부각되어 있으며, 귀면의 양미간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은 이 판을 추녀마루나 두공(枓)에 붙이기 위한 것이다. 치미에는 큰 것과 작은 것의 2가지가 있으며, 안학궁과 평양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벽돌에는 사각형 벽돌·직사각형 벽돌·부채꼴 벽돌 등이 있다. 사각형 벽돌은 금강사지(金剛寺址)에서 발견되었는데, 집바닥 전면에 깔려 있었다. 직사각형 벽돌은 퉁거우·평양 등의 고구려 유적에서 발견된 것으로 무늬를 돋치거나 글귀를 새긴 것이 많다. 무늬는 대체로 기하무늬와 식물무늬로 나뉜다. 기하무늬로는 둥근 돈을 띠로 이어댄 돈띠무늬, 겹선으로 사격 또는 방격무늬를 놓고 그 속에 마름모형을 새긴 능형무늬가 대부분이다. 식물무늬로는 연꽃무늬·인동무늬 등이 흔히 보인다.

 직사각형 벽돌에는 글자를 새긴 것도 있다. 태왕총(太王塚)에서는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고 쓴 벽돌이 나왔고, 천추총(千秋塚)에서는 ‘千秋萬歲永固’라고 쓴 벽돌이 나왔다. 이 벽돌들은 모두 이 무덤 주인공의 명복을 빌어 만든 것이다. 부채꼴 벽돌은 직사각형 벽돌이 한쪽으로 휜 모양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바깥 옆면과 안쪽 옆면에 인동무늬를 여러 가지로 변형시킨 무늬를 부각한 것이 있다.

 이 밖에 고구려의 공예에서는 옥공예(玉工藝)와 옻칠공예도 찾아볼 수 있는데, 옥공예품으로는 중국 지안[集安]에서 발견된 백옥귀잔이 있으며, 옻칠공예품으로는 안악 제3호분· 강서중묘(江西中墓)·퉁거우 제12호분에서 출토된 칠판에 쓴 것으로 보이는 칠화 조각이 알려졌다. 강서중묘의 칠화 조각은 검은 칠을 두껍게 먹이고, 그 위에 흰색과 붉은색을 가지고 인동무늬와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봉황을 화려하게 그렸다. 이러한 공예품 이외에, 고구려 금속공예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금속공예품 1점이 신라 호우총(壺塚)에서 발견되었는데, 명문이 있는 청동호우(靑銅壺)이다. 깊숙한 물체에 뚜껑이 달린 합(盒)으로 몸체와 뚜껑의 표면에는 삼중의 동심횡대(同心橫帶)가 돌려 있고, 뚜껑 중앙에 달려 있는 오똑한 구형(球形) 꼭지는 연꽃에 싸여 있으며, 합 바닥에는 광개토왕(廣開土王)을 위해 만든 것으로 해석되는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공예는 수준이 높았다.

 

【건축】

 

 살림집·궁전·사찰 등이 있다. 고구려의 살림집에 관한 자료로는 《삼국지(三國志)》 《신당서(新唐書)》 등의 문헌기록 및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주택 그림과 주택 유적 등이 있다. 문헌에 의하여 대옥(大屋)·소옥(小屋)·창고(倉庫)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그 구체적 구조는 알 수 없다. 고구려 벽화고분 중에는 주택에 관계 있는 그림이 그려진 고분이 많다. 즉 쌍영총·천왕지신총·대안리 제1호분·안악 제1호분·퉁거우 제12호분 등에는 전각도(殿閣圖)가 있고, 안악 제3호분·약수리 벽화고분·무용총·각저총·퉁거우 제12호분· 마선구 제1호분 등에는 주택의 부속건물 그림이 있다. 이런 벽화고분 중에서 쌍영총의 전각도를 보면, 용마루 끝에 망와(望瓦)가 달린 맞배지붕의 건물이 그려졌는데, 기둥은 가늘고 기둥머리에는 이중으로 보이는 두공이 달렸으며, 건물 측면은 기둥머리에 창방(昌枋)을 걸고, 기둥 위 주간(柱間)에는 측면에 하나, 정면에 5개의 ‘人’ 자형 대공(臺工)이 있으며, 또한 대공과 대공 사이에는 동자주(童子柱)를 세웠다. 측면의 ‘人’ 자형 대공머리에는 소루(小累)를 올리고 그것이 덧보를 받고 있으며, 덧보 위 중앙에 다시 같은 모양의 대공을 올려 중도리를 받게 하였다. 또 건물의 좌측에는 문짝을 달았다.

 한편, 안악 제1호분의 전각도를 보면 주택에는 넓은 마당이 있고 주위에는 높은 담장을 돌렸으며, 그 안에 골기와를 이은 주택이 세워져 있다. 주택 유적에서 발굴된 집터를 보면, 평북 강계군(현 시중군) 노남리(魯南里) 제2호 집터는, 4개의 기둥구멍이 동서방향으로 1줄로 늘어서고, 2개의 온돌은 모두 외고리의 ‘T’자 모양으로 꺾인 긴 고래온돌이다. 아궁이는 남쪽에 있고 고래는 북쪽으로 뻗다가 서쪽으로 구부러졌으며, 집터의 바닥은 진흙으로 발랐다. 여기에서는 기와가 없어 서민층의 주택으로 보이며, 벽화의 그림은 지배층의 주택으로 여겨진다.

 다음에, 고구려의 왕궁터로는 평양의 안학궁(安鶴宮)과 고구려 장안성 내의 궁성, 중국 둥베이지방 지안의 국내성(國內城) 등이 알려져 있다. 안학궁 안에는 대건축군과 정원이 들어차 있다. 궁전들은 대체로 남북으로 놓인 3개의 축에 따라 배치되었는데, 궁성 남문을 통하는 남북축이 중심축, 궁성 남벽의 동서문을 통하는 남북측이 보조축으로 되어 있다. 중심축 위에는 4개의 기본 궁전들이 놓여 있었고, 궁전들의 중앙 부분에는 대체로 주축자릿돌이 비어 있다. 이처럼 궁전자리는 알 수 있으나 그 위에 세워진 건물의 구조는 알 수 없다. 끝으로 그간에 알려진 절터의 한두 예를 들면, 우선 금강사지(金剛寺址)는 남북으로 놓인 축상에 문·탑·당을 차례로 세운 형식의 가람배치이고, 평양시 동쪽 청암리 토성 안에 위치한 청암리사지(淸巖里寺址)를 보면, 팔각전(八角殿)을 중심으로 동·서·북의 3면에 금당을 배치한 1탑 중심(一塔中心) 동서북 3금당식(東西北三金堂式) 가람배치이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절인 아스카사[飛鳥寺]의 배치와도 같다.

천상열차분야지도

 가로 122.5cm, 세로 211cm. 복각본탁본.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천문 관측을 맡은 일자(日者)라는 관리가 있었다고 하며,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성에 첨성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이러한 관리 기구와 관측 시설을 이용해 일식과 행성, 유성, 혜성 등의 움직임을 관측하였으며, 그 내용이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 기록에 반영되어 있다. 또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별자리 그림들이 남아 있다. 고구려에는 돌에 새겨진 천문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고구려가 망할 때 없어졌다고 하는데, 그것을 대본으로 하여 만든 천문도가 조선 초기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천문도에 기초하여 1395년에 만들어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그림은 고구려 시기의 천문도를 약간 수정하고 보충한 것이므로 고구려 천문학 수준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천문도에는 가운데에 있는 큰 동그라미 안에 별자리 그림이 있고 그 둘레에 여러 가지 수표와 설명문이 있다. 별자리 그림에는 북극이 중심에 놓이도록 천구를 평면에 투영하고 1467개의 별들을 282개의 별자리로 묶어서 정확히 제자리에 표시하여 놓았다. 별자리 그림에는 적도원, 황도원, 북극원과 함께 경도선이 밝혀져 있고, 은하수도 그려져 있다.


출처: 선형색미술학원

출처 : 의미의 공간
글쓴이 : 독수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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