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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경양방죽 풍경.(광주시청 홈페이지에서 가져옴) | 전주에는 덕진호가 있고, 춘천에는 소양호가 있으며, 경주에는 보문호가 있다. 이들 모두가 인공호수이지만 오늘날 그 도시를 대표하는 명물로 자리잡았다. 만일 역사가 삐걱대지만 않았더라면 광주에도 이런 큰 호수가 있었을 것이다.
1960년대 중반 이전부터 광주에 살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양방죽을 기억한다. 이 호수는 지금의 계림동 일대에 넓게 펼쳐졌는데, 면적만 6만5000여 평에 달했다고 한다.
규모만큼이나 방죽에 얽힌 일화도 많았다. 우선 방죽이 생겨난 유래에 대해 일설에는 덕림산 아래에서 태어난 김양(金陽)이란 분이 굴착했다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임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 장군이 무등산에서 말을 타고 훌쩍 뛰어내린 자리가 패여 방죽이 됐다고도 한다.
방죽을 판 목적에도 여러 주장이 있었다. 대개는 가뭄을 극복하고 논물을 대기 위해 팠다고 말한다. 하지만 혹자는 풍수설에 빗대 `빛고을’ 광주에 예로부터 불기운이 왕성해 화재가 자주 일어났으므로 이를 잠재우기 위해 팠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숱한 일화에도 불구하고 경양방죽이 처음부터 인공호수였다는 견해에 의문을 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를테면, 조선초에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양방죽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보다 훨씬 작은 방죽들은 기록하면서 왜 이 거대한 호수를 뺐는지, 그 이유가 석연치 않다. 그래서 원래는 자연늪지였던 것을 후대에 조금씩 손질해 인공호수의 면모를 갖춘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여하튼 조선후기에 경양방죽은 전국 굴지의 호수로 손꼽혔다. 자연히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다산 정약용도 마찬가지였다.
다산의 고향은 원래 경기도 남양주다. 그런데 유배를 오기 훨씬 전부터 다산에게 전라도는 꽤 익숙한 땅이었다. 특히 부친 정재원이 화순현감(1777∼1780)을 지낸 시절에 부친의 임지를 오가며 여러 번 광주를 거쳐갔다. 1779년 다산이 지은 `경양방죽을 지나며’란 시도 그 때의 작품이다.
<온갖 잡목 우거져 관로(官路)를 뒤덮고/ 역루(驛樓) 가까이엔 꽃다운 연못 하나 있네/ 얼굴 비치도록 맑은 방죽물은 아득히 깊고/ 저녁 구름은 두둥실 그 위를 떠가네/ 대숲 울창해 말을 몰기 여의치 않을지언정/ 연꽃 만발해 뱃놀이하기엔 제격일세/ 위대한 손 관개(灌漑)의 힘이여/ 일천이랑 논에는 물결이 출렁이네>
이처럼 경양방죽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 경이로운 광경에 경탄했다. 물론 호수의 넓이도 장관이었지만 주변 경치 또한 볼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말 때 전라도에서 오랫동안 군수를 역임한 오횡묵은 이곳을 지나며 둑길에 우거진 숲이 10리를 헤아린다고 했고, 구례 운조루의 주인 유형업(柳瑩業)도 방죽 주변에 그득한 억새와 갈대, 그리고 어부의 낚시질하는 광경이 볼 만하다고 썼다. 그밖에 뭇사람들도 방죽에 가득한 물과 그 위로 만발한 연꽃을 침이 닳도록 칭찬했다.
하지만 경양방죽은 일제시대부터 여러 번 매립위기를 겪었다. 1930년대 말엽 일제는 도시개발을 한다면 방죽을 메워 택지로 만들려 했다. 다행히 많은 뜻 있는 사람들이 합심해 그 계획을 막았다. 비록 지금 광주고 뒷산을 깎아 방죽의 일부를 메우기는 했으나 그 때까지도 방죽의 면모는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 방죽을 땅에 묻은 것은 우리 자신이었다. 1960년대 중반 도시확장을 위해 매립했던 것이다. 일부 반대가 있었음에도 계획은 강행됐고 방죽과 함께 많은 시(詩)와 역사와 추억이 함께 파묻혔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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