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丁未)7조약인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 당한 한국은 이제 통치의 방향이 고문정치(顧問政治)에서 차관정치(次官政治)로 전환되었으며, 사법 행정권 및 관리임면권의 탈취와 외국인 고문 폐지 등으로 병합을 위한 기본노선이 착실히 진행되었다. 더우기 이 조약 실행에 관한 비밀각서에 명시된 행정권 장악 가운데 중요한 분야는 한국군을 어떻게 조정 감원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대중적 저해세력이 무장군대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국군의 감원조정은 이미 1904년 6월 14일 주한일본 공사관부무관(公使館附武官) 재등력삼랑(齋藤力三郎)의 건의에 따라 제안되었는데 당시 7개연대 규모의 한국군을 대폭 축소 조절하여 근소(僅少)한 병력을 유지케 하자는 것이 일본침략 수뇌부의 일치된 속셈이었다.그러나 그해 8월에 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의 건의로 감원조정에서 대폭감축의 책략으로 바뀌었다. 더우기 한국정부의 군사고문인 야진진무(野津鎭武)는 고종을 기만하고 소위 군제개혁안을 제의하여 1905년 4월 원수부(元帥府)를 해체한뒤 우선 병력을 반감(半減)하였다. 따라서 1907년 7월말 현재 한국군병력은 장교 이하 하사까지 9,640명이고 지방진위대(地方鎭衛隊)의 장교졸병(將校卒兵)이 4,370명으로 14,010명이며 시위대(侍衛隊)와 친위대(親衛隊) 1,136명을 합산하면 전국에 15,146명이 병적(兵籍)에 기록된 군인수로 나타나 있다. 얼마되지 않은 한국군이 일본의 한국병합을 저해할 수 있는 세력이 된다고 간주된 나머지 8월 1일 전격적으로 무장해제와 동시에 해산당하였다.
한국군대는 해산당하기 전에 이미 무기 탄약관리권을 빼앗겼고 3개월간의 봉급도 받지 못한 실정이었는데 고종이 퇴임 당할 즈음 탈영한 일부군인들의 치열한 시가전(市街戰) 등 항쟁이 있자 서둘러 완전한 무장해제와 함께 해산을 음모하였던 것이다.[註3] 따라서 통감 이등박문에 의해 7월 24일 일본정부로 하여금 주한일본수비대를 증파토록 요청받자 7월 말경 일본보병 제12기단이 서울에 도착함으로써 한국군의 해산을 위한 군사적 배경이 확립된 셈이었다. 마침내 7월 31일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와 일본군사령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가 이등박문 관저(官邸)에서 회동하고 군대해산을 위한 충분한 의견을 교환한 뒤 황제에게 압력을 넣어 황실시위(皇室侍衛)에 필요한 근소한 군대외에는 '경비와 능률에 지장이 있으니 타일(他日) 징병법(徵兵法)을 발포하여 공고(鞏固)한 병력을 구비하겠다.'하고 한국군 해산의 조칙(詔勅)을 내렸던 것이다. 동시에 한국군 군대해산시에 인심의 동요를 예방하고 항쟁하는 한국인을 탄압할 것을 통감에게 의뢰하게 조칙을 내렸으나 이는 필시 이등박문이 이완용으로 하여금 이같은 흉계를 꾸미게 충동한 것이었다. 이렇게 7월 31일자로 두가지 조칙을 내리게한 일본에 의하여 8월 1일 군대 해산식이 서울 훈련원(訓鍊院)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강행되었다.[註7] 이날 오전 7시에 일본군사령관인 장곡천호도는 그의 관저인 서울 대관정(大觀亭)으로 군부대신 이병무 이하 각 부대 대대장 이상급을 불러 조칙을 전달하는 동시에 상부명령이므로 즉각 한국군대를 해산하며 오전 10시까지 각대 사졸(各隊士卒)을 무장해제한 채 도수(徒手)로 훈련원에 집합하도록 하달하였다. 따라서 주권국가의 최대무기인 한국군은 졸지에 훈련원으로 강제 집합되었는데 각 군졸이 그 영문(營門)을 나서자 전격적으로 일본군이 들어와 접수하고 무기도 회수하여 갔다. 그 가운데 서소문내에 있는 시위보병(侍衛步兵) 제1연대 제1대대에서는 오전 8시가 조금 지나 한국군대교관인 율원대위(栗原大尉)가 대병(隊兵)을 인솔하고 훈련원으로 가고자 하였는데 대대장 박승(성)환이 이 비참한 현실을 참지 못하고 장열히 자결하자 인솔되어가던 군졸들이 격분한 나머지 무기를 탈취해 가지고 영외(營外)로 뛰어나가 병영주위(兵營周圍)에 초병(哨兵)을 배치한 뒤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서소문 일대에서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사격전이 일어나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지자 이 같은 총격전이 신호라도 되듯 남대문안에 있는 시위보병(侍衛步兵) 제2연대 제1대대의 군졸들도 호응하여 무기를 들고 일군(日軍)을 향해 사격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돌발사태에 당황한 일본군은 비상망을 펴고 그 대책에 부심하였다. 일본군은 9시 30분 일본군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 전병력과 기관총 3문(門)의 장비를 투입하고 제1,제2대대의 응원병력 약1개 대대병력과 남대문위병(南大門衛兵) 서소문위병(西小門衛兵) 등의 후원하에 총격전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은 오전 11시 20분에 먼저 제2연대 제1대대의 병력을 공격하였는데 한국군은 병영의 벽과 창문에 의지하면서 사격전을 벌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일본군은 완강한 저항에 부딛혀 위태롭게 되자 중무기를 동원하여 한국군에게 타격을 입히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기관총을 남대문벽상에 걸어놓고 한국군을 향해 마구 사격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한국군은 그들의 중무기와 수적으로 우세한 공격에 밀려 오전 10시 50분에 병영을 점령당하였다.
한편 한국군 제1연대 제1대대는 일본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저항하면서 정세를 만회코자 기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역시 오전 11시 40분경에 그들의 병영 역시 점령당하였다. 그러나 양영(兩營)에서 퇴거한 한국군 가운데 일부는 서소문밖 고지일대를 배경으로 서울역의 일본군 위병을 사격하는 등 탄환이 다 떨어질 때까지 목숨을 걸고 끝까지 조국의 명예를 위해 항일전쟁을 계속하여 한국군의 위국(爲國)정신을 드높였으며 일부는 무기와 탄약을 가진채 각 지방으로 흩어져 한일전을 전개하였으니 이 시기의 의병항일전(義兵抗日戰)이 가장 치열하였던 것은 이들이 의병의 중심 세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항일시가전에 참가치 않은 각 대는 오전 10시 15분에 훈련원 (서울중앙의료원자리)에 모여 일본주차군 참모장 모전소장(牟田少將) 군사고문 야진진무 및 한국군수뇌 들이 들어선 가운데 전격적으로 군대해산식을 행하고 소위 은사금(恩賜金)이라는 약간의 지폐를 주어 격로와 허탈을 무마 · 고정시키려 애썼다. 한국군 장졸은 항거하고 싶었으나 무기가 없을 뿐 아니라 훈련원주변에 착검한 일본군대가 삼엄하게 포위 · 감시함으로 통곡하거나 받은 지폐를 찢어 버리는 등 소극적인 저항만 나타냈을 뿐이었다. [註10] 더우기 종로 일대와 덕수궁 대한문 등에는 기관총을 몇 문씩 장치해 놓고 한국시민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자세를 취하고 있어 시가전의 양상을 방불케 하였다. 이같은 긴박하고 유동적인 저기압 상태하에서 한일양군의 전투는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 시가전투에서 일본군의 피해도 커서 10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으며 한국군은 중대장 정위 오의선(吳儀善) 권중협(權重協) 참위 장세정(張世禎) 등과 견습참위 이긍주(李肯周) 등 13명의 장병이 전사하고 10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8월 1일의 한국군해산식이 끝난 뒤에 각 지방의 진위대(鎭衛隊)를 해산하기 위해 군부대신의 명의로 각 진위대장에게 서울로의 집합 전문을 보냈다. 더우기 이등박문은 따로 각 도에 타전하여 일본경찰과 수비대로 하여금 각 진위대 장병이 소지하고 있는 무기를 수거케한 뒤 해산함으로써 경향 각지의 한국군은 무장해제와 동시에 해산당하였던 것이다. 이들에게도 소위사 은사금(恩賜金)을 지급하였거니와 8월 3일에 수원 진위대를 해산한 후 9월 3일에 북청 진위대를 해산하기까지 1개월여에 걸쳐 모든 한국군은 해산 귀향케 하였다. 다만 강화와 원주 두곳의 진위대는 이 사실을 탐지하고 무기를 든채 그곳에서 봉기하여 때로는 의병과 연합전선을 펴거나 단독적인 항일전쟁을 펴 일본군을 괴롭혔다. 의병항일전이 1907년 8월 이후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파급되어가 일본군졸에게 사상을 입힌 것은 해산된 한국군의 적극적인 호응 · 합세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로서 한국군은 해산된 셈이지만 장교는 이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일본에 협조하지 않는 자는 면직되어 결국 9월 3일 1,255명의 장교가 자리를 떠나고 나머지 장교는 사관양성(士官養成) 운운의 명목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그 뒤 그들 역시 1909년 9월 30일의 군부폐지 칙령으로 인해 무관학교(武官學校)가 폐교되고 사관양성문제 역시 일본에 의해 흡수당하는 비운을 맞이하여 잔류 장교도 제복을 벗어버리고 말았다.
그 자리를 물러 난 장교나 해산된 헌병은 은사금(恩賜金)을 지급받거나 헌병보조원 간부로 특채되는 등의 회유공작을 전개함으로서 격분을 무마시키려 기도하였다.
한편 해산된 한국군이 지방으로 나가 항일전을 전개하는 한편 지방진위대 가운데 몇개처에서는 해산에 앞서 의거를 일으켜 이 소식이 전국적으로 파급됨으로서 지방군인들의 전면적인 항일전을 불러 일으켰다. 8월 5일 원주진위대에서는 특무정교 민긍호가 대대장대리(大隊長代理) 정위(正尉) 김덕제를 설득하여 전대원에게 총기와 탄약을 분배하고 지방민에게도 무기를 지급하여 항일전을 일으켰다. 이날 진위대원 250명을 포함한 원주의병들이 일본경무분견소(日本警務分遣所)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거나 정찰나온 일본군 충주수비대(忠州守備隊)와 2시간여의 격전을 치루고 퇴각시켰다. 이달 이후 원주진위대원들은 해병영(該兵營)을 떠나 상기 민긍호 · 김덕제를 중심으로 몇 부대로 나눈 후 각 지방으로 나가 의병항일전에 합세하여 지방의병항쟁의 열기를 더해 주었다. 이 때 김덕제는 5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평창 강릉을 거쳐 삼척 양양 고성 간성 통천 흡곡 춘천 일대에서 일본인과 그 군인들을 살해하거나 그들의 기관을 파괴 소각하기도 했다. 민긍호 역시 1,000여명의 해산된 군인과 의병을 이끌고 원주 제천 영월 충주 죽산 장호원 여주 이천 양근 홍천 횡성 등지에서 항일전을 펴면서 전술을 개발하고 새로운 양상의 의병전쟁을 전개해 나갔다.
원주진위대의 항일전과 의병으로의 전환을 전해 들은 진위 제1대대 강화분견대 군졸들은 8월 9일 크게 자극되어 항일전투의 태세를 취하고 항쟁하였다. 이날 전 진위대 참교였던 유명규(유명계)는 강화부 동문 밖에서 군수 정경수등 일진회 회원을 살상케 하고 진위대원을 격동 분리시킴으로 대원들이 일제히 용기백배되어 무기고를 파괴하였다. 따라서 총기와 탄약을 인출하여 지방민과 함께 800여명이 의병화되어 일본 순사주재소(巡査駐在所)를 습격 소각하고 일경(日警)을 살해하자 항일투쟁은 본격화되었다.[註16] 느닷없이 이같은 충격적인 항쟁이 있음을 알아차린 그곳 진위대교관 일본군 소창대위(小倉大尉)는 분견대 해산을 위해 8월 10일 보병 1소대와 기관총 2문을 거느리고 인천으로부터 강화로 와 갑곶(甲串)에 상륙하였다. 이때 그곳에 매복해 있던 의병들이 맹렬히 사격함으로서 쌍방간의 격전이 벌어졌다. 800여명의 의병은 강화성벽에 의지하고 상륙한 일본군을 향해 총격전을 벌여 6명을 즉사시키고 5명에게 중상을 입힌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다음날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강화부성이 함락되고 600여명의 의병은 무기를 든채 승선(乘船)하여 교동(喬桐)과 황해도 연안(延安)으로 들어가 다시 항일전을 계속하였다.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5-1-13-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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