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bird | 외로움과 고독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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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내내 감기와 동거를 하다가 가출하였던 감기가 다시 들어오는 바람에 꼼짝 않고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있다가 지난 자료들을 검토하다가 하나의 자료에 눈에 들어왔다. 삼 년 전 3박 4일간을 전라도 광주, 담양, 부안 등을 두루 다녀온 적이 있다. 학우들과 함께 한 여행이었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여행 중에 나는 내가 무척이나 만나고 싶었던 이의 무덤가를 갔다. 내가 학우들과 함께 찾아간 곳은 부안읍에 있는 梅窓공원이였다. 부안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안내를 받아 함께 갔는데 길가에 자그마한 공원과 함께 한 梅窓의 작은 묘에 도착한 것은 노을이 질 무렵이였다. 지는 햇살을 받아 봉분의 맨 위는 붉게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매창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오 년 전 즈음 된듯하다. 고전시가쪽으로 관심이 많아 책들을 사서 보곤 했는데 기녀문학을 대하면서 매창의 글을 접하게 되었다.
기녀문학이라고 하면 맨 먼저 황진이를 떠오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황진이는 자유분방한 “멋”이 깃들여져 있는가 하면 梅窓은 황진이만큼 예쁘지는 않았지만 정의(情誼)에 가득 차고, 정절로 굳으며 그 인내와 순종과 여성적 섬세함으로 눈물겨운 작가였다고 한다.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휴머니티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고 거치른 마음을 순화시키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철학적인 고요한 명상과 예술적인 승화된 정감을 일으키는 부분이 나를 사로잡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시를 잘 쓰고 성정이 절개가 있고 깨끗하여 세상 어지러움에 물들지 않았으며 음란한 일을 좋아하지 않았던 매창에게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안현의 아전이라고 전해진 이탕종의 딸로 계유년(1573년)태어나 이름을 계생(癸生)이라 지었으며 계랑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워낙 재주가 뛰어나 시문과 거문고를 익혔다고 한다. 15세경에 고을 태수인 서우관이 사랑한 바가 되어 그를 따라 서울로 갔다가 여의치 못해 부안으로 내려와 기생이 되었다는 “열상규조”에 기록되어있다. <주>열상규조는 지정(之亭) 안왕거가 저술한 규방의 시문집
기생이 되었다고 아무렇게나 몸을 내버린 것이 아니라 절개가 곧았다고 한다. 술 취한 손님이 접근을 하더라도 그녀는 시를 지어서 쫓아내곤 하였다고 한다. 지봉 이수광은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어느 한 나그네가 계랑의 소식을 듣고 시를 지어서 집적되자 그녀는 운을 받아 이렇게 응답을 한다.
떠돌며 밥 얻어먹는 법이라곤
평생 배우지 않고
매화나무 창가에 비치는 달 그림자만
나 홀로 사랑했다오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을
그대는 알지 못하고
뜬구름이라 손가락질 하며
잘못 알고 있어라
라고 했더니 그 나그네는 서운해 하며 가버렸다고 한다. 계랑은 평소에 거문고와 시에 뛰어났으며 죽을때도 거문고와 함께 묻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녀와 유희경의 애정이야기는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녀의 나이 20세가 되던 해 촌은 유희경을 만나게 된다. 당시 유희경은 서울에서 시문객으로는 모를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세는 부안까지 알려진 모양이였다. 유희경이 백대붕과 부안에 머물게 되면서 梅窓을 만나게 되면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당시 유희경은 48세였다. 서로 사랑을 확인 하는 시로 화답을 주고 받으며 사랑을 나누다 유희경이 서울로 훌쩍 떠나버리자 그녀는 죽을때까지 유희경을 잊지 못하고 있다 38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유희경은 자가 응길이며 호는 촌은으로 천민은 아닌것 같으나 양반 가문 태생은 아니라는 것만 전해져오고 있다. 92세의 나이로 서울 대묘동의 도봉서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양반출신이 아니라 벼슬을 못했지만 인품이 청결 소박하였으며 시문이 청절하여 당대의 명공 귀족과 시문으로써 창수하였다 한다. 그의 나이 48세에 20세가 된 梅窓을 만나면서 사랑을 하며 헤어져 있어도 梅窓을 그리워 하는 마음은 그의 시에서 역력히 드러나 있다.
1.계랑에게 주노라
일찍이 남국에 계량 이름 소문 나
글 솜시 노래 재주 서울까지 울리더니,
오늘에야 그 모습 대하고 보니
선녀가 떨쳐 입고 내려온 듯 하구나
이 시는 처음 유희경이 梅窓을 만나 정들었던 심회이다.
2. 계랑과 희롱하며
버들 꽃 붉은 자태 잠깐동안 봄이려니
마른 몸에 주름 얼굴 다시 못고쳐,
선녀인들 독수공방 어이 참으리
무산의 운우지정 자주 내린다
이 시는 매창과 만나서 운우의 정으로 즐기며 희작한 시이다. 즐거움은 이때가 절정이였으리라
3. 계랑을 생각하며
그대 집은 낭주에 있고
나는 서울 한구석에 살고 있으니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 비 뿌릴제 창자 끊기네
이 시는 매창과 헤어져 서울에 와서 그리워하는 촌은의 심화이다
촌은집에 매창에 관한 시 15수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매창은 유희경을 그리워 하는 시를 이렇게 적고 있다.
소나무처럼 늘 푸르자 맹서했던 날
우리의 사랑은 바닷속처럼 깊기만 했어라.
강 건너 멀리 떠난 님게선 소식도 끊어졌으니
밤마다 아픈 마음을 나홀로 어이할까나
松柏芳盟日, 恩情與海深
江南靑鳥斷, 中夜獨傷心
梨花雨 훗날닐제 울며 쟙고 離別한 님
秋風落葉에 져도 날 생각는가
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여라
동풍은 삼월에 부는데
곳곳에 꽃 떨어져 휘날리는데
젊은 날 상사곡 아무리 부른들
어찌타 강남의 임은 오지 않는고
원뜰 대밭에 봄이 깊어 새들은 지저귀고
거문고 빗기 끼고 상사곡 불렀어라
눈물이 뺨을 적셔 발을 걷고 바라보면
동풍에 꽃 떨어지고 제비는 비껴간다
이 시조는 가곡원류에 실려있다. 梅窓은 유희경이 서울로 올라간 뒤에도 다른 남자에게 정을 주지 않고 절개를 지켰음을 알 수 있다.
梅窓은 유희경이 서울로 올라간 뒤 이귀를 만난다. 이귀는 이웃고을 군수인데다 글재주까지 뛰어나 매창의 마음을 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 구체적 기록은 없고 허균의 기행문에 이귀의 정인(情人)이라고 표현한 것만 남아있다. 이귀가 파직되어 떠난 뒤 梅窓은 허균을 만난다. 허균은 여행길에 부안에 머물며 梅窓을 만났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녀의 재주와 정취에 하루 종일 술을 나눠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 받았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 딸을 허균의 침실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를 허균은 “만일 그 때에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 들었다면 우리가 이처럼 십년씩이나 가깝게 지낼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여자를 좋아했던 허균이었지만 자기 고백대로 梅窓과는 끝내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니 梅窓의 절조 높은 뜻을 허균이 알고서 정신적 연인으로서 서로 사랑을 나눈 것이다. 또한 梅窓은 허균이 자길 좋아하는 줄 알면서도 자기 대신 조카딸을 허균의 방으로 들여보내준 梅窓의 마음씨 또한 놀랍다. 그토록 지혜로운 여인이었기에 처음 만나자마자 허균과 하루 종일 시를 주고 받으며 즐겁게 노닐 수 있었을 것이다. 梅窓은 허균과의 만남 이후 梅窓이 죽을 때까지 특별한 기록은 없다. 매창과 촌은이 1607년에 다시 만나 열렬한 사랑을 재연하고 서울에서 새생활을 하였다는 기록은 추측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梅窓을 사랑했던 촌은 유희경과 허균은 그녀가 죽은 후 애도의 시를 적고 있다.
허균의 추도 시
아름다운 시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나셨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하고
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숭아가 열릴 때쯤에는
그 누가 설도의 무덤 곁을 지나려나
설도는 당나라때 시를 잘 짓는 기생으로 시인들과 함께하였다고 한다. 허균은 매창을 설도에 비하였다.
촌은 유희경은
꽃다운 혼이 상여를 타고 백운간에 사라졌구나
하늘은 멀어 아득한데 돌아올 기약없네
오직 이원에 한 곡조 남겨두고 갔으니
왕손들이 옥진가를 부르누나
옥진가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장한가에서 당 현종과의 슬픈 애정 이야기에 양귀비를 표현 한것이다. 유희경은 매창을 옥진에 비유하면서 예를 표한것이리라.
비록 기생이였지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절개는 고결하였다고 할 수있다.
오늘 하루 종일 매창과 함께 하면서 간단하게 소개만 하였다. 더 많은 자료는 있으나 일일이 열거 할 수는 없어 여기까지만 적어본다.
하루 종일 뜨거운 이불 속에서 나오지 말라는 엄명(?)을 받잡고 감기 퇴치하기 위한 몸부림을 치며서 매창의 문학속으로 빠져보았다. 촌은 유희경과 매창의 질퍽한 사랑보다는 깔끔하고 고결한 사랑속삭임 속을 헤매다 이제 겨우 빠져나와본다.
*참고자료 "김지용 "매창 문학연구"
"허광자 "이매창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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