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史> <北史> <梁書>
#南史卷79-列傳第69-百濟
<百濟>者....後漸强大, 兼諸小國. 其國本與<句麗>俱, 在<遼東>之東千餘里.
<晉>世<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齊><永明>中, 除<大>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梁><天監>元年, 進<大>號征東將軍. 尋爲<高句麗>所破, 衰弱累年, 遷居南<韓>地.
<普通>二年, 王<餘隆>始復遣使奉表, 稱累破<高麗>, 今始與通好. <
百濟>更爲强國....號所都城曰<固麻>, 謂邑曰<첨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土有二十二 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 其人形長, 衣服潔淨. 其國近<倭>, 頗有文身者......
(AD3세기 이전) <백제(맥제)>는 점차 강대하여져서 주변의 (郡國, 邑國 정도로) 작은 나라들을 아
울렀다.
(백제(맥제)는) 그 근본이 <고구려>와 마찬가지이고, <요동(군)>의 동쪽으로 천여 리에 있었다.
<진(晉,AD265-420)>이 들어서자
<고구려>는 <요동(군)>을 주워먹었고,
<백제>는 <요서(군)> 및 <진평(군)> 두 개의 군을 깔고앉아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제(齊(AD479-502)>는 <영명>년중(AD483-493)에 <대(大,동성왕,AD479-501)>를
"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으로 삼았다.
(왕을 함부로 갈아치우는 등 일이 잦았던 즉 擅東夏하던 齊에게서 통치권을 넘겨받은;周書百濟傳,
通典邊防傳)
<양(梁,AD502-557)>은 <천감;AD502-519>원년(AD502)에 <대(大;동성왕)>를 '정동장군'으로 올렸다.
(백제는) 연이은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여러 해를 쇠약해져 있으면서 남쪽 한(韓)의 땅으로 옮겨
살았다.
양(梁) <보통>2년(AD521)에 백제왕 여융(무령왕,AD501-523)은 다시금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를 여러 번 무찔렀다고 (梁에게) 말하고, 우호통교를 시작했다.
<백제>는 다시 강국이 되었다..... 도읍지를 <고마>라 부르고, 읍은 <첨로(담로)>라 하였는데 중원
국의 군현(郡縣)과 같다.
22개의 <첨로>를 두고 왕실 문중의 자제가 나누어 다스리며 살게 하였다.
사람들은 키가 컷고(大人國?) 의복은 깔끔하였다.
왜(倭)와는 가까이 있었고, 얼굴에 문신을 한 이들도 있다.
#南史卷79-列傳第69-新羅
<新羅>....在<百濟>東南五千餘里. 其地東濱大海, 南北與<句麗>·<百濟>接.
<魏>時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斯羅>.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梁><普通>二年, 王姓<募>名<泰>, 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其俗呼城曰<健牟羅>, 其邑在內曰<啄評>, 在外曰<邑勒>, 亦中國之言郡縣也.
國有六<啄評>·五十二<邑勒>....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신라>는 <백제>의 동편 남쪽 5천여리에 있고, 동쪽은 '大海'에 가깝고, 남쪽과 북쪽은 <고구려>
및 <백제>와 맞닿아 있다.
<위(魏,AD220-265)>시절엔 <신로>라 불렸고, <송(宋,AD420-479)>시절엔 <신라> 또는 <사라>라 불렸
다.
나라가 (아직) 작아서 스스로(혼자) 사신을 교환할 수 없었다.
<양(梁;AD502-557)> <보통;AD520-527) 2년(AD521)년에 [왕은 성(姓?,氏?)이 모(募) 이름은 태(泰)
였는데],
<백제>의 사신을 좇아 (梁에게) 사신과 방물(토산물)을 보냈다.....
성(城)을 <건모라(健牟羅)>라 부르고, 읍(邑)은 <탁평(啄評)>이라 하고,
(왕의 직할지가 아닌) 외방의 읍(邑)은 <읍륵(邑勒)>이라 하였는데 역시 중원의 말로는 <군현>을
이름함이다.....
문자(漢字)를 쓰지 않고 나무에 새겨 뜻을 전했으며, (나라간에) 얘기를 할 때는 <백제>사람의 통
역을 거쳤다.
#南史卷79-列傳第69-倭國
....有獸如牛名山鼠, 又有大蛇呑此獸. 蛇皮堅不可斫, 其上有孔, 乍開乍閉, 時或有光, 射中而蛇則死
矣.
物産略與< 耳>·<朱崖>同....
....二十年, <倭國王><濟>遣使奉獻, 復以爲安東將軍·<倭國王>.
二十八年, 加使持節〈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 安東將軍如故;
....其南有<侏儒國>,.... 又南有<黑齒國>·<裸國>, 去<倭>四千餘里, 船行可一年至.
又西南萬里有<海人>, 身黑眼白, 裸而醜, 其肉美, 行者或射而食之.
....(왜국에는) 짐승으로는 소처럼 생긴 산쥐(?)가 있고, 산쥐를 통째로 삼키는 큰 뱀(악어?)이 있
는데,
그 뱀의 껍질은 질겨서 잘 찢어지지 않으며, 위쪽에 구멍(콧구멍?)이 있어 열렸다 닫혔다 하고,
때로는 (몸에서) 빛이 났는데, 화살을 쏘아 맞히면 곧 죽었다.
토산물은 <담이>나 <주애>와 같다....
(송,문제,원가)이십년(AD443)에 <왜국(倭國)>의 왕인 제(濟)가 사신과 선물을 보내왔기에,
(濟를) 다시금 안동장군·<왜국왕>으로 삼았고,
이십팔년(AD451)에는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를 얹어주었고,
"안동장군"이라는 직함"은 전과 같이 그대로 두었다;.....(=>說이 분분한 부분).
남쪽에는 <주유국>이 있고, ...그 남쪽에는 <흑치국>과 <라국>이 있는데 <왜>에서 4천여리 딸어져
있으며 작은 배를 타고 가면 일년이 걸린다. 또 서남으로 만리를 가면 <해인>이 있는데.....
#南史卷79-列傳第69-文身國
<文身國>在<倭>東北七千餘里, 人體有文如獸, 其額上有三文, 文直者貴, 文小者賤. ....
行客不齎糧. 有屋宇, 無城郭. 國王所居, 飾以金銀珍麗, 繞屋爲塹, 廣一丈, 實以水銀, ....
<문신국>은 <왜>의 동편 북쪽으로 7천여리(산넘고 물건너 이리저리 걸어서)에 있는데,
사람들의 몸에는 三文(문양-문신- 3가지 또는 3곳)이 있다.
그 문신이 곧으면(확실하면) 귀한 사람이고, 시원찮으면(작거나 뚜렷하지 않으면) 천한(신분이 낮
은) 사람이다. ......
(집을 나서서) 여행하는 이는 식량을 지니지 않는다.
(지붕있는) 집에 살며, [(마을-나라를 지키기 위한) 성곽은 없다(싸움이 없는 곳)].
국왕의 거처는 금, 은과 진귀한 것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고, 너비가 한 길이 되는 수은으로 채워
진 해자로 둘러싸여 있는데, .......
#南史卷79-列傳第69-大漢國
<大漢國>在<文身國>東五千餘里, [無兵戈, 不攻戰], 風俗 與<文身國>同而言語異.
<대한국>은 문신국에서 동쪽으로 5천여리에 있고, [무기도 다툼도 없어] 풍속은 <문신국>과 같고
언어만 다르다.
#南史卷79-列傳第69-扶桑國
<扶桑國>者, <齊><永元>元年, 其國有沙門<慧深>來至<荊州>, 說云: [<扶桑>在<大漢國>東二萬餘里,
地在中國之東. 其土多扶桑木, 故以爲名. 扶桑葉似桐, 初生如 , 國人食之. 實如梨而赤, 績其皮爲[布
],
以爲[衣], 亦以爲[錦]. 作板屋, [無城郭. 有文字]. 以扶桑皮爲[紙]. [無兵甲, 不攻戰]. 其國法有南
北獄,
若有犯, 輕罪者入南獄, 重罪者入北獄. 有赦則放南獄, 不赦北獄. 在北獄者男女相配, 生男八歲爲奴,
生女九歲爲婢, 犯罪之身, 至死不出. 貴人有罪, 國人大會, 坐罪人於坑, 對之宴飮分訣若死別焉....,
其一重則一身屛退, 二重則及子孫, 三重者則及七世. 名國王爲<乙祁>.
貴人第一者爲<大對盧>, 第二者爲<小對盧>, 第三者爲<納 돌沙>.
<부상국(扶桑國)>은 <제(齊,AD479-502)> <영원;AD499-501>원년(AD499)에 그 나라의 불승 <혜심>이
란 자가 <형주>에 와서 말하길
<대한국(大漢國)>의 동쪽 2만여리(산넘고 물건너 이리저리 걸어서)에 있는데, 중원의 동쪽이라 하
였다.
그 땅엔 <부상>나무가 많아 나라이름으로 하였다.
<부상>잎은 오동잎과 비슷하고, 잎이 새로 난 모습은 <上竹下尹>과 같은데 그 나라 사람들이 그것
을 먹었다.
그 열매는 배와 같은 모양으로 색은 붉고, 그 나무의 껍질은 엮어서 거친 천(布)로 만들어 옷을 만
들거나 또는 비단(또는 무명)같이 고운 천을 만들기도 하였다.
집은 판옥이었고 [성곽이 없고] 문자는 사용하였다.
<부상>나무의 껍질로 [종이]를 만들었다.
[병기와 갑옷도 없고 전쟁도 없었다].
그 나라는 법이 있어, 남과 북에 감옥이 있는데,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경범자는 남옥에 가두었고
중죄자는 북옥에 가두었다.
남옥은 사면하여 풀어줌이 있으나 북옥은 풀어줌이 없다.
북옥에 있는 이들은 남녀가 짝을 이루어 자식을 낳으면 사내('男', 非'子')는 8살에 사내종으로 하
고 계집애는 9살에 계집종으로 삼았고,
범죄인 자신은 죽을 때까지 풀려남이 없다.
귀한 신분의 사람이 죄를 지으면 나라 안의 (높은) 사람들이 크게 모여 죄인을 구덩이에 앉혀놓고
바라보며 먹고마시면서 죽일 것인지 내칠 것인지를 분별한다....
죄의 무게가 1중이면 죄인 한 사람만 물러나게(벼슬을 못하게) 하고,
2중이면 아들과 손자까지 물러나게 하며, 3중이면 7세(대)까지 물러나게 한다.
국왕은 을기<乙祁>라 부르며, 제일 귀한 신분은 <대대로?>, 그 다음은 <소대로?>, 그 다음은 <납돌
사>라 하였다.
國王行有鼓角導從. 其衣色隨年改易, 甲乙年靑, 丙丁年赤, 戊己年黃, 庚辛年白, 壬癸年黑.
有牛角甚長, 以角載物, 至勝二十斛. 有馬車·牛車·鹿車. 國人養鹿如中國畜牛, 以乳爲酪.
有赤梨, 經年不壞. 多蒲桃. 其地無鐵有銅, 不貴金銀. 市無租 .
其昏姻法, 則壻往女家門外作屋, 晨夕灑掃, 經年而女不悅卽驅之, 相悅乃成昏. 昏禮大抵與中國同.
親喪七日不食, 祖父母喪五日不食, 兄弟伯叔姑 妹三日不食, 設座爲神像, 朝夕拜奠, 不制衰 .
嗣王立, 三年不親國事. 其俗舊無佛法.
<宋><大明>二年, <계賓國>嘗有<比丘>五人游行其國, 流通佛法經像, 敎令出家, 風俗遂改].
국왕이 행차할 때는 고각을 앞세운다.
옷 색깔은 해에 따라 달리 입어, '갑을' 해엔 청색, '병정' 해엔 누른색, '경신' 해엔 흰색, '임계
' 해엔 흑색이다.
소는 뿔이 길어(커서) 큰 것은 크기가 스무말(두섬)? 들이까지 되기도 한다.
말, 소, 사슴이 끄는 수레들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사슴 기르기를 중원사람이 소를 기르듯 하며, 짐승 젖으로 술을 담근다.
붉은 배(?)가 있는데 한 해가 다되어도 붉어지지 않는다.
蒲(부들?)과 桃(복숭아나무?)가 많다.
그 땅에서는 쇠(鐵)는 나지 않고 구리(銅)가 나며, 금(金)과 은(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시장에서는 세금거둠이 없다.
혼인예법으로는 사위될 사람이 여자의 집으로 가서 문밖에 집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물뿌리고 청소
하기를 한 해를 하여,
여자가 즐겁지 않으면 바로 �겨나고, 서로 즐거워하면 혼례를 치르는데, 혼례예법은 대개 중원과
같다.
부모가 돌아가면 7일간, 조부모가 돌아가면 5일간, 형제자매와 3촌 등이 돌아가면 3일간 음식을 먹
지 않고,
신상을 마련하여 조석으로 상을 차려 절하고, 상옷과 상띠는 하지 않는다.
(왕이 죽어) 새로이 들어선 왕은 (초기) 3년간은 친정하지 않는다.
풍속으로는 옛적엔 불법이 없었으나,
<송(宋)><大明;AD457-464>二年(AD458)에 <계빈국(계賓國)>의 비구니 5인이 그 나라에 불법, 불경,
불상을 전하였고,
불도를 닦으려면 출가하게 되어,
이후 풍속이 바뀌었다.
<慧深>又云: [<扶桑>東千餘里有<女國>, 容貌端正, 色甚潔白, 身體有毛, 髮長委地.
至二三月競入水則任娠, 六七月産子. 女人胸前無乳, 項後生毛, 根白, 毛中有汁以乳子.
百日能行, 三四年則成人矣. 見人驚避, 偏畏丈夫. 食<鹹草>如禽獸.
<혜심>이 또 이르기를 "<부상국> 동쪽으로 천여리에 <여국>이 있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피부색은 아
주 깔금하며 희고,
몸에는 털이 있고(毛人國?), 머리는 길어 땅에 끌린다.
이삼월에 다투어 물에 들어가면 임신하여 육칠월이 지나 자식을 낳는다.
여인의 가슴엔 젖이 없고, 목덜미 뒤에 털이 나고 (털 난곳의) 밑은 희고, 털 사이에서 즙이 나와
그것으로 자식을 먹여키운다."고 하였다.
태어난지 100일이면 걸을 수 있고 서너살이면 성인이 된다.
사람을 보면 놀라서 달아나며, 장부를 공경한다. 날짐승 들짐승처럼 <함초>를 먹는다.
#北史卷94-列傳第82-高句麗
....<正始>三年, <位宮>寇<遼西安平>.
五年, <幽州>刺史<관丘儉>將萬人出<玄토>, 討<位宮>, 大戰於[<沸流>]. 敗走,
<儉>追至<정峴>, 懸車束馬登<丸都山>, 屠其所都. <位宮>單將妻息遠竄.
六年, <儉>復討之, <位宮>輕將諸加奔<沃沮>.
<儉>使將軍<王기>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愼>南, 刻石紀功.
又刊<丸都山>銘<不耐城>而還. 其後, 復通中夏....
(위,魏)<정시;AD240-249>3년(AD242)에는 <위궁(동천왕,AD227-248)>이 <서안평>을 도적질하였다.
<정시>5년(AD244)에는 <유주>자사 <관구검>이 만 명을 이끌고 <현토>를 나가 <위궁(동천왕)>을 토
벌하였는데,
[<비류(불류)>]수에서 크게 싸웠다.
(위궁이) 패하여 달아나기에 <관구검>이 이를 쫓아 <정현(정峴)>까지 이르러, 말에 수레를 매어달
고
<환도산>으로 쫓아 올라가 도읍을 도륙하니, <위궁>은 처자식만을 데리고 멀리 달아나 숨었다.
<정시>6년(AD245)에 <관구검>이 다시 토벌하자,
<위궁>은 거의 빈몸으로 여러 가(加;대신들)과 함께 <옥저>땅으로 도망하였고,
<관구검>은 장군 <왕기>를 시켜 이를 추적하게 하여,
<옥저>땅 천여리를 지나 <숙신> 땅 남쪽에 이르러, 그 공적을 돌에 새기고,
또 <환도산>에는 <불내성>이라 새겨놓고 돌아왔다.
이후에 (고구려는) 중하(중원)와 다시 통교하였다......
#梁書卷54-列傳第48-新羅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居之, 以<秦>人故名之曰<秦韓>.
<신라>는 그 뿌리가 <진한(辰韓)>이다. [<辰韓>은 <秦韓>이라고도 하며, 서로간의 거리는 만 리이
다].
이래저래 전해오기를,
<진(秦)>시절 중의 고역(무슨 고역?)을 피하여 달아난 사람들(匈奴? 秦人?)이 (언제?) (마한땅으로
) 들어왔기에,
<마한>이 동쪽의 땅을 떼어주어 살게 하였고, (이들이) <진(秦)>에서 온 사람들이었기에 <秦韓>이
라 불렀다.
#北史卷94-列傳第82-新羅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地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地.
<辰韓>亦曰<秦韓>, 相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 <馬韓>割其東界居之, 以<秦>人故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 有似中國人,...不與<馬韓>同.
又<辰韓>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傳, <辰韓>不得自立王, 明其流移之人故也.
恒爲<馬韓>所制. <辰韓>之始有六國, 稍分爲十二, <新羅>則其一也.
<신라>는 그 뿌리가 <진한(辰韓)>이다. 땅은 <고구려>의 동남지역인데 <한(漢)>시절의 <낙랑>땅이
다.
<辰韓>은 <秦韓>이라고도 하는데,
이래저래 전해오기를, <진(秦)>시절 중의 고역(무슨 고역?)을 피하여 달아난 사람들(匈奴? 秦人?)
이 (언제?) (마한땅으로) 들어왔기에,
<마한>이 동쪽의 땅을 떼어주어 살게 하였고,
(이들이) <진(秦)>에서 온 사람들이었기에 <秦韓>이라 불렀다.
이들이 쓰는 말과 물건을 이름함은 중원(秦?華夏?)과 비슷하였는데,....<마한>과는 같지 않았다.
또 <진한>의 왕은 통상 <마한>사람이 대대로 하였고,
<진한>은 자기들 사람으로 왕을 세우지 못하였기에 유랑하여 흘러 온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
다.
항상 <마한>의 다스림을 받았다.
<진한>은 시작은 여섯 나라였는데 점차 나뉘어져 열 두 나라가 되었고, <신라>는 이(열둘) 중의 하
나였다.
或稱<魏>將<관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有留者, 遂爲<新羅>, 亦曰<斯盧>.
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高麗>, 不堪戎役, 後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附庸於<迦羅國>焉.
傳世三十, 至<眞平>. 以<隋><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
<文帝>拜<眞平><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혹은 이르기를, "<위(魏,AD220-265)>의 장수 <관구검>이 (AD244년에) <고구려>를 토벌하니,
(고구려 사람들이) <옥저>로 도망갔다가, (잠잠해진) 후에 일부는 원래의 땅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옥저에) 그대로 눌러앉아 살아 <신라> 또는 <사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 <신라>인의 구성은 <화하(秦人?,非秦人?)>, <고구려>, <백제>계의 사람들이 섞인 것이고,
(이들은) <옥저>, <불내>, <한>, <예>의 땅을 깔고 앉았다.
그 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으며, (백제 땅인) <해(海)>에서 <신라>로 도망하여 들어가 왕을 했
던 것이다.
(백제인이 왕을 하던 신라는) 초기에는 <백제>에 부용하였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치니,
(계속되는) 융역(북벌전쟁준비 등의 노역)을 참지않고
후에 (고구려로 돌아가지 않았던) 사람들은 서로를 이끌어(뭉쳐서) (진세망인의 신라)로 들어가
(진세망인의 신라는) 강성하여졌다.
(강성하여진 신라가) <백제>를 치자 (백제는) <가야국(迦羅國)>에 �었다.
(이 신라는) 삼십 대를 이어 <진평왕>대에 이르렀고,
(이 신라는) <수(隋)> <개황>14년(AD594)에 사신과 토산물을 (수나라에) 보냈다.
(수나라의) <문제(文帝;AD581-604)>는 <진평왕>을 <상개부>·<낙랑군공>·<신라왕>이라 하였다.
其官有十七等:....外有郡縣. 其文字·甲兵, 同於中國....風俗·刑政·衣服略與<高麗>·<百濟>
同....
其有大事, 則聚官詳議定之....死有棺 , 葬送起墳陵. 王及父母妻子喪, 居服一年.
田甚良沃, 水陸兼種. 其五穀·果菜·鳥獸·物産, 略與潢.
<大業;隋煬帝>以來, 歲遣朝貢. <新羅>地多山險, 雖與<百濟>構隙, <百濟>亦不能圖之也.
벼슬(관)은 (안으로는) 17등급을 두었고, ....., 밖으로는 군과 현을 두었다.
문자(漢字)를 사용하고, 갑병(상설정예병)을 둠이 중원과 같았다.
풍속, 형벌과 다스림, 의복은 <고구려>나 <백제>와 같았는데,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즉시 관리들을 모아 상의하여 정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관으로 염습하여 묻고 흙봉분을 쌓았다.
왕이나 무모와 처자가 죽으면 1년간 상옷을 입는다.
토지는 매우 비옥하고, 물논농사와 밭농사를 함께 했다.
오곡, 과채, 날짐승과 땅짐승, 특산물은 대략 華(중원)와 같았다.
대업(수양제,AD605-617) 이래 매년 수(隋)와 조공(朝貢)하였다.
<신라> 땅은 산이 많아 험하였으며, <백제>와 싸움을 자주 하였으나
<백제>가 (이미 강성한) <신라>를 마음대로 어쩌지는 못하였다.//
남사 열전 부상국 기록중에 <여국>에 대한 기록 나머지 부분
#南史卷79-列傳第69-扶桑國-02/02
<鹹草>葉似<邪蒿>, 而氣香味鹹. <梁;AD502-557><天監; AD502-519>六年, 有<晉安>人度海, 爲風所飄
至一島, 登岸, 有人居止, 女則如<中國>, 而言語不可曉. 男則人身而狗頭, 其聲如吠. 其食有小豆, 其
衣如布. 築土爲牆, 其形圓, 其戶如竇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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