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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아시아 신화를 보는 두 개의 시각-2

_______! 2008. 8. 9. 21:19
이윤기는 문화적 사대주의가 아니냐는 비난 섞인 질문에 대해 그리스 신화가 인간의 보편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 신들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이윤기의 말에 일면 타당성이 없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로마 신화라는 것은 단지 보편적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거기에는 그리스 로마라는 문화가 전제되어 있다. 거기에는 이미 우리가 서양문화의 한 근원으로 이야기하는 특정문화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점을 간과한 보편성에 대한 강조는 우리를 신화적 보편성에 관한 장님으로 만들기 십상이다.
문제는 바로 이윤기가 선동하고 대중들이 열렬히 호응한 그리스신화현상이 대중들을 신화적 보편성에 대한 맹인으로 만든다는 데 있다. 더 나아가 그 보편성을 은연중에 서구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이윤기는 최근에 발간(2003. 9. 1)된 {이윤기, 그리스에 길을 묻다}에서 여전히 그리스에 길을 묻고 있다. 그는 왜 그리스 신화에 길을 물으려고 했을까? 그건 이미 캠벨의 질문이고 그는 캠벨의 질문을 반복하고 있다. 이윤기는 왜 자신의 질문을 던지지 않고 한 미국 신화학자의 질문을 되풀이하는가? 이윤기에게 보편적 인간은 아마도 "서양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혹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지라도.
이미 낡은 패러다임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유용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서구인의 동양(인)에 대한 관념인데 여기에는 서구인이 동양을 보는 시선대로 동양인이 동양을 보는 시선(내부적 오리엔탈리즘)까지 포함되어 있다. 단순하게 말해 오리엔탈리즘은 "서양:동양=이성:신비(비이성)=보편:특수"와 같은 식의 이원론을 가지고 있다. 서구의 영화들이 동양을 말할 때 동양을 늘 신비하고 이상하고 어수선한 곳으로 묘사하는 것도 이런 시각 탓이다. 우리가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서양 선교사의 한국에 대한 간명한 묘사에도 이런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이 스며 있는 것이다. 근대적 이성을 무기로 내세운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눈에 동양은 비이성적이고 여성적인, 따라서 정복 가능하고 정복해서 질서를 선물해야만 할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시각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한국사회의 신화에 대한 이해도, 이윤기의 그리스로마 신화도 이 오리엔탈리즘 안에 있는 것이다.
이윤기는 소박하게, 혹은 솔직하지 않게 그리스 신화를 통해 보편적 인간을 탐구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리스 신화를 통해 탐구된 인간이 반드시 보편적 인간일지는 의문이다. 예컨대 홍수신화만 하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홍수신화하면 당연히 노아의 홍수신화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데우칼리온과 퓌라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런데 이들 홍수신화에서 홍수 후에 살아남는 사람은 부부이다. 그러나 서양신화가 아닌 홍수신화에서 홍수 후 생존한 남녀가 부부로 설정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오누이를 비롯한 근친관계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홍수신화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근친상간 금지를 넘어서는 근친혼을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가 부부로 상정되면 홍수신화의 이런 상징적 함의와 역동적 의미가 소멸된다. 성서의 신화나 그리스 신화는 이미 근친상간을 금기시하는 유대교문화나 로마문화의 영향으로 살아남은 남녀의 관계가 부부로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신화의 홍수신화를 가지고 인간의 보편성을 논의할 수 있겠는가?
이윤기는 뿌리 깊은 오리엔탈리즘을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활용하여 그리스 신화를 한국의 대중들에게 소비시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리엔탈리즘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윤기는 그런 점에서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윤기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공부 안에 매여 있기 때문이고, 그리스로마신화가 아닌 신화에 무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가 이제 공부 범위를 그리스에서 아시아 쪽으로 확장하겠다는 큰 야망(?)을 보이는 것이 심히 걱정스럽다. 그는 혹시나 그리스 신화의 눈으로 다른 신화를 보는 편견을 재생산하지 않을까?
우리가 그리스로마신화의 미망으로부터 벗어나고, 이윤기의 주술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우리 신화를 다시 보는 길이다. 이윤기가 말하는 "우리"가 아니라 그야말로 우리와 문화적으로 근친성이 있는 우리의 신화로부터, 그리고 그리스로마신화를 제외한 그야말로 "타자"로서의 우리와 연대성을 지닌 우리 신화로부터 새롭게 신화 읽기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아시아 지역의 무수한 민족신화, 특히 동북아 신화와의 만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거기서 차이가 발견된다면 그것의 의미를 추궁하고, 동일성이 발견된다면 그야말로 인간 보편의 의미를 추궁하면 될 일이다. 이것이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첫 실마리일 것이다.

2.동아시아 신화와 화이관의 문제
그리스로마신화에 대한 우리의 기호와 편식이 근대의 산물인(혹은 근대에 와서 심각하게 문제시되기 시작한)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라면 신화를 보는 우리의 시각을 흐리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중세의 산물인 화이관(華夷觀), 달리 말하면 중화주의이다. 이 문제는 전자에 비해 심각하다고 할 수 없을 지도 모르지만 이 또한 우리가 동아시아 신화를 평등안(平等眼)으로 바라보기 위해 점검해야할 전제에 해당한다.
하나의 사례를 통해 이야기해 보자. 국내에 소개된 중국신화 도서 가운데 대우총서에서 번역되어 나온 {중국신화전설1·2}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중국의 저명한 신화학자인 위앤커(袁珂)가 정리한 것인데 우선 그 방대한 분량에 놀란다. 이 책을 읽노라면 중국 신화가 대단하구나, 그리스로마신화에 맞먹을 만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야말로 저자인 위앤커가 기대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위앤커의 중국신화를 위한 노고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겹 벗겨내면 거기에는 그리스신화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중국신화를 어떻게 할까 고심한 한 신화학자의 오리엔탈리즘이 드러난다.
그리스로마신화라는 것도 로마의 신화정리자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마찬가지였겠지만 중국신화의 주요한 특징은 "단편성"이다. 일찍이 구전서사시의 전통은 단절되었고, 남은 것은 수많은 중국 문헌들 속에 짤막하고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는 신화의 파편들일 뿐이다. 그것은 일찍부터 확립된 문자의 전통과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부정한 유가적 전통 등의 영향으로 신화가 채록되어 기록된 채 신화 자체로 남아 있지 않고 역사의 일부로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국문명의 특수성일 수 있지만 그 특수성을 서구라는 보편성에 들이대자 갑자기 그 특수성이 자괴감으로 전화된 것이다. 이 자괴감이 위앤커로 하여금 중국의 모든 문헌들에 등장하는 신화적 파편들을, 로마의 시인작가들이 그러했듯이,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다시 조립하여 체계화하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게 했다. 그는 이 작업을 "녹여붙이기"라고 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중국신화전설}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본래 중세에나 근대 초기에 중국신화가 지닌 단편성이나 문헌신화적 성격은 주변의 이족들이 지닌 다양하고도 풍성한 신화 전통에 대해 중화문명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징표였다. 미개한 주변의 오랑캐들은 아직도 신화적 세계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일찍이 그런 세계를 벗어나 도덕과 이치가 지배하는 문명의 세계로 나왔다는 자만감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우월성이 대포를 쏘며 들어온 서구라는 보편성 앞에 노출되자 갑자기 열등성을 드러내는 징표로 전락한다. 말하자면 이 열등성을 벗어나기 위해 위앤커는 평생을 바쳐 노고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텍스트의 탄생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의도적으로 혹은 은연중에 매몰되고 남는 것은 텍스트 자체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이 판본이 마치 중국신화의 정전(正典)처럼 활약하기 시작하고 "어리석은" 연구자들은 이 텍스트를 연구 자료로 삼게 되고, 작가들은 이 텍스트를 창조적 밑천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왜곡된 이미지가 진짜 이미지로 둔갑하여 가짜가 진짜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예측이 아니라 이미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신화전설}은 중국의 뿌리 깊은 화이론, 다시 말해 중화주의(*"절지천통" 신화 참조)의 근대적 변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중화주의는 중국은 늘 중심에 있고, 우월하며 따라서 주변의 민족들을 선도하는 위치에 있다는 의식(거의 무의식 수준)이다. 중앙의 한족이 머리를 틀고 문신을 하지 않고 화식을 한다면 주변의 오랑캐들은 머리를 풀고 문신을 하고 생식을 한다는 비교를 통해 자신들과 주변을 문화적으로 분별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주변의 이족들이 풍부한 구비서사시, 신화들을 전승하고 있다면 자신들은 문자 기록을 통해 그것들을 정리하고 역사화했다는 점을 들어 우월함을 자부한다. 그러던 것이 서구적 보편성 앞에서 다른 방식으로 변형되어 다시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요즘 중국의 학자들이 이른바 중국의 3대 서사시(게사르, 마나스, 장가르)가 일리아드를 넘어서는 세계 최장, 최고의 서사시라고 자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들 서사시들은 현재도 전승이 이어지고 있고, 아직 정리가 마무리되지 않는 거편의 신화적, 혹은 전설적 영웅들이 등장하는 영웅서사시들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중국의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중국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족의 서사시가 아니라 각각 티벳, 키르기스, 몽골 민족의 서사시들이다. 다만 이들 민족 일부, 혹은 상당수가 중국이라는 거대 "국가"에 강제로 통합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중화주의에게 이들은 반드시 중국이어야 한다.(이것은 중국이 티벳의 독립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중화주의는 발해만이 아니라 고구려도 중국 역사의 일부로 기술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의 문화를 볼 때, 중국의 신화를 읽을 때 늘 이런 화이론의 관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3.우리를 둘러싼 "신화"를 말하는 담론의 조건이 이렇게 가혹한 것이라면 우리의 신화 읽기는 어떻게 시작되어야 하고, 어떤 경로를 거쳐야 한다는 것인가? 이런 물음 앞에서 우리가 대안으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이 동(북)아시아 소수민족 구전신화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문자를 갖지 않은 민족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 구술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중세적 사유로부터 자유로운 좀더 원시적인 자료들을 소지하고 있고, 그 자료도 풍부하다. 그리고 어떤 민족들은 우리와 언어적, 인종적, 문화적으로 친연성을 가지고 있어 우리 신화를 이해하는 데도, 우리 신화의 잃어버린 부분을 복원하는 데도 유용하다.
동아시아 소수민족의 구전신화(문헌에 정착된 신화도 거부할 필요는 없겠지만)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신화연구의 토양으로 삼거나, 창작의 질료로 삼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먼저 앞서 거론했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서구적 시선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그리스로마 신화라는 "허구적" 보편성을 벗어나 신화를 바라보는 눈을 우리에게 열어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세계의 창조는 신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주검으로부터 생성된 것일 수도 있고, 우연히 생성된 것일 수도 있다는 시각을 얻게 되고, 홍수도 인간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신의 과도한 분노가, 혹은 신들 사이의 싸움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전혀 다른 생각을 얻을 수도 있게 될 것이다.
또 하나는 화이론을 문화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화이론의 구도 내에서 중화를 보편이라고 강변하는 또 다른 보편주의, 오리엔탈 내의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개별 민족들의 고유한 신화를 구해내는 길을 발견하여 그야말로 문화적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신화적 보편성을 추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지창조든 인류의 기원이든, 씨족의 기원이든 국가의 기원이든, 동아시아의 다양한 개별 민족으로부터 수렴된 일반론과 특수론의 시각에서 중국의 문헌신화를 볼 때 중화의 신화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신화연구를 통해 민족문화의 정체를 읽으려는 연구자건 인간 보편의 정신을 추궁하려는 학자건, 아니면 신화를 통해 상상력의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시인이건, 신화를 통해 새로운 창작의 에너지를 수혈하려는 작가건, 한국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반성적 시각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출처 : 그닥 시답잖은 나의 공간
글쓴이 : 이충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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