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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갈피갈피]절양루와 유림숲

_______! 2010. 11. 21. 17:56

광주갈피갈피]절양루와 유림숲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던 곳
조광철
기사 게재일 : 2010-08-03 07:00:00
▲ 광주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녔던 누각 ’절양루’ 앞에는 유림숲<사진>이 있었다. 지금은 절양루도 유림숲도 모두 사라졌다.

 조선시대에 광주의 북문거리가 끝나갈 즈음, 지금의 충장로5가와 독립로가 교차하는 지점에는 절양루(折楊樓)란 누각이 있었다. 하도 오랜 전 일이라 정확한 풍모를 가늠하기조차 힘들게 됐지만 누각은 꽤나 우람하고 화려했던 모양이다. 광주에 온 방문자들이 간혹 이 누각을 보고 위풍당당한 성문이라 착각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1690년대 광주목사를 지낸 오두인이 이 누각을 다른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하면서 오늘날 이 누각은 공북루(拱北樓)로 더 잘 알려지게 됐다. 북녘하늘을 보며 임금에 대한 충성의 의지를 다진다는 의미를 띠게 된 것이다. 그러나 누각 하나에까지 충군의 의미를 덧붙여야 하는지에 떨떠름했던 사람들은 여전히 이 누각을 옛 이름 그대로 절양루라 부르곤 했다.

 절양루가 언제 세워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오두인보다 2백년 앞서 살았던 신숙주가 쓴 `희경루기’란 글이 있는데 1450년대 당시 광산현감 안철석이 희경루를 창건한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이 글에 따르면, 오래전부터 광주 고을의 북쪽에 절양루가 있었다고 했다. 이 누각이 허물어진 채 방치돼 있을 무렵, 안철석이 희경루를 세운다는 소식을 접한 고을 원로들이 차라리 새로 누각을 세울 생각이라면 기왕에 절양루가 있던 자리에 건립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의견을 냈다고 한다. 그 후 과정이야 어떻든 절양루는 아주 오래전부터 광주 북쪽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광주 사람들에게 절양루는 퍽 중요한 장소였다. 무엇보다 절양루는 광주의 관문이었다. 비록 행정구역상 광주의 경계는 이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 누각을 지날 때라야 사람들은 비로소 광주 고을의 중심부로 들어왔다는 느낌을 가졌기 때문이다. 물론 광주를 떠나는 사람들에겐 그 반대의 아릿한 슬픔 같은 것을 느끼는 장소였겠지만 말이다.

 어떻든 이런 절양루의 각별한 의미는 1890년대 광주를 다녀간 오횡묵이란 사람이 남긴 기록에도 엿보인다. 오횡묵은 이곳을 일러 “사신들이 임금을 뵈러 갈 때 머물렀던 객사였다”고 했다. 실제 광주에는 읍성 내에 사신들이 묵는 광산관이란 객사가 따로 있었으므로 절양루가 사신들의 숙소로 이용되는 일은 없었겠지만 그들의 왕래가 있을 때마다 이곳에서 곧잘 송별연이 열렸을 가능성은 있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절양루는 오랜 세월 광주를 거쳐 간 사대부들의 시문에 자주 등장했다. 면앙정 송순은 이곳에서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시를 지은 바 있고, 윤두서의 사위인 석북 신광수도 절양루에 올라 시를 남겼다.

 하지만 선인들의 자취가 밴 이곳조차 1910년대 일본인들이 광주의 옛 도시경관들을 하나둘 파괴할 때 철거됐다. 비아중학교 교장을 지낸 최윤상 씨(작고)에 따르면 절양루가 철거된 시기가 1916년이라 했는데 이 해에 광주를 온 구례 사람 유형업의 일기에는 애초 조선총독부가 이 누각을 철거했는데 광주군청이 이를 300냥 주고 사들여 다른 빈터로 옮겨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광주군청이 무슨 뜻으로 이 누각을 보존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든 1916년 절양루가 원래의 장소에서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절양루처럼 일제강점기에 이처럼 광주에서 사라진 누각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굳이 절양루를 딱히 기억하고자 하는 이유는 단순히 사라진 것에 대한 서글픔 때문만은 아니다.

 절양루는 예로부터 광주를 떠나는 사람들이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던 곳이었다. 이곳은 사사로운 이별의 장소였을 뿐 아니라 남구만의 `약천집’에 기록된 것처럼 정유재란 때 고종후(고경명의 아들)의 의병부대가 진주성으로 떠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헤어진 장소이기도 했다.

 사실, 절양루란 이름에도 이런 이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로부터 길 떠나는 사람에게는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뜻으로 버들가지를 꺾어 건네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버들가지를 꺾어주는 것, 즉 절양은 이별과 동의어로 통했다. 광주 사람들이 이별이 잦은 이곳에 누각을 세우고 절양루라 불렀던 것도 바로 이런 뜻이었다.

 더욱이 절양루는 단순히 누각의 이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광주의 절양루 앞에는 울창한 버드나무 숲이 있었는데 유명한 유림수(柳林藪)가 그것이다.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본래 버드나무로 이루어졌던 숲은 차츰 느티나무, 팽나무 등 다른 활엽수로 바뀌었지만 사람들은 숲의 원래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광주를 거쳐 간 무수한 외지사람들도 유림수에 깃든 이런 의미를 소중히 여겼다. 1900년대 일본인들이 이곳을 개간하려 했을 때 당시 광주군수와 전남관찰사가 저들의 개간 시도를 한사코 저지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국권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애써 지키고자 했던 숲은 이제 누각과 함께 사라진지 오래다. 먼 훗날 누군가에 의해 누각은 다시 복원될지 모르겠지만 누각과 함께 애써 지키고자 했던 숲까지 복원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를 예감하듯 실학자 이익은 3백년 전에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버드나무는 가로로 심어도 나고, 거꾸로 심어도 산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제아무리 열성을 다해 심고 가꾼들 단 한 사람이 뽑아버린다면 제대로 살아남을 버드나무가 어디 있겠는가?” 숲을 뽑아내는 데는 잠깐이면 되지만 그 숲이 우거지는 데는 수백년이 걸렸다는 걸 우리는 가끔씩 잊는다. 또한 옛 사람들이 공공건축물을 하나 짓는데도 얼마나 많은 것을 생각했는가를 우리는 거의 모른다.

  조광철<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