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자료

마의태자

_______! 2010. 9. 18. 22:14
E D R S P I H C RSS
麻衣太子. '魔의 太子'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1.신라의 마지막 태자.

본명은 김일(金鎰)이며, 마의태자라는 말은 별칭으로 마로 된 옷을 입고 다녔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제56대 경순왕과 죽방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시대의 대세가 고려로 정해지자,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마의태자는 여기에 반대하였으나 결국 왕의 뜻을 막지 못하고 신라는 고려에 항복하고 만다. 마의태자는 아버지를 따라 개경으로 가지 않고 개골산(=금강산)으로 가버리고 삼베(마)로 만든 옷을 입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그 때문에 마의태자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강원도 인제로 가서 신라의 남은 충신들과 지사들을 규합해 고려에 저항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쪽이 맞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일부에서는 금강산으로 들어간 마의태자와 인제로 간 마의태자가 다른 인물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고자 하자 이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결사항전을 부르짖었던 것으로 볼때 강경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의태자가 결사항전을 부르짖은 이유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마의태자는 효종랑의 손자였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효종랑이 화랑을 이끌던 낭주였기 때문에 마의태자는 화랑도의 영향을 깊게 받았고 그로 인해서 신라의 사직을 넘겨주자는 주장에 강하게 반발했던게 아닐까 하는 가설.

사실 결사항전을 부르짖었던 것으로 미뤄볼때 마의태자가 혼자 금강산에 들어가서 신선이 되었다기 보단 마의태자가 고려에 맞서서 신라 부흥을 도모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보이긴 한다. 실제로 마의태자처럼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고려에 저항한 호족들도 있었다가 노비나 천민으로 전락한 경우도 있으니 말 다했다.

그리고 산신령이 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사람을 신화화 하는 전형적인 형태이기도 하기 때문에...(단종이라던가...)

마의태자는 또 다른 떡밥을 남겼으니 바로 금태조 완안아골타와 관련된 떡밥이다. 고려사나 여러 기록들은 마의태자의 아들인 김행, 혹은 김준이 여진족으로 들어가서 대를 이은 결과 나온게 금태조 아골타라는 것이 떡밥의 핵심. 하지만 고려사를 엄밀하게 살펴볼때 김행이나 김준이 마의태자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다만 순암 안정복은 마의태자의 세 아들중에 김준이 여진족에게 망명했고, 나머지 두 아들은 고려에 남았다고 말하고 있긴 하다(하지만 역사에 남은 것만 세 명이니 결론적으로는 네 명이 되지만...).

그러나 이걸 가지고 금이 한국사에 들어간다느니 하는 뻘소리를 말하면 곤란하다. 우선 근거가 부족하고 설령 피가 섞였다고해도 아주 조금 섞였을 뿐이며 혈연관계 민족주의는 이미 그렇게 해석하는거 자체가 오래전에 쉬어터진 떡밥이다. 또 어디까지나 금을 세운 주체는 여진족이기 때문. 그냥 개소리일 뿐이므로 그냥 그렇다고만 알아두자.

마의태자의 문제에서 또 다른 헷갈리는 떡밥은 바로 부안 김씨의 문제. 부안 김씨는 자신들의 시조가 마의태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려사를 살펴볼때 마의태자의 아들인 김순웅은 경주김씨 대장군공파의 파시조가 되었고, 김교는 고려 광종때 통천군에 봉해지고 통천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 모든 것들을 정리해보면 마의태자의 아들들은 참 널리도 퍼져 살았던 것일지도?

하여튼 떡밥으로 충만한 마의태자의 묘는 금강산 비로봉 바로 아래에 있다고 한다. 금강산 관광에서 비로봉 까지 공개될 예정이어서 마의태자의 묘도 실물이 공개되나 했지만 남북관계 경색과 금강산 관광 중단으로 보류된 상황. 하지만 앞으로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면 마의태자의 묘가 남한 언론에 공개될수도 있을듯.

2. 이광수의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