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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진산 금정산] 명승고적 - 동래온천의 변천(삼국시대~조선시대)

_______! 2013. 2. 18. 17:29

[부산의 진산 금정산] 명승고적 - 동래온천의 변천(삼국시대~조선시대)


동래온천의 변천(삼국시대~조선시대)
1)삼국시대

우리 나라에서 발간한 각종 문헌자료로 미루어 보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온천의 습관이 이어져 온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 나라에서 온천의 풍속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145년(고 려 仁宗 23년) 김부식의 ≪三國史記≫에 나타난다. 고구려 서천왕(西川王) 17년(268년) 2월에 왕의 아우인 일우(逸友)와 소발(素勃)이란 두 사람이 서로 짜고 병이 들었다는 핑계 로 무리들을 이끌고 온천으로 찾아가 함부로 놀아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신라 성덕왕 (聖德王) 11년(712년) 4월에 왕이 온천으로 행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때의 온 천이 어느 곳인지 언제 발견된 것인지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는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역사 기록상 처음으로 지명이 밝혀진 온천은 바로 동래온천이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7년 (1281)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이란 스님이 펴낸 ≪三國遺事≫라는 역사책에 동래 온천의 이름이 처음으로 나온다. 신라 신문왕(神文王) 2년(682)에 충원공(忠元公)이라는 재상이 동래온천에서 목욕하였다는 기록이다. 동래온천에 관한 좀 더 구체적인 기록을 전 하는 것은 성종 12년(1481)에 양성지·강희맹 등이 펴낸 ≪동국여지승람(1481)≫ 명승고적 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동래온천은 병자들이 목욕을 하면 문득 나아 신라시대 때부터 왕들이 여러차례 이곳에 와 서 목욕을 하였다. 또 그 표시를 남기고자 온천 주위의 네 귀퉁이에 구리 기둥을 세웠다. 온천 의 수온은 계란을 익힐 수 있을 정도로 뜨겁다."

그러나 신라때 어느 왕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온천장의 토박이 노인들 사이에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신라 때의 여왕이 몸에 이상이 생기면 이 곳에 찾아와 부정을 씻었다고 한다. 신라시대의 여왕이라면 제27대 선덕왕(善德王)을 비롯해 제28대 진덕왕(眞德王)과 제51대 진성왕(眞聖王) 뿐이어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또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이 일에 시달린 몸을 풀기 위하여 이 곳을 자주 찾아왔다는 이 야기도 전한다. 이 역시 영도의 태종대(太宗臺)가 태종무열왕이 한때 머물렀던 곳이라는 이야기와도 관련되는 것이다. 아무튼 신라의 왕들이 동래온천을 자주 이용하였다는 기록 은 ≪동국여지승람≫ 이외에도 여러 역사 자료에 나타나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동래 온천은 이미 고대부터 전국에 이름을 떨쳐 왕을 비롯한 귀족들의 병을 고치는 휴양지가 되 어 왔음을 알 수 있다.

2)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동래온천에 관해서는≪고려사≫에 아무런 기록이 없을 뿐 아니라, 그 밖의 역사자료에서도 이렇다 할 기록을 찾을 길이 없다. 동래온천이 고려의 수도 개성과는 거리가 너무 멀고, 또한 고려 때의 기록들이 정치에만 지나치게 기울어 기록을 더욱 찾기 어려운 것 같다. 1740년(영조 16)에 펴낸 ≪동래부지≫에 동래 온천을 다녀간 고려시대 저명인사 들이 동래온천을 노래한 옛날의 시(詩)가 몇편 남아 있을 뿐이다. 그 고시(古詩)들은 당시 동래온천의 풍속을 어렴풋이 전해 주고 있어서 매우 흥미롭다.

고려 고종 때 ≪동국이상국집≫과 ≪백운소설≫을 남긴 유명한 이규보(李奎報)는 동래온 천을 돌아보고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七言絶句)를 남겨놓고 있다.

未信硫黃浸水源 온천물에 유황이 스며들었으니 신비롭기도 하구나
却疑暘浴官朝暾 동래의 아침 해돋는 곳에서 목욕함도 꿈만 같거니와
地偏辛色楊妃汚 외진 땅이라 양귀비도 더럽히지 못하였거니
過客下妨暫時溫 지나가는 나그네여 온천 물에 잠시 멱감아 보면 어떠리

위에서 '양귀비도 더럽히지 못했다'고한 것은 워낙 동래온천의 물이 맑고 깨끗하여 양귀비 가 알았더라면 옛날에 먼저 써버렸을 것이라는 비유이다.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를 지낸 설곡(雪谷) 정포(鄭浦)는 잘못된 정치를 상소하다 벼슬자리에서 쫓겨나고,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의 모함으로 울산에 유배된 일이 있었다.

그는 후일 죄를 면하여 풀려났으나 풍토병인 장려로 2년이나 고생했고 몸도 몹시 허약해져 동래온천을 찾아가 온천수로 목욕하고 요양하며 그 감회를 다음과 같은 5언율시조(五言律 時調)로 남겨 놓았다.

湯泉傳自昔 예부터 전해 오는 온천이여
浴室至今存 욕실도 아직 그대로 있구나
水脈來非遠 물 솟는 자리도 멀지 않아
槽欄尙帶溫 욕조의 언저리 항상 따뜻하네
二年困瀆려 2년이나 지치고 곤한 몸도
半日洗효煩 반나절 목욕으로 씻은듯 하네
此樂除曾點 이 상쾌한 마음 증점(曾點)이 아니면
無人可與論 그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위에서 증점이라는 사람은 중국 춘추시대의 노(魯)나라 사람이다. 공자의 제자이고≪孝經 ≫을 남긴 증자(曾子)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공자가 어느날 여러제자들을 모아놓고 평소에 하고 싶은 일을 말해보라고 하자 모두들 정치라고 했다. 그러나 증점만이 "늦은 봄날에 벗과 더불어 온천에 찾아가 목욕을 즐기고 망대에 올라 바람을 쐬며 시를 읊겠다"고 말했다.

공자도 그 대답에 무릎을 치고 감탄하며, "나도 증점처럼 하겠다"라고 말했다는 중국의 옛 이야기가 있다. 위의 시를 지은 정포는 자신이 느낀 온천욕(溫泉浴)의 깊은 즐거움을 강조 하기 위해 증점의 이름을 인용한 것이다. 이를 미루어서도 동래온천은 아주 오래 전부터 널리 명성이 알려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2년 묵은 병이 반나절 목욕으로 다 나았다는, 비록 표현이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동래 온천의 치료나 요양 효험이 매우 좋 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 충숙왕(忠肅王)때의 문신으로 동지밀직사사(同知蜜直司事)를 지낸 연창군(延 昌君) 박효수(朴孝修)도 동래온천에서 목욕을 즐긴 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놓았다. 동 래온천의 운치와 풍류를 한껏 찬탄한 이 시는 고려시대 동래온천의 규모라든가 풍속 등을 단편적이나마 엿볼 수 있게 한다. 위의 시를 통해 대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정리할 수 있다 . 욕조는 꽤 깊은 장소에 돌을 깨어 석당(石塘)을 만들었고, 탕원(탕원:??이라고도 한다 )은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욕조는 항상 물이 흘러 넘칠만큼 고여 있고, 깊이는 허리에 찰 정도인 2자가량 되었을 것으 로 추측된다. 그리고 특기할만 한 사실은 그 무렵에도 아름다운 여인이 욕객을 욕탕으로 맞아들이고 몸을 씻어주었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으나 아마 온천을 관리하 고 있던 지방 관아에서 귀빈들을 모시기 위해 여비(女婢 : 여종이나 하녀)를 배치해 두지 않았나 생각된다. 노인이 꽃처럼 아름다운 묘령의 여인에게 부축되어 깊은 계곡의 욕탕으 로 들어가고, 그 미녀가 부드러운 손으로 등을 밀어준다는 것은 색정이 넘치는 묘사라고 하겠다. 그리고 모시수건으로 몸을 닦고 침상에 누어 단잠을 자며 꿈속에서 마저 즐긴다는 것은 여유 있게 유유자적하던 선인들의 시정(詩情)이 넘치는 생활을 느끼게 한다.

고려시대의 동래는 울주(蔚州 : 지금의 울산)나 양주(良州 : 지금의 양산)에 딸린 고을로 중앙 관리조차 파견되지 않는 한적한 지역이었다. 또한 수도 개성과는 천여리나 멀리 떨어 진 벽지였다. 그런데도 동래온천의 명성은 널리 떨쳐 일년 내내 개성 귀족들의 발길이 끊 일 날이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동래부지≫에는 앞에서 소개한 詩篇 외에도 고려시대 의 시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한 두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래온천을 노래하고 있는 시들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다시 동래온천의 유명도가 어느 정도 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3) 조선시대

동래온천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고려 때의 귀족적인 온천문화를 벗어나 서민적이 면서도 국제적인 온천으로 서서히 발돋움해 나가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온천의 건강요법 과 치병효능이 일반화되고 온천의 활용이 서민들의 의료구제기관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특히, 동래온천은 각종 병을 고치는 효험이 뛰어나 수많은 서울의 명사와 현관(賢官)들이 먼길을 마다않고 줄을 이어 찾아왔다. 또한 동래온천의 명성은 멀리 일본까지 알려져 국제 적 온천으로 발전했다. 우리 나라를 찾아온 왜인들의 소원에 동래온천의 목욕이 끼일 정도 였다. 조정에서도 이같이 날로 늘어나는 온천의 수요를 적절하게 감당하고 온천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필요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온천의 이용을 제도화하기 위하 여 필요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온천의 이용을 제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 늘날과 같은 근대적인 목욕문화로 본격적인 발전을 이룩해 온 조선조시대의 동래온천을, 시기별로 좀더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가. 조선 초중기 동래온천

조선 초기에는 신흥국가로서 모든 제도를 새로이 정비하면서 온천의 이용도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온천은 보건행정상 매우 중요시되어 관청에서 편찬한 각종 지지(地誌)에는 반드 시 그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1484년(성종 15년)에 완성한 조선시대 유일의 최고법전 인 ≪경국대전≫을 비롯한 ≪속대전≫ 등 각종 법전에도 온천의 운용을 명기하였다. 온천 이 있는 지방의 수령(守令)은 온천에 공공시설을 하고 운영과 관리를 철저히 하도록 제도 화해 두었다.

동래에는 건국 초기에 병마사(兵馬使)겸 판현사(判縣使)가 부임하여 온천의 이용을 지도 하였다. 세종 때에는 첨절제사(僉節制使)와 뒤이어 현령(縣令)이 부임하여 지방행정을 맡 는 한편, 온천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또한 역마(驛馬)를 배치하여 각지에서 모여드는 욕객들의 교통에 편의를 제공하였다. 온정(溫井 : 지금의 목욕탕) 부근에는 관립 여관인 온 정원(溫井院)을 만덕고개 가까이 있는 화미리(華美里)라는 곳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동국여지승람(1481)≫에 기록된 조선시대의 전국 온천은 모두 서른다섯 곳이다. 그 가운 데 세 곳은 오늘날 이미 폐장되었다. 남한에는 동래온천을 비롯하여 부곡·마금산·수안보·유 성·온양·덕산·백암 등 여덟 곳이 있었다. 이들 중 부곡온천은 조선조 초기에 폐장되었으나 지난 1970년대에 다시 새로운 천원이 발견된 것이다.

실학(實學)의 거두인 지봉(芝峰) 이수광은 1614년에 펴낸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고 할 ≪지봉유설≫에서 황해도 평산 연안과 충청도의 온양, 강원도의 이천, 고성과 경상 도의 동래 온천을 가장 좋은 온천으로 손꼽았다. 성종 때의 청백리로 대제학(大提學)을 지 낸 대학자인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동래온천을 전국의 온천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고 적고 있다.

"동래온천은 가장 좋은 온천으로 온천물이 흰 명주를 펴듯이 땅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그 물을 끌어들이면 섬지기가 되고, 수온은 끓을 정도며 마시면 따끈하게 데운 술맛 같 았다. 왜인들이 외교 관계로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동래온천에서 목욕하기를 간절히 원하 고, 오랑캐의 왕래가 빈번하여 州縣에서는 그 고통을 견디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선조와 광해군 때의 명신이자 대석학으로 손꼽히는 정구(鄭逑)가 남긴≪蓬山浴行錄≫은 1617년 그의 나이 75세 때에 고향 성주에서 동래온천으로 찾아가 요양하고 돌아가기까지 의 45일 동안에 있었던 일을 일기체로 자상하게 기록한 기행문이다. 이 책은 당시 그를 모 시고 따라온 제자들이 엮은 것으로 그때의 동래온천의 시설 등이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 다.

"온정의 안팎은 신라왕이 지었다는 석감(石龕:돌로 만든 감실로 오늘의 욕조를 말 한다.) 이 있는데 한 감실에 5~6인이 들어갈 수 있다. 온정의 윗부분에는 많은 구멍이 있어 물이 나오고, 수온은 손발을 담그기가 어려울 정도로 뜨거웠다. 욕조 밖에는 외석정(外石井 : 욕 조바깥에 물을 받아두는 곳)이 따로 있었고, 온수를 별도로 떠다가 식혀서 목욕할 수 있는 목탕(木湯 : 나무로 만든 욕조) 시설도 있었다. 온천 주변에는 관립 여관인 온정가가 욕객 이 머물 수 있도록 하고 있을 뿐아니라, 귀빈 일행을 모시기 위해 따로 임시 가옥을 짓기도 하였다."

≪浴行錄≫에는 정구가 의사의 약물치료와 함께 행한 온천요법이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한층 흥미롭다. 30일간 목욕을 한 정구는 처음에는 시탕(試湯 : 물을 떠내어 가볍게 몸을 씻음), 다음은 목탕, 그리고 외석정에 이어 마지막으로 욕조에 들어가는 순서로 진행 하였다. 목욕 횟수도 처음에는 이틀 걸러 한번, 다음은 하루걸러 한번씩 하다가 매일하는 방법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하루 동안에도 처음에는 1회, 다음은 2회, 끝날 무렵 일주일은 3회씩 하는 과정을 밟았다. 오늘날의 온천요법과 꼭 같다. 정구가 한 달간의 목욕을 끝내자 안색과 기혈이 전보다 훨씬 좋아져 보는 이들마다 모두 동래온천의 효험이라 놀라워했다 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한편, 고려 말기부터 남쪽 해안 일대를 끊임없이 쳐들어와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았던 왜구 는 조선왕조의 큰 근심거리였다. 특히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와 가장 가까운 동래 부산포는 제일 손쉬운 약탈의 대상이 되어 이곳 바닷가 주민들은 항상 왜구의 공포에 떨어 야 했다.

이에 1707년(태종 7년,≪태종실록≫)에 일본 무로마찌 막부(室町幕府 )와 통상무역교섭하 여 부산포(富山浦)와 내이포(乃而浦 : 지금의 진해시 웅촌)를 일본인의 배가 닿을 수 있는 곳으로 정해 주었다. 그때 일본 사송선(使送船 : 사신을 보내는 배)이 닿은 곳은 지금의 범 일동인 자성대 서북쪽 부근이다. 그러나 머물 곳을 정해준 뒤에도 왜구들은 틈만 나면 노 략질을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1419년(세종 원년)에 이종무(李從茂) 장군을 앞세워 대마도 를 크게 무찌르고 교섭을 끊어버렸다. 통상이 막혀 어려움을 겪게 된 대마도의 우두머리 쇼오사다모리는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교역을 간청했다. 1423년(세종 5년)에는 유화정 책으로 다시 부산포와 내이포를 열어 주고, 이어 1426년(≪世宗實錄≫ 世宗 5年, 8年)에는 염포(鹽浦 : 울산 방어진과 장승포 사이)까지 문화를 열어주었다. 이것이『三浦開港』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의 공식적인 입국이 허용되고 교역이 자유로워지자 조선땅을 찾는 일본인 들의 수는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동래온천의 명성이 알려지자 일본인들은 어느 포 구로 들어오건 동래온천으로 몰려와 목욕을 하고자 하였다. 목욕을 하기 위해 동래온천으 로 몰려드는 일본인들로 인근 주민들은 여러가지 불편을 겪기에 이르렀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들 치마같이 벌렁거리는 하까마〔袴〕를 걸친 일본인들이 어린아이 기저귀 같이 남자 의 음부만 싸서 가리는 훈도시만 하고 맨살을 드러낸 채 다니는 꼴을 본 주민들은 대낮에 도깨비라도 본듯 혼비백산했던 것이다. 특히, 아녀자들은 멀리 일본인의 모습이 보이기만 해도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숨기기에 바빴고, 나이 많은 노인들은 그들의 행색에 혀를 내두르며 나라꼴을 한탄했다.

각처에서 관청으로 항의를 하고 조정으로 탄원을 하기도 했다. 주민의 원성이 심해지자, 1438년(세종 20년)에는 일본인들의 온천 사용에 관한「溫井規則」을 제정하여 부산포로 입국하는 일본인들만 동래온천에서 목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온천에 한번 들른 일본인 들은 좀처럼 떠날줄 모르고 오래 머물러 또한 큰 폐단이 되었다. 이에 1440년(세종 22년)에 는 일본인들이 3일에서 5일이상 동래온천에 머물지 못하도록 더욱 엄격히 규정하였다.

그후 왜구의 약탈이 다시 일어나므로 1443년(세종 25년) 두번째로 대마도를 정벌하여 일본 인들은 일체 건너올 수 없게 하였다. 눈치를 보고 있던 대마도주(對馬島主)는 광준(光俊 )이라는 중을 파견하여 교역을 간청했다. 그때의 교섭사항 가운데 하나로 동래온천의 목욕 이 들어 있었다. 동래온천에 대한 일본인의 애착이 거의 결사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 나 조정에서는 다시 부산포에 붙박아 살고 있는 일본인 한 가구에 한하여 동래온천 목욕을 허락했을 뿐 다른 것은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대마도주는 계속해 사신을 파견 하여 끈덕지게 교섭을 간청하였다.

1451년(문종 원년) 정월에는 대마도주가 직접 예물을 갖고 찾아왔다. 그는 특별한 외교 접대로 동래온천에서 목욕을 하였다. 이때부터 대마도주에게는 동래온천의 목욕을 허락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를테면 동래온천이 친선외교의 무대가 되었던 것이다. 일반 일본인 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동래온천의 이용이 허락되지 않았다. 어쩌다가 일본인 사신들 중에 서 난치병에 걸린 자가 외교적으로 청원을 하면 목욕과 체류를 허락해 주었을 뿐이었다.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일양국의 국교는 다시 단절되었다. 왜관도 완 전히 폐쇄되고 말았다.

왜관은 일본인의 출입을 허용한 포구에 설치해 준 관사로서 일본인 들을 접대하고 그들이 머물며 물건을 팔고 사도록 한 곳이다. 후일에는 일본인들의 집단 거류지를 말하기도 했다. 부산의 왜관은 개항과 동시에 자성대(子城臺 : 지금의 동구 좌천 동)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전에도 일본과의 관계 악화나 회복에 따라 여러 차례 설치와 폐지를 거듭해 왔었다. 1598년(선조 31년)에 임진왜란이 끝나자 일본은 다시 강화 교섭을 청해왔다. 1601년(선조 34년)에 이르러 절영도(絶影島 : 지금의 영도)에 임시왜관 을 설치하였다. 이어 1607년 선조 40년에는 지금의 수정동 침례병원 부근에 두모포왜관이 설치되었다.

두모포왜관은 그후 일본인들이 선박출입이 불편하다고 계속 옮겨줄 것을 요청하여 우여곡 절 끝에, 1678년(숙종 4년)에 지금의 용두산 부근인 초량왜관으로 옮겨졌다 숙종 4년 (1678년) 두모포왜관의 선박 출입 불편 등의 이유로 일본의 요청에 의해 신초량(지금의 용 두산 일대)으로 옮겨 초량왜관이라 하였다. 그 면적이 약 11만평에 이르렀으며, 동남의 두 면이 바다와 접했다. 이후부터 두모포왜관을 구관(=고관) 이라 하고, 초량왜관을 신관이라 부르게 되었다). 수정동 일대를 지금도 구관(舊館)이라 부르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다.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삼포를 개항하자 일본인의 입국은 더욱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 그러나 일본인들에게는 왜관 안에서의 일반 통상은 허용되었으나 왜관 밖의 출입은 엄격 히 통제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잠상(蠶商 : 밀무역)과 부녀자 겁탈 등을 막기 위해서였다. 당시 부산포에 온 일본상인들은 지금의 동광동 1가 상업은행 부근에 마련한 개시대청(開 市大廳 : 임시 거래소)에서 우리나라 상인들을 만나 물건을 서로 흥정하여 사고 팔았다. 그 들은 주로 유황, 약재, 동, 철 등을 가져와 쌀, 콩, 면포, 인삼 등으로 바꾸어 갔다. 그러나 출입증을 얻기도 까다롭고 수수료 등으로 많은 돈을 내야 했기 때문에 몰래 암거래를 하는 일이 많았다. 잠상행위가 발각되면 효수형(梟首刑 : 목을 베어서 나무에 매달아 일반인들 에게 두루 보이는 형벌)에 처하였는 데도 날로 성행하기만 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상인들은 왜관을 벗어나 민가로 숨어들어 여자를 겁탈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때로는 문지기를 매수하여 작부 따위의 여자를 구하기도 하여 잠간(潛姦)을 일삼기도 했다 . 조정에서는 일본상인들이 주민에게 끼치는 이러한 여러가지 해악 때문에 수차례에 걸쳐 각종 조약과 법령을 강화하며, 그들의 왜관 밖 출입을 한층 엄격하게 제한했다. 때문에 상 당한 기간 동안 일본인이 동래온천을 이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일본인 입국자 가 늘어나는 만큼 그들의 불법적인 행동도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들은 왜관 안에서 조 선 관리들을 폭행하기도 하고, 때로는 관문밖으로 뛰쳐나와 난동을 부리기도 하였다.

1671년(현종 2년)에는 '두모포왜관'의 이전을 요청하기 위해 부산에 온 일본사절이 일이 잘 해결되지도 않고 공교롭게도 왜관에 불까지 나자 울화로 죽는 일이 생겼다. 이에 자극 을 받은 일본인 50여 명이 순식간에 폭도로 변해 거리로 뛰쳐나와 난동을 부렸다. 그들은 관 원의 제지를 무력으로 물리치고 동래온천으로 몰려가 목욕을 하고, 양산까지 돌아다니기 도 하였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크고 작은 행패는 그 뒤에도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동래온 천은 늘 그들이 탐내는 표적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조 후기에 접어들어 국력이 극 도로 쇄약해지고 1876년「병자수호조규」가 체결되자 동래온천의 경영권 일부는 일본인 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조선시대 중기의 동래온천 목욕시설과 관리 실태를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다. 조선 중기에 들면서 동래온천의 이용은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 라 일본인까지 이용하게 되자, 시설의 확충은 물론 새로운 천원(泉源)의 개발이 필요하게 되었다.

신라 때부터 땅 속에서 저절로 솟아오르는 자연용출의 온천은 오랜 사용으로 물이 마르게 되었다. 이에 숙종에서 영조시대 사이에 동래온천의 대대적인 정비와 보수가 뒤따르게 되 었다. 1691년(숙종 17) 동래부사 김홍복(金洪福)은 새로운 천원을 파고 온정옆에서 행랑 5칸이 딸린 7칸짜리 '온정가(溫井家)'라는 관공서를 세웠다. 온정가에는 '온정직(溫井直 )'이라는 관리 한 사람을 고정 배치하여 온천의 관리를 맡겼다.

이후 1729년과 1740년에도 부사(府使)들이 계속 온천시설을 고치고 확장하였으나 늘어나 는 온천의 대대적인 정비와 보수에 착수하였다. 그는 옛 천원 근방을 굴착하여 수량이 풍 부한 새 천원을 발굴하였다. 이듬해에는 9칸의 욕사(浴舍 : 목욕탕)까지 새로 건립해 욕객 의 불편을 크게 덜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때 세운 비석이 "온정개건비(溫井改建 碑)"로 지금도 온천동 녹천호텔 옆의 빈터에 남아 지방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온정개건 비에 쓰여있는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바로 동래온천의 역사를 전하고 있는 매우 귀 중한 자료이다.≪東萊府誌≫ 산천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온정은 동래읍의 북쪽 5리에 있는데 금정산에서 발원한다. 탕에 들어가 목욕하면 온갖 질 병이 낫는다. 옛날에 지은 건물은 낡았고 돌로 만든 두 개의 탕도 막혀버렸다. 이에 강필리 공이 온정을 다스려서 9칸으로 고쳐 지었는데 남탕과 여탕을 구분하였고, 상쾌하고 화려하 기가 마치 꿩이 나는 듯 으리으리 하였다. 지키는 집을 짓고 안에는 비를 세웠다···."

위의 비문으로 보아 아마도 그때부터 동래온천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오늘날 공중 목 욕탕식의 남녀욕탕 구분이 본격화되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온정개건비는 원래 욕실 안에 세워진 것이었으나 1923년 동래면(東萊面) 경영의 공중목욕탕을 신설하면서 그 건물의 입구로 옮겨졌다. 그러나 일제의 시가지계획으로 한때 땅 속에 파묻혀 없어진 것을 해방 후 주민들이 찾아내 지금의 자리에 세워 보존하게 되었다. 현재 온정개건비 곁에는 낡은 석조(石造 : 돌로 만든 물통) 하나가 있는데, 이것이 그 당시 남탕으로 사용된 것이라 고 전해진다. 여탕의 것도 있었는데 일제시대 때 관청을 지으면서 주춧돌로 사용했다고 하 나 확인할 수는 없다.

나.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의 동래온천

1876년(고종 13)「병자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체결로 쇄국의 빗장을 풀고 항구를 개 방하게 되면서부터, 일본은 한반도로 서서히 세력을 뻗치게 되었다. 종전의 엄격하던 왜관 질서도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1877년에는「釜山口租界條約」이 체결되자 종전의 왜관 안에 일본 조계(租界 : 외국의 행정권이 행사되는 지역)가 생기고 외교관이 상주하게 되었 다. 이로써 일본인들은 부산항을 자유롭게 드나들게 되고, 왜관안의 땅과 건물들을 자기네 들 것으로 만들어 살면서 마음놓고 장사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일본돈도 쓸 수 있게 되 었다.

그러나 개항 당시 동래지방의 주민들이 일본인들을 보는 눈은 매우 적대적이었다. 왜관시 대부터 출입을 통제하며 경계해 왔던 수백년 간의 전통이 있었던 데다가, 대원군(大阮君 )의 쇄국정책으로 부산에 척화비(斥和碑 : 대원군이 외국인을 배척하기 위해 세운 비)를 세운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여서 민족적 자존심이 강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실제로「병자 수호조규」가 체결된 이후 전국에서 가장 먼저 민중의 배일운동이 일어난 곳이 동래였다.

1879년(고종 16년) 하나부사〔化房〕라는 일본 공사(公使)가 부산항의 측량을 위해 일본 군함을 타고 입항했다. 이때 군함에 타고 있던 일본 사관과 수병들은 조약상 자유왕래가 허락되어 있으니 배에서 내려 동래온천으로 가자고 했다. 그들이 동래성으로 들어가려 하 자 우리 관원들이 그들의 통과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지켜본 동래 주 민들이 문루와 성벽으로 몰려와 사정없이 돌멩이를 내려 던졌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피 할 사이도 없이 몇 사람이 상처를 입은 채 그들은 황급히 도망쳐야 했다. 이같은 주민들의 반발을 예상했던 것일까.「병자수호조규」가 체결된지 얼마되지 않아 제정된「일본인통 행수칙」에는 일본인들이 동래를 왕래하더라도 관아(官衙 : 관공서)나 민가에는 들어갈 수 없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래 부산의 장이 열리는 날에도 출입을 금하였다. 1879년(고종 16)에도 비슷한 통행수칙을 만들어 그들의 출입과 활동을 매우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그러 니까 조약상으로는 일본인의 자유왕래가 보장되어 있었으나, 그 때까지는 실제적인 자유 왕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약상의 자유통행권이 유명무실해지자 일본측에서는 우리 조정을 협박하여 1882년 8월 30일「朝日修好條規續約」을 체결하고 새로 통행구역을 규정하였다. 각 항의 간행이정은 사방 50里(朝鮮里數)로 하고 이후 다시 조정한다 라고 하였다. 1883년「議訂朝 鮮國間行里程約條」를 체결하여 기장·김해·양산을 비롯한 동래온천의 통행권을 얻어냈다.

그러나 때마침「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은 일본식 신식군대와 민비정권(閔妃政 權)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구식군대의 반란이었다. 때문에 부산의 일본인들은 대원군(大 院君)의 재집권을 두려워하여 자유왕래를 삼갔다. 임오군란이 일본과 청국의 무력개입으 로 수습되자, 일본인들은 때를 만난 듯 동래온천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한꺼 번에 떼를 지어 몰려들자 부근 주민들 사이에 노골적인 불만이 일어났다. 일본 영사(領事) 마에다〔前田〕는 충돌을 염려하여 잠시 일본인들의 온천 출입을 금지시켰다. 뒤이어 1884년 11월 29일「조선국간행이정약서부록」을 체결하여 언양·창원·마산·삼량진·가덕도 까지 통행을 확대하였고,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그들의 오랜 소망이었던 동래온천의 자유 왕래가 예사롭게 되어버렸다.

한편, 이 무렵의 동래온천은 조선을 삼키려는 강대국들의 세력다툼 속에 극도로 정국이 혼 미하여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채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 동래온천의 행정관원으로 배 치했던 '溫泉監官'도 어느새 폐지되었다. 온천마을인 금산마을 주민 가운데 금정산성 별장 (別將)이라는 벼슬아치가 그 소임을 대신 맡았다. 그러나 사실상 금산마을 사람 전체가 공 동 소유처럼 사용·관리하며 수익권도 서로 나누어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동래온천 이 행정적 공백상태에 놓여 표류하고 있는 틈을 타 일본영사 마에다는 1884년「간행이정 약서부록」의 체결에 이어 동래부사에게 동래온천 목욕탕의 임차를 교섭하였다. 이때 동 래부사는 공중목욕탕의 남녀 욕탕 중 여탕의 일부를 임시로 빌어주게 되었다. 일본측은 즉 시 차용한 욕탕을 다시 남녀 두 개의 탕으로 나누어 일본인 전용 목욕탕으로 만들었다. 일 본인 전용 목욕탕은 부산의 일본거류민단에서 경영 관리하였고 간수를 고정 배치시켜 지키게 하였다.

동래온천 역사상 일본인에게 우리의 온천 권한을 빼앗긴 최초의 일이었다. 비록 일부이기 는 하지만 온천탕의 사용권과 경영권 일부가 일본인에게 돌아가자 온천 마을사람들의 항 의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에 대한 악감정이 뿌리깊이 남아 있는 데다가, 바로 곁 에서 일본인들이 함께 드나들며 목욕을 하게 되자 여간 심기가 불편하고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동래부사도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호락호 락 내줄 일본인들이 아니었다. 결국 영사가 몇 차례 바뀌고, 그때마다 반환을 요구했으나 그들은 들은 척도 않았다.

1884년 말에「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갑신정변은 일본의 세력을 업은 김옥균(金玉均)·박 영효(朴永孝) 등의 개화당(開化黨)이 청(淸)의 세력에 의지하고 있는 수구세력을 물리치려 고 일으킨 정변이었다. 그러나 청군의 출동으로 3일 천하로 그치고 주모자들이 일본으로 쫓겨간 것은 물론, 개화당을 지원한 일본공사도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귀국해버렸다. 갑신 정변의 소문이 동래부에까지 퍼지자, 주민들은 일본인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이번 기회 에 일본인들을 깡그리 몰아내고 말아야 한다며 공공연히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이 늘어갔 다. 부산의 일본 조계(租界)에 살고있던 1,700여 명의 일본인은 크게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원산 쪽에서 일본인 부녀자들이 계속 부산 조계로 피난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사 태의 흐름을 조심스럽게 지켜보며 한국인들의 공격이나 기습에 대비해 무장까지 하고 있 었다. 두 나라 국민 사이의 감정이 이렇게 험악하게 되어가자 서로의 왕래는 모두 단절되 었다. 두 나라가 서로 충돌을 걱정하여 모두 온천을 금지시킨 것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일 본측은 이 때에야 빌려쓰고 있던 일본인 전용 목욕탕을 슬그머니 내여 놓았다. 약삭빠른 일본인이 우리 주민들의 마음을 풀어보고자 은근히 화해의 비소를 던져본 것이 아니었던 가 한다.

1885년 8월과 1886년 4∼5월에는 일본 오사카 등지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출입하는 일본인들에 의해 전염되어 영남 일원을 휩쓸게 되었다. 이 일로 일본인에 대한 동래지방 주민의 악감정은 더욱 골이 깊어지고 말았다. 결국 이렇게 보이지 않게 쌓여가던 두 나라 국민간 의 감정이 끝내 마주쳐 폭발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1886년(고종 23년) 9월 26일 의 일이다. 이날 아침 우리나라 부녀 두 명이 동래온천의 일본인 욕탕을 지키는 간수소(看 守所) 앞을 지나다가, 마쓰하라라는 일본인 간수에게 농담삼아 먹을 것을 좀 달라고 말을 걸었다. 금산마을에 사는 그 부녀자들은 들일을 나갈 때면 늘 간수소 앞을 지나치게 되어, 마쓰하라와는 서로 친숙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지냈던 것이다. 마침 그 전날 간수소에 도 둑이 들어 화가 나 있었던 마쓰하라는 부녀자들의 청을 쌀쌀하게 거절하면서 욕설까지 퍼 붓자, 서로 심한 언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온정을 경비하던 우리 별장이 달려와 그들의 싸 움을 말리고 부녀자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다음날 하오, 부녀자중의 한 사람이 전날의 울분을 참지 못해 일본인 간수소로 다 시 찾아가 마쓰하라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화가 치민 마쓰하라는 그녀를 완력으로 집안으 로 끌고 들어가 폭행까지 범하고 말았다. 이때 그녀의 비명 소리에 달려온 마을사람 20여 명은 마쓰하라를 끌어내어 죽도록 뭇매를 때린 것은 물론, 간수소까지 깡그리 부수어 버리 고 말았다. 별장에게서 이 사건을 보고 받은 동래부사 김학진(金學鎭)은 바로 관헌을 현장 에 보내어 진상을 조사시켰다. 그 무렵, 동래부에는 동래온천으로 목욕하러 온 일본인들이 우리 부녀자들을 희롱하거나 겁탈하는 일이 빈번하여 주민들의 원성이 끊이지 않고 있었 다. 김학진 부사는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 받고, 당장 일본 공사를 불러들이게 하여 매 우 강력한 태도로 요구했다.

"····이번 일의 책임은 전적으로 일본측이 져야 합니다. 당장 목욕탕 앞의 간수소를 철폐하 고 당분간 일본인들의 내욕(內浴)을 자제시켜 주시오! ···"
라고 요구하자. 오히려 일본 공사는 오히려 정색을 하며 언성을 높여 반론을 제기했다 한 다. 그 내용의 일부를 살펴보면,

"무슨 소리요, 부사. 우리가 별도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사건의 진상은 전혀 다르오. 우리 일본인 간수는 그 여자가 배가고파 죽을 지경이니 밥을 좀 달라고 애걸하기에 너무 불쌍한 나머지 자기 내실로 데려가 밥 한 그릇을 먹였을 뿐인데, 이를 잘못 본 마을 사람들이 몰려 와 행패를 부렸다고 하오. 필시 이 일은 우리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를 이간질 하려는 나쁜 무리들이 꾸민 소행이 틀림없으니 다시 잘 조사해 보시오."

어쨌거나, 이 사건은 일제침략기의 동래온천을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인사이에 있었던 미 묘한 민족갈등을 단적으로 드러낸 일이라 하겠다. 기록에 따르면, 위의 사건이 일어난 3년 후인 1889년(고종 26년) 무렵 동래 온천 주변에는 30∼40호의 민가(金井里)가 마을을 이루 고 있었다고 한다. 온천장으로 불리는 지금의 온천1동이 서서히 형태를 갖추고 있을 때였 다. 이 때부터 동래부에서는 온천장 일대를 공식적으로 '금정온천'이라 불렀다.

그때까지도 온천수는 평지에서 저절로 솟아올랐으며, 그 온도가 너무 뜨거워서 화강암으 로 만든 욕조에 받아 식기를 기다려서 목욕을 하였다. 당시에는 이미 공중목욕탕의 운영으 로 온천목욕이 대중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목욕 풍속은 매우 여유 있고 유유자적하여 긴담뱃대를 물고 욕탕에 들어가는 노인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 인들은 1883년 이후 우리 공중목욕탕의 여탕을 빌려 남녀탕으로 다시 나누어 사용하고 있 었음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다. 그러나 1898년(광무 2년)에는 일본 영사가 우리 나라의 궁내부(宮內部)와 직접 동래온천 임차계약 교섭을 벌였다. 그들은 곧 10년 계약으 로 온천탕 일부를 사용하고 부속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임시 경영권을 얻 어 쓰다가 보다 강력한 차용권을 얻게 된 일본인들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온천지역 침투 에 나서기 시작했다.

일본 거류민단은 온천 차용권을 다시 일본 나가사키현 야쓰시〔八頭司〕라는 업자에게 위 탁하여 경영하게 하였다. 야쓰시는 일본식 시설을 갖춘 새 목욕탕과 부속 건물을 지었다. 부속 건물에는 '야쓰시 여관'이란 간판을 걸었다. 부산항 개항 이후 동래 온천장에 처음 들 어선 일본인 여관이었다. 일본인 전용 목욕탕 겸 여관이 두번째로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5년 후인 1903년(광무 7년)의 일이었다. '광월루(光月樓)'라는 여관이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일본인 대부호 도요타〔豊田福太郞〕가 동래 온천에 별장을 세우기도 했 다. 도요타는 우리 나라의 식량을 사다가 일본에 가져가 팔고 일본의 비료를 우리 나라에 팔아온 무역업자였다. 그는 만성 신경통으로 매우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동래 온천에서 온 천요법으로 크게 효험을 보자, 풍치가 아름다운 금정산 자락에 아예 별장을 지어 오랫동안 머물 작정을 하였다. 그는 그후 계속한 온천요법으로 신경통이 완쾌되자, 1907년에 '봉래 관'이라는 대규모 여관을 건립하였다. 바로 오늘날 "동래관광호텔"이 있는 자리이다. 당시 동래 온천에 일본인 거주자는 불과 여섯 가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연이어 새로운 여관과 별장들을 짓고 확장해 나갔다. 조선인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며 가옥들도 하나 둘 사들여 온천장의 실권은 그들의 손아귀에 넣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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