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제] 2006년 10월 23일(월)
활자 中기원설 반박
"동북공정 최상책은 철저한 고증실력이야. 우리 젊은이들도 옛 문서하나 붙잡고 몇십년간 파고들 수 있는 끈기가 있어야 돼."
한국과 중국간 벌어져왔던 인쇄술 본가(本家) 논쟁의 최전방에서 활약해왔던 '성암고서박물관'의 성암 조병순 관장(84)은 북핵위기의 와중에서도 고서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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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목적이 티베트에 대한 서남공정, 위구르에 대한 서북공정 등의 예를 볼 때 결국 '영토문제'로 수렴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라고 했다.
"아직도 고서는 두 손 모아 기도한 뒤 펴곤하지. 옛 문서는 하늘이 돕기 전에는 손에 넣을 수 없거나 발견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항상 정성을 쏟으려고 해왔어. 마스크와 장갑까지 챙기는데 마스크는 콧김에 훼손될까봐 그런 거고…."
조 관장이 동북공정 논란 속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현존 세계 최고(最古) 목판본인 '다라니경',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을 놓고 중국기원설을 제기해왔던 중국 주장들을 뚜렷한 물증으로 모두 막아낸 주인공이기 때문.
"석가탑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당 무주(武周ㆍ702년) 때 중국 낙양에서 인쇄된 뒤 703년부터 신라에 전해진 것으로…." "베이징 도서관 소장 '어시책(御試策)'은 1341년~1345년 사이에 인쇄된 것으로 한국 직지심경(1377년)보다 오래된 현존 최고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모두가 중국이 제기해왔던 주장들이다.
그는 다라니경의 중국기원설의 경우 중국 유일의 여제(女帝)였던 측천무후(서기 625년~705년)가 재위기간 중 아버지의 이름(武士華)에 들어간 '화(華)'를 쓰지 못하도록 했다는 사실 하나로 근거가 없음을 밝혀냈다.
지명인 '화주(華州)'를 '태주(太州)'로 바꿀 정도로 이 문제에 신경썼던 시점에 석가탑 다라니경에 '華'자가 쓰였다는 사실을 밝혀내 측천무후 재위시절인 702년 낙양에서 간행돼 신라로 건너갔다는 중국 주장의 허점을 결정적으로 콕 집어낸 것.
금속활자 기원논쟁은 일본에 있는 '정가당문고'라는 한 박물관에서 '어시책' 원본을 직접 찾아낸 뒤 이것이 목판본이라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우리 측 승리로 끌어냈다.
조 관장이 직접 세운 성암고서박물관은 74년 11월 개관해 20여점의 국보나 보물급을 포함 약 7만여점의 옛 자료들을 보유하고 있다. "공대(한양공업대 건축공학과)를 나와 젊은 때는 건축업에 전념했는데 고서가 막 벽지로 쓰이더라고. 그래선 안된다는 생각에 고서들을 모으기 시작했어."
그는 귀중한 문화유산을 수집ㆍ보전해온 공로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고 얼마 전 박물관 개관 30년을 기념해 후학용으로 '삼장문선대책연구'란 연구서를 펴내 또다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출처 : 태계황선생
글쓴이 : dalc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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