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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웅녀·유화신화의 행방과 사회적 차별의 체계 /조현설

_______! 2008. 8. 9. 21:19
웅녀·유화신화의 행방과 사회적 차별의 체계

1.웅녀·유화 신화의 행방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단군신화에는 곰의 변신인 웅녀라는 여성이 있다. 그러나 단군신화는 그 이름처럼 단군과 환웅, 그리고 환인의 신화이지 웅녀의 신화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단군신화에서 만나는 웅녀의 형상이란, 본래 한 동굴 속에서 범과 함께 살던 곰이었는데 늘 천신의 아들인 환웅에게 사람되기를 빌어 환웅이 제시한 쑥과 마늘의 동굴을 통과한 뒤에야 여자-사람이 되었고, 또 다시 아이를 낳기를 간절히 원하여 가화한 환웅과의 결합을 통해 건국주 단군을 낳는 존재이다. 단군을 낳은 후 웅녀는 단군신화에서 사라진다. 물론 환웅이 신단수에 하강할 때에도 웅녀는 거기 없었다. 웅녀는 자기의 이야기를 잃어 버린 존재, 환웅이나 단군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부여받는 존재인 것이다. 이런 웅녀의 위상은 웅녀가 단군신화에서 소외된 존재, 즉 타자화된 존재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대단히 부차적이고 기능적인 존재로 자리매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새의 변신으로 추정되는 주몽신화의 유화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압록강의 수신 하백의 딸인 유화는 웅심연에 놀러나왔다가 천신의 아들 해모수에게 붙잡혀 그와 억지결혼을 한다. 그리고는 아버지 하백의 영역에서 추방되어 유폐되었다가, 또 다른 남성왕 금와에게 사로잡혀 그의 밀실에 갇힌다. 갖은 고통을 감내하고서야 유화는 주몽을 낳는 것이다. 주몽신화에서도 중심은 천제-해모수-주몽으로 이어지는 남성들의 계보이지 여성 유화의 계보는 아니다. 유화의 계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계보의 상위에는 이미 남성신 하백이 앉아 있다. [동명왕편]을 참조하면 유화는 하백의 딸들 중 하나인 것이다. 물론 웅녀와는 달리 유화는 후에 건국영웅 주몽의 장도를 촉구하는 계도자의 구실을 담당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화가 동명성왕 주몽신화의 주체로 재의미화되는 것은 아니다. 유화 역시 자기 이야기를 잃어버린, 타자화된 존재이다.
웅녀와 유화의 이야기는 어디로 갔을까? 왜, 그리고 어떻게 이들은 자신들의 신화를 상실했을까? 한국신화학이 제기한 적이 없는, 이 근본적인 물음으로부터 이 글은 시작된다. 실낙원 이전에 이들을 주체로 삼고 있었던 이야기는 무엇이며 어떤 계기에 의해 이들은 주체의 자리에서 밀려나 타자화되었는가? 그 타자화의 역사적 비극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남성지배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적 차별의 체계 위에서, 그 차별의 체계를 담론화하고 있는 건국신화 속에서 이런 물음들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기 위해 이 글은 출발한다.


2.시조신화의 상실과 비극의 탄생
이들의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으려고 할 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서사형식이 한 집단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시조신화이다. 웅녀나 유화나 본래는 어떤 집단의 시조신격이었으나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건국신화 속으로 재구성되어 들어오면서 시조신격으로서의 지위를 일정 부분 상실하고 아울러 자신의 신화도 제거당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상실과 제거 이전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서는 시조신화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필요의 바탕에는 시조신화와 건국신화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건국신화는 시조신화가 국가 권력의 이념으로 변형되면서 재구성된 서사라는 것, 그리고 이 건국신화는 온 나라가 함께 즐기는 축제의 장에서 서사시의 형식으로 음송되고 음송의 결과가 구전됨으로써 그 이념과 당위가 신화공동체 속으로 내면화된 서사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건국신화를 구성한 권력은 남성권력이라는 것이 그 인식의 내용이다. 우리가 건국신화에서 남성지배의 제도화, 또는 공식화를 문제삼아야 한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전에 웅녀나 유화가 잃어버린 시조신화의 실체가 어떤 것이었는지, 여전히 살아 있는 시조신화 한 편을 들어 논의해 보기로 하자. 웅녀의 신화와 모종의 관계를 지닌 것으로 보이는, 중국 동북쪽 흥안령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이른바' 소수민족인 어윈커족의 기원신화가 그것이다.

①어떤 사냥꾼이 사냥하러 갔다가 암콤에게 잡혀 굴 속에서 함께 살았다.
②몇 해 함께 사는 사이 곰은 새끼 한 마리를 낳았다.
③나중에 사냥꾼은 기회를 타 도망을 친다.
④사실을 안 곰이 새끼를 안고 따라오자 사냥꾼은 뗏목을 타고 달아난다.
⑤성이 난 곰은 새끼를 두 쪽으로 찢어 한 쪽은 사냥꾼에게 던지고 한 쪽은 자기가 가진다.
⑥남은 쪽은 곰으로 던져진 쪽은 어윈커 사람으로 자랐다.

이 이야기는 곰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믿기 때문에, 곰을 부모를 부를 때 사용하는 극존칭으로 부르는 어윈커족의 시조신화이다. 신화 속의 암콤을 어원커족은 자신들의 피의 계보의 첫머리에 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한 편의 시조신화만을 가지고 단군신화 속 웅녀의 원상를 상상한다면 견강부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자료를 나란히 배열해 놓고 견주어 볼 필요가 있다. 널리 알려진 공주 곰나루[熊津]전설이 그것이다.

①어떤 남자가 나무하러 갔다가 암콤에게 잡혀 굴 속에서 함께 살았다.
②몇 해 지내는 동안 남자와 관계해 곰은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
③자식을 낳은 후 곰이 안심하고 나간 사이 도망쳐 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
④늦게 사실을 안 곰이 따라와 자식을 죽이겠다고 위협하지만 남자는 가버린다.
⑤곰은 두 자식을 다 물에 빠트려 죽이고 자신도 빠져 죽는다.
⑥곰이 죽은 후부터 배가 뒤집어지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⑦사당을 짓고 곰을 위해 주자 배가 뒤집어지지 않았다.

이 곰나루 전설과 어원커족의 기원신화를 견주어 보면 전·중반부(①∼④)의 사건 전개가 혹사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차이가 빚어지는 부분은 도망가는 남성을 다시 붙잡는데 실패한 암콤의 행위가 드러나는 ⑤단락이다. 이 단락에서 두 이야기의 운명은 달라진다. 하나는 민족의 신성한 기원에 관한 신화서사로, 다른 하나는 암콤의 비극적인 운명에 관한, 나아가 곰사당의 유래를 전해주는 전설서사로 갈라지는 것이다.
추리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또 다른 자료를 읽어 보자. 다음은 경상북도 모령군 성산면에서 채록된 [봉화산의 암콤]이라는 구비전설이다.

①봉화산 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소나무 아래 암콤이 살고 있었다.
②암콤은 사람이 되는 것이 소원이어서 백일기도를 올려 예쁜 소녀가 된다.
③곰녀는 사냥시 곰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데 길잃고 쓰러진 사냥꾼을 구해준다.
④곰녀의 강요로 둘은 굴 속에서 함께 산다.
⑤1년 후 곰녀의 경고를 무시하고 사냥꾼은 처자식이 그리워 도망친다.
⑥돌아와 사실을 안 곰녀는 사냥꾼을 찾아 헤매다 소나무 아래 목을 매 죽는다.

우리는 이 전설의 ①, ②단락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단군신화를 떠올릴 수 있다. 커다란 소나무에서 신단수를, 사람이 되는 것이 소원인 암콤에게서 웅녀를 상상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③∼⑤단락은 단군신화가 아닌 어윈커족 기원신화, 혹은 곰나루전설과 혹사하고 ⑥단락은 곰나루전설과 방사하다. 달리 말하자면 이 전설에는 단군신화·어원커기원신화·곰나루전설의 요소들이 착종되어 있는 것이다. 착종의 내력을 검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이들 가운데 단군신화를 제외한 나머지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모두 암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들은 바로 '웅녀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런 사실은 단군신화의 웅녀 관련 삽화가 비교대상이 된 신화나 전설과 일정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곰나루전설-봉화산암콤-단군신화-어윈커신화'를 연결지으면 단군신화의 웅녀가 잃어버린 자기 이야기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추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윈커신화와 유사한 형태를 지녔던 본래의 웅녀신화는 단군신화의 일부로 포획되어 {삼국유사}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꼴로 구전이든 기록이든 정착되었다가, 고조선의 해체와 더불어 발생한 단군신화의 해체 이후 원래의 웅녀신화를 중심으로한 신화공동체로 돌아왔으나 이 집단이 역사적 패배를 거듭하여 실체가 소멸하면서 신화는 신화로 지속되지 못하고 신화의 자취를 간직한 전설로 전환된 채 전승되어 왔으리라는 추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추리가 유효하다면 우리는 고대국가라는 계기에 의해 재구성된 건국신화를 해체하고 나면 거기 남는 것이, 시간을 추체험해 가면 거기 아직 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 신성한 암콤을 이야기하는 시조신화의 존재, 시조신화를 이야기하는 씨족집단의 존재라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웅녀는 본래 어윈커족의 시조신화와 같은 형태의 자기 신화를 지닌 시조신화의 주체였던 것이다.
그런데 시조신화는, 느닷없이 떠오른 국가권력이라는 계기에 의해 건국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신화적-의식적 체계'로 새롭게 구성된다. 문제는 이 구성과정에서 시조신격이 어떤 운명에 처하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논의한 바 있는데, 시조신화에서 씨족형성의 기원(원인자)이었던 시조신격은 건국신화에서는 건국주를 탄생시키는, 다시 말해 새롭게 국가의 원인으로 설정된 지고신(파견자)의 뜻에 따라 건국주의 출현을 매개하는 '대리자'의 기능(중개자)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웅녀의 경우에는 대리모가 되는 셈이다. 이 기능전환은 남성지배사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종속'의 실현인 셈이다. 이제 시조신격은 주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지고신의 신성한 천명을 방조하는 타자 신세로 전락한다. 사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여성 소외의 신화, 신화적 형태화는 여기에서 비로소 그 기관을 형성한 것이다.
어윈커신화가 보여주듯이 한 민족의 시조였던 곰신은 단군신화라는 새로운 서사체계의 일부로 자리잡는다. 자리잡기 과정에서 곰신은 제 얼굴을 다른 얼굴로, 다시 말해 단군신화에 맞는 얼굴로 성형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인데, 이 성형과정이야말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성차가 어떻게 신체에 등록되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본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군신화를 꼼꼼히 읽어가다 보면 웅녀는 두 차례의 성형을 하게 되는데 먼저는 '곰의 웅녀되기'이다. 이는 동물의 사람되기라고도 할 수 있을 터인데 이 과정에서 상정할 수 있는 권력관계는 '사람(신)-동물(신)' 사이의 지배관계이다. 동물인 곰과 범은 사람-신인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간걸한다. 이 '간걸'의 의미가 무엇이든 거기에는 이미 확정된 '시혜자-수혜자' 혹은 '지배자-피지배자'라는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다. '100일 금기'로 구상화된 이 권력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동물(범)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금기는 이미 폭력의 한 형태가 되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우위의 사고방식과 여성과 동물을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이다. 여성은 동물과 동일시됨으로써 인간, 다시 말해 보편적 인간인 남성의 하위에 배치된다. 여성은 '간걸'을 통해서만 자신의 사회적 의미를 확보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규정되는 것이다.
이차적 성형은 '웅녀의 국모되기'이다. 이 과정을 통해 '사람-동물'의 권력관계는 '남성-여성'의 권력관계로 곧바로 전환된다. 이 전환 속에서 보편적 인간에 대해 특수한 인간이 된 웅녀는 이제 사람-신 환웅에게 득남을 위한 '교접'을 간걸할 수밖에 없다. 또 다시 '주는 자-받는 자'라는 권력관계가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웅녀의 국모되기를 이룬 이 간걸에는 어떤 고난도 감내하겠다는 웅녀의 의지가 숨어 있지만 기실 이 의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발성이라는 이름으로 웅녀의 신체에 각인된 타율성이다. 그런데 이 신체에 각인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타율성은 웅녀에게는 믿음의 차원에서 수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타율성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피지배자로 하여금 의식이나 의지의 차원을 넘어 그들에게 강요된 한계를 묵시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육체를 통한 인식인 것이다. 이 육체에 의한 승인을 통해 웅녀는 환인-환웅-단군의 계보에서 스스로를 타자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군을 낳고는 스스로 소멸해갔던 것이다.
흔히 이 웅녀의 사람되기와 국모되기는 단군신화 연구사에서 신성혼의 이름 속에 용해되어 있다. 물론 이 혼인은 두 신격, 즉 천부신과 지모신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신성한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신성의 베일 속에 가려진 비극의 탄생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거기에는 이미 하늘과 땅을 이원화하고 각각에 남성과 여성을 귀속시킨 후 천지를 위계화하고 성차를 제도화하는 사유방식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구별이라는 상징적 체계야말로 물리적 억압이 작동하는, 그리고 그런 억압의 작동에 선재하는 비극의 장이다. 이 위계화 속에서 땅의 여성은 하늘의 남성에게 '간걸'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로 다시 규정되는 것이다. 건국이라는 단군의 신성한 역사에 참례하는 것을 당위로 인식하는 웅녀의 비극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출처 : 그닥 시답잖은 나의 공간
글쓴이 : 이충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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