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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저항과 긍지의 땅, 강화

_______! 2006. 11. 28. 00:18
 

10월의 마지막주...

쌀쌀한 새벽 공기가 이제 가을이 접어드는 걸 실감나게 했다.

강화로 향하는 길....아이들 체험학습 인솔로 따라 나서긴 했지만 저항과 긍지의 숨결이 어린 땅, 그곳 강화에 대한 애잔함이 날 끌어당겼다. 한산한 국도를 달리는 중, 자욱하게 낀 새벽안개에 쌓여 강화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아득한 옛날로의 시간여행 같았다.

40분 남짓 달렸을까?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해서인지 예상보다 빨리 강화에 도착할 수 있었다.

   < 갑곶돈에서 바라본 강화대교와 갑곶돈에 설치된 포(위), 성벽과 강화역사관(아래)>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자리 잡은 첫 유적지가 갑곶돈이다.

1232년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이후 1270년까지 몽고와의 줄기찬 항전을 계속하며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몽고족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큰 물줄기 한번 구경 못 하고 산 민족이다. 바로 이 이유로 고려가 강화로 도읍을 옮겼던 것이다. 몽고족은 폭이 200~300m밖에 안 되는 강을 차마 건너지 못하고 건너편 문수산성 위에서 갑곶을 바라보고만 있었으니 고려로서는 천혜의 요새일 수밖에. 그러나 아무리 천혜의 요새인들 지키는 쪽에 허점이 있다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법. 1636년 병자호란을 맞은 상황에서 조선의 초병들은 물색없이 강물만 믿고 낮잠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몽고족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민가를 헐어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와 강화를 함락시키고 말았다.

  햇빛에 반사된 은빛 물결은 그곳이 격전의 장소였다는 것은 옛말인 듯 잔잔하게 흐르고만 있었다.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고요함... 저 멀리 적군의 살벌한 눈초리는 마냥 남의 일인 듯 편히 낮잠을 청했던 조선 초병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본다. 

 갑곶돈의 일부가 강화의 다른 전적지와 함께 복원되면서 대포와 소포 등을 새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는데, 그 갑곶돈 자리에 강화역사관도 들어서 있었다.

강화역사관은 5년에 걸친 시공 끝에 1988년 9월 14일 개관, 모두 4개의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석기 시대부터 이어진 선조들의 생활 흔적, 팔만대장경 제작 모습 등의 문화 전시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쳐 운요호 사건에서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기까지 고려에서 조선, 근· 현대에 이르는 강화의 역사가 망라되어 있다. 강화를 찾는 이라면 한번은 반드시 들러 보아야 할 곳이다. 강화의 역사를 한눈에 훑어볼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

 여기서 관람팀!! 강화도는 가는 곳곳마다 입장료를 받는다. 곳곳에 유적지가 있다보니 아름아름 입장료가 모이다보면 그 가격도 제법 만만치가 않다. 자신이 갈 곳과 관람료를 따져보고 3곳 이상 간다면 5곳을 한번에 묶어 판매하는 패키지티켓을 끊을 것. 훨씬 저렴한 관람을 할 수 있다.


 섬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는 가을의 들녘을 따라 하점면 부근리에 들어서자, 거대한 고인돌이 제법 잘생긴 자신의 모습을 뽐내며 나를 맞이했다.  부근리 고인돌은 북방식 무덤인데 우리나라 고인돌 중에서 가장 큰 것 중 하나라고 한다. 비스듬히 경사를 이룬 굄돌 위에 거대한 화강암 덮개돌이 올려져 있었다. 무게만도 무려 5톤이라고 하니 과연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꽤 많은 인력과 또 그만큼 많은 시간을 들였을텐데, 그 일대의 막강한 족장쯤 되는 것일까? 책을 통해 고인돌을 쌓는 이론이야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 서 있는 이 고인돌을 보니 이론은 저리로 가고 신기함과 경외심만 커져갔다. 내가 찾았을 땐 한창 보수공사 중이었는데, 숲 속에 있던 지대석 한점도 한곳으로 이전시켜 놓고, 매표소도 들어서 있었다.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기대 반, 걱정 반...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우리나라의 고인돌이니만큼 신중하고 발전적인 변화가 되기를 마음속으로 간곡히 부탁해 보았다.


 다시 시내로 빠져나와 좁은 골목을 따라 올라가니 그 끝점에 고려궁터가 자리잡고 있었다. 고려궁터는 고려왕조가 대몽항쟁을 피해 39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그 후 조선 인조 때 행궁을 건립해 전각과 강화유수부, 외규장각 등을 세웠으나 병자호란 때 함락되고,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완전 소실되는 등 수난의 역사가 되풀이되었다. 지금은 덩그러니 단 몇 채의 건물만 들어서 있고, 찾는 이도 없이 고요히 역사와 함께 묻혀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세월의 흔적은 고스란히 앉고 있는 고목들은 높게 뻗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고목에 둘러쌓인 강화유수부 건물과(위) 한쪽편에 복원한 외규장각의 모습(아래)>

 산책하는 마음으로 궁터를 둘러보다 한쪽 편에 새로 복원된 외규장각이 눈에 들어왔다. 다가가 스그머니 문을 열어보았다. 휑하니 비어 있는 그 곳...순간 얕은 탄식이 토해졌다. 전란을 대비하여 안전하게 보관하고자 이곳에 두었을 수많은 국서들...임진왜란의 고초를 이겨내고 겨우 이곳에 자리 잡았던 것들이 제 자리를 잃고 먼 타국 땅에서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무겁게 내려놓았다. 1866년 프랑스의 함대가 강화에 침입해 외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던 대부분의 책들은 불태우고 340여권의 책을 가져갔다. 그렇게 빼앗긴 도서들은 현재 프랑스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요즘 모프로그램에서 우리 문화유산들을 되찾기 위한 노력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렇게 한발한발 움직일 때가 아닌가 싶다.


 깊어가는 가을날 강화를 찾은 만큼 빠질 수 없는 곳이 전등사이다. 변변한 단풍구경 한번 못해 본 올 해, 전등사를 올라가는 발걸음이 자못 경쾌하기까지 했다. 점심을 든든히 먹고 올라 간 탓인지 몇몇의 일행들이 숨을 헐떡이며 계단을 기다시피 올라가는 모습에 한참을 웃으며 밀고 당기고 하나 보니 어느새 전등사현판이 보인다.

   < 전등사전경(위)과 전등사 대웅보전 추녀 밑의 나체연인상(아래)>

 전등사는 강화에서 가장 큰 절이다. 강화의 역사와 더불어 온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이다. 큰 절이라 하지만, 나만의 느낌일까... 전등사의 아름다움은 소박함과 포근함이다. 울긋불긋 단풍들에 둘러싸여 풍경인 듯 자리 잡은 절은 편안한 정원같다.

 전등사에서 놓치지 않고 찾아봐야 할 것 중 하나가 대웅보전의 추녀이다. 대조루를 비껴서면 대웅보전이 눈앞에 다가서는데, 재미난 것이 추녀 밑에 나체 여인상을 조각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 나녀상에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광해군 6년 12월 전등사는 큰 불이 나 모든 건물을 새로 짓게 되었다. 이때 대웅전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아랫마을 주모와 정분이 났다.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도편수가 벌어다 준 돈을 챙겨들고 줄행랑을 쳤다. 앙갚음 할 묘안이 없을까. 도편수는 골똘히 생각한 후 주모를 닮은 나체상 네 개를 만들어 법당의 네 귀에서 추녀를 떠받치게 하였다. 부처의 설법을 듣고 개과천선하라는 것이었고, 악녀를 멀리하라는 경고였다고 전한다. 유적지를 찾아보며 느끼는 또 다른 즐거움은 이런 이야기거리들이다. 대웅보전 둘레를 보면 추녀 밑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네 귀퉁이를 돌아보는 사람들이 유독 눈에 뛸 것이다. 이 사람들 중 한명이 되어 보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광성보와 돈대였다. 강화의 유적지 대부분이 적을 방어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설치했던 것들이라고 한다. 예전부터 강화 땅을 넘보는 무리들은 무수히 많았다. 강화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외세 침략의 첫 통과지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적을 방어하기 위한 진, 보 등의 흔적들이 많은데, 강화도에는 당시 5개의 진, 7개의 보, 53개의 돈, 8곳의 포대, 8곳의 봉수, 4곳의 요망대가 있었고, 현재 그 중 일부가 복원된 상태라고 한다.

    < 광성보 성문인 안해루와 어재연장군 형제의 쌍충비(위)와 순국무명용사비(아래)>

 광성보에 도착해 성문을 들어서자 왼쪽편으로는 강화의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고 오른쪽편으로는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흡사 경치 좋은 유람지에 들어선 기분이다. 엄마, 아빠 손을 붙들고 마냥 좋아 깔깔거리며 앞서가는 꼬마아이는 이곳이 수많은 이의 피로 물들여졌던 전쟁터였던 것을 상상이나 할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니 왼쪽편에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 형제의 쌍충비가 비각과 함께 세워져 있었다. 어씨 문중에서 순국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그 곁에 신미양요 때 싸운 순국무명용사비가 서 있어 그들의 충혼을 기리게 한다. 잠시 앉아 고단한 발에게도 휴식의 시간을 주며 아이들에게 열심히 강의하시는 강사님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봤다. 그리고 내 귀에 포착된 재미난(?)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다음과 같다. 강화도의 덕진진에서 신안리를 마주 바라보는 좁은 해협, 손돌목에는 슬픈 전설이 하나 전해진다고 한다.

 고려 고종이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를 향해 피신하는데,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뱃길을 안내가게 되었다. 배가 광성보를 지나자 갑자기 뱃길이 막혔다. 피신길이던 왕은 뱃사공인 손돌이 무슨 계략을 품은 줄로 여겨 즉각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손돌은 이곳 지형이 원래 그렇다고 결백을 주장하였으나, 왕과 대신들은 손돌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손돌은 뱃길 앞에 바가지를 띄웠다. 그 바가지가 떠가는 대로만 가면 저절로 뱃길이 트일 것이라고 일러주고는 끝내 처형당하고 만다. 어쩔 수없이 왕은 손돌이 가르쳐 준 대로 바가지를 따라갔는데,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왔다. 왕은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부터 사람들은 덕진진 앞 좁은 물길을 손돌목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지형적 특징을 따라가보면 그곳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진실인지 알 길은 없지만, 자못 일리가 있고 그럴듯해 난 늘 그런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돈대로 발길을 옮기는 중 몇 걸음 내려서자 7기의 분묘가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이 내려다 보였다. 결전 당시 어재연 장군 휘하에 있던 군인 51명이 모두 전사했는데, 그들의 신원을 알 수가 없어 여기 7기의 분묘에 합장했다고 한다. 포로가 되느니 최후까지 나라를 위해 몸바치겠다는 결의로 싸웠고, 결국 전사했다는 기록은 오가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이로써 나의 강화답사는 마무리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저항과 인내로 버텨 온 강화의 역사... 강화의 이러한 역사가 있어 어쩌면 우리의 땅과 역사가 지켜지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잠깐 해보았다. 수많은 피와 눈물이 묻혀있는 땅, 하지만 그것들로 인해 긍지로운 땅....강화에서 아프지만 강인했던 우리의 역사를 뒤돌아보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고맙다...강화야.... 


출처 : 문화유산 답사기
글쓴이 : 히메로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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