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하이쿠 서양인들은 왜 하이쿠에 열광하는가 17음절이 빚어내는 환상적 아름다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문법적 전형에서 벗어나는 것 같은 표현들,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 의미가 더욱 더 모호해져 이해하기 어려운 일본의 시가 하이쿠다. 일본인들에게도 어렵다는 이 하이쿠에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어 빠져들고 하이쿠에 감동하고 있으니 자못 오묘할 따름이다.
하이쿠를 소개한 미국의 초등학교 교과서. 학생들에게 어느 한 순간을 하이쿠로 표현하도록
시킨다.
서양인들에게 미지의 환상성, 동양적 신비의 냄새를 풍겼을 법한 하이쿠는 에즈라 파운드와 같은 이미지스트들에 의해 서양 영문학사에서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에즈라 파운드는 하이쿠의 마력에 빠져든 다음부터는 주절주절 30행이 넘는 자신의 시가 ‘이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시를 버리고 줄이고 하는 과정을 거듭한 끝에 정제와 간결, 단순의 미학이 절정을 이루는 하이쿠 풍의 시를 쓰게 된다. 몇 마디 말이 품어내는 묘한 여운과 이미지, 그것들이 겹겹으로 융합되어 감상자들을 시의 진경(眞境)으로 이끄는 힘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짧으나, 그 여운은 길다 하이쿠의 사전적인 정의는 이렇다. “하이카이[俳諧]의 구, 골계적인 구. 5 ·7 ·5의 17음을 정형으로 하는 짧은 시. 렌카의 홋쿠 형식을 계승한 것으로 기고[季語]와 기레지[切子]를 넣어서 읊는다.” 그렇다면 ‘한줄도 길다’는 짧은 시 하이쿠가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우선 하이쿠의 매력은 ‘지금 바로 여기’, 이 ‘순간’의 정황을 포착하여 짧은 시로 긴 여운과 울림을 주는 것에 있다. 다음은 아라키다 모리타케(1493-1594)의 하이쿠다. 낙화洛花 나뭇가지로 돌아가네 아! 나비로구나 벚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봄날, 몽롱한 시간 속을 하늘하늘 나는 한 마리 나비가 절로 그려진다. 가장 짧은 시어로 도달할 수 있는 환상적인 세계,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듯한 순간의 포착, 거기에 하이쿠의 매력이 있다. 어떻게 저 짧은 시어들로 신비로운 세계가 그려지는 것일까?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기고[季語]와 기레지[切子]를 이해해야 한다. 마사오카 시키: 일본의 고전시가인 하이쿠를 근대의 시로 거듭나게 하는 데 절대적
역할을 했다.
멋대로 쓰면 안 된다 하이쿠가 짧고 쉬운 것처럼 보여서 그냥 내키는 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 그 규칙의 첫 번째가 바로 기고다. 기고는 “렌카와 하이쿠에서 작품 속의 계절을 나타내기 위해서 읊도록 특별하게 정해진 단어로, 예를 들면 꾀꼬리는 봄, 금붕어는 여름의 기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별하게 정해진’ 말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계절을 나타내는 모든 단어가 기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 시인들에게 읊어져서 인정받은 단어야만 한다. 기고는 일본 전통시가의 역사 속에서 오랜 시간 갈고 닦이면서 축적된 시어 이미지 전승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암묵적 전승을 어겨서는 안 된다. 여백의 아름다움 기고가 약속된 시어라면 기레지[切子]는 여백의 아름다움을 배가하는 ‘말 끊음’이다. 다시 말해 시적 언어의 아름다움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수사적으로 끊는 형태를 취하는 말’이 바로 기레지인 것이다. 읽는 방식의 낯설게 하기를 통해 일면적이고 단선적으로 흐를 수 있는 시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이끄는 방식이다. 서술되지 않는 여백은 더 많은 말을 하는 법이다. 하이쿠는 모여서 읊어야 제맛 하이쿠 인구가 500만 명, 단카 인구가 100만 명이 넘는다니 얼마나 하이쿠가 일본인들의 저변에 자리잡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이 하이쿠를 향유하는 방식은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하이쿠 문단은 창작 선생에 해당하는 주재자를 중심으로 결사가 형성되며,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구카이[句會]라고 하는 하이쿠 창작, 감상 모임을 연다. 하이쿠는 여럿이 모여 읊고 감동하는 형태로 향유된다. 하이쿠 인구가 많아 하이쿠 문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이 종종 생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하이쿠를 즐기는 사람들은 대개 결사에 속해 있으며, 다른 결사에서 지어진 하이쿠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서구 정치인들이 종종 하이쿠를 인용하는 이유 하이쿠는 하나의 시이기 이전에, 안과 밖을 구분하고 같은 부류에게만 열려 있는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며, 고도의 양식미, 세련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일본 문화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일본을 방문하는 서양 사람들, 특히 정치인들은 연설 중에 하이쿠를 자주 인용한다. 그들이 하이쿠를 인용하면 일본 사람들은 자기들이 잘 아는 하이쿠라면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군요’라는 친숙함으로, 잘 모르는 하이쿠라면 자기 나라에 저런 멋진 시가 있었다는 것에 새삼 놀라워하며 그 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준 연설자의 노력에 호감을 가진다. 어쩌면 세계의 시 중에서 가장 비정치적이고 메시지의 전달과는 거리가 먼 하이쿠가 이렇게 활용되는 것이 한편 놀랍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서구인들이 일본이라는 폐쇄적인 공동체의 문을 여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들은 하이쿠로 일본인들의 마음을 향해 인사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것이다. 늘 삐걱거리기만 하는 한일 관계의 숙제를 푸는 비법이 이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일본 문화의 힘-세계는 왜 J-컬처에 열광하는가』(동아시아 펴냄) 중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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