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무술 탐방기1/'태극권 본고장에서 '건강양생' 실감 |
류병관 용인대 태권도학과 교수/ 본지 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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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을 채우기 위한 아픈 여행 밤새 술을 마시고 나면 속이 아프다. 그런 아침에 자동차 시동소리와 매캐한 매연사이를 뚫고 국물 맛이 좋은 해장국집을 찾아 돌아 다녀본 기억들이 한 번씩은 있을 것이다. 식도를 덥혀 주는 얼큰한 국물 맛에 대한 기억과 이빨에 꽉 깨물어 씹히는 찬 깍두기의 시큼털털한 그런 맛을 찾아 몇 골목을 헤맬 때쯤이면 대개 등줄기를 파고드는 바람이 골목 어귀에서 일어나곤 하는 그런 기억들 말이다. 비행기 표를 받아들고, 순간 약간은 쓰린 속을 위해 이른 아침 해장국 골목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왜 일까? 느닷없이 “태권도공원 조성을 위한 해외 방문조사단”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일원이 되었다. 마치 준비 안 된 위속에다 독주를 쏟아 붓고 거꾸로 배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술기운을 늦게서야 맡으며 쓰린 속을 의식하는 듯한 새삼스럽고 생뚱맞은 기분이었다. ‘태권도공원’, ‘태권도진흥재단’…분명 우리를 위한 이름인데도 아주 멀리 있는 잘 보지 않는 사촌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또 왜일까? “태권도공원”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어감도 그러하거니와 태권도계 전체가 이 문제에 대해 함께하는 간단한 토론조차 한번 벌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설 풀린 고춧가루 맛밖에 없는 깍두기를 한입 베어 문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태권도공원”에 무엇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라는 것이 이번 여행의 궁극적 목적이었던 것 같았다. 좋은 공원조성을 위한 각계의 전문적인 자문을 정리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그 오랜 전통의 소림무술과 태극권의 본산들과 산동무술원과 당랑권의 본가들을 방문하러 중국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태권도인은 필자와 국기원의 박기인 사무국장만이 이 여행에 참석했다. 아울러 이 소회는 오로지 필자의 느낌만이라는 것을 밝혀둔다). 가기 전에 단 한 번의 미팅도 없었기 때문에 사명감에 불타는 소명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는 마음이 솔직한 심정이라는 것도 말해야 할 것 같다. 우리 태권도계 스스로가 준비 한 게 아무것도 없어서 중국을 다녀와야 하는지, 아니면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어서 중국 무술과 무술원들을 벤치마킹이라도 해야 하는지조차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 그냥 빈속을 채우기 위한 아픈 여행길에 오르고 있었다. 꼭 가고 싶었던 陳家溝(진가구),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찾아서 사실 이번 여행 중에 가장 나를 설레게 만들었던 것은 진가태극권의 본고장인 하남성 온현의 진가구를 가본다는 것과 당랑권의 본고장인 산동 땅을 밟아 본다는 것이었다. “太極拳(태극권)”, 중국을 세상에 알리는데 일조한 무술, 태극의 오묘함과 음양의 조화를 함께 지녔다는 그 무술, 중국 공원마다 어린이부터 노인네까지 다 나와서 아침이면 함께 한다는 그 태극권의 본고장 진가구, 그곳을 가본다는 설렘이 있었다는 것은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진가구를 향하는 양쪽의 길목은 중국의 솔직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집집마다 쌓여있는 석탄가루들과 그 가루들을 반죽하여 작은 구공탄을 찍어내는 노인네들, 남루한 옷차림의 농민들과 검정 묻힌 얼굴로 뛰어노는 아이들, 그리고 나를 놀라게 했던 건 골목마다 사람들이 하고 있는 제기차기와 연날리기였다. 이소룡 흉내를 내며 나무 쌍절곤을 휘두르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과 너무나 흡사한 그래서 익숙한 그런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익숙함이 진가구 초입에 있는 가장 크다는 “태극권무관”의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다시 생소한 느낌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단지 내 감성적인 마음 탓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럴듯한 겉모습과 달리 너무나 지저분한 환경, 엉성한 나무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숙소와 바닥의 매트리스가 울고 있는 썰렁한 도장! 단 하나 적색과 청색의 태극마크만이 바닥과 벽에 선명한 그런 모습을 접하면서 어쩌면 진가구도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녹슨 검들과 낡은 사무실 때문이 아니라 나를 더 없이 슬프게 한 것은 일반적인 체육이론들이 적혀있는 교과과정표였고, 그보다 더 나를 슬프게 만든 것은 때 묻은 벽을 초라하게 장식한 무술경기대회의 작은 상장들이었다. 솔직히 그런 것들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진정 무를 추구하는 태극권사들이 그들이 말하는 形身合一(형신합일)과 內外合一(내외합일)을 위해 열심히 功夫(공부)하는 그런 모습만을 기대하고 온 내가 잘못이었다는 생각도 순간적으로 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미련은 진가구에 들어서 진왕정 이래 태극권문의 종가였던 “진씨태극무술원”에 발을 들여 놓을 때까지도 쉽게 가시지는 않았다. 그곳에 가면 진정한 무술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오랜 기대를 쉽게 버릴 수 없었던 미련 때문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문을 들어서자 여기저기 모여 놀던 아이들이 금방 모여들더니 어느새 기계적으로 봉을 휘두르거나 태극권의 투로들을 해 대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관광객들이 오면 자동으로 하게끔 교육이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1대 진복에서 실제로 태극권을 완성한 9대 진왕정 선생, 태극권의 모든 이론체계를 완성시킨 16대 진흠 선생과 태극권을 가장 빛낸 17대 진발과 선생 그리고 태극권의 세계화에 성공한 현재의 19대 진소왕 선생으로까지 이어지는 태극권의 모든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그야말로 태극권의 본산에 들어서면서 착잡해지기 시작한 내 마음은 도장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는 서서히 실망감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나뒹구는 도검들과 어지러운 도장 내부, 적어도 몇 달은 방치된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마음속에서 작은 허탈감이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여기에서 과연 무엇을 얻어갈 수 있을까? 라는 강한 의구심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이 자연스럽게 온통 머릿속을 메우기 시작했다. 왜 중국 정부는 태극권의 본산인 이곳을 이렇게 방치하고 있을까? 그런 나의 의문은 동시에 중국 정부가 태권도에 주력하는 모습들과 맛물려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400년을 넘게 이어온 태극권의 역사! 그리고 이런 초라한 모습들 속에서도 끊임없이 살아나가고 있는 태극권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진가구에 오기 전 보았던 정주무술원에서의 태극권시범이 머릿속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며 기격으로서의 태극권을 보여 주려 애쓰던 권사의 시범, 그리고 무술을 모르는 우리 동행이 한 말 “실전에도 쓰일 수 있을까요…?”, 이미 K-1이나 프라이드같은 종합격투기에 시각적으로 익숙해진 세상사람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그런 의문들…, 과연 그런 것들 말고 다른 어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름대로 폭넓은 무술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나로서도 우선 떠오르는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러나 빛나는 보석은 언제나 돌 속에 박혀 있다고 했던가? 이런 의문과 궁금증을 한번에 풀리게 하고 나에게 무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이해의 지평을 열어주게 하는, 내가 태권도에서 가장 바라고 생각하던 그 가치를 문득 발견하고야 말았다. 양가 태극권의 창시자인 양로선 선생의 활약상을 그린 벽화를 보고, 태극권의 모든 이론 체계를 수립한 진흠 선생의 초상과 역대 조사들의 비문들을 보고 있다가 드디어 나는 가장 중요한 태극권의 가치와 실체를 발견하고는 나도 모르게 “아!”라는 감탄사를 속으로 내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현란한 태극검의 검세도, 교묘한 기결의 술기도, 태극봉의 무형의 위력도 아니었다. 그들의 비문 맨 위에 새겨진 이 땅에서 그들이 살다간 시간에 대한 작은 기록들이었다. 박종구 선생이 말한 태극권의 두 번째 혁명 ‘건강양생’, 내가 그렇게 태권도의 가치로 삼고 싶었던 양생의 힘과 가치, 그것이었다. 195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50세 미만이었고 중국도 우리보다 낮으면 낮았지 높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살고 싶어한 진시황이 49세에 죽었고, 조선시대 임금님들의 수명이 평균 40세를 넘지 못하였는데? 1대에서 18대에 이르는 태극권 조사들의 나이는 한결같이 80세를 전부 웃돌고 있었다. 어쩌면 꾸미지 않은 역사의 진가가 고스란히 그냥 그 비석에 새겨진 숫자들에 배어있는 것 같은 느낌은 이전에 받았던 실망감에 더해 완전히 어떤 충격적 모습으로 갑자기 역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석들은 최소한 나에게는 살아있는 것을 강하게 만들어서 병을 예방하고 내외를 합일하여 완성을 추구하는 태극권의 모든 진가들의 살아있는 증거일 수밖에 없었다. 그 도장의 어지러움은 꾸미지 않고 정돈하지 않는 중국인 특유의 문화일 뿐인가? 갑자기 나에게 몰아 닥치는 새로운 해석에의 의무감은 그 실망감들마저도 약하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이었다. 50년을 살지 못하는데 하나같이 80세 이상을 줄기차게 산 것은 태극권 수련의 본질적 가치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수련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느끼는 가치가 있다던 것이 바로 이런 健康養生(건강양생)의 도였구나!’ 이보다 더 어떤 증거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들은 그냥 그런 가치를 생활로 삼고 일상의 수련을 할 정도였던가? 태극권이 남녀노소가 다 하는 건강 운동이라는 것, 그것에 대한 증명은 그것으로 충분하였다(다음호로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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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03월 20일 10:37:46 / 수정 : 2006년 03월 23일
14:02:21 |
출처 : 청해류병관의블로그
글쓴이 : 루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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