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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라이트노벨에 대해. 일상

_______! 2010. 10. 10. 22:53

한국적 라이트노벨에 대해. 일상

아카사님이 한국적인 것에 대한 글을 다시 쓰셨군요. 제가 지난번에 이 부분에 관한 포스트를 쓰겠다고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는지라. 지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에게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한국인이 남들(외국)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개성을 알아나가려고 했던 적극적인 노력은 왜란과 호란 즈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다름에 관한 기록이다. 남들이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를 우리의 눈으로 소상히 기록해 놓았다. 소쉬르에 따르면 대립쌍은 서로 다른 점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다름이 사라지면 구분도 의미가 없다. 구분의 의미가 사라진 것들은 다른 이름(기호)를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모든 여행기는 ‘나와 그들’이라는 대립쌍 속에서 그 차이를 기록하는 과정인 것이다.

청나라와의 교류로 인해 그 이전까지는 있어도 없었던 것과 같았던 외국의 존재가 점차 조선인들의 사고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 이후로 나오게 된 소중화론, 동도서기론, 문명개화론 등은 모두가 세계 속에서 조선이 어떻게 자리매김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였다.

은자의 나라에서 100년 만에 망한 나라, 더욱 망한 나라, 완전하 망한 나라의 좆망 똥망 테크를 모두 밟고 지금은 소위 선진국 클럽에서 말석이나마 자리를 잡는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은 이 나라의 특징이란건 도대체 뭔가. 무엇이 남들과 다른건가. 남들과는 다르지만 4500만이 공유할만한 공통점이란 것은 무엇인가.

“인터넷 강국”이 한국의 특징인가? 월드와이드웹이 나온지가 이제 겨우 15년 즈음이다. 지도에 아파트로 픽셀을 찍는 아파트 괴물이란 것이 한국의 특징인가? 80년대 이전까진 아니었다. “빨리빨리”를 외치며 열심히 일하는게 한국인의 국민성인가? 박정희 이전까진 아니었다. 소주 한잔 걸쳐 먹는 삼겹살 구이가 한국 음식인가? 놀랍게도 90년대 이전까진 보편화 되지도 않았다.

이렇든 누구나가 한국적 사고방식, 한국적 라이프스타일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짧게는 10년, 길어봤자 일제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국민성이란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한국인의 경우엔 더더욱.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미국인이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민족(?)으로 거듭나는데에 채 100년이 걸리지 았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인도 완전히 새로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집단이다. 과연 이러한 한국인들에게 과거를 더듬어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한정한다는 행위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추석에 한복을 입고 세배를 하는 의식은 이제 한국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갖는가. 이제는 희미해져가는 구한말과의 인연을 가까스로 붙들고 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가.

신채호는 조선에 조선다움이 없음을 한탄했지만 정작 조선다움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에는 지리멸렬했다. 기껏 들고 왔다는게 환빠스런 낭가사상이라니. 오호통재라. 국가주의적 무장조직이 한국인의 아이덴티티였다니. 한국인은 그냥 뼛속까지 파시스트로군요. 이대로 가다가는 나치스 친위대가 독일의 뿌리가 될 기세.



외국인들이 바라보는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외국인들이 한국을 어떻게 봐 주길 원하는지 알고 싶다면 VANK와 같은 단체들의 행동을 보면 된다. 한국의 자연은 아름다우며 한국의 역사는 길고 한국의 전통문화는 단아함과 정중함의 아이콘이 되어야 한다. 반면에 서울은 세계 어떤 도시보다 번화해야 하고 시민들은 ‘다이나믹’하게 역동적이며 독도는 한국땅이어야만 한다.

이것이 한국인들이 원하는 세계에서의 한국인 상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박정희의 ‘민족 중흥’과 전두환의 ‘국풍81’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디테일은 좀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부분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한 번 80년대 초등학교의 바른생활 교과서라도 펴고 확인 해 보시라. 정말이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줄이면 ‘아름다운 전통과 성공적인 근대화’다. 그냥 그게 전부다.

90년대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출연해서 화제가 되었던 ‘Welcome to Korea’광고라도 다시한 번 돌려보라. 여기서 한 치라도 벗어나는게 있던가. 이데아적 한국인의 상조차 이렇게 상상력과 콘텐츠가 부족하다.

하지만 현실은 “까오리빵즈”와 “춍”, 혹은 “어글리 코리안”일 뿐이고.(....) 소위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좀 더 어설프게 알아가면서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되고, 그 와중에 실시간으로 상대방을 씹으면서 이상적인 한국인 상 따위는 들이밀어볼 구석도 없어진다. 아마 서로가 이런 저열한 비방을 적당히 그만두는 시점이 온다고 해도 한국인이 원하는 저런 착하고 예쁜 모습만 예 그렇습니까 하고 납득해 줄 리도 없을겠지.


‘외국인이 바라보는 한국적인 것’을 들여다보는 한국적인 것.

착하고 예쁘게 보이고 싶은 이런 이데아적 이미지는 웃음거리가 되거나 그나마 관심 한 줌 못 받는 와중에 내적으로는 우리를 옥죄는 족쇄가 되어버린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다. 근데 한국적인게 뭐야? 천조국 카네기홀에 가서 아악이라도 연주하면 되나? 한복 입고 덩실덩실 춤추는 코쟁이 사진이라도 박아서 보도자료로 뿌리면 되는건가?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한국인. OECD국가 중 노동시간 가장 많아’ 같은 신문기사에 마냥 기뻐하면 되는건가?

천조국 황상께서 우리를 어떻게 봐 주실까 하는 우리 망상속의 오리엔탈리즘이 우리의 행동을 옥죈다. 한국적인 것이 뭔지는 아직 아무도 감을 잡지 못한 듯 하지만 백인님이 좋아할만한 거라면 그게 좋은 한국적인 것일거다. 분명 농악은 100년 이상을 민간에서 이어온 진짜 한국의 음악이지만 실제로 해외에서 팔리고 있는건 김덕수 사물놀이다. 아예 사물놀이란 음악 장르의 발명자가 김덕수씨다. 근데 전통음악이 아니잖아 이건.

이 자기검열에 매우 충실했던 작품이 바로 신지식인 심형래 감독의 괴작 “디워”였다. 국가 아이덴티티에 지독하게 집착하다 보니 예술작품으로서의, 혹은 상업 작품으로서의 퀄리티는 곤두박질 치다 못해 땅 속을 뚫고 들어가 맨틀에 닿았다. 이게 바로 기명사미가 보고 배 아파했던 쥬라기 공원과 타이타닉의 가장 한국적이어서 가장 세계적인 버전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체화된 오리엔탈리즘적 시선 의식이 파산하는 순간이다.

이제 우린 한국적인 것을 생각하기 이전에 국가나 민족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 할 때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가진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그를 위해서는 문학 역시 민족을 위해 복무해야 마땅하다. ‘민족적 삶’을 ‘민족적 가치’속에 담아내어야 민족 문학의 전진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민족 문학의 최종적인 목표는 민족의 위대성을 높이어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는 것이다.

민족과 유리된 개인이 존재할 수 없기에 개인적 삶과 사상에 집착하는 소시민적 문학의 장궐은 필연적으로 민족성 타락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으며 민족의 구성원들을 타락시키고 민족의 가치를 훼손하는 이러한 작품들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라는건 그냥 봐도 병신같잖아요.


그냥 자기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면 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쓰는, 혹은 쓰고싶은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여러분 이외엔 아무도 쓸 수가 없어요. 우린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쓰는 글이 민족이니 나라니 하는걸 위한 것도 아니잖아요. 당장 이 세상에 무해무익한 라노베 따위가 무슨 그리 발전적인 역할 씩이나 하겠어요? (웃음)

여러분의 작품이 ‘한국인’에게 어필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여러분 소설 좋다는 사람들 구미에나 좀 맞춰주면 되요. 어차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소설 따윈 존재한 적도 없어요. 영도좌가 드래곤 라자를 쓴 건 무슨 애국을 하자는게 아니었어요. 별다른 이유 없었어요. 그냥 쓰고 싶으니까 쓴 거에요. 예술이니 엔터테인먼트니 철학이니. 아무려면 어때요.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걸 쓰면 되는거에요.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저 망설임 없이 적어나가면 되는 겁니다. 발행 후엔 독자가 판단을 하게 되겠지만 적어도 쓰고 있는 순간 만큼은 온전히 작가의 것이니까요.

다른걸 몰라도 이거 하나는 보장할 수 있겠네요. 이고깽 판타지와 귀여니 소설은 지극히 한국적이에요. 대한민국이 아니면 이런 소설을 어디 가서 보겠어요? 이 작품의 작가들이 뭐 그리 대단한 애국자였을리는 없어요. 하지만 그 작품들은 “전부” 한국적이에요. 십수년 내지 수십년을 한국인으로 나고 자라서 살아왔는데 어찌 눈짓 손짓 하나하나 한국적이지 않은 것이있을 수 있겠어요? 여러분이 쓰는 메모 한 장, 댓글 한 줄조차 한국적이에요. 오히려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갑절로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한국인이 책을 썼다? 이게 어찌 한국적이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서구의 모더니즘 없이 김광균이나 이상이 있었을 것 같나요? 사회주의 없이 카프가 있었을까요? 탈냉전 포스트모더니즘 기류가 없이 윤대녕이 나왔을까요? 하나같이 외국 사조의 영향력에 쩔어 있던 양반들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분들 작품이 국문학이 아닌가요? 도대체 국문학의 기준은 뭔가요?

한국적 삶의 모습을 사실주의적으로 담는다? 라이트노벨에선 그게 불가능하다니까요? 그림쪽 이야기입니다만 ‘망가는 벗어버려’ 드립을 치면서 극사실주의 화풍을 그리 좋아하시던 석정현씨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삽니까? 그건 망가는 벗었는지 모르지만 더 이상 만화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맥루한에 따르면 미디어는 정세도(Definition)를 기준으로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로 나눌 수 있는데 실사에서 선의 양을 과감하게 줄인 만화는 전달하는 정보의 양이 적기 때문에 쿨 미디어라고 분류가 되는거에요. 근데 그 사람 그림은 다시 핫 미디어로 가 버렸네요? 그런건 만화라고 부르지 않아요.

라이트노벨은 기본적으로 사실주의적이 되기 힘든 문학이에요. “다중인격 탐정 사이코”의 원작 작가 오오츠카 에이지에 따르면 라이트 노벨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작품의 작중 현실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아니에요. 라이트노벨 창작은 만화적 세계라는 일종의 가상 현실을 다시 글로 옮겨내는 작업인 거에요. 왜 라이트노벨 문학상 이름이 전격 ‘게임소설’ 대상이겠어요? 다 그런 이유인 겁니다. 국내 판타지 소설의 출발이 TRPG의 리플레이였던 것처럼 라이트노벨 역시 만화적 세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망가는 벗어버려’의 사고사례는 이미 설명했습니다. 리얼리즘이란건 전가의 보도가 아닙니다. 리얼리즘이라고 해서 그 작품이 진정한 ‘리얼’을 담아내고 있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리얼리즘 작품에서 작가의 시각과 카메라의 포커스는 편식이 심해집니다. 주제를 위해 필요한 것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전부 버려집니다. 리얼리즘의 리얼은 필터링된 리얼입니다. 리얼리즘적 시각은 무신경한 감시 카메라 같은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리얼리즘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삶의 진면목을 담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우린 스페인에서 자행된 독일군의 학살을 증언하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꼽습니다. 전혀 리얼하지 않지만 말이지요. 


이제 결론을 말해야 할 시간이네요. 민족 중흥 안 해도 됩니다. 외국인 관광객이 여러분들 붙들고 How can I read? 하고 작품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으니까 자랑스런 한국인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삶의 디테일함을 담으려 너무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야기가 진실하다면 진심은 전해집니다. 한국인이 전하는 진심이 한국적이지 않을 리도 없지요.

제발 좀 한국적인 것을 찾는다는 도달 불능한 목표를 찾아 표류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국산 라이트노벨이 한국적인 것 같지 않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인생이란 점을 연결해 나가는 것 같아서 앞으로 나가면서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모든 것들이 다 지나고 나서 뒤돌아 볼 때에야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작품들이 앞으로도 계속 나온다면 한국의 라이트노벨은 좋은 의미로던 나쁜 의미로던 계속 변화해 갈겁니다. 그리고 뒷날 뒤돌아보면 결국 한국적인 것이 무엇이었는지의 궤적을 찾을 수 있을겁니다. 한국적인 개성은 지금도 쌓여가고 있고 이제까지 출간된 소설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판타지 소설이 그랬고 무협 소설이 그랬고 로맨스 소설이 그랬습니다. 뭐가 뭔지 모를 엉망진창이었지만 결국 한국적 개성이란 것은 만들어 내고야 말았습니다. 뭐가 그리 걱정이고 무엇이 그리 조급하십니까? 이건 그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일 뿐입니다.

 

http://hasaho.net/ninetail/textyle/181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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