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에 일본에 가서 L님과 술을 마시면서도 나온 이야기지만 저는 동인지는 거의 보지 않습니다. 동인지를 사는 일도 거의 없고 동인지 사러 코미케나 코미티어 같은데 가지도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예 관심조차 없다는 게 맞겠죠. 왜 이렇게 동인지에 관심이 없느냐 하면 개인적으로 그런 일본식 동인 문화, 정확히는 1990년대 중반 이후에 크게 왜곡되어버린 동인 문화가 싫기 때문입니다. 뭐 그 왜곡의 정도가 그래도 90년대 후반까지는 참아줄만은 했는데 21세기에 와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악화를 구축해버려서 더욱 싫어하게 된 것이겠지만요.
'동인지'라는 게 순수한 의도로 만들면 참 좋은 것이죠. 적어도 코미케 초창기(1970년대 중반~1980년대)의 코미케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순수성이라는 걸 갖고 참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많은 참가자들이 순수한 마음에 참가하고는 있습니다. 문제는 그 중 악질적인 부류들인데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혹은 그런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코미케와 기타 동인 행사들, 그리고 동인지 문화는 현재 만화 산업 전체의 커다란 악의 축이 되어버렸습니다.
동인지라는 건 말 그대로 순수하게 자신들이 좋아하는 작품을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데서 보람을 찾는 자주 창작품입니다. 오리지널 동인지도 있고, 다른 작품의 2차 창작 동인지도 있죠. 그리고 이런 동인지로 시작해서 상업지로 데뷔하거나 동인 게임을 만들어 상업적으로 큰 회사로 성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렇듯 동인지 시장이 커지면서 동인지만으로도 큰 돈을 챙기는 게 충분히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코미케에 참가하는 몇 만개의 서클 가운데 200부 이상의 동인지를 찍는 곳은 1/5도 안 될 겁니다. 그리고 1,000부 이상을 찍는 곳은 더 적을 것이고, 1만부 이상 찍는 빅 서클은 한줌도 안 되겠죠. 그런데 그 한줌도 안 된다는 게 4~5만 개 서클에서 한 줌이니까 생각보다는 서클의 수가 제법 많은 편입니다. 동인지 1권의 가격은 B5판 20매짜리가 보통 500엔 정도 하는데, 이런 20매짜리 동인지의 제작비는 1만부 찍었을 때 권당 30엔도 안 합니다. 많이 찍으면 제작비는 거의 안 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돈 왕창 깨질 일도 없고, 일단 5,000부 이상 파는 서클은 제작비 부담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참 짭짤한 게 동인지는 세금을 안 냅니다. 현행법으로는 세금을 추징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만약 1만부 찍어서 권당 30엔의 제작비가 들었다면 권당 470엔이 전부 서클의 몫이고 만약 개인 서클이라면 전부 한 사람의 주머니에 고스란히...그것도 전부 현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1만부 파는 곳은 매우 드물지만 그런 개인 서클이 있다는 가정에서 계산을 해보면 4,700,000엔이죠. 한화로 계산하면 5,000만원이 넘는 돈이죠. 20P 짜리 한권 그리는데 과연 얼마 만큼의 시간이 걸릴까요? 뭐 이렇게까지 비양심적인 곳은 적으니 그래도 44P 정도는 된다고 해도 제작비도 별로 차이 안 나고 돈이나 노동에 들어가는 부담도 크게 차이는 안 날 겁니다. 상업지 작가는 5,000만원을 벌기 위해서는 410엔짜리 단행본을 12만부 정도 팔아야 합니다. 지금의 일본 단행본 시장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부수고, 그걸 만들어 내기 위해 마감과 단행본 작업에 들이는 노동량은 개인 서클지 만드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게다가 화실 운영비까지 하면 끔찍해지죠.
또 하나의 문제는 저런식으로 대량 판매가 이루어지는 동인 작가들의 작품은 대부분이 노골적인 포르노라는 점입니다. 결국 작품성이 좋아서 팔린다기보다는 그림이 예쁘고 에로도가 높은데다가 자기가 좋아하는 특정 작품의 2차 창작물이어서, 혹은 그 동인 작가를 좋아해서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죠. 실상 작품성 있는 오리지널 동인지는 아무리 유명 작가가 그려도 잘 안 팔리는 게 현실입니다.
몇 천부 정도만 판다고 해도 이런 종류의 동인 행사가 워낙 많이 열리기 때문에 대형 인기 동인 작가는 그런 행사 몇 개만 참가해도 엄청난 고수익을 올릴 수가 있으며, 세금도 한 푼도 안 낼 수가 있습니다. 나쁜 마음만 먹는다면 본업으로 챙기는 돈으로 생활하고 이렇게 번 돈은 저축을 한다거나, 더 나쁜 마음을 먹으면 직업이 없는 것을 빌미로 보조금을 받을 수도 있죠. 이런 곳에서 인기 있는 유명 작가들이 철저하게 개인 신분을 숨기고 사진도 못 찍게 하고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무슨 신비주의나 쑥스러워서가 아니라, 대개는 세금 추징으로 이어질 수 있는 증거를 안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더 나쁜 마음을 먹으면 자신의 동인지 중 10~20부 정도만 찍는 엄청 프리미엄 붙을 만한 걸 만들어서 지인을 이용해 옥션 같은 곳에 올려 뒷돈을 챙길 수도 있습니다. 이런 작가들도 실존하고 있고, 혹시 코미케에서 너무 많이 찍어서 물량이 남으면 동인지 샵에 위탁 판매로 보내거나 더 대량으로 찍어서 샵에서 판매해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건 아주 일부의 인기 동인 작가들의 이야기로 대다수의 동인지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또 뭐냐하면, 정말 실력이 출중하고 대중에게 먹힐만한 아이템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 작가라면 괜히 힘들게 상업지에서 만화를 그릴 필요가 없어졌다는 거죠. 상업지에 가서 100만부 팔 능력이 된다면 동인지 찍어도 1~2만부 씩 파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건 아닙니다. 어차피 그 세계도 재능 있고 센스 있는 사람이 살아남기 마련이니까요.
"동인지 시장이 커지면서 상업지 시장을 잠식했다."라는 의견도 있는데, 이건 과장이 심한 이야기입니다. 왜냐면 아무리 커졌다고 해도 일단 찍는 부수나 즐기는 대중의 규모가 비교가 안 되거든요. 상업지 시장과 동인지 시장의 규모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죠. 그럼 동인지 시장이 가져온 가장 큰 해악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작가를 잠식했다는 겁니다.
작금의 일본 잡지 만화계의 가장 큰 고민은 발행부수가 떨어지는 것도, 잡지의 수가 너무 많아지는 것도, 중고 전문 서점이 생기는 것도 아닌 실력 있는 작가가 만화를 그리러 오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지금 일본 만화계를 지탱하는 주요 작가들의 평균 연령은 80년대나 90년대 초반에 비해 엄청나게 상승해 있죠. 이것은 결국 이런 작가들의 감성이 점차 대중에게는 먹혀들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머리가 좀 좋고 실력 있다면 힘들게 상업지에서 만화를 그리는 것보다 그냥 동인지나 그리면서 본업을 갖는 게 훨씬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것이죠. 이런 이유 탓으로 이제 상업 잡지에는 능력 있는 신인은 거의 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건 다시 히트작의 부제로 이어지고, 이런 것들로 인해 잡지의 판매 부수는 인기작의 연재가 하나 끝날 때마다 바닥을 치게 되어버린 것이랄까요.
뭐... 이제는 뭔가 조치가 필요할지도요~
출처 : 아까짱 블로그
글쓴이 : 김상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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