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문화재의 종류
문화재는 그 종류를 유형(有形)문화재, 무형(無形)문화재, 민속자료(民俗資料),
기념물(記念物)로 크게 나눈다. 또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시·도)의 지정을 받은 국가지정문화재, 시·도지정문화재와 지정을 받지 않은
비지정(非指定)문화재로 나누기도 한다. 국가지정문화재는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민속자료, 기념물의 4종류로 나누고, 시·도지정문화재는
지방유형문화재, 지방무형문화재, 지방기념물, 지방민속자료와 문화재자료로 나눈다.
1.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형체가 있는 문화재를 말하며
건물,탑(塔),불상,석등(石燈),고문서(古文書),서적,비(碑),금(金),자(磁),토기(土器),서화,종(鐘),장신구(裝身具),무기,마구(馬具) 등
역사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가 크고 고고학적 자료(考古學的資料)가 되는 것이다. 국보와 보물은 유형문화재중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것과 중요한 것을
지정한 것이며, 국보는 문화재의 최상급에 속하는 것이다.
2.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
형체가 없는 문화재로 노래,춤,놀이,제례(祭禮),극,공예기술 등에서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큰 것을 말한다.
3. 민속자료(民俗資料)
음식,가옥,생업,행사기구,의복,집 등 풍습과 생활의 추이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을 말하며, 가구,옷,음식,베틀,물레,북,화폐,농기구,민가,어업기구,관·혼·상·제용구,공구,도구,공예품,오락기구,무속기구 등이다. 유형문화재가
귀족적이고, 외래문화의 영향을 빨리 받는다면 민속자료는 하층문화(下層文化)로 서민적이고 토착적(土着的)이다. 그러므로 민족의 개성이 뚜렷하고
밀착된 것이 민속자료라 할 수 있다. 국가에서는 중요 민속자료로, 시·도에서는 시·도민속자료로 지정하고 있다.
4. 기념물(記念物)
기념물은 역사적 기념물과 자연적 기념물로 구분되는데.역사적 기념물은
조개무덤(貝塚),고분(古墳),성지(城址),궁지(宮址),사지(寺址),요지(窯址),고전지(古戰址),서원(書院),유물포함층(遺物包含層)등의
사적지(史蹟地)이며, 천연기념물은 우리나라의 고유자원인 동물,광물,식물,경승지 등이다. 역사적 기념물은 역사의 현장으로 민족사의 흐름이
내재(內在)되고 민족의 의지가 축적된 곳이다. 유형문화재처럼 조형미나 민속자료처럼 강한 개성을 지닌 독립된 유물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역사적 기념물에서 역사의 교훈을 얻고 국난극복의 정신을 배울 수 있다. 기념물은 국가에서 사적,명승,천연기념물로, 시·도에서는 시·도기념물로
지정하고 있다. 문화재는 유형,무형,민속자료,기념물로서 가치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중요한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다 중요한 것이다.
5. 문화재자료(文化財資料)
1982. 12. 31 문화재보호법이 전문(全文) 개정되어 문화재자료란 명칭이
새로 생겼다. 문화재자료는 국가 또는 시·도로부터 유형문화재,무형문화재, 기념물,민속자료로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향토문화 보존상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문화유적을 지정한 것을 말한다. 문화재자료는 시·도에서 문화재와 같이 종류별로 구분하여 지정하지 않고 총괄하여 지정하며 일련번호를
부여한다. |
제4절
유교문화 유적(儒敎文化 遺蹟)
조선조 중기부터 전국 각처에서 서원이 창건되기 시작하여 사교육기관으로 역할을
하였으나, 조선 말기에는 각 지방, 각 성씨문중에서 경쟁적으로 창건하여 씨족들의 세력을 자랑하는 일종의 전시적인 상징물화하게 되고 그 폐단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고종 신미년(1871)에 대원군에 의하여 전국에 47개 서원만을 남겨두고 그 외의 서원과 사(祠)는 훼철(毁撤)되었다. 서원에는 세가지
유형이 있었다. 첫째는 나라에 공이 많은 충신·열사나 도학군자로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는 인물을 봉향(奉享)하여 그 충의정신이나
학문을 계승하고 추앙하기 위하여 창건되고, 나라에서 사액(賜額)한 사액서원이 있고, 둘째는 그 지방에 학문이나 또는 훌륭한 행의(行誼)를 남긴
인물을 지방유림의 소청에 의하여 예조에서 허가한 향현사(鄕賢祠)가 있으며, 셋째는 각 성씨문중에서 선대
조상중에서 특별한 업적을 남긴 선조를 모신 세덕사(世德祠)가 있다. 그리고 충신이나 효자, 열녀에
대하여도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려 오래도록 잊지 않게 하였으며, 나라에서 정려가 내리지 아니한 효자, 열녀는 지방 유림에서
표양(表揚)하였다.
1. 서 원(書院)
문경지역에는 사액서원은 없고, 향현사(鄕賢祠)가 있다. 창건연대순으로 연혁과 입향된 인물의
약력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1)
근암서원(近嵓書院)
(1) 소재지 : 산북면
서중리 (2) 연 혁 : 중종
39년(1544)에 상주목사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이 근암서당을 설립했다. 현종 5년(1664)에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을 봉향한
향현사가 되었다. 헌종 10년(1669)에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을 주벽으로 예조로부터 서원창건을 허가받았다. 숙종
28년(1702)에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를 추향(追享)하고, 정종 10년(1786)에 활재(活齋)
이구(李榘
),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을
추향하였다.
(3) 봉향인물의
약력 이덕형(李德馨) :
중종 36년(1541)에 출생. 호는 한음(漢陰) 관(貫)은 광주(廣州)이다. 선조 13년(1580)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간 이후
홍문관, 사헌부를 거쳐 1592년 임진(壬辰)에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그 해 4월에 왜란이 일어나자 평양 대동강에서 일본사승 현소(日本使僧
玄蘇)와 담판, 침략의 부당성을 통박함. 1598년 우의정(右議政), 1601년에 도체찰사, 1602년에 영의정을 지내고, 52세에 별세함.
시(諡)는 문익공(文翼公)이다. 홍언충(洪彦忠) :
성종 4년(1473)에 출생, 자는 직경(直卿) 호는 우암(寓菴) 관은 부림(缶林)이니 문광공(文匡公) 귀달(貴達)의 아들이다. 연산
원년(1495)에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와 홍문관 교리(敎理)를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갑자사화(1504)때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1506)으로 풀려 났으나 그 뒤로는 벼슬에 나가지 아니하고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36세로 별세하였다. 김홍민(金弘敏) :
중종 35년(1540)에 출생, 자는 임부(任父) 호는 사담(沙潭) 관은 상산(商山)이다. 선조 3년(157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응교(應敎), 청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시에는 보은에서 창의하였다. 1594년에 55세로
별세했다. 홍여하(洪汝河) :
광해 12년(1620)에 출생, 자는 백원(伯源) 호는 목재(木齋) 관은 부림(缶林)이니 문광공 귀달의 5대손이요, 대사간 호(鎬)의
아들이다. 이
구(李 구) : 광해 5년(1613)에 출생, 자는 대방(大方) 호는 활재(活齋) 관은 전주(全州)니 호령대군
8세손이다 이만부(李萬敷) :
현종 5년(1664)에 출생, 자는 중서(仲舒) 호는 식산(息山) 관은 연안(延安) 박천(博泉) 옥(沃)의
아들이다. 권상일(權相一) :
숙종 5년(1679)에 출생,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 관은 안동(安東)이다. 기사(耆社)에 들었으나 시(諡)는
희정(僖靖)이다.
2)
한천서원(寒泉書院)
(1) 소재지 : 농암면
농암리(가실목) (2) 연 혁 : 숙종
23년(1697)에 창건. 사직(司直) 안귀손(安貴孫), 처사(處士) 신숙빈(申叔彬)을 봉향하고 있다. 정조 11년(1787)에 추담(秋潭)
성만징(成晩徵)을 추배(追配),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다. 그 후로 설단(設壇)하여 매년 3월 중정(中丁)에 봉사(奉祠)하고
있다. 안귀손(安貴孫) :
관은 순흥(順興),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현손이며 사간(司諫) 기(耆)의 아들이다. 사직(司直)으로 연산조때 국정이 문란하고
무오사화에 어진 선비들이 참화를 당함을 보고 가은 소양에 낙향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신숙빈(申叔彬) : 세조 3년(1457)에 출생. 관은 평산(平山) 문희공(文僖公) 개(개)의 손이며,
대사성(大司成) 자승(自繩)의 아들이다. 연산 무오(1498)에 거창현감으로 있다가 어진 선비들이 주륙됨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빙장인
안사직(安司直)과 가은 소양에 낙향하여 후진교회(敎誨)에 전념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보였으니 有山有水處 無榮無辱身 耕田消白日
採藥送靑春(산있고 물있는 곳 영화도 욕됨도 없는 내몸, 밭 갈아 날 보내고 약초 캐며 청춘을 보냈도다.)라
하였다. 성만징(成晩徵) :
관은 창령(昌寧) 호는 추담(秋潭) 유일(遺逸)로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우암문인(尤菴門人)이요,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의
고제(高弟)로소 강호팔학사(江湖八學士)의 한 사람이다. 저서로는 추담집, 조령산성기 등이 있다.
3)
소양서원(瀟陽書院)
(1) 소재지 : 가은읍
전곡리(소양동) (2) 연 혁 : 숙종
38년(1712)에 창건. 영조 21년(1745)에 조령으로 훼철. 순조 원년(1801)에 중건(重建)하고 난암(난菴) 정언신(鄭彦信),
인백당(忍百堂) 김낙춘(金樂春), 가은(嘉恩) 심대부(沈大孚), 가은(稼隱) 이심(李심)을 열향(列享). 그 후에 고산(孤山) 남영(南嶸)을
추배(追配). 고종 8년(1871)에 조령으로 훼철하고 1990년에 복원하였다. 정언신(鄭彦信) : 중종 22년(1527)에 출생하니 자(字)는 입부(立夫)요 호는 난암(난菴)이며 관은
동래(東來)이다. 가은 성저에서 자랐다. 명종 15년(1560)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국(史局)에 있을 때에 명망이 높았다.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영상(領相)으로 있을 때에 사람됨을 알아보고 하루는 통천석각(通天서角)을 주면서 “장래에 나를 대신할 것이다.”라 하였다.
선조 12년(1579)에 우승지(右承旨)로 함길도 절제사가 되어 주군(州郡)을 순찰하니 치정이 엄정하여 동북의 주민들이 자식을 낳으면 공을
사모하여 자식의 이름을 공의 이름자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선조 16년(1583)에 여진족 이탕개(尼湯介)의 란에
함길도 도순찰사가 되어 부임하니 호령이 엄숙하고 용병이 특출하여 적도들이 싸움 한번 못하고 도망갔다. 공이 사람을 알아보는 지감이 뛰어나 그의
막료중에는 이무신, 신립, 이억기, 김시민 등 임진왜란에 국운을 짊어진 명장들이 모여 있었다. 병조판서로 소환되어 선조 22년(1589)에
우의정이 되었으나 아깝게도 정여립 옥사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1591)에 적소에서 졸하였다. 출장입상(出將入相)에 모두가
흠모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조령을 지나면서 “정립부(鄭立夫)가 살아 있었다면 적이 어찌 이 령을 넘을 수가
있었겠는가”하면서 탄식하였다고 한다. 김락춘(金樂春) :
자는 태화(泰和)요, 호는 인백당(忍百堂)이며, 관은 순천(順天)이니 평양부원군 양경공(平陽府院君 襄景公) 승주(承주)의 6대손이다. 중종
25년(1525)에 출생하여 21세 때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생원(生員)이 되었으나 나라에서 파방(罷榜)을 시키니 그 후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퇴도문인(退陶門人)으로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친상에 여묘 3년을 다하고 일찍이 말하기를 “향당은
부모종족(父母宗族)이 있는 곳이라”하여 반드시 말(馬)을 내렸다고 한다. 남 영(南
嶸) : 자는 사수(士秀)요, 호는 고산(孤山)이며, 관은
의령(宜寧)이니 강무공(剛武公) 은(誾)의 5세손이다. 가은 하괴에서 출생하여 어릴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6세에 이미 효경(孝經)에 통하고
부모를 공경하니 모두가 효자로 칭송하였다. 18세에 친상을 당하여 묘 옆에 여막을 짓고 밤낮으로 호곡하며 몇 숟갈의 죽만을
마시고 소금, 간장, 약과 등을 먹지 않으니 마침내 두 눈을 실명하게 되어 사물을 볼 수 없게 되었다가 치료한지 여러 달 만에 사물을 보게
되었다. 오직 학문 탐구에만 힘쓰고 명리를 구하지 않더니 50세가 넘어서 서애 류성룡이 한 번 만나보고서 그 인품이 후덕하고 재덕(才德)이
겸비함을 알고 조정에 천거하여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가 되었다. 선조가 두풍을 앓아 밤에 잠을 못이루는지라 공이 천류지기지리(川流地氣之理)로
사람들이 월맥지소하니 선조가 기뻐하여 달리(達理)한 선비라 칭하고 당상관(堂上官)을 제수하였다. 진천, 양성, 마전, 음죽 등 여러 군현에
출재(出宰)하여 선치(善治)를 하였다. 심대부(沈大孚) :
자는 신숙(信叔)이요, 호는 가은(嘉隱)이며, 관은 청송(靑松)이니 청원부원군 대(垈)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임진왜란에 경기감사로
삭녕(朔寧)전투에서 전사하니 공의 나이 7세임에도 거상(居喪)에 예를 다하여 보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광해(光海) 5년에 진사가 되고
그 뒤에 찰방이 되었다. 경오(1630)에 대군사부(大君師傅)가 되고 송화현감(松禾縣監)을 지냈으며, 삼남(三南)에 흉년이 들어 크게 주릴 때에
경상도사 겸 진휼사(慶尙都事 兼 賑恤使)가 되어 사의균세사 백언(使宜均稅事 百言)을 상소하니 임금이 가람하였다. 뒤에 사간(司諫)이
되었다. 이
심(李 심) : 자는 자첨(子瞻)이요, 호는
가은(稼隱)이며 관은 연안(延安)이니, 감사(監司) 창정(昌庭)의 아들이다. 광해조(光海朝)때에 세상이 크게 어지러움을 보고 몸을 깨끗이 지키며
과거보기를 피하고서 가족을 이끌고 가서내촌(加西內村)으로 이사하여 농사하며 자급하니 군내의 자제들이 날마다 모여서 수업함에 사는 집이 학교가
되었다. 형제 6명이 분산 각거하지 않고, 아우들이 높은 지위에 있으나 매양 귀가시에는 동구밖에서 말을 내려 한 집에 모여서 공경하며 엄부와
같이 대하였다. 공은 은거하여 진고(眞古)한 곳에만 왕래하니 이른 바 청사(淸士)였다. 아들 관징(觀徵)은 판중추(判中樞)에
이조판서(吏曹判書)요, 손 옥(沃)은 예조참판(禮曹參判) 부제학(副提學)이요, 증손 만부(萬敷)는 성리학의 대학자이다.
4)
웅연서원(熊淵書院)
(1) 소재지 : 산북면
서중리(웅연) (2) 연 혁 : 정조
19년(1795)에 웅연(熊淵) 인천채씨(仁川蔡氏) 사현(四賢)을 모신 세덕사(世德祠)로 창건되었다. 사현(四賢)은 다의당
채귀하(多義堂 蔡貴河), 난재 채수(난齋 蔡壽), 졸재 채소권(拙齋 蔡紹權), 우담 채득근(雩潭 蔡得近)이다. 고종 5년(1868)에
조령(朝令)에 의하여 훼철되고 현재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채귀하(蔡貴河) : 자는 청일(淸一)이요, 호는 다의당(多義堂)이며 관은 인천이니 상서(尙書) 원길(元吉)의
아들이다. 고려말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교분이 두터웠으며,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지냈다.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스스로 맹세하기를 동비아토(東非我土)니 수갱재답(誰更再踏)이리오. 서망수양(西望首陽)하니 인망일심(忍忘一心)인가 하고
날마다 채미도(採薇圖)를 바라보며 그 뜻을 굳게 하였다. 이태조(李太祖)가 호조판서로 여러차례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시(諡)는
정의(貞義)이며, 평산의현(平山義峴), 대구서산(大邱西山), 개성숭양(開城崇陽) 등 서원에
입향(入享)되었다. 채 수(蔡 壽) : 자는 기지(耆之)요, 호는 난재(난齋)이며, 부사 신보(申保0의 아들이다. 세조
14년(1468)에 생원(生員)하고 대음 해에 삼장장원(三場壯元)을 하니 조선이래 이석정(李石亭)과 더불어 두 사람 뿐이었다. 수찬(修撰),
지제교(知製敎), 응교(應敎), 도승지(都承旨), 관찰사(觀察使), 한성좌윤(漢城左尹), 대사성(大司成), 호·예·형조(戶·禮·刑曹)의
참판(參判0 등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즐겨 산경지지(山經地誌), 비관인설(裨官人說)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으며, 시문과
명필로서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또한 도승지(都承旨)로 입시하여 천변의 득실을 극언하며 병자(丙子)의 원옥을 말하니 왕이 이에 감동하고 수백인을
방면하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에는 단성(丹城)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였고, 67세에 졸하였다. 시(諡)는 양정(襄靖)이며
함창 임호서원(臨湖書院)에 봉향(奉享)되었다. 채소권(蔡紹權) :
자는 효중(孝仲)이요, 호는 졸재(拙齋)이며, 난재(난齋) 수(壽)의 둘째 아들이다. 성종 11년(1480)에 출생하여 25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오르고 중종 원년(1506)에 문과에 급제하여 갑술(甲戌)에 경상도사(慶尙都事)가 되니 그 때에 김안로(金安老)가
어사(御史)가 되어 함께 용궁에 도착하여 망산성(望山城)하여 공음(共吟)할 때 공이 먼저 짓기를 천림수면평여장(天臨水面平如掌)이요
성재산요소약제(城在山腰小若臍)라 하니 김안로가 뜻이 막혀 얼굴빛을 변하고 갔다. 무인(戊寅)에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가 되어서는 조정암,
이음애와 함께 동문선(東文選)을 찬(撰)하였다. 계사(1533)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형조참판이 되었고, 을미(1535)에 한성판윤,
7월에는 형조판서가 되었다. 병신(1536)에 김안로가 용사(用事)하여 국사가 어지러움을 보고 벼슬길의 무익함을 알고서 남으로 고향에 돌아오니
57세 때이다. 인종 을사(乙巳)에 영상(領相) 윤인경, 찬성, 이언적이 재상(宰相)의 그릇이라 추천하였으나 간신 이파(李芭)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채득기(蔡得沂) :
자는 영이(詠而)요, 호는 우담(雩潭)이며, 윤사(潤私) 유부(有孚)의 종자(從子)이다. 선조 37(1604)에 출생하여 청음 김상헌(金尙憲)
문인(門人)으로 유일(遺逸)로 별제(別提)에 천수(薦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자천대(自天臺)에 은거하였다. 인조 16년(1638)에
효종(孝宗)이 심양에 있을 때에 서로 만나 지우(知遇)가 되고 을유(1645)에 봉가동환(奉駕東還)하여 자천대 석면에 새기되 崇禎日月 大明天地라
하여 채미(採薇)의 굳은 뜻을 보였다. 사후에 효종이 애도하며 치제문(致祭文)하여 조위를 내렸다. 정종조에 집의(執義)에 증직되었다.
삼강록(三綱錄), 존주록(尊周錄), 배신록(陪臣錄)등에 실려 있다.
2. 사·묘(祠·廟)
1) 충열사(忠烈祠)
(1) 소재지 : 문경읍
상초리 (2) 연 혁 : 순조
병술(丙戌 1826)에 향내 유림과 현감 홍로영(洪盧榮)이 창건하고 임진왜란에 문경현감으로 순절한 신길원(申吉元)을 봉향하고, 철종 정사(丁巳
1857)에 현감 임황수(林晃洙)와 유림에서 도청(都廳) 신광환(申匡桓)과 유사(有司) 문의식(文懿碩)이 협력하여 중수하였다. 고종 신미(辛未
1871)에 조령(朝令)으로 훼철된 것을 1981년 충렬사 중수추진원회가 구성되고 이원영(李源榮)위원장과 신석후(申錫厚),고호림(高皓林) 등
향내 유림의 협조와 문경군의 지원으로 향교 아래에 복원하였고, 1999년 현재의 위치(제1관문 안)에
이건(移建)하였다. 신길원(申吉元) : 자는 경초(慶初)요 관은
평산(平山)이니 지평 국량(持平 國梁)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자신의 손가락을 자른 피를 약에 섞어 어머니를 연명케 하였고,
14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슬피 울며 삼년상을 마치니 보는 이가 눈물을 흘렸다.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선조가 효자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선조 병자(丙子 1576)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한 뒤에 태학(太學)의 추천으로 참봉(參奉) 벼슬 등을 거쳐 선조 경인(庚寅 1590)에
문경현감으로 부임하여 백성을 정성으로 다스리며 항시 성리학을 연구하며 규범으로 삼았다.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
4월 27일에 왜적이 문경에 침입하니 모두가 형세 불리함을 들어 피하기를 권하였으나 공은 소리 높혀 말하되 “내가 맡은 고을이 곧 내가 죽을
곳이다. 어찌 피하리오”하고 소수의 군사를 독려하며 지켰다. 적병이 이르자 모두가 도망가고 김룡이라는 종 한사람만이 따르거늘 의관(衣冠)을 바로
하고 관인(官印)을 차고 관아에 앉으니 왜병이 달려들어 칼을 목에 대고서 속히 항복하여 길을 안내하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공은 손을 들어 목을
가리키며 “내가 너를 동강내어 죽이지 못함을 한탄하니 빨리 나를 죽여서 더렵히지 말라” 하니 적병이 성내어 먼저 한 팔을 자르고 계속
협박하였으나 공은 얼굴빛도 바꾸지 않은채 꾸짓기를 마지 않으니 마침내 살을 발라내는 죽임을 당하였다. 때는 4월 27일이요 나이는 45세였다.
나라에서는 좌승지(左承旨)에 증직하고 속삼강록(續三綱錄)에 등재하고 대구 표충사(表忠祠)에 배향(配享)하였다. 충렬비(忠烈碑)는 정언
채팽윤(正言 蔡彭胤)이 찬(撰)하고, 묘지명(墓誌銘)은 대제학(大提學) 이재(李縡)가 찬하였다.(聞慶縣誌, 續三綱錄 亂中雜錄, 慶尙道巡營錄,
表忠祠誌奉安文)
2) 용곡리사(龍谷里祠)
(1) 소재지 : 영순면
오룡리 (2) 연 혁 : 진주강씨
세덕사(晋州姜氏 世德祠)로 숙종 을축(乙丑 1685)에 창건하고, 삼산
강응청(三山 姜應淸), 백석 강제(白石 姜霽), 석봉 강우(石峰 姜우)를 봉향하였다. 고종 무진(戊辰 1868)에 조령(朝令)으로 훼철되고 현재
그 자리에는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강응청(姜應淸) : 자는
경운(景運)이요, 호는 삼산(三山)이며 운계 세경(雲溪 世卿)의 아들이다. 벼슬은 통례원 인의(通禮院 引儀)를 지냈다. 유복자로 태어나 7세에
추복(追服)하고 평생을 여묘(廬墓)하였다.
아들 아홉이 모두가 문장으로 현달하여 용강구우(龍姜九雨)의 명성이 국내에 진동하였다.(出 龍宮縣誌) 강 제(姜 霽) : 자는 명원(明遠)이요, 호는 백석(白石)이며 삼산 응청(三山
應淸)의 아들이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부사(府使)와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삼강합류처(三江合流處)에
백석정(白石亭)을 짓고 후학교회(後學敎誨)에 힘쓰다가 그 정사(亭舍)를 사위인 종사랑 구선윤(從仕郞 具善胤)에게 전하였다. 문인(門人)으로는
농가월령(農家月令)을 지은 태촌 고상안(泰村 高尙顔)이 유명하다.(商山誌, 龍宮誌) 강 우(姜 우) : 자는 대소(大蘇)요, 호는 석봉(石峰)이며 삼산 응청(三山
應淸)의 아들이다. 문음(門陰)으로 문경(聞慶), 신은현감(新恩縣監)을 역임했다. 부모상(父母喪)에 6년을 여묘(廬墓)하니 묘곁에 채소가 자생하여 4계절
푸르러서 조석으로 써도 다함이 없었다고 한다. 시묘를 마친 뒤에 스스로 말라 죽으니 모두가 애석해 하였다.(商山誌, 龍宮誌)
3) 숙청사(肅淸祠)
(1) 소재지 : 산북면 대하리 (2) 연
혁 : 세종조의 명재상(名宰相) 익성공 방촌 황희(翼成公
庬村 黃喜)의 영각(影閣)이었다가 고종 무진(戊辰 1868)에
훼철(毁澈)되었으며 그 뒤에 지금의 종재(宗齋) 옆에 숙청사(肅淸祠)를 세우고 영정(影幀)과 선생의 유물 4점을
보존하고 있다. 대하리(大下里) 장수황씨(長水黃氏) 가문사보(家門4寶)는 옥연(玉硯),
옥서진(玉書鎭), 산호영(珊瑚纓), 서각대(犀角帶)이며 따로 분재기(分財記)가 있다. 황 희(黃 喜) : 자(字)는 구부(懼夫)요, 호는
방촌(庬村)이며 관(貫)은 장수(長水)이다. 고려 공민왕 계묘(癸卯
1636)에 출생하였다. 우왕 때에 등제(登第)하여 성균학관(成均學官)이 되었다가 이태조(李太祖)가 개국하자 여러직을 역임하였다.
태조,정종,태종,세종 등 사조(四朝)를 섬겼고 정승(政丞)으로 24년을 지내면서 국가의 주석(柱石)으로 세종 30년의 지치(至治)를 주도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의 표본이기도 하다. 세종 묘정(世宗 廟庭)과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에 봉향되었다.(王朝實錄, 商山誌,
名臣錄)
4) 화산사(華山祠)
(1) 소재지 : 산북면 내화리 (2) 연
혁 : 예안김씨 세덕사(禮安金氏 世德祠)로 예안김씨 삼세육인(禮安金氏 三世六人)을
봉향하였으니, 검암 곤(劒岩 錕), 효우당 단(孝友堂 鍴), 지남 남일(砥南 南一), 노주 태일(蘆洲 兌一), 단계
해일(檀溪 海一), 학고 이만(鶴皐, 履萬)이다. 김
곤(金 錕) : 자(字)는 자진(子珍)이요,
호는 검암(劒岩)이며 문절공 담(文節公 淡)의 후이다. 기절(氣節)이 강직하고 유학을 진작시키는데 힘썼다. 성균관(成均館)의 생원(生員)으로
있을 때에 병자호란을 당하여 남한산성으로 대가(大駕)를 따라 입성(入城)함에 성균관 유생(儒生)들이 일시에 흩어져 가는지라 公이
나이후(羅以後), 김강(金鋼)으로 더불어 오성위판(五聖位板)을 보호하여 성중(城中)에 들어가 개원사(開元寺)에 임시 봉안하고 고향에 돌아와
어버이를 지성으로 봉양하니 향린(鄕隣)이 모두 그 효성에 감복하였다. 김
단(金 鍴) : 자(字)는 계정(季精)이요,
호는 효우당(孝友堂)이니 검암곤(劍岩 錕)의 제(弟)이며, 지남 남일(砥南
南一)의 부(父)이다. 참판(參判)에 증직되었으며 문장덕행(文章德行)이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김남일(金南一) : 자(字)는
중백(重佰)이요, 호는 지남(砥南)이니 효우당 단(孝友堂 鍴)의
자(子)이다. 홍산현감(鴻山縣監), 괴산군수(槐山郡守)를 역임하고 숙종 병자(丙子 1696)에 괴산임지(槐山任地)에서 졸(卒)하니 公의
청덕(淸德)을 흠모하여 군민이 송덕비를 세웠다. 지남집(砥南集)이 있다.(醴泉誌) 김태일(金兌一) : 자(字)는
추백(秋伯)이요, 호는 노주(蘆洲)니 효우당 단(孝友堂 鍴)의
자이며 중부 검암(仲父 劒岩)에게 출계하였다. 수학(受學)을 외조인 사고 극해(槎皐 克諧)하여 현종조 경자년(顯宗朝 庚子年)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監察), 현감(縣監), 찰방(察訪)을 역임하고,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진주목사(晋州牧使),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지내는 동안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 성균관 사성(成均館 司成)을 역임하고 숙종 임오(壬午 1702)에 졸하였다. 문장과 덕행으로
세상에서는 노주선생(蘆洲先生)이라 칭한다. 노주집(蘆洲集)이 있다.(醴泉醴) 김해일(金海一) : 자(字)는
종백(宗伯)이요, 호는 단계(檀溪), 인조 경진(庚辰 1640)에 나니 효우당 단(孝友堂
鍴)의
아들이다. 현종 원년 경자(庚子 1660)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지평(持平), 정언(正言), 집의(執義), 부교리(副校理) 등을 역임하고
2차에 걸쳐 부사(副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쳐 동도윤(東都尹 경주부윤)이 되어서는 주린 백성 7만여구를
살려내어 송덕비(頌德碑)가 있다. 숙종 신미(辛未 1691)에 관아(官衙)에서 졸하였다. 숙종이 직접 제문을 내려 슬퍼했다. 덕성이 있고 문장이
지출하여 세상에서 무척 아까워했다.(醴泉醴) 김이만(金履萬) : 자(字)는
중수(仲綏)요, 호는 학고(鶴皐)니 단계 해일(檀溪 海一)의 아들로 숙종 9년(1683)에 출생하였다. 숙종 계사(1713)에 사마시와 문과에
등제(登第)하여 영조 경신(1740)에 양산군수(梁山郡守)가 되어서는 매년 한재(旱災)와 수재(水災)로 백성들이 주리고 있음을 보고 자신의
봉록(俸綠)을 들려 제방을 축조하였으니 청전제(靑田堤)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장령(掌令), 정언(正言), 집의(執義), 사간(司諫)을 거쳐
첨지(僉知) 중추부사(中樞府事)가 되었다. 영조 무인(1758)에 졸하였다. 문장과 청렴으로 존경을 받았다.(醴泉醴)
5) 도천사(道川祠)
(1) 소재지 : 산북면 대하리 (2) 연
혁 : 영조조에 창건되어 칠봉 황시간(七峰 黃時幹), 우곡
황상중(愚谷 黃尙中), 만은헌 신경(晩隱軒 申熲)을 봉향하였다. 황시간(黃時幹) : 자(字)는
공직(公直)이요 호는 칠봉(七峰)이며 관은 장수(長水)니 방촌(厖村) 희(喜)의 6세손(世孫)이다. 삼가현감(三嘉縣監)을 지냈으며 류서애(柳西崖), 정한강
문인(鄭寒岡 文人)으로 정우복(鄭愚伏), 전사서(全沙西), 이창석(李蒼石)과 도의로 교유하였는데, 세상에서는 상산사로(商山四老)라 칭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적이 公을 헤치려고 칼을 내려 치려는 때에 公의 부인 권씨(權氏)가 몸으로 대신 칼을 받으니 피가 흘러 몸을
적셔도 있는 힘을 다하여 막아서므로 왜적도 감동하여 버리고 갔다. 인조 갑자(甲子 1624) 이괄(李适)의 난에 어가(御駕)가 남행(南幸)할
때에 충의로 의병을 모아 행재소(幸在所)로 향하였다. 병신년(1656) 봄에 마을사람들과 대상보(大上洑)를
축조하였다.(商山誌) 황상중(黃尙中) : 자(字)는 계통(季通)이요, 호는 우곡(愚谷)이니 칠봉 황시간(七峰 黃時幹)의 손이다. 백원
신석번 문인(百源 申碩蕃門人)으로 여흥 민노봉(驪興 閔老峰) 형제와 교유하였다. 성균관 진사(成均館 進士)로 안동 류직(安東 柳稷) 등이
소두(疏頭)가 되어 율우(栗牛) 양현(兩賢)의 척향소(斥享疏)를 올리니, 여기에 대하여 가정(柯亭) 신석향(申碩享), 만은헌 신경(晩隱軒
申熲), 채하징(蔡河徵), 박회중(朴晦中) 등과 더불어 변무소(辯誣疏)를
올려 광정(匡正)하였다.(商山誌) 신 경(申
熲) : 자(字)는 회보(晦甫)요, 호는
만은헌(晩隱軒)이며, 관은 평산(平山)이니 문희공 인재선생(文僖公 寅齋先生)의 후이며, 좌랑 석무(佐郞 碩茂)의 아들로 광해 무오(光海 戊午
1618)에 출생하였다. 백부 백원공(百源公)에게서 수학하니 문예가 숙성(夙成)하여 노봉 민정중(老峰 閔鼎重)의 천(薦)으로 송라도 찰방(松羅道
察訪),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역임했다. 특히 사문(斯文)을 보호하기 위하여 류직(柳稷) 등이 율우양현(栗牛兩賢)의
척향소(斥享疏)를 올려 윤준(尹준), 허적(許積)의 당료들이 전횡할 때에 우곡 황공(愚谷 黃公)과 만란을 무릅쓰고 그 변무(辯誣)에 나서서
성취시켰다. 숙종 정축(丁丑 1697)에 졸하였다.(商山誌, 咸昌誌)
6) 영고사(潁皐祠)
(1) 소재지 : 흥덕동 예동(芮洞) (2) 연
혁 : 개성고씨 세덕사(開城高氏 世德祠)로 영조연간(英祖年間)에 창건되어 태촌
고상안(太村 高尙顔)과 낭옹 고세장(浪翁 高世章)을 봉향(奉享)하고 고종 무진(戊辰 1868)에 훼철되었다가 1992년에
중건하였다. 고상안(高尙顔) : 자(字)는 사물(思物)이요, 호는 태촌(太村)이며, 관은 개성(開城)이니 통정 수연(通政 壽延)의
증손이다. 선조 계유(癸酉)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병자(丙子 1576)에 문과(文科)하여 성환도 찰방(成歡道 察訪)과 함창(咸昌),
지례(知禮) 등 5군에 출재하여 많은 치적을 남겼다. 문장이 출중하고 농사를 과학적으로 권장하기 위하여 농가월령(農家月令)을 지어 농사교본으로
삼게 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함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대장에 추대되었으나 마침 예천군수가 결원이 되어 예천군정을 돌보라는 명을 받고
예천군으로 떠났다. 1594년에는 삼가현감(三嘉縣監)으로 충무공 이순신 영(忠武公 李舜臣 營)에서 주시(主試)로 있었으며, 1598년 정유재란
때는 왜적을 막을 8조목(條目)의 방어책을 도체찰사 류성룡(都體察使 柳成龍)에게 올렸다. 울산판관(蔚山判官), 풍기군수(豊基郡守)를 거쳐
1609년에 고향에 돌아와 남석정(南石亭)에서 은거하다가 광해군(光海君)의 탁정(濁政)에 산북면 초동으로 옮겨 1623년에 졸하였다.(商山誌,
龍宮誌, 咸昌誌) 고세장(高世章) : 자(字)는 여사(汝舍)요, 호는 낭옹(浪翁)이며 태촌 상안(太村 尙顔)의 손이다. 인조 신사(辛巳
1641)에 출생하니 총명함이 뛰어나 학문에 정진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 제자백가(諸子百家) 등 군서(群書)를 많이 읽어 이기(理氣),
음양(陰陽), 의약(醫藥) 등에도 통달하였다. 현종 14년(1673)에 사마시에 오르고, 1681년에는 영남유생들의 소두(疏頭)가 되어
율곡(栗谷), 우계(牛溪)의 척향소(斥享疏)를 올렸다가 벽동(碧洞)에 유배되었다. 숙종 기사(己巳)에 선원전(璿源殿)의 참봉(參奉)이 되었다가
50세에 졸하니 집의(執義)에 증직되었다. 낭옹집(浪翁集)이 있다.(商山誌)
7) 죽곡사(竹谷祠)
(1) 소재지 : 산양면 녹문리 (2) 연
혁 : 개성고씨 세덕사(開城高氏 世德祠)로 삼계 고윤종(三溪 高胤宗), 계정
고흥운(溪亭 高興雲), 월봉 고인계(月峰 高仁繼), 추담 고유(秋潭 高裕)를 봉향하였다. 고윤종(高胤宗) : 자(字)는
술지(述之)요, 호는 삼계(三溪)이며 직제학 사원(直提學 士原)의 현손이다. 성종 계축(癸丑 1493)에 출생하여 중종조(中宗朝)에
학행(學行)으로 직장(直長)에 천수(薦授)되고 주부(主簿)에 이르렀으며, 중종 임인(壬寅 1542)에
졸하였다.(龍宮誌) 고흥운(高興雲) : 자(字)는 천상(天祥)이요, 호는 계정(溪亭)이며 삼계 윤종(胤宗)의 자이다. 중종 계미(癸未
1523)에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부조의 정훈(庭訓)을 받아 힘써 독학하니 문장행의(文章行議)가 일세의 경중(敬重)하는 바 되었다. 명종
기유(己酉 1549)에 생원(生員)하고, 선조 경오(庚午 157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횡성현감(橫城縣監)을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겨 현민(縣民)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우고 아쉬워 했다.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재직시에는 강직(强直)함으로 당로자(當路者)의
꺼림을 받았고 1582년 임오(壬午)에 고성군수(高城郡守)로 부임하였다가 관에서 졸하였다. 자(子) 인계(仁繼)의 참원종훈(參原從勳)으로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通政大夫 承政院 都承旨), 지제교(知製敎),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상서원정(尙瑞院正)이 증직되었다.(商山誌, 龍宮誌) 고인계(高仁繼) : 자(字)는
선승(善承)이요, 호는 월봉(月峰)이니 군수 흥운(郡守 興雲)의 자(子)이며, 생부(生父)는 부위 경운(副尉 慶雲)이다. 명종 갑자(甲子
1564)에 출생하여 선조 병오(丙午 1606)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예(司藝)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는 창의하여 선무훈(宣武勳)에
록(錄) 되었다. 광해조(光海朝)에 간신 이이첨(李爾瞻)의 미움을 받아 관에서 사퇴하였다.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에 은퇴하였는데 인조(仁祖)가
개옥(改玉)한 뒤에 여러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고향에서 후진(後進)을 교육하면서 독서로 일생을 지냈다. 상주 효곡서원(尙州 孝谷書院)에
봉향하였다.(商山誌, 龍宮誌) 고 유(高
裕) : 자(字)는 순지(順之)요, 호는
추담(秋潭)이니 월봉 인계(月峰 仁繼)의 6대손이다. 경종 임인(景宗 壬寅 1722)에 출생하여 영조 임술(英祖 壬戌 1742)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로부터 필선(弼善),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일찍이 경상도사(慶尙都事)가 되어서는 관찰사 윤동도(觀察使
尹東度)가 검전(檢田)의 일을 맡김에 송첩(訟諜)이 많았으나 그 판결을 신과 같이 하니 모두가 크게 경탄하였다. 창녕(昌寧)에
출재(出宰)하여서는 감사(監司)가 조창(漕倉)을 신설하려고 함에 민폐를 염려하여 말리었으나 듣지 않음으로 부득이 조정에 서계(書啓)하여 중지케
되니 주민이 크게 기뻐하였고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 안주목사(安州牧使)가 되어서는 밭뽕을 권장하니 안주혈라(安州穴羅)의 명산물이 이래서
생겨났다. 다시 상보(上報)하여 허호(虛戶) 八千을 감하여 세금을 경감시키니 백성들이 칭송하였다. 정조 기해(正祖 己亥 1779)에 졸하였고
청백리(淸白吏)의 천(薦)에 올랐다. 추담집(秋潭集)이 있다.(商山誌)
8) 의산사(義山祠)
(1) 소재지 : 산양면 위만리 (2) 연
혁 : 영조 경오(英祖 庚午 1750)에 의산사(義山祠)를 세우고 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를
봉향하였다. 고종 무진(高宗 戊辰 1868)에 조령(朝令)으로 훼철되었다가 그 뒤에 중건하였다. 1995년 지방문화재자료 제302호로
지정되었다. 엄흥도(嚴興道) : 관은 영월(寧越)이다. 조선조 제6대 왕인 단종(端宗)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땅으로
쫓겨난 세조 3년(1457) 12월에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하니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그 시신을 거두는 이가 없었다. 이때에 호장(戶長)이던
공은 가족도 겁이 나서 만류하였으나 신하된 몸으로 그럴 수가 없다고 울면서 명주와 관을 써서 “나는 착한 일을 하고 화를 당한다고 하여도 달게
받겠다.” 고 하면서 그날 밤에 남몰래 청령포 비탈길을 올라가 단종(端宗)의 시신을 수습한 뒤 안장할 곳을 찾아 나섰으나 엄동설한이라 온 천지가
눈이 뒤덮여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가 없어 방황하던 중 한곳에 다다르니 노루 한 마리가 달아나므로 그 곳에 가보니 눈이 녹아 있기에 그 곳에
안장하고 이 일이 탄로날까 두려워 가족을 데리고 도망하여 숨어 살다가 죽으니 아들 호현(好賢)이 고산에 장사 지냈다. 그후 세월이 흘러 숙종조에
와서 단종(端宗)의 능(陵)이 장릉(莊陵)이라 불리워지고 우암 송시열의 건의로 공의 자손을 찾아 등용하고 공을 육신사(六臣祠)에 배향하였다. 영조 19년(1743)에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증직되었고, 영조 26년(1750)에 공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하여 상절사(尙節祠)에 배향하고 의산사(義山祠)를 세웠으며 정조 15년(1791)에
충의단(忠義壇)에 배향되고, 순조 33년(1833)에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증직되었으며 고종 14년(1877)에
충의공(忠義公)의 시호(諡號)가 내렸다.(莊陵誌, 寧越誌)
9) 송죽사(松竹祠)
(1) 소재지 : 산양면 송죽리 (2) 연
혁 : 의령여씨(宜寧余氏)의 세덕사(世德祠)이며 일명 여씨별사(余氏別祠)라 한다. 죽헌 여춘(竹軒 余春)을
봉향하였다. 여 춘(余
春) : 자는 수구(秀久)요, 호는
죽헌(竹軒)이며 관은 의령(宜寧)이니 호판(戶判) 중부(仲富)의 후이다. 선조 병오(宣祖 丙午 1606)에 무과(武科)에 등제(登第)하여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佑)를 따라 창의(倡義)하고 많은 공적을
세웠다.(商山誌)
10) 부림홍씨별묘(缶林洪氏別廟)
(1) 소재지 : 영순면 율곡리 (2) 연
혁 : 문광공(文匡公) 홍귀달(洪貴達)선생을 봉향하였다.(참조
유학편)
11)
양경공부조묘(襄景公不祧廟)
(1) 소재지 : 가은읍 작천리 (2) 연
혁 :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김승주의
부조묘(金承霔 不祧廟)이다. 김승주(金承霔) : 호는 월담(月潭)이고 관은
순천(順天)이며, 관(官)은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大匡補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이다. 태종조(太宗朝)에 매번 대한(大旱)의 때를 당하여 공이
헌관이 되어 기우제를 올리면 몇리를 못가서 비가 오기에 나라에서 승주(承霔)라는 이름을 내렸다. 태종 신사(太宗 辛巳 1401)에 추충분의
익대공신(推忠奮義 翼戴功臣)이 되고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순천김씨 종중에서 부조묘(不祧廟)로
모시고 있다.(명신록)
12) 안동권씨별묘(安東權氏別廟)
(1) 소재지 : 산북면 서중리 (2) 연
혁 : 안동권씨(安東權氏)의 근암 입향조인 구학재 권구(溝壑齋 權坵)의
사당이다. 권 구(權
坵) : 자는 차산(次山)이요, 호는
구학재(溝壑齋)이며 금곡(琴谷) 익린(益隣)의 자이다.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문장이 유려하고 행의(行誼)가 단방(端方)하요 세상에서 중히 여겼다.(商山誌)
13)
도암영각(陶菴影閣)
(1) 소재지 : 가은읍 완장리 (2) 연
혁 : 학천정 경내 도암 이재(陶菴 李縡)의 영정(影幀)을 봉안한
곳이다. 이 재(李
縡) : 자는 희경(熙卿)이요, 호는
도암(陶菴)이며 관은 우봉(牛峰)이니 우상 숙(右相 숙)의 손이요 진사 만정(進士 晩晶)의 아들이다. 영조조(英祖朝)의 대학자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숙종 임오(肅宗 壬午 1702)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 공조판서(工曹判書),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였다. 만년(晩年)에 용인(龍仁)으로 퇴거하니 전국에서 많은 제자가 운집하였다. 가은(加恩)의 선유동(仙遊洞) 경치를
좋아하여 완장(完章)에서 강의(講義)하였다. 병인(丙寅)에 졸하니 시(諡)는 문정(文正)이다. 사례편람(四禮便覽), 어류초절(語類抄節),
근사록심원(近思錄尋源) 등 많은 저서와 문집이 있다. 용인 한천서원(龍仁 寒泉書院)에 봉향되었다.(儒賢淵源錄, 文衡錄,
名臣錄)
14)
노양영각(魯陽影閣)
(1) 소재지 : 산양면 부암리 (2) 연
혁 :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 지원군으로 왔다가 귀화(歸化)한
충장공 천만리(忠壯公 千萬里)의 진영(眞影)을 모셨고, 1890년에 창건하였다. 천만리(千萬里) : 자는 원지(遠之)요,
호는 사암(思菴)이며 중국 영양인(中國 穎陽人)이다. 방마술(方馬術)에 뛰어나 무과(武科)에 장원하고 북로(北路)에 출정하여 진무사(鎭撫使)가
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두 아들 상(祥)과 희(禧)와 더불어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우리나라에 와서 왜적을 무찌르고 동래(東萊)에
이르러 여러번의 전승이 있었다. 정유재란 때는 울산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다. 그 뒤 우리나라에 영주(永住)하므로 조정에서는 충장공(忠壯公)이라
시호(諡號)를 내리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하였다. 부조묘(不祧廟)가 고성(固城)에 있고, 남원 환봉사(南原 環峰祠), 안동 동산서원(安東 東山書院), 고성
호암서원(固城 虎岩書院), 청도 황강서원(淸道 皇崗書院)에 봉향되었다.
15)
옥소영각(玉所影閣)
(1) 소재지 : 문경읍 당포리 (2) 연
혁 : 학자(學者)이며 시인인 옥소 권섭(玉所 權燮)의 영정(影幀)을
봉안한 곳이다. 권 섭(權
燮) : 자는 조원(調元)이요, 호는
옥소(玉所)이며 관은 안동(安東)이니 영상(領相) 수암 상하(遂菴 尙夏)의 질이요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의 외증손(外曾孫)이며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은 처고조(妻高祖)가 된다. 현종(顯宗) 12년(1671)에 출생하여 오직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고 관직에서 나아가지 않고
산림에 은거하여 시주(詩酒)로 자오(自娛)하였다. 문경 당포의 산수(山水)를 즐겨 이 곳에 은거한 뒤에 이 지방 곳곳에 많은 시(詩)를 남겼으며
특히 시조의 대가로서 송강 노계(松江 蘆溪)의 맥을 이어 많은 작품을 남겼다. 38세때인 숙종(肅宗) 25년(1699)에는 통덕랑(通德郞)이
제수(除授)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수직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제수되고 영조(英祖) 35년(1759)에 졸하니 89세였다. 지방유림과
후손들이 1985년에 영각(影閣)을 세워 영정(影幀)(문화재자료 제349호)을 봉안하고 봉사(奉祀)한다.(淸風誌)
15)
어서각(御書閣)
(1) 소재지 : 산북면 서중리 (2) 연
혁 : 영조(英祖)께서 희정공 청대 권상일(僖靖公 淸臺 權相一)이
찬수당상(纂修堂上)으로 있을 때에 갈성찬수(竭誠纂修) 공존천의(功存闡義) 이대철권(以代鐵卷)이라는 친필을 하사(下賜)하여 후손들이 각(閣)을
세워 보관하고 있다.(權相一 見近嵒書院)
16)
어필각(御筆閣)
(1) 소재지 : 호계면 호계리 (2) 연
혁 : 선조(宣祖)께서 선천부사 홍인걸(宣川府使 洪仁傑)에게 하사한
어필(御筆)을 봉안(奉安)한 곳이다. 충효사(忠孝祠)가 있어 홍선천공(洪宣川公)을 봉향하고
있다. 홍인걸(洪仁傑) : 자는 사호(士豪)요, 관은 부림(缶林)이니 문광공 귀달(文匡公 貴達)의 현손(玄孫)이다.
선조조(宣祖朝)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웅천현감(熊川縣監)을 지내고 창주진방어사(昌州鎭防禦使)를 역임하고 통정(通政)에 올라
선천도호부사겸병마절제사(宣川都護府使兼兵馬節制使)를 지냈다. 병자호란에는 사직(社稷)을 호종(扈從)하여 강화(江華)에 들어가고
임경업장군(林慶業將軍)과 연결(連結)하며 적을 물리칠 계획을 세우고 많은 공(功)을 남겼다.(忠愍公入淸日記) 선조(宣祖)가 써서 내린
어필(御筆)은 다음과 같다. 양가각생자 제해교상여(兩家各生子 提孩巧相如) / 소장취희희 불수동대어(少長聚戲嬉 不殊同隊魚) / 연지십이삼 두각초상소(年至十二三 頭角稍相疎) / 이십점괴장 청구영오거(二十漸乖張
淸溝暎汚渠) / 비황등답거 불능이섬여(飛黃騰踏去 不能頤蟾蜍) / 일위마전졸편(一爲馬前卒鞭)
3. 충(忠)·효(孝)·열(烈)의 각(閣)
1) 신길원현감 충렬비각(申吉元縣監
忠烈碑閣)
(1) 소재지 : 문경읍
상초리 (2) 연 혁 : 임진왜란 때에 순절(殉節)한 신길원현감(申吉元縣監)의 충렬비(忠烈碑)는 공의 사후(死後) 100년이 되는 숙종(肅宗)
18년(1692)에 정언 채팽윤(正言 蔡彭胤)이 짓고, 성균전적 남도익(成均 典籍 南圖翼)이 써서 읍민(邑民)의 힘으로 문경관아(聞慶官衙)
입구에 세웠다. 일정시에 비각이 허물어지고 도로변(문경초등학교 앞)에 이건 방치되었던 것을 광복후 1947년에 비각을 중수하였으나 1950년
6.25동란에 소실되었다. 1976년에 새재 제1관문 안의 비군(碑群)속에 옮겨 세웠던 것을 문경향내 유림의 진정에 의하여 1981년에
새재관리사무소 옆으로 옮겼다가 다시 현 위치로 옮겼으며, 같은 해에 지방유형문화재 145호로 지정되었다.
2) 열녀 최씨정려각(烈女
崔氏旌閭閣)
(1) 소재지 : 가은읍 전곡리 소양동 (2) 연
혁 : 열녀 최씨정려각(烈女 崔氏旌閭閣)은 중종년대(中宗年代)에
전곡리(前谷里)에 세워졌다가 1946년 소양동 상강정(上江亭) 경내로 옮겨 세웠으며 1986년 가은~농암간 도로확포장으로 상강정(上江亭)과 함께
현위치에 옮겨 세웠다. 열녀최씨(烈女崔氏)
: 관은 강릉(江陵)이며 판부사 치운(判府事 致雲)의 딸이요 문성공 안유(文成公 安裕)의
현손(玄孫)인 사직 안귀손(司直 安貴孫)의 처(妻)이며 한천처사 신숙빈(寒泉處士 申叔彬)의 빙모(聘母)이다. 문장이 탁월하고 절행이 바르더니
연산 무오사화(燕山 戊午士禍) 때 사직공(司直公)과 서랑(婿郞) 신숙빈(申叔彬)을 따라 가은 소양에 은거하여 후학(後學)을 교육하다가 죽었다. 최부인(崔夫人)은
다음과 같은 애사(哀詞)를 지어 제사지내고 자진하니 중종(中宗)이 그 절행(節行)을 포양(褒揚)하여 정려(旌閭)를 내렸다.(聞慶縣誌,
勝覽) 鳳凰于飛 和鳴樂只 鳳飛不來 凰獨哭只 搔首問天 天默默只 天長海闊 恨無極只. 봉(鳳)과
황(凰)이 함께 날아 화답하니 즐거웠도다./ 鳳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으니 凰만 홀로 우는구나./ 머리를 긁으면서 하늘에 물어봐도 하늘은 답답하게
대답이 없네./ 하늘은 크고 바다는 넓어 恨은 끝이 없고나.
3) 강여성과 장수황씨 효열각(姜汝성과 長水黃氏 孝烈閣)
(1) 소재지 : 영순면 오룡리 (2) 연
혁 : 효자 강여성(孝子 姜汝성)의 효자각(孝子閣)은 처음에는 오룡리
마을 복판에 있었던 것을 광해 을묘(光海 乙卯 1615)에 정려(旌閭)를 받아 산양에 있던 숙모인 장수황씨(長水黃氏)의 정려(旌閭)와 함께 오룡리 산4번지에 옮겨
세웠으나 세월이 지나고 퇴락(頹落)되어 1990년에 문경군과 진주강씨문중(晋州姜氏門中)에서 출연(出捐)하여 도로 옆 현 위치에
옮겨 중건하였다. 강여성(姜汝성) : 관은 진주(晋州)니 효자 삼산 응청(孝子 三山 應淸)의 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벼슬에
뜻을 버리고 가정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던 중 임진왜란 다음해인 1593년에 고향에 왜적이 침입하므로 보은을 향하여 피난하는 도중에 적을 만나
어머니를 왜적으로부터 몸으로 막았으나 자신은 물론 어머니마저 해를 당하니 그의 아들도 또한 아버지를 구하려다 해를 당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참의(參議)에 증직되고 효자정려(孝子旌閭)가 내렸으며 삼강록(三綱錄)에 기록되었다.(龍宮誌, 勝覽,
孝烈行誌) 장수황씨(長水黃氏) : 효열부 장수황씨(孝烈婦 長水黃氏)는 칠봉 황시간(七峰 黃時幹)의 매(妹)이며
성균박사 강설(成均博士 姜雪)의 처이다. 시부모를 지성으로 섬기고 남편을 내조하여 향리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벼슬길에 있는
남편을 따라 한양에 있으면서도 별도로 빈소를 모시고 조석으로 호곡(號哭)하였으며 남편이 벼슬을 하다가 병사하자 부인은 “남자는 나라를 위하여
죽고 여자는 남편을 위하여 죽는다” 며 천지간의 죄인으로 자처하면서 남편의 시신을 운구하여 고향 선영하에 안장한 뒤로 식음을 전폐한지 30일만에
목숨을 다하니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리고 기렸다.(商山誌, 龍宮誌)
4) 효자 신식 정효문(孝子 申湜
旌孝門)
(1) 소재지 : 가은읍 전곡리 (2) 연
혁 : 효자 신식(孝子 申湜)의 정효각(旌孝閣)은 나라에서
건립하였다. 중간에 없어지고 정문현판(旌門懸板)이 전곡리 소양에 있는 구수재(龜壽齋)에 보관되어
있다. 신 식(申
湜) : 관은 평산(平山)이며
세종조(世宗朝)의 좌상(左相)인 문희공 개(文僖公 槩)의 후손이다. 어머니가 병석에서 고사리를 먹고싶다 하므로 눈속에 산을 헤메면서 고사리를 구하여
공양했으며, 어느날 의원에게 약을 구하러 갈 때 장마비로 개울물이 범람하여 건널 수가 없어 망설이고 있을 때 홀연히 신선 같은 분이 도와 강을
건너서 약을 지어다 드렸다고 한다. 나라에서 그 효성을 기려 정효(旌孝)를 내렸다.(聞慶縣誌)
5) 조 형 효자비각(趙 珩
孝子碑閣)
(1) 소재지 : 문경읍 마원리 915-1번지 (2) 연
혁 : 조형(趙珩)의 효자비각(孝子碑閣)은 문경읍 마원리 조령천
제방에 세워져 있었으나 비각은 없어지고 현재는 효자비만 서 있다. 1990년에 문경시에서 주위를 정화하고 보호책을
설치했다. 조 형(趙
珩 : 관은 횡성(橫城)이요, 온보(溫寶)의
아들로 문과하여 부정(副正)을 지냈다. 천성이 어질고 문예가 숙성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친상을 당하여서는 여막을 짓고 피눈물로 호곡하며 3년을 지냈으며
조부상에도 그렇게 하여 세조(世祖)가 정려(旌閭)를 내렸다.(聞慶縣誌, 勝覽)
6) 상산김씨 효녀각(商山金氏
孝女閣)
(1) 소재지 : 산양면 반곡리 397번지 (2) 연
혁 : 상산김씨 효녀각(商山金氏 孝女閣)은 정조(正祖)
17년(1793)에 건립되어 오늘에 이른다. 효녀 상산김씨(孝女
商山金氏) : 임진왜란 때에 상주 북천전투에서 순절한
김일(金鎰)의 딸이요, 감역 김광윤(監役 金光潤)의 처(妻)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순변사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패주할 때 효녀의 아버지
김일(金鎰)의사는 300여 의병과 북천일대에서
왜병과 대적하여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하니 이 흉보를 듣고 무남독녀인 17세의 소녀가 시종인 영환(永煥)을 데리고 그 많은 시체중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찾는데 낮에는 왜병의 눈을 피하고 밤에만 찾기를 3일만에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30여리를 걸어 고향인 상주군 낙동면 화산리에 안장하였다.
1793년에 정려(旌閭)를 내리고 우승지(右承旨), 홍인선(洪仁善)을 파견하여 정려(旌閭)를 현위치에 건립하였다.(商山誌,
李烈誌)
7) 박일성과 박증효 효자각(朴日성과 朴曾孝
孝子閣)
(1) 소재지 : 농암면 연천리 438번지 (2) 연
혁 : 이 효자각은 고종 임신(高宗 壬申 1872)에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려 창건되었으며 1992년 11월에 문경군의 지원과 후손들의 성금으로
중수하였다. 박일성(朴日성) : 관은 밀양(密陽)이니 보경(保景)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아버지가 악성 종기로
고생할 때에 두꺼비 재가 약이 됨을 알고 엄동설한에 두꺼비를 찾아 헤매면서 하늘에 지성으로 기도를 올리자 뜰에서 두꺼비가 나와 그것을 약으로
쓰니 아버지의 병이 완치되었으며, 그 후 다시 천식으로 기절을 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하니 담핵이 나와 소생되고 오래도록 살 수
있었다. 아버지가 죽으니 시묘 3년을 할 때 호랑이가 상주를 보호하였다.(聞慶縣誌, 孝烈行誌) 박증효(朴曾孝) : 효자 일성(日성)의
아들이다. 대(代)를 이은 지극한 효자로써 아버지가 병중에서 생선탕을 찾으니 겨울철 냇가에 나가 지성으로 기도를 올리자 신령이 나타나 자라
1마리를 주므로 아버지께 시탕하였으며 임종시에는 대변의 맛을 보면서 진단하고 손가락의 피를 내어서 마시게 하면서 극진한 간호를 하였다.
친상후에는 죽으로 연명하며 3년간 시묘를 했다. 이러한 양대(兩代)의 효행으로 아버지 일성은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아들 증효(曾孝)는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으며 나라에서 1872년에 정려(旌閭)를 내렸다.(孝烈行誌)
8) 배문술 효자각(裵文述
孝子閣)
(1) 소재지 : 가은읍 하괴리 841-1번지 (2) 연
혁 : 관은 성산(星山)이니 성산백(星山伯) 극렴(克廉)의
후손(後孫)이다. 천성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별세하자 엄동설한에도 밤중마다 성묘를 하니 호랑이가 항시 뒤따라 지켜 주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그 사실을 알고 정려(旌閭)와 함께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을
추서하였다.(孝烈行誌)
9) 김주범 정효각(金周範
旌孝閣) 환여승람에는 김용주(金溶周)로,
효열행지(孝烈行誌)에는 김주범(金周範)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종(高宗) 29년(1892)에
정려(旌閭)하였다. (1) 소재지 : 산양면 과곡리 349번지 (2) 연
혁 : 김주범(金周範) 자는 치호(致浩)요, 호는 백헌(白軒)이며,
관은 김녕(金寧)이니 백촌(白村) 문기(文起)의 후(後)이다. 순조(純祖) 27년(1827)에 출생하여 천성이 착하고 근면하더니 아버지가
병환으로 고생하자 그 대변의 맛으로 병세를 진단하였으며, 백방으로 약을 써도 효험이 없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여서 10년을 더 살게
하였다. 이와 같은 효행이 경상감영을 통해 조정에 알려져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고 정려(旌閭)가
내렸다.(孝烈行誌)
10) 고유완 효자각(高有完
孝子閣)
(1) 소재지 : 동로면 석항리 (2) 연
혁 : 고유완(高有完) 관은 개성(開城)이니 가선 필흥(嘉善 必興)의
아들이다. 1699년에 나서 1788년에 졸하였다. 출생한지 몇 달이 못되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며, 소년으로 성장하여서는 아버지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되어서 죄인으로 자처하여 조석으로 아버지의 묘를 찾아 호곡하였다. 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고 봉양하여 90세에
졸하니 자신이 흙을 져다 묘를 이루고 여묘
3년을 마친 뒤에도 주식(酒食)을 갖추어 매일 성묘를 하니 무릎이 닿은 자리에 구멍이 생겼다. 하루는 호랑이가 묘 옆에서 노려보아도 개의치
않으니 호랑이도 피해 갔다. 정축년(丁丑年) 국상 때는 조석으로 북향하여 4배를 드리고 소식(素食)으로 지냈으며, 병신년(丙申年)에도 그와 같이
하니 나라에서 정효(旌孝)를 내려 삼세(三世)를 추증하였다.(醴泉誌)
11) 열부 윤소사 일심각(烈婦 尹召史
一心閣)
(1) 소재지 : 문경읍 하초리 새재진입로 옆 (2) 연
혁 : 열부 윤소사(尹召史)는 인조(仁祖) 때에 남편인
조막룡(趙莫龍)이 병자호란에 정병(正兵)으로 출전하여 쌍령전투에서 전사하자 6년을 소복하니 친정부모는 이를 가엽게 여겨 재혼할 것을 강제로
권하므로 자진하여 절개를 지켰다. 나라에 알려져 효종 갑오(孝宗 甲午 1654)에 열부 윤사사지려(烈婦 尹召史之閭)가 내리고 일심각(一心閣)을
세웠다.(聞慶縣誌)
12) 김후준 처 이씨정려(金厚俊 妻
李氏旌閭)
(1) 소재지 : 마성면 오천리 (2) 연
혁 : 효열부 경주이씨(孝烈婦 慶州李氏)는 이국준(李國俊)의 딸이며
김후준(金厚俊)의 처이다. 나라에서 정려를 세웠다. 자라면서 효성이 지극하더니 출가하여서도 가난한 집안에서 시부모 모시기를 지성으로 하던 중
시부모가 큰 병으로 고생할 때에 극진하게 간병을 하여 인근에서 칭송이 자자하더니 남편은 먼저 죽고 없는데도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직접 염습을
장만하여 법도에 따라 장례를 치른 뒤에 묘 옆에 작은 굴을 뚫어 놓고 날마다 가서 관을 어루만지며 통곡하였으며 비가 내리는 날에도 “내 어이
비가 온다고 피하리요” 하면서 비가 개인 뒤에 내려오고 하다가 3년상을 필한 뒤에 음독 자살 하였다.(孝烈行誌)
13) 효자 신탁 정려(孝子 申탁
旌閭)
(1) 소재지 : 농암면 농암리 (2) 연
혁 : 신탁(申탁) 관은 평산(平山)이니 한천처사 숙빈(寒泉處士
叔彬)의 손(孫)이다. 어버이를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고 돌아가시자 여묘 3년을 하는데 밤마다 범이 와서 보호했다.
벼슬은 충순위(忠順尉)이며, 효행이 나라에 알려져 정려(旌閭)가 내리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勝覽)
14) 효자 김일조(孝子 金日祚)와 김득현
정려(金得鉉 旌閭)
(1) 소재지 : 호계면 구산리 (2) 연
혁 : 김일조(金日祚) 자는 주서(周瑞)요, 관은 김해(金海)니 가선 우성(嘉善
宇성)의 아들로 경종 임인(景宗 壬寅 1722)에 출생하여 정조 갑인(正祖 甲寅 1794)에 졸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더니 아버지
병환에 대변의 맛을 보며 시탕을 하고 단을 모아 매일 하늘에 축수하던 중 아버지가 엄동설한에 잉어를 찾으시므로 얼음속에서 잉어를 구하여
드렸으며, 운명시에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3일간이나 연명을 더하였다. 나라에서 알고 정문(旌門)을 내리고 조산대부 동몽교관(朝散大夫
童蒙敎官)을 증직하였다.(儒林履行錄) 김득현(金得鉉) : 자는 인성(仁性)이요, 호는 운소(雲消)니 동몽교관
일조(童蒙敎官 日祚)의 자(子)이다. 영조 정묘(英祖 丁卯 1747)에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선친의 훈육을 받아 부모 섬기기를 지성으로 하여
효행이 특출하였다. 도백(道伯)이 상주하여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내리고 통훈대부 호조좌랑(通訓大夫 戶曹佐郞)을 증직하였다. 양대에 걸친 효로써
은전(恩典)을 입기는 드문 일이다.(儒林履行錄)
15) 효열부 신씨 정려(孝烈婦 申氏 旌閭)
(1) 소재지 : 산양면 현리 (2) 연
혁 : 효열부 신씨(孝烈婦 申氏) 인천인 채파(仁川人 蔡波)의 처(妻)이다.
경인년(庚寅年)에 남편이 죽으니 뒤를 따를 것을 결심하고 장례를 마친 뒤에 시부모의 사당을 세우고 사자(嗣子)를 정한 뒤에 직접 염포일습을
지어서 집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시부모님께서 돌아가시면 이것으로 대렴을 하라” 하고는 자리를 바르게 하고 자진하였다. 나라에 알려져
정려(旌閭)가 내렸다.(商山誌, 勝覽)
16) 효자 채형 정효각(孝子 蔡泂
旌孝閣) (1) 소재지 : 산양면 현리 (2) 연
혁 : 채 형(蔡 泂) 관은 인천(仁川)이요, 자는 해음(海吟)이며,
호는 위재(謂齋)니 규하(奎夏)의 증손(曾孫)이다. 5세때에 거머리가 선공의 다리의 살을 씹어 빠는 것을 보고 새 옷을 지어서 입게 하였으며,
선친의 병중에 빙어(氷魚)를 드린 특이함이 있었고,밖에 있다가 밤에 집으로 바삐 돌아올 때에 호랑이가 길을 인도하였다. 선친의 기일을 당하여는
집이 가난하여 쇠고기를 올리지 못함을 한탄하니 노루 한 마리가 담 안으로 뛰어들어와 잡아서 제수에 올렸다. 나라에 알려져 정조(正祖)께서
정문(旌門)을 내리고 판서(判書)를 증직했다.(尙州誌, 勝覽)
17) 밀양박씨 백원각(密陽朴氏
百源閣) (1) 소재지 : 농암면 종곡리 194-2번지 (2) 연
혁 : 1878년에 문경, 상주, 함창, 용궁 등 4개군 유림에서
건립하였다. 효부 밀양박씨(孝婦
密陽朴氏) : 효부 밀양박씨는 창성(昌城)의 딸이요, 진주인 강미옥(晋州人 姜美玉)의 처(妻)이다.
가난한 선비집에 시집와서 어려운 살림에도 어색함 없이 병석에 계시는 홀로된 시아버지를 정성들여 받들었다. 시아버지가 침을 맞을 때에 아픔을
견디지 못함을 보고, 직접 자신이 침술을 배워 아픈가의 여부를 먼저 자신에게 시험한 후에 시아버지에게 침을 놓았으며, 시아버지가 손이 불편하여
수저를 잡지 못하니 10년을 하루같이 음식을 떠 드렸으며 시아버지가 비둘기 고기를 찾으므로 산에 올라 하늘에 빌었던 바 비둘기 한 쌍이 부엌에
날아 들기에 잡아서 드렸더니 시아버지가 10년간 고생하던 병이 깨끗이 나았다. 미처 나라에서 정문이 내리기도 전에 일제에 나라가 망하니
지방유림에서 효행비와 각을 세웠다. 1990년도에 중수하였다.(孝烈行誌)
18) 경주이씨 효열각(慶州李氏
孝烈閣) (1) 소재지 : 산북면 우곡리 214-1 (2) 연
혁 : 1923년 지역주민이
건립하였다. 효열부 경주이씨(孝烈婦 慶州李氏) : 이명석(李命碩)의 딸이며 광산인 노병호(光山人 盧秉浩)의
처(妻)이다. 남편이 일찍 죽어서 남편을 대신하여 시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한 효부이다. 1874년 용궁에서 이명석(李命碩)의 딸로 태어나 산북의
노병호(盧秉浩)에게 출가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남편이 깊은 병이 들어 지성으로 간호한 보람도 없이 죽었다. 남편이 죽던 날 남편과 함께 죽으려고
하였으나 연로하신 시부모님을 생각하여 죽지 못하고 시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였으며, 또 친가의 노모도 슬하가 적막하여 용궁 친정을 왕복하면서
시가와 친가의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였다.(孝烈行誌)
19) 김연호 창효각(金演鎬
彰孝閣) (1) 소재지 : 산북면 석봉리 347 (2) 연
혁 : 1941년 지방 사림(士林)에서
건립하였다. 김연호(金演鎬) : 관은 강릉(江陵)이니 이형(履亨)의 증손(曾孫)이다. 13세 때에 일제의 압정을 피하여 조부가 출타하여 귀가하지
않으므로 조부를 찾기 위하여 1년여를 전국을 찾아 헤매다 돌아오니 어머니가 깊은 병을 앓고 있었다. 온갖 약을 썼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던 어느날
밤 꿈에 김룡사 내원곡(金龍寺 內院谷) 바위 밑에 산삼 두 뿌리가 있다고 하기에 다음 날 그 곳을 찾으니 과연 산삼이 있어서 캐다가 약으로
사용하니 어머니의 병이 완쾌되었다. 지방 사림(士林)에서 효성을 높이 찬양하여 창효각을 세웠다.(孝烈行誌)
20) 박종진 창효각(朴鍾鎭
彰孝閣) (1) 소재지 : 마성면 정리 34 (2) 연
혁 : 1958년에 지역주민이
세웠다. 박종진(朴鍾鎭)
: 관은 밀양(密陽)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15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애통하기를 어른보다 애절하였으며, 홀로 계신 어머님을 모시는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서 항시 웃는 얼굴로 지성껏 모셨으나 어머니가 병이 들므로 엄동설한 눈길 5백리를 멀다하지 않고서 약을 구하여 드렸으나
돌아 가셨다. 어머니 별세후에는 항시 소복차림으로 지냈으며, 부모님 산소를 길지(吉地)에 모시려고 30년 동안이나 찾아 다니다가 마침내 좋은
자리를 찾아 안장하였다. 그 뒤로 평생을 매월 초하루 보름에는 성묘를 하면서 부모 모시기를 생전과 다름없이
하였다.(孝烈行誌)
21) 효자 류해룡 려(孝子 柳海龍
閭) (1) 소재지 : 동로면 생달리 (2) 연
혁 : 류해룡(柳海龍) 자는 공삼(孔三)이요, 호는 단계(檀溪)이며
관은 진주(晋州)니 구암 용(龜岩 鏞)의 후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더니 동생 해승과 더불어 부모님의 병환에 대변의 맛을 보면서
간호하였으나 보람도 없이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3년을 여묘하여 읍혈(泣血)하니 호랑이가 와서 보호하였다.
1993년 지방유림과 문경군에서 비와 비각을 세웠다.(孝烈行誌)
4. 정(亭)·재(齋)의 목록
구 분 |
명
칭 |
소 재 지 |
비
고 |
누정(樓亭) |
교귀정(交龜亭) 경송정(景松亭) 갈은정(葛隱亭) 사군정(思君亭) 경운루(慶雲樓) 비홍정(飛鴻亭) 열무정(閱武亭) 연
정(蓮 亭) 조개정(螬蝔亭) |
문경 상초(새재) 문경 갈평 문경
갈평 문경 갈평 문경 상리(현아 안) 문경 마원(정곡) 문경
마원(소야천변) 문경 상리(현아 안) 문경 마원(정곡) |
1470창(창건),
1999중(중창) 1958창 1960창 창:미상,
今無 창:조선초, 今無 창:미상,
今無 1753창, 今無 창:미상,
今無 창:미상,
今無 |
상강정(上江亭) 영류정(映流亭) 영락정(潁樂亭) 금하정(金霞亭) 만취정(晩翠亭) 칠우정(七友亭) 학천장(鶴泉亭) 임연정(臨淵亭) 옥하정(玉霞亭) 빙허루(憑虛樓) |
가은 전곡(소양) 가은 전곡 가은
성유 가은 갈전(아차) 가은 전곡(수상) 가은 완장 가은
완장 가은 성저 가은 완장(선유동) 가은 성저 |
1550대창, 1980이건 1600대창,
1890중 1909창 1930창 1936창 1910창 1906창 미상 미상 미상 |
월봉정(月峯亭) 백석정(白石亭) 만수정(萬樹亭) 무림정사(茂林精舍) 간산정(艮山亭) 구봉정(九峯亭) 금주정사(금州精舍) 앙소정(仰巢亭) 영운정(潁雲亭) 소주정(蘇州亭) 망산정(望山亭) 체화정(棣華亭) 삼의정(三宜亭) 삼호정(三湖亭) |
영순 김룡(댓골) 영순 이목(백석) 영순
왕태2 영순 사근(무림) 영순 사근(무림) 영순 금림(자그네) 영순
이목(금포) 영순 포내 영순 사근1 영순 왕태(저현) 영순
의곡(갬실) 영순 율곡1 영순 달지 영순 달지 |
1630대창, 1871중 1600대창,
1998중 1919창 1939중 1977창 1976창 1700대창 1964창 1990창 1919창 1976창 1821창,
1966중 미상, 今無 1921창, 1978훼,
今無 |
북파정(北坡亭) 녹양정(綠楊亭) 경체정(景棣亭) 양파정(陽坡亭) 숭효정(崇孝亭) 학음정(鶴陰亭) 농청정(弄淸亭) 유천장(柳川亭) 농암정(籠巖亭) 두은정(杜隱亭) 세진정(洗盡亭) 죽헌정(竹軒亭) 천연정(天淵亭) 해운정(海雲亭) 영은정(潁隱亭) 월고정(月皐亭) 소원정(遡源亭) 연석정(然石亭) 남고정(南皐亭) 반석정(盤石亭) 원모정(遠慕亭) 석정정사(石汀精舍) 녹리정(甪里亭) |
산양 녹문 산양 녹문 산양
현리 산양 현리 산양 부암 산양 과곡1 산양 존도(금천변) 산양
존도(금천변) 산양 진정(추산) 산양 형천(두곡) 산양 과곡1 산양
송죽(송골) 산양 송죽(안못골) 산양 우본 산양 반곡 산양
봉정 산양 봉정 산양 우본1 산양 과곡1 산양 형천1 산양
송죽(송내) 산양 녹문 산양 녹문 |
1900초창 1955창 1935창 1920대창 1987창 1924창 1739창,
1863중 1905창,
2000중 1955창 1966창 1959창 1919창 1927창 1965창 1971창 1956창 1936창 1948창 1977창 1969창 1930창 1925창,
今無 1900초창, 今無 |
죽림정(竹林亭) 송초정(松梢亭) 지락헌(至樂軒) 농산정(弄山亭) 병암정(屛巖亭) 칠문정(七門亭) 취은정(醉隱亭) |
호계 우로2 호계 우로1 호계
봉서(영강변) 호계 우로1 호계 봉서(잿봉서) 호계 부곡 호계
별암(영강변) |
1934창 1960창 1482창,
1935중 1969창 1750창, 1893중 1960창 1700후창,
今無 |
석문정(石門亭) 산수정(山水亭) 주암정(舟巖亭) 우암정(友巖亭) 화계정사(花溪精舍) 봉산정(鳳山亭) 옥련정(玉蓮亭) 윤봉정(潤峯亭) |
산북 이곡(석문) 산북 내화 산북
서중(웅창) 산북 서중 산북 내화 산북 석봉 산북
우곡1(읍실) 산북 창구 |
1771창 1650대창 1900대창 1801창 1600초창,
1999중 1962창 1960창 1984창 |
정호정(靖湖亭) 망월정(望越亭) 계은정(溪隱亭) 송은정(松隱亭) 벽송정(碧松亭) 비파정(琵琶亭) |
산북 흑송 산북 내화 산북
내화 산북 소야 산북 흑송 산북 대하 |
1966창 1952창 1980창 1927창 1989창 1992창 |
천상정(天上亭) 송간정(松澗亭) 석계정(石溪亭) 여양정사(礪陽精舍) |
동로 간송(천주) 동로 인곡(사기막) 동로
석항(수진) 동로 마광 |
1904창 1915창 1969창 1972창 |
봉생정(鳳笙亭) 진남루(鎭南樓) 조양정(朝陽亭) 취석정(醉石亭) |
마성 신현(봉생) 마성 신현(돌고개) 마성
외어 마성 신현(진남교반) |
임진란전, 1844중 1893창,
今無 今無 今無 |
병천장(甁泉亭) 사가정(四佳亭) 오괴정(五槐亭) 윤화정(允華亭) 진향루(進鄕樓) 사우정(四友亭) |
농암 내서(쌍룡) 농암 율 수 농암
화산 농암 내서 농암 농암 농암 내서 |
1703창 1947창 1964창 1965창 1979창 |
침석정(枕石亭) 남석정(南石亭) 반구정(伴鷗亭) 천교정(遷喬亭) |
흥덕동(옛골 芮洞) 흥덕동(옛골
芮洞) 창동(영강변) 유곡동(역 아사내) |
미상 1600초창, 今無 1750대창,
今無 1490창, 今無 |
재(齋) |
구수재(龜壽齋) 연봉재(蓮峯齋) |
가은 전곡(소양) 가은 성저 |
1610대창, 1851중 1810대창,
1945중 |
퇴산재(退山齋) 청산재(靑山齋) 달지재(達池齋) 사현재(沙峴齋) 추모재(追慕齋) 병현재(屛峴齋) 석산재(石山齋) 성계재(聖溪齋) 율곡대재(栗谷大齋) 진목재(眞木齋) 간곡재(間谷齋) 지상재(池上齋) 수상재(水上齋) 하연재(荷淵齋) 추원재(追遠齋) 추원재(追遠齋) 동산재(東山齋) 산택재(山澤齋) |
영순 오룡(퇴동) 영순 의곡(도연) 영순
달지 영순 오룡(퇴동) 영순 오룡(퇴동) 영순 왕태(저현) 영순
이목 영순 말응 영순 율곡 영순 사근 영순 사근 영순
사근 영순 의곡(퇴안) 영순 율곡(전촌 영순 포내(포상) 영순
말응(먼갓) 영순 율곡(동무지) 영순 율곡(영강변) |
미상, 1864중,
1983중 1600대창 미상 미상,
1985중 1887창, 1987중 미상,
1924중 미상,
1985중 1930대창 미상, 1990중 1879창,
1967중 1969창,
1980중 1900대창 1925창 미상,
1927중 1918창 1976창
今無 |
발음재(發蔭齋) 상의재(尙義齋) 충사재(忠思齋) 영모재(永慕齋 원모재(遠慕齋 동은재(東隱齋) 모원재(慕遠齋) 흘모재(屹慕齋) 취규재(聚奎齋) 추원재(追遠齋) 영소당(永소堂) 모견당(慕鵑堂) |
산양 과곡 산양 위만 산양
부암 산양 현리 산양 과곡 산양 과곡 산양 반곡1 산양
반곡1 산양 신전 산양 위만 산양 과곡(구연지 위) 산양
과곡 |
1909창 문화재자료302호,175尙節祠,1965중 1946창 1790창,
1911중 1920창 1956창 1987창 1926창 미상,
1984중 1960대창 1964창 1956창 |
사효재(思孝齋) 영모재(永慕齋) 사목재(士牧齋) |
호계 구산(가실) 호계 견탄 호계
선암1 |
1922창 영조조,
1955중 미상 |
부곡재(鳧谷齋) 존경재(尊敬齋) 계양재(啓陽齋) 우모재(寓慕齋) |
산북 대하2 산북 내화(탑동) 산북
지내1 산북 지내1 |
1878창 1550대창,
1963중 1962창 1962창 |
영모재(永慕齋) 고산재(古山齋) 사향재(思鄕齋) |
동로 인곡(구만) 동로 마광 동로
인곡2 |
1906창,
1987중 1926창 1984창 |
추모재(追慕齋) |
마성 오천(저부실) |
고종조, 1998중 |
경모재(敬慕齋) 성경재(誠敬齋) 유천재(乳泉齋) 존경재(尊敬齋) |
농암 연천2 농암 궁기2 농암
화산(삼화실) 농암 사현 |
1990대창 1937창 1900초창,
1943중 1900초창 |
영고서재(潁皐書齋) 첨소재(瞻掃齋) 경모재(景慕齋) 추원재(追遠齋) |
흥덕동(옛골
芮洞) 우지동(씨실골) 흥덕동 공평동 |
1845중 1942중
1980중 |
대(臺) |
추롱대(秋聾臺) |
산양 진정2(추산) |
추재(秋齋) 金振錫의
소요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