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추석이다. 한가위이고 중추절이다. '중추절/한가위/추석'은 어떻게 그런 이름을 갖게 됐을까? '중추절(仲秋節)'은 가을을 셋으로 나눠 음력 7월을 맹추(孟秋), 8월을 중추(仲秋), 9월을 계추(季秋)라고 불렀던 게 유래다. <예기> 6권 '월령'편에 나오고 <회남자> 5권 '시칙훈'편에도 나온다.
한가위는 '가배'에서 왔다. 신라 유리왕 9년 음력 7월 기망(16일)부터 8월 보름(15일)까지 왕실 후원으로 열렸던 길쌈 컨테스트 이름이 가배(嘉俳)였다. <삼국사기> 1권 '신라본기'에 나온다. '가배'가 음운변화를 거쳐 '가위'가 됐고 거기 '크다'는 뜻의 '한'이 붙어 '한가위'가 됐다. 한가위는 '한 가운데 날'이라는 뜻이다.
'추석(秋夕)'은 어디서 나온 말일까?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중추(中秋)와 월석(月夕)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들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예기(禮記)>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전자는 민간어원설이지만 그럴듯하므로 많이들 받아들이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은 '추석'의 어원을 <예기>의 '조춘일 추석월'에서 찾았다.
눈길을 끈 것은 두 번째의 '<예기>유래설'이다. '추석'이 <예기>에 나오는 말인데 중국 사람은 안 쓰고 한국 사람만 쓴다? 이상하다. 좀 살펴보기로 했다. <네이버>와 <다음>, <엠파스>와 <야후>, <네이트>와 <파란>의 백과사전에서 '추석' 항목을 찾아봤다. 그중 '추석 <예기>유래설'을 주장한 것은 <네이버> 하나뿐이었다.
"이 말(추석)은 <예기(禮記)>의 '조춘일(朝春日) 추석월(秋夕月)'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중추절(仲秋節)이라 하는 것도 가을을 초추·중추·종추 3달로 나누어 음력 8월이 중간에 들었으므로 붙은 이름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추석’ 항목).
미심쩍다. <예기> '무슨 편'이라는 말도 없고 인용구절도 도무지 해석이 안 된다. 또 한문은 대구를 이루는 법인데 '조춘일'과 '추석월'은 그것도 아니다. 그리고 가을 세 달을 가리키는 말이 초/중/종추였던가? 내가 알기로는 맹/중/계추다. 초추나 중추는 더러 들어봤다지만 종추라는 말은 첨 봤다. 어찌된 일일까?
<조선일보>의 자매지 <엔케이조선> 탈북자 동호인 게시판에도 <네이버오픈백과>를 인용한 <예기>의 '조춘일 추석월'이 등장하고...
암튼 <예기>를 찾아봤다. 한 중국학 사이트에서 내려받아 놓은 <예기> 화일이 있었는데 주빈(未彬)이 편집한 <예기훈찬(禮記訓纂)>판이었다. 그러나 이 <예기> 화일에는 그런 말이 없었다. 낱말을 쪼개서도 찾아봤지만 대답은 '찾는 문자열이 없습니다'였다.
그럼 <예기>가 아니라면 '조춘일 추석일'의 출전은 어디일까? 그 구절로 구글 검색을 해봤다. <네이버>의 <예기>유래설을 복사한 게시판이나 블로그, 개인 홈페이지가 수도 없이 많았다. 출처를 밝힌 것도 있지만 그러지 않은 게 대부분이다. 개인 글이나 페이지 뿐 아니었다. 초중고등학교와 정부기관, 기업과 사회단체 사이트에도 <예기>유래설이 범람했다.
목사님들의 설교문에도 <예기>의 '조춘일 추석월'이 등장한다.
정보를 다루는 게 전공인 대학, 언론, 사찰,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일보>의 북한관련 사이트인 <엔케이조선>은 <네이버오픈백과>를 인용해 <예기>어원설을 소개했고, 경남대학 사이트에는 박사과정 학생이 쓴 글에 출처 없이 <예기>어원설이 나왔다. 강화도 전등사의 홈페이지와 포항중앙교회 담임 목사님의 2004년 9월26일 설교문에도 등장한다.
남궁영 교수가 <중부일보>에 기고한 글에도 나오고 <사천신문>과 <경기북부 시사신문>의 문화기사에도 나온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두 추석 관련 기사에도 나왔고, 정치인 이인제 홈페이지 <아이제(IJ)월드>의 "대한민국 칼럼"에도 소개됐다. 이들은 전혀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조춘일 추석월'은 정치인 웹사이트에도 (출처없이) 인용되고....
국내만이 아니다. <네이버>의 추석 <예기>유래설은 압록강을 건너고 태평양을 건넜다. 중국 연변의 <조선족 문화발전 추진회> 관리자가 올린 게시물에도 등장하고,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발행되는 한인 신문 <코리안아메리칸 저널>에도 소개됐다.
그뿐 아니다. 포탈 '지식' 싸이트에는 추석 <예기>유래설이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 있다. <네이버>뿐 아니라 <야후>와 <엠파스>와 <다음>과 <파란>의 지식 사이트도 마찬가지다. 또 대학생들의 에세이나 논문을 모아서 파는 <레포트월드>도 추석 <예기>유래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잘못된 지식이 쌓이고 퍼질 뿐 아니라 돈으로 매매까지 되고 있었다.
돈받고 파는 레포트에도 '조춘일 추석월'은 범람한다.
<네이버> 백과사전의 위력이 대단하다. 그러나 <네이버>는 왜 <예기>유래설을 주장한 것일까? 이번엔 한문만 가지고 중국말 사이트를 뒤졌다. 그랬더니 관련된 타이완, 홍콩, 중국 사이트가 셀 수 없이 걸려 올라왔다. 그 중에서 홍콩 <야후>의 지식 사이트의 중추절 소개글을 한번 보자.
"음력 8월15일은 우리나라 전통 중추절이다. 중추절에는 높은 하늘과 큰 보름달이다. 원래 황제가 봄에는 태양에 제사하고 가을에는 달에 제사하는 관습에서 나왔다. <예기>에 이르기를 '천자가 봄에는 태양에 제사하고 가을에는 달에 제사한다. 태양 제사는 아침에 드리고 달 제사는 저녁에 올린다'고 했다." (農曆八月十五, 是我國傳統的中秋節, 中秋節的主角則是高掛天空的一輪明月 原本, 帝王就有春天祭日, 秋天祭月的禮制 <禮記>上說:「天子春朝日, 秋夕月. 朝日以朝, 夕月以夕」, http://hk.knowledge.yahoo.com/question/?qid=7006022200251)
홍콩 <야후> 지식 사이트를 보니까 '조춘일'이 아니라 '춘조일'이다. <예기>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홍콩 <야후>의 인용구가 좀 다르다. <네이버>의 '조춘일'은 '춘조일'의 오타였던 것이다. 이젠 대구가 맞는다. 또 홍콩 <야후>에는 '천자'라는 주어가 나오므로 해석이 가능해 진다. 그러나 바로 잡힌 인용구도 <예기> 화일에는 없었다. 그래서 '천자춘조일 추석월'을 한문으로 바꿔 다시 중국말 사이트를 검색했다.
결론만 말하자. 출전은 <예기>가 아니라 <사기(史記)>였다. 그나마 사마천의 <사기> 원문이 아니라 송나라의 배인()이 여러 <사기> 주석을 모아 원문과 함께 편집한 <사기집해(史記集解)>의 구절이다. 그것도 배인의 말이 아니라 그가 인용한 응소(應 )의 주석이었다.
심지어 <엠에스엔>에도....
사마천의 <사기> 제12권 '효무본기'에 나오는 "天子始郊拜泰一 朝朝日,夕夕月"라는 구절에 대해 응소가 "天子春朝日,秋夕月,拜日東門之外,朝日以朝,夕月以夕"라고 주석을 단 적이 있다고 배인이 기록한 것이다. (자꾸 해석해 주면 버릇되므로 그냥 둔다-<딴지일보> 버전^^. 각자 번역해 보시던가 아니면 그냥들 넘어 가시라.)
여기 나오는 '추석월'은 '(천자가) 가을 저녁에 달에게 제사 드린다'는 뜻이다. 천자의 가을 제사는 8월 보름에 이뤄졌으므로 그게 추석의 기원이라고 봐 줄 수 있겠다. 그럴 경우 '추석'이라는 말의 출전은 배인의 <사기집해>이고, 그걸 처음 쓴 사람은 응소가 된다.
응소의 주석 출전이 <사기집해>에서 <예기>로 바뀐 이유를 모르겠다. 암튼 이건 중국인들 잘못이다. <네이버>는 그걸 베껴다가 한국 사이트에 유통시켰다. 이건 <네이버> 잘못이다. 그나마 '춘조일'을 '조춘일'로 잘못 베끼는 바람에 바로 잡는 시간과 노력이 배로 들었다. 역시 <네이버> 잘못이다. 이 기회에 포탈 사이트와 네티즌들께 제안 좀 드리자.
무엇보다 포탈 사이트들은 '많은' 정보보다는 '정확한' 정보 제공에 힘들을 쓰시길 빈다. 명색이 '백과사전'이라면서 이게 뭐냐. 정보는 돈과 다르다. 돈은 많을수록 좋지만 정보는 정확할수록 좋다. 많기만 하고 부정확한 정보는 쓰레기만도 못하다. 독자들의 시간/노력 잡아먹는 아귀다.
<네이버타임즈> 10호에도 '조춘일 추석월'이 인용돼 있다.
그리고 정보 좀 독자적으로 생산하시라. 다른 나라 꺼 베끼지 좀 말고.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도 언젠가 들통난다. 베낄 때는 좀 제대로 베끼고 출처는 명시하시라. 표절도 도둑질이지만 잘못 베낀 표절은 멍청한 도둑질이다.
<네이버>백과사전이 '추석' 항목을 빨리 수정해 주면 좋겠지만 남 장사하는 데 이래라 저래라 하기는 좀 그렇다. 알아서 하시라. 자주 가서 검사는 해 보겠다. 독자 분들도 한번씩들 가서 보시라. 기념 삼아 캡쳐해 두는 센스를 발휘하셔도 좋겠다. 권력처럼 지식도 감시자가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네티즌도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그럴 듯해 보여도 도끼눈으로 텍스트를 읽으시라. 그건 신문이든 백과사전이든 마찬가지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으면 절대로 믿지 마시라. 그리고 확인하고 확인하시라. 글을 퍼 가실 때는 출처를 명시하시라. 안 그러면 표절의 공범된다.
끝으로,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추석 <예기> 유래설' 퍼 가신 분들은 빨리빨리 지우시라. 추석이 다가오는데 애들이 그거보고 숙제할까 두렵다. 그 자리에 평미레의 이 글을 퍼다 놓으시던가. 공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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